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잭 슈타인버거를 추모하며
작성자 : 이강영 ㅣ 등록일 : 2021-05-11 ㅣ 조회수 : 1,729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 LHC > 등이 있다. (kylee.phys@gnu.ac.kr)
잭 슈타인버거(Jack Steinberger)는 온천으로 유명한 휴양지인 독일 바이에른 주 바트키싱겐(Bad Kissingen)의 유태인 가정에서 1921년 태어났다. 슈타인버거는 학교를 다니던 1930년대 초,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부터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드러난 나치스의 반유태주의 행위들을 기억했다.1) 갈색 셔츠를 입은 돌격대가 “유태인의 피가 칼날에서 흐를 때 세상은 좋아질 것이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고 비열한 모습의 유태인 캐리커처가 담긴 포스터가 공공연히 길에 나붙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인종 관련 법률이 잇달아 통과되고 위험은 이제 현실로 닥쳐왔다. 상황이 점점 악화될 것이 명백해지자 슈타인버거의 부모는 1934년 봄 13세와 14세였던 두 아들을 미국에 있는 한 유태인 자선단체의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 양자로 보내기로 결심한다. 낯선 곳으로 던져질 어린아이들에게도, 점점 더 위험해져가는 독일에 남는 가족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슈타인버거는 1988년,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된 뒤에 자신이 탈출했던 그 고장을 다시 찾아갔다. 시나고그는 수정의 밤에 불타버려서 밋밋한 시청 건물로 바뀌어 버렸지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은 다행히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들을 태운 배는 그 해 12월에 브레멘을 출발했다. 슈타인버거는 뉴욕까지의 이 항해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생스러웠던 일 중 하나였다고 했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한 미래가 가슴을 짓누르는 가운데, 형제는 좁은 삼등 선실에서 대서양의 거친 겨울 파도와 뱃멀미에 시달려야 했으며, 크리스마스도 새해도 선상에서 맞아야 했다. 뉴욕에 도착하자 재단은 양부모를 찾을 때까지 형제를 140번가 근처의 암스테르담 아베뉴에 있는 유태인 고아원에 머물게 했다. 15년 후 그는 뉴욕에 돌아와서, 그가 머물렀던 고아원에서 멀지 않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을 하게 될 것이지만, 당시는 물론 그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아원의 음식과 시설은 썩 좋지 않았어도 다행히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고 얼마 후에는 공립학교에도 나갈 수 있었다. 슈타인버거는 훗날 제네바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익힌 프랑스어보다 그때 뉴욕의 공립학교에서 채 한 달도 배우지 않은 영어가 더 나았었다고 말했다.
형제는 두 달 후에 시카고 근처의 집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일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고, 본인도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형제는 처음 보내진 집을 떠나 각각 미시간 호수 근처의 부유한 교외 지역에 위치한 다른 집들로 다시 입양되었다. 슈타인버거를 받아들인 가족은 아이 없는 50대 부부였고 양부는 시카고 상품거래소의 브로커였다. 물론 그들 역시 유태인이었다. 입양된 다음 해 양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양부와 십대 남자애인 슈타인버거는 다소 어색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슈타인버거가 다니게 된 뉴 트라이어 고등학교는 부유한 동네답게 학교 교육의 수준이 높아서 수학과 과학 교육을 잘 받을 수 있었고, 형도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어 학교에서나마 만날 수도 있었다. 또한 양부의 도움으로 유럽에 남았던 가족들도 비자를 구해서 1937년 말 미국으로 이민을 오는데 성공했다.
가족은 우선 양부의 농장에서 일을 했다.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당시의 미국에도 반유태주의는 공공연히 퍼져 있어서 유태인은 사회생활의 곳곳에서 차별을 당했다. 슈타인버거는 그러한 예로, 양부가 시카고 선물 시장의 부회장까지 지냈는데, 관례대로라면 다음 해에 회장이 되어야 했지만 뽑히지 못한 일을 든다. 어린 슈타인버거가 여름 동안 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유태인 골프장에서나 가능했다. 유태인이 대학의 교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심사할 때 유태인임은 반드시 고려되었다. 그래서 영어가 익숙지도 않은 가족이 새로운 나라에 정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슈타인버거의 아버지는 미국에 적응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고, 집에서도 영어만을 사용하고, 시나고그에 나가는 등의 유태인의 관습을 포기했다. 슈타인버거는 훗날 아버지가 내면에서 진정으로 유태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슈타인버거는 시카고의 아머 공과대학(Armour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의사가 되기를 꿈꿨지만 학비를 댈 수도 없었고, 빨리 직장을 얻고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역시 학비가 없어서 2년 만에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미국에는 불황이 깊어가던 시절, 대학도 마치지 못한 유태인 젊은이가 직장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힘든 구직 활동 끝에 겨우 슈타인버거는 시카고의 한 제약회사에서 실험 용기를 닦는 일을 얻었다. 처음에는 그릇을 닦는 일만 했지만 그는 차츰 상사를 도와서 연구 과정에도 참여하게 되었고, 화학을 좀 더 공부할 필요를 느껴 시카고 대학의 야간 과정에 등록했다. 얼마 후 그는 다행히 주간으로 옮겨 시카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41년 진주만 이후 미국이 전쟁에 참가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카고 대학의 한 교수의 조수로 일하던 슈타인버거는 레이더를 개발하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전자기학을 가르쳐서 투입하는 군 통신부대의 프로그램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물리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던 슈타인버거는 거기서 맥스웰 방정식을 처음 보았다고 술회한다. 슈타인버거는 이 과정을 다니는 동안 사무실에 근무하던 첫 부인 조앤을 만나서 결혼했다. 과정을 마치고 슈타인버거는 MIT의 야간 폭격용 레이더를 개발하는 방사선 연구실에서 안테나를 설계하는 일을 했다. 연구하면서 그는 틈틈이 MIT의 물리학 수업을 들으며 비로소 물리학의 기초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전쟁 말기에 그는 뉴저지에 있는 통신부대의 사무실에서 한동안 일했는데, 훗날 동료가 되는 레온 레더먼(Leon Lederman)도 그 곳에서 같이 일했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공부를 계속하는 것을 지원하는 미국 정부의 G. I. Bill 프로그램 덕분에 슈타인버거도 대학원을 갈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슈타인버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운명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을 만난다. 슈타인버거가 물리학 대학원을 가기로 했을 때, MIT에서 같이 일했던 한 동료가 오펜하이머를 지도 교수로 택하라고 권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서 국가적 영웅이 된 오펜하이머에게 지원하는 일은 확실히 매력적으로 보였으므로 슈타인버거는 칼텍에 지원서를 보냈는데, 조교 자리가 있는 줄 모르고 그냥 장학금만 신청했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슈타인버거는 가족이 근처에 살고 있고, 자신이 다녔던 시카고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했다. 시카고 대학에서는 무난히 조교 장학금과 함께 입학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1947년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학교를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슈타인버거가 조교 자리를 신청해서 칼텍에 갔었다고 해도 오펜하이머와 인연을 맺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한편 시카고 대학의 물리학과는 전쟁이 끝나면서 핵물리학 연구소를 설립해서, 로스앨러모스에서 풀려난 뛰어난 물리학자들을 대거 영입해서 물리학을 선도하는 위치를 점하게 되는데, 그 중심 인물이 슈타인버거의 지도 교수가 되는 엔리코 페르미였다.
페르미는 연구뿐 아니라 교육에도 탁월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슈타인버거는 페르미의 강의를 ‘단순성과 명확성의 보석(gems of simplicity and clarity)’이었다고 표현했다. 강의와 설명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페르미는 정규 강의 외에도 폭넓은 물리학 주제를 토의하는 저녁 토론 시간을 운영하고, 전문가를 초빙해서 대학원생들과 함께 연구실에서는 세미나를 가지는 등 학생들이 훌륭한 물리학자로 성장하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슈타인버거는 1947년의 어느 날 페르미의 연구실에서 열린 세미나를 기억한다. 그날 페르미는 이탈리아의 콘베르시(Marcello Conversi), 판치니(Ettore Pancini), 피치오니(Oreste Piccioni)의 실험 결과를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은 우주선 속의 메조트론(뮤온)은 유카와의 중간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2) 슈타인버거는 “이 세미나에서 입자물리학이 나의 삶으로 들어왔다. With this seminar, particle physics entered my life.”라고 말했다.
페르미 외에도 당시 시카고 대학에서 초빙한 사람들을 보면 괴퍼트-메이어(Maria and Joseph Edward Goeppert-Mayer) 부부,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그레고르 벤첼(gregor Wentzel), 새뮤얼 앨리슨(Samuel King Allison) 등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교수진의 명성은 물리학을 공부하려는 우수한 학생들을 끌어모아, 훗날 노벨상을 받게 되는 리청다오(李政道, T. D. Lee)와 양진녕(楊振寧, C. N. Yang), 쳄벌레인(Owen Chamberlain)을 비롯해서, 리처드 가윈(Richard Garwin), 제프리 츄(Geoffrey Chew), 링컨 볼펜슈타인(Lincoln Wolfenstein), 마빈 골드버거(Marvin Leonard Goldberger), 마셜 로젠블루트(Marshall Rosenbluth) 등 훗날 지도적인 물리학자로 성장하게 될 여러 학생들이 함께 공부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고 그들의 지도 교수를 따라 시카고로 온 것이다. 슈타인버거는 다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서, 예를 들어 양은 중일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혼자 공부해서 배울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며,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교수들로부터 배운 것만큼이나 많은 것을 배웠다.”라고 회상했다.
이 말의 절반은 겸손의 표현이라고 해도, 절반은 사실이었을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슈타인버거는 물리학을 정규 과정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서, 그 당시는 다른 우수한 학생들보다 뒤쳐져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가지 정황은 1947년 여름 슈타인버거와 그 외 여러 학생들이 학위논문 연구를 위한 기초 물리학 시험을 보았는데, 슈타인버거만 시험에서 떨어졌던 일이다. 규정대로라면 슈타인버거는 박사학위 과정에 남을 수 없고 학교를 나가야 했지만, 다행히도 본인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몇 달 후 다시 시험 기회가 주어졌고, 이번에는 무난히 합격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미는 슈타인버거를 자신의 학생으로 받아주었다. 누구나 페르미의 학생이 되기를 바랐으므로 이것은 몹시 운이 좋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발간된 페르미의 전기에서 저자 데이비드 슈워츠는 “분명히 페르미는 슈타인버거를 좋아했다”라고 말한다.3) 순탄치 않은 환경에서 우여곡절 끝에 물리학의 길에 들어선 젊은이에게서 페르미가 비범한 무언가를 느꼈던 것일까? 슈타인버거는 처음에는 이론 연구를 하려고 했지만 마땅한 연구 주제를 찾는 일이 어려웠다. 당대의 가장 중요한 이론 문제였던 QED의 양자 보정 계산은 학생이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페르미는 슈타인버거에게 브루노 로시(Bruno Rossi)와 매튜 샌즈(Matthew Sands)가 언급했던 우주선의 뮤온 문제를 살펴보라고 했다. 당시 우주선의 뮤온은 붕괴해서 나오는 전자를 관측해서 확인했는데, 예상보다 너무 적게, 거의 1/4밖에 관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슈타인버거는 관측 과정의 공간적 분포를 올바르게 해석하면 절반은 설명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나아가서 페르미는, 그들의 관측은 뮤온이 전자와 중성미자라는 두 개의 입자로 붕괴했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를 확인하기 위해 전자의 에너지 분포를 확인할 것을 제안했다. 로시가 그 실험을 할 시간이 없다고 하자, 페르미는 슈타인버거에게 이 실험을 맡겼다.
슈타인버거는 조수였던 우즈 부인과 함께 80개의 가이거카운터를 만들어서 실험을 했다. 실험은 지상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높은 산인 콜로라도의 에번스 산꼭대기에서 수행되었다. 실험을 통해서 슈타인버거는 뮤온으로부터 붕괴한 전자의 에너지가 연속적인 분포를 보임을 확인했다. 이 결과는 예전에 베타붕괴에서와 마찬가지로, 뮤온이 전자와 중성미자라는 두 개의 입자로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개의 입자로 붕괴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세 번째 입자도 관측되지 않으므로 그 입자 역시 중성미자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연구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되었다.4)
페르미는 슈타인버거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었고 실험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실험 자체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논문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논문에 페르미의 이름이 있으면 슈타인버거가 공적을 인정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뮤온이 붕괴할 때 두 개의 중성미자가 나온다는 이 결과는 당연히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하지만 슈타인버거는 물론 페르미도 이 결과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었으면 약한 상호작용이라는 분야를 더 일찍 개척하지 않았을까? 슈타인버거는, 존재를 자신이 처음으로 드러낸 이 입자를 훗날 또다시 자신이 발견해서 노벨상을 받게 되리라고는 당연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슈타인버거는 다시 원하던 대로 이론 연구로 돌아와서 1948년 가을부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1년간 연구했다. 예전에 학위과정 지도교수로 택하려고 했던 오펜하이머를 이제 연구소의 소장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고등연구소에서 슈타인버거는 오펜하이머를 비롯해서 울렌벡(George Uhlenbeck),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 등 여러 뛰어난 사람들을 알게 되어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논문을 쓸 만한 이론 연구 주제를 잡기 어려워서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1949년 초 슈타인버거는 파울리-빌라의 정규화를 이용해서 특정한 종류의 무한대를 다루는 법을 개발했고, 이를 이용해서 중성 파이온이 두 개의 광자로 붕괴되는 과정과 파이온의 수명을 계산하는데 성공했다. 이 논문은 중성 파이온에 대한 연구의 막을 여는 기념비적인 연구다. 중성 파이온은 오펜하이머가 우주선이 대기 중에서 일으키는 전자기 샤워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적이 있던 입자였고 이 논문이 나올 때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었다. 슈타인버거는 이 연구에서 페르미와 양이 제안한 대로 파이온을 핵자-반핵자가 결합한 복합 입자로 가정했다. 즉 그의 주변 사람들의 영향이 잘 녹아있는 연구다. 슈타인버거는 논문을 보고 오펜하이머가 무척 기뻐했다고 회상했다. 오펜하이머는 타임지에 기대되는 젊은 물리학자 10명을 추천할 때 슈타인버거를 포함시켰다.
슈타인버거는 학생 시절에 함께 연구한 적이 있던 윅(Gian Carlo Wick)의 조수가 되어 그 해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버클리에는 또한 시카고 시절에 동료였던, 추, 골드버거, 쳄벌레인 등이 슈타인버거를 환영해 주었다. 이론물리학자인 윅의 조수로 버클리에 왔지만, 슈타인버거는 또한 당대 최고의 시설을 갖춘 버클리 대학의 방사선 연구소에서 실험 연구에도 강한 흥미를 느꼈다. 방사선 연구소는 세계 최고의 출력을 내는 184인치 사이클로트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 해에는 파이온을 발견한 브리스톨 파웰 그룹의 라테스(César Lattes)가 버클리로 옮겨와서 가드너 (Eugene Gardner)와 함께 이 사이클로트론으로 가속시킨 알파 입자를 탄소 원자에 충돌시켜 인공적으로 파이온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마침 에드윈 맥밀런(Edwin McMillan)도 330 MeV의 전자 싱크로트론(synchrotron)을 새로 건설한 참이었다. 맥밀런의 권유로 슈타인버거는 싱크로트론을 이용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슈타인버거가 계획한 실험은 싱크로트론에서 나오는 높은 에너지의 X-선으로 원자핵을 때려서 파이온을 생성하는 것이었다. 슈타인버거는 생성된 파이온의 방향 분포를 측정하고 이로부터 파이온의 스핀과 패리티를 구해서 파이온이 유사스칼라(pseudoscalar)임을 처음으로 보였다.5) 또한 동료인 파노프스키(W. K. H. Panofsky), 대학원생이던 스텔러(J. Steller)와 함께 표적에서 나온 광자들을 분석해서 중성 파이온이 붕괴해서 나온 광자 쌍을 찾아냈다.6) 이것은 중성 파이온을 최초로 발견한 것이었고, 나아가 가속기를 통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입자를 발견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같은 해 브리스톨 그룹도 기구를 이용한 우주선 실험에서 중성 파이온의 존재를 확인했다. 한편 그 실험이 끝날 즈음 시카고 시절의 친구인 쳄벌레인이 합류해서, 이번에는 파이온의 수명을 매우 정확히 측정하는 데에도 성공했다.7) 1950년 한 해 동안 파이온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세 편이나 발표한 것이다. 이러한 활약에 대해 슈타인버거는 “이것은 50년 전의 일이다. 그때는 한두 명의 동료와 함께 실험을 해서 1년 사이에도 세 가지의 흥미롭고 새로운 결과를 발견해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연히,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첫째로는 슈타인버거가 연구 주제를 올바른 방향으로 설정했기 때문이고, 보다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 순간 그가, 그 실험들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장소인 버클리의 방사선 연구소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슈타인버거의 버클리 시절은 정치적 문제로 갑자기 불쾌하게 끝나버렸다. 냉전의 파도가 밀어닥치면서 캘리포니아 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들이 구성원들에게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선서를 요구했다. 버클리 대학 방사선 연구소의 구성원들도 이 파도에 휩싸였다. 자유주의 성향의 윅, 추, 서버, 파노프스키 등은 선서를 반대했고, 노골적인 우파였던 연구소의 설립자 로렌스(Ernest Orlando Lawrence)와 루이스 알바레즈(Luis Walter Alvarez) 등은 선서를 지지하며 반대자들을 압박했다. 다수는 선서에 부정적이기는 했지만 강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좌파적인 가치에 공감을 가졌던 슈타인버거는 물론 선서에 서명을 거부했고, 곧바로 대가를 치렀다. 슈타인버거는 중성 파이온을 발견한 후 184인치 사이클로트론의 양성자 빔을 이용해서도 중성 파이온을 관측하기 위해 검출기를 설치하는 허가를 받았었는데, 실험 장치를 설치하고 몇 시간 뒤에 갑자기 알바레즈가 슈타인버거를 사이클로트론 실험실에서 내쫓은 것이다.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나아가서 맥밀런과 세그레가 슈타인버거를 연구소의 정규직 자리에 추천한 것도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연구소에 남을 수 없게 된 슈타인버거는 다른 학교를 알아보아야 했다. 다행히도 컬럼비아 대학이 슈타인버거를 받아주어 그 해 가을학기부터 뉴욕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컬럼비아 대학은 버클리 못지않은 물리학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방사선 연구소는 가을학기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여름이 막 시작되던 6월 30일 아침, 슈타인버거는 선서를 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내로 자리를 비우라는 통고를 들었다. 무례하고 가혹한 조치였다. 다른 구성원들도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파노프스키와 서버는 일단 서명을 했으나 몇 년 후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슈타인버거처럼 서명을 거부한 추와 윅 등은 역시 연구소를 떠나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당시의 컬럼비아 대학 역시 물리학 연구에 최고의 환경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라비(Isidor Rabi)가 뛰어난 인력들을 끌어모았던 컬럼비아의 물리학과는 당시 QED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실험 결과들인 램 이동과 이상(anomalous) 자기 모멘트를 측정한 윌리스 램(Willis Lamb)과 폴리카프 쿠쉬(Polycarp Kush), 훗날 라비의 원자 빔 연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게 되는 노먼 램지(Norman Ramsey), 메이저를 발명하게 될 찰스 타운즈(Charles Townes) 등 최고 수준의 교수진을 자랑했다. 또한 버클리의 사이클로트론보다 출력이 높은 380 MeV의 사이클로트론이 막 완성되어 가동을 시작하려고 하는 중이었고, 얼마 후에는 T. D. 리와 서버 등의 이론물리학자들이 합류해서 입자물리학 분야도 막 크게 발전하려는 참이었다. 뉴욕 시내에 위치한 컬럼비아 대학의 캠퍼스에는 대규모의 사이클로트론을 설치할 장소가 없었으므로 사이클로트론 연구소는 북쪽으로 약 30 km 떨어진 허드슨 강가의 너비스(Nevis)라 불리는 지역에 위치했다. 이곳은 원래 미국 건국의 주역이었단 알렉산더 해밀튼의 땅이었는데 컬럼비아 대학에 기부한 곳이었다. 이후 이 연구소는 핵 및 입자물리학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가 되었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슈타인버거는 이후 약 15년간 이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활약하게 된다.
컬럼비아 시절에 가장 중요한 슈타인버거의 업적은 1960년대 초 중성미자가 서로 다른 두 종류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일이다. 슈타인버거의 제자인 멜빈 슈워츠(Melvin Schwartz)는 1959년에 약한 상호작용에 대한 T. D. Lee의 강연을 듣고 중성미자를 관측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가속기에서 생성된 파이온 빔을 장벽으로 둘러싸인 검출기에서 관측하면 모든 입자는 장벽에 걸러지지만, 파이온이 뮤온으로 붕괴할 때 함께 만들어진 중성미자는 장벽을 통과할 수 있으므로 검출기에서는 중성미자만을 검출하게 된다. 슈타인버거와 슈워츠, 그리고 동료 교수인 레더만은 다른 연구진과 함께, 당시에 브룩헤이븐에 막 건설된, 당대 최고 에너지인 33 GeV의 가속기 AGS(Alternating Gradient Synchrotron)에서 만들어진 파이온 빔과 10톤의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스파크 챔버를 이용해서 중성미자가 알루미늄 표적에 충돌하는 사건을 관측했다. 물론 대부분의 중성미자는 검출기마저 통과해 버리지만, 적은 수는 알루미늄 원자핵과 충돌해서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들이 확인하려던 것은 뮤온과 함께 만들어진 중성미자로부터 전자도 만들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베타붕괴에서 전자와 함께 만들어진 중성미자는 물질과 상호작용할 때 전자를 만든다는 것이 1956년 레인즈(Frederick Reines)와 코원(Clyde Cowan) 팀의 실험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험 결과 이들은 뮤온에서 나온 중성미자는 뮤온만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확인했고, 따라서 중성미자는 두 종류가 있어서, 전자와 함께 나온 중성미자는 전자만을, 뮤온과 함께 나온 중성미자는 뮤온만을 생성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8) 이 실험은 또한 검출기의 차폐를 위해 2차 세계 대전에서 사용되었던 함정에서 나온 철판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실험의 결과로 슈타인버거와 슈워츠, 레더먼은 198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65년에 슈타인버거는 CERN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이탈리아의 루비아(Carlo Rubbia)와 함께 중성 케이온을 가지고 CP 대칭성 깨짐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이 실험은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슈타인버거가 안식년 후에 1년간의 무급 휴직을 요청한 것을 컬럼비아 대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슈타인버거와 학교 사이에는 틈이 벌어졌고, 결국 슈타인버거는 1968년 CERN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후 슈타인버거는 은퇴할 때까지 CERN에서 활동했다. 1970년대에는 CP 대칭성 깨짐 실험을 계속하는 한편 CDHS (CERN-Dortmund-Heidelberg-Saclay) 그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CDHS 그룹은 1976년에서 1984년까지 CERN에서 중성미자-핵자 충돌 실험을 수행하며 여러 중요한 결과를 얻었다. 또한 1980년대에 사상 최대의 가속기인 LEP이 건설될 때 슈타인버거는 ALEPH 그룹을 만들어서 참여했으며 그룹의 첫 번째 대표를 맡았다. ALEPH 검출기는 그의 개성과 리더십의 결실이었다.
은퇴한 후에도 슈타인버거는 오랫동안, 나이가 90대가 될 때까지 자전거를 타고 CERN으로 출근해서 물리학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한편 물리학 다음으로 슈타인버거가 사랑한 것은 음악이었다고 한다. 그는 집에서 아마추어 음악가들을 모아서 바흐를 연주하곤 했다. 그는 플루트를 맡았는데, 자신의 표현으로는 그다지 잘 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가끔은 프로 음악가가 초청되기도 했다. 그의 아들 네드(Ned Steinberger)는 헤드 없는 기타라는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슈타인버거의 창립자기도 하다.
슈타인버거는 본질적으로 휴머니스트였고, 평생 좌파적인 견해를 지지했으며, 공공연히 무신론자임을 자인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만약 신이 있다면 결코 인간을 차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유태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린 시절 그가 유태인으로서 겪었던 박해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발언이 아닐까 한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유럽에 정착한 후 고향인 바트키싱겐을 다시 찾았고 이후에도 종종 방문했다. 마을은 2001년 그가 다녔던 학교를 그의 이름을 따서 잭-슈타인버거-김나지움으로 바꾸었고 2006년에는 그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슈타인버거는 2004년에 자서전 <입자에 대해 배우기 Learning about Particles>을 펴내면서 “특권을 받은 50년 50 privileged years”라는 부제를 달고,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1)
나는 50년의 긴 직업적 생애 동안 입자물리학의 아름다운 발전에 몸담고 기여한다는 특권을 누렸다. 이러한 특권은 2차 세계 대전 직후 시카고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엔리코 페르미를 지도교수로 만난 것이다. 또한 운 좋게도 나는 1949년에 버클리에 있었다. 당시 버클리는 막 발견된 입자인 메손을 연구할 수 있는 가속기를 보유한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나는 최첨단 수준의 연구를 하는 연구소나 그 주변에서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하는 행운을 누렸다.
자서전의 제목에서, 그리고 이 서문을 보면 그가 입자물리학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다. 비록 뒤늦게 학문의 길에 합류했지만, 잭 슈타인버거는 온전히 물리학을 위한 삶을 살았다. 평생을 입자물리학 연구에 바쳤고 컬럼비아 대학에서는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카이스트 물리학과에서 나의 지도교수였고 지금은 은퇴한 김재관 교수님이 바로 슈타인버거의 제자다. 슈타인버거가 1921년 5월생이니 마침 지금이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즈음인데, 100세를 채우지 못하고 작년 12월 12일에 99세로 돌아가셨다. 이 자리를 빌려 훌륭한 물리학자였고 훌륭한 인간이었던 슈타인버거를 추모한다.
- 각주
- 1)Jack Steinberger, Learning About Par- ticles‑50 Privileged Years (Springer- Verlag, Berlin Heidelberg, 2005).
- 2)M. Conversi, E. Pancini and O. Piccioni, Phys. Rev. 68(9-10), 232 (1945); Phys. Rev. 71, 209 (1947).
- 3)데이비드 N. 슈워츠 지음, 김희봉 옮김, 엔리코 페르미,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사람 (김영사, 2020).
- 4)J. Steinberger, Phys. Rev. 74, 500 (1948).
- 5)J. Steinberger and A. S. Bishop, Phys. Rev. 78, 494 (1950).
- 6)J. Steinberger, W. K. H. Panofsky and J. Steller, Phys. Rev. 78, 802 (1950).
- 7)O. Chamberlain, R. F. Mozeley, J. Steinberger and C. Wiegand, Phys. Rev. 79, 394 (1950).
- 8)G. Danby, J-M. Gaillard, K. Goulianos, L. M. Lederman, N. Mistry, M. Schwartz and J. Steinberger, Phys. Rev. Lett. 9, 36 (1962).
- 9)A giant of the field, Orbituary to Jack Steiberger, CERN Courier 61(2), 69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