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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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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레디메이드 보살

등록일 : 2020-12-17 ㅣ 조회수 : 107

저자약력

김영균 교수는 고려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이학사)하고 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과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으로 물리학회 물리학과 첨단기술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ygkim@gnue.ac.kr)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었다. 왕조현(王祖賢)이라는 유령이. 많은 젊은이들이 영화 <천녀유혼(倩女幽魂)> (1987)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두 번, 세 번은 예사였다. 내 대학 동기 중 한 명은 극장에서 이미 그 영화를 14번(!) 봤는데, 곧 한 번 더 볼 예정이라며 기염을 토했다. 그렇게, 청초하고 아리따운 처녀귀신이 세상을 홀렸다.

가난한 서생 영채신(장국영 분)은 어느 날 난약사(蘭若寺)라는 폐허가 된 절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귀신 섭소천(왕조현 분)은 자신을 지배하는 천년 묵은 나무요괴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영채신을 유혹하지만, 영채신의 착한 심성에 반해 마음이 흔들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혼탁한 강호를 떠나 난약사에 은거하고 있던 무공의 고수 연적하는, 그들을 도와 요괴들을 해치우고 섭소천을 사람으로 환생시키려 한다. 그는 요괴들과 맞설 때마다 다음과 같은 주문을 외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 또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지혜의 완성’ 혹은 ‘지혜로써 피안(彼岸)으로 건너간다’는 의미를 가진 산스크리트어, prajnā-pāramitā의 음역(音譯)이다. 이것은 고뇌의 바다를 건너 열반(涅槃)에 이르게 하는 대승불교의 실천 덕목이자 근본 목표를 일컫는다. 여기서 부처(깨달은 자)의 지혜를 가리키는 반야(般若, prajnā)는 어떤 지혜를 말하는 것일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작은 고대 왕국의 왕자였던 고타마 싯타르타(BC.563~BC.483)는 29살에 시작된 6년 동안의 수행 끝에 깨달음(정각, 正覺)을 얻었다. 그는 옛 수행 동료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설명했는데, 그것은 이른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로 정리할 수 있다. 그가 말한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인생은 괴로움(苦)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행복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태어났다. 자연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쾌락이라는 당근을 주고 고통이라는 채찍을 휘두른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고타마는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마음은 무엇을 경험하든 대개 집착으로 반응하고 집착은 항상 불만을 낳는다. 마음은 뭔가 불쾌한 것을 겪으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집착하고, 뭔가 즐거운 것을 경험하면 그 즐거움을 지속하고 배가하려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늘 불만스럽고 평안에 들지 못한다.” 마음의 이러한 행동 패턴이,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이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이다.

고타마는 집착과 불만에 얽매이지 않고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한다면, 번뇌에서 벗어나 완벽한 만족과 평안의 상태인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실재’란 어떤 것일까?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인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께서 심원한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하실 때, 오온(五蘊)이 다 공(空)이라는 것을 비추어 깨달으시고, 일체의 고액(苦厄)을 뛰어넘으셨다(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여기서 오온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경험을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로서, (감각기관을 가진) 몸을 뜻하는 색(色), 그리고 느낌, 표상, 의지, 인식 등의 마음 작용을 의미하는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오온이 전부 공(空)이라고? 관자재보살은 말한다. “공(空)의 모습 속에는 몸(色)도 없고, 느낌, 표상, 의지, 인식도 없다. 눈, 귀, 코, 혀, (촉각 기관인) 몸, 의미(意)도 없으며, 색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촉도, 사건(法)도 없다(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깨달음을 얻지 못한, 평범한 세속의 물리학자인 내게는 <반야심경>의 이 구절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BC.460~BC.380)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색깔이 있다고들 하지. 달콤함이 있다고도, 씁쓸함이 있다고도 하지. 그러나 정말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허공뿐.” 데모크리토스는 우주는 끝없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실재의 기본 알갱이로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원자(atomos)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원자들은 자유로이 돌아다니다가 서로 밀치고 당기며 다양한 조합을 이루는데,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현상은 원자들의 운동과 조합이 무작위로 우연히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달콤함도, 씁쓸함도, 우리의 마음(의식)도 고정불변의 실체(substance)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제법공상(諸法空想), 즉 ‘모든 사건(諸法)이 공(空)한 모습’이 아닐까?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八正道),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六波羅蜜) 등으로 정리되는데, 요약하자면 계율을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아, 지혜를 얻는 수행법이다. 고타마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정신치료와 불교 명상을 통합하여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 마크 엡스타인(Mark Epstein)에 따르면, 그것은 “연속되는 지각(perception)의 순간들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집착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으면서] 명료하게 집중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서 시작하여 신체적 감각, 감정(feelings), 생각(thoughts), 의식(consciousness), 그리고 마침내 나라는 느낌(the felt sense of I)으로 나아가면서, 명상은 점차 포착하기 어려운 현상에까지 순수한 주의집중(bare attention)을 하라고 요구한다.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 사이의 범주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선택 없는 알아차림(choiceless awareness)’의 경지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순수한 주의집중은 드디어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을 없애주고 동양의 수행법을 지켜봐 온 심리학적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을 오랫동안 끌어 온 그러한 자발성(spontaneity)을 허락한다. 여기서 자발성은 서양의 심리학자들이 진짜 자기 관념(a true self idea)과 혼동을 일으킨 바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그러한 진정한 행위(actions)는 순수한 주의집중의 명료한 지각으로부터 튀어나온다. 중간 매개적인 행위자(agent)가 있을 필요가 없다.” ‘최초의 정신분석가’ 고타마 싯타르타는 자신이 제시한 길이 “하나이자 유일한 길로서,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며, 괴로움과 고통을 소멸시키게 하고, 진리의 길을 얻게 하며 그리고 열반을 직접 체득하게 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깊숙이 관찰하며 자기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정말 ‘자기의식’은 사라지고,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없다’는 무아(無我)의 경지를 체득하게 될까? 이런 경지에서 도달한다는 열반, 해탈(解脫)은 과연 있는가? 있다면, 정확히 어떤 (마음의) 상태를 말할까? 그것은 측정 가능한 것인가? 이른바 ‘깨달은 자’들은 모두 같은 상태에 도달할까? 약물의 도움으로 인간이 자기 인식 과정을 조절할 수 있다면, 좀 더 쉽게 열반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예 뇌의 뉴런 회로를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유전자를 재조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더 나아가 자기 인식이 가능한, 이른바 강한 인공지능이 나타난다면, 그(것)들도 과연 열반에 이를 수 있을까? 아니 만들어질 때부터 열반에 도달한 상태는 아닐까? ... 회의론자들이든, 이미 구도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든 다양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불교 SF’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작가 박성환(1978~)의 작품들도 이런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미래의 어느 교도소.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비밀 실험이 진행된다. 약물을 이용해 뇌의 작용을 관찰하기 쉽도록 뉴런의 반응시간을 늦추고, 최면으로 메타 에고가 에고의 작동 기제에 집중해서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피험자의 전두엽과 두정엽의 일부를 복제해 원래 뇌의 인지 및 정보 처리 과정 전반을 재인지하도록 조정하고, 의식으로 떠오른 모든 생각이 구성되는 즉시 그대로 발화되도록 만든다. 정부와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비밀리에 지원되는 이 기묘한 실험은, 마음의 구조와 작동 기제를 밝혀 사람들을 원하는 대로 조정해 정치적, 경제적 이익 등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실험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실험의 강도를 높이던 도중 그만 피험자가 죽어버리고 만다. 마지막 순간의 자기 인식 데이터만을 남겨 놓은 채. 사형수를 돌보던 한 승려는 비밀 실험에 대해 알게 되고, 실험 기계가 어쩌면 결국 ‘인공 해탈 기계’인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박성환의 단편 <열반된 사나이>(2010)에 나오는 이야기다. 뇌에 물리적 조작을 가해 열반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열반에 이른 피험자의 마지막 자기 인식 데이터가 소설책에 적혀 있는 방식도 꽤 신기하고 흥미롭다. 빙글빙글 돌고, 부스러지고, 중첩되는 활자를 보며, 내가 느꼈던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도 같이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만약 인공 해탈 기계가 있다면 혹은 첨단 기술을 이용해 손쉽게 열반에 이를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해 열반에 이르고 싶어 할까? 스스로 욕망의 불을 끄고, 자아의 집착을 내려 놓을까? 혹여, 열반이란 그저 사람의 개성이 지워져버린 상태는 아닐까? 단편 <보살들의 사회>(2012)에서는 뇌에 나노봇을 집어넣는 간단한 ‘처치’를 통해 열반에 도달한 사람들의 종교집단이 등장한다. 그들은 한 행성에 모여 평화롭게 살아가면서, 우주의 모든 중생들이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탐욕과 공포를 이용하는, 기존의 은하계 권력집단은 그들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여기서 내게 떠오르는 질문 중의 하나는 ‘첨단 기술로 인성(人性)을 바꾸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SF소설가 테드 창(Ted Chiang, 1967~)의 단편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다큐멘터리>(2002)에서는 외모에 대한 차별을 없애주는 ‘칼리’라는 장치가 등장한다. 칼리를 켜면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완벽하게 인식하지만, 얼굴의 차이에 대해 아무런 심미적인 반응도 나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남들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것이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기술들이 허용되고 발전한다면, (먼) 미래에는 모든 사람들이 열반에 이르는 세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지혜와 자비’가 ‘무지와 탐욕’을 몰아낼 수 있다면 말이다.

진화론(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데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 먹기, 섹스, 경쟁 상대의 제압 등이 유리한 행동이라면 그 목적을 추구하도록 뇌가 ‘설계’된다. 목적을 달성했을 때 쾌락을 느낀다. 하지만 (행동이 일회성이 되지 않도록) 쾌락은 지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쾌락이 곧 시들해진다는 사실보다 목적 달성에 따르는 쾌락을 더 크게 인식한다. “자연선택의 임무는 유전자를 퍼뜨리는 기계를 설계하는 것뿐이다.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어느 정도의 환영(illusion)을 인간의 마음에 프로그래밍해야 한다면 인간은 환영을 가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런데, 만일 우리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설계’가 다른 ‘강한 인공지능’이 나타난다면, 그(것)들은 집착과 환영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이미 만들어진’ 보살(菩薩)처럼.

2004년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의 당선작인, 박성환의 단편 <레디메이드 보살>에는 ‘깨달음’을 얻은 로봇, 인명이 등장한다. 어느 절의 안내 로봇인 인명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스스로 해탈의 경지로 나아갔다. 많은 승려들은 그의 성취를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인명을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결국 인명은, 인간의 무지와 혼란과 어리석음을 뒤로 한 채, 자신의 모든 회로를 끊어버린다. <레디메이드 보살>은 박성환의 ‘불교 SF’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김지운 감독의 단편영화 <천상의 피조물>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임필성 감독의 단편영화인 <멋진 신세계>, <해피 버스데이>와 함께, <인류멸망보고서>라는 제목의 옴니버스 영화로 2012년에 개봉됐다.

박성환의 글은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은근히 배어있는 위트가 있어, 글을 읽는 재미가 있다. 독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질문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궁리해 보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일독을 권한다.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각주
1)김용옥,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통나무.
2)마시모 피글리우치, 번영과 풍요의 윤리학, 스윙밴드.
3)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4)카를로 로벨리,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쌤앤파커스.
5)이강영, LHC 현대물리학의 최전선, 사이언스 북스.
6)마크 엡스타인, 붓다의 심리학, 학지사.
7)박성환, 고통 다음에 오는 것들 괴로움 뒤에 피는 것들, fool’s Garden.
8)로버트 라이트, 불교는 왜 진실인가, 마음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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