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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세상을 바꾼 논문

작성자 : 이강영 ㅣ 등록일 : 2022-01-17 ㅣ 조회수 : 2,741

저자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등이 있다. (kylee.phys@gnu.ac.kr)

La Ricerca Scientifica는 이탈리아 국립 연구 위원회(Consiglio Nazionale Delle Ricerche)가 로마에서 발행하던 이탈리아의 과학 저널이다. 1931년부터 1976년까지 발행되었고 지금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 학술지는 이탈리아어로 발행되었고 대체로 연구 결과를 간단히 소개하는 짧은 논문을(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자면 letter를) 신속하게 싣는 저널이었다.

그림 1. La Ricerca Scientifica에 실린 페르미의 첫 중성자 실험 논문.그림 1. La Ricerca Scientifica에 실린 페르미의 첫 중성자 실험 논문.

1934년 3월부터 약 15개월에 걸쳐 이 저널에 일련번호가 붙은 10편의 시리즈 논문이 발표되었다. 처음 두 논문은 저자가 한 사람이었고, 5번째 논문까지는 5인 저자, 그 후에는 저자가 6인이 된다. 저자 이름은 알파벳 순서로 기재되었다. 오늘날 입자물리학과 핵물리학 등의 분야에서 저자 이름을 알파벳 순서로 기재하는 전통은 상당히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걸 알 수 있다. 첫 논문의 제목은 “중성자 타격으로 유도된 방사성 Radioattività indotta da bombardamento di neutroni”이고1) 두 번째 논문의 제목은 “중성자 타격에 의한 방사성 Radioattività provocata da bombardamento di neutroni”이다.2) 그 뒤의 논문은 같은 제목에 뒤에 III‒X까지 일련번호가 붙는다. 저자 이름은 알파벳순으로 적혀 있는데, 6인 논문일 때는 아말디(E. Amaldi), 다고스티노(O. D’Agostino), 페르미(E. Fermi), 폰테코르보(B. Pontecorvo), 라제티(F. Rasetti), 세그레(E. Segrè)고 5인 저자일 때는 여기서 폰테코르보가 빠진다. 단독 논문인 처음 두 논문의 저자는 물론 엔리코 페르미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이 논문들은 세상을 바꾸는 인간 문명의 한 분야를 여는 첫 신호였다. 물론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 세상을 바꾼 논문이라고 할 만한 논문들은 여럿 있다. 하지만 이 논문들처럼 그 의미가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시작된 새로운 분야는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고, 비유나 상징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말 그대로 인류를 실제로 멸망시킬 수도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논문들에 담긴 내용은 간단히 말하자면, 느리게 움직이는 중성자를 이용해서 인공방사능을 만들고 그 결과를 탐색한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1934년 1월 파리의 졸리오-퀴리 부부가 최초로 인공방사능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졸리오-퀴리 부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폴로늄을 보유한 연구소답게 풍부한 알파 입자를 가지고 여러 원소를 때려서 방사성 원소들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알루미늄에 알파선을 쏘아서 인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얻었고, 붕소에서는 질소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들어냈다. 핵물리학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방사성이 없는 원소에서 방사성 원소를 만들어 냈다는 결과는 놀라운 일이었다. 이 업적은 졸리오-퀴리 부부의 최대 업적이 되었고, 부부는 이 업적으로 193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졸리오-퀴리 부부의 논문을 읽고 엔리코 페르미의 직관이 번득였다. 페르미의 직관이란 대체로 교묘하고 복잡하기보다 단순하면서 핵심을 찌르는 스타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페르미가 생각한 바는 이러했다. 알파 입자는 핵과 같이 양전하를 가지고 있으므로 핵과 서로 전기적으로 밀쳐낸다. 따라서 원자핵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우므로 원자핵을 때려서 반응을 일으키기에는 효율이 좋지 않다. 하지만 중성자라면 원자핵에 가까이 가도 반발력을 받지 않으므로 쉽게 원자핵을 때릴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중성자는 알파 입자보다 다루기가 어렵다. 중성자를 만들기도 어렵고, 전기적으로 중성이므로 조종하기도, 안개상자 등을 통해 중성자 빔을 관찰하기도 어렵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마침 페르미는 동료인 라제띠와 감마선 산란 실험을 하느라 중성자 발생장치를 개발한 적이 있었다.

페르미의 연구는 1934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라제띠가 개발한 폴로늄-베릴륨 혼합 시료는 나오는 중성자가 너무 약해서 적합하지 않았다. 페르미는 라듐에서 나오는 라돈 기체를 응축해서 베릴륨을 섞으면 충분히 강력한 중성자원이 된다는 아이디어를 내고 곧 이를 실험적으로 확인했다. 페르미는 이 중성자원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원소들을 중성자에 노출시킨 뒤 가이거 카운터로 방사능을 측정했다. 3월 25일에 첫 논문이 나왔다. 페르미는 이 논문에서 플루오린과 알루미늄을 중성자로 때려서 방사선이 나오도록 유도했다고 보고했다. 페르미는 이 연구가 중요하고 매우 시급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닫고 동료와 제자들을 소집했다. 바로 위의 저자 목록에 있는 이름들이다. 라제티는 고등사범학교의 동창이자 오랜 동료고, 아말디와 세그레는 첫 제자, 그리고 다고스티노와 폰테코르보는 새로 들어온 제자들이다. 드디어 역사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연구는 워낙 유명하고 인상적인 장면도 많아서 여러 문헌에서 그려지고 있다. 아마도 제일 유명한 것은 페르미의 부인 라우라가 쓴 “원자 가족 Atoms in the Family”에서 그린 장면일 것이다.3)

중성자원으로부터 나오는 방사선이 계수관에 닿으면 측정을 방해하기 때문에 물질에 방사선을 쬐는 방과 계수관이 있는 방은 긴 복도 두 끝에 각각 위치했다. ... 어떤 원소에서 생성된 방사능은 단명하기 때문에 1분만 지나도 감지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신속함이 생명이므로 복도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은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 어느 날 검은 양복에 흰 셔츠 차림의 점잖은 에스빠냐 과학자 한 사람이 물리관을 찾아와 페르미 각하를 보기를 청했다. ... 방문객이 2층에 막 올랐을 때 웬 장밋빛 얼굴의 젊은이와 다리가 짧은 사람이 더러운 잿빛 가운을 입고 손에는 이상한 물건을 든 채로 미친 듯이 복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리가 짧은 사람이 페르미, 장밋빛 얼굴의 젊은이는 아말디다.

이 연구에서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중성자의 속도가 느릴수록 반응이 크게 일어난다는 걸 알아냈다는 점이다. 양성자는 반발력을 이겨야 하므로 가능한 한 속도를 빠르게 해야 반응이 커지지만 중성자는 오히려 속도를 느리게 해야 충돌할 확률이 높아지고 반응이 커진다.

연구는 주기율표의 원소들을 모두 지나 우라늄에 이르렀다. 우라늄은 당시까지 알려진 가장 원자번호가 높고 무거운 원소였고 그 자체가 방사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실험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우라늄을 중성자로 때리면 우라늄이 중성자를 흡수해서 초 우라늄 원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그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새로운 원소를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데, 하물며 당시에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III번 논문에 초 우라늄 원소에 관한 논의가 들어 있다. 물론 페르미 팀은 “새로 만들어진 원소는 없는 것으로 보이므로 새로운 원소가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라고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렸다.4)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실제로 일어난 일은 몇 년 뒤에 오토 한과 리제 마이트너가 밝혀냈듯이 우라늄 원자핵이 가벼운 원자핵으로 쪼개진 것이었다. 사실 페르미 팀도 우라늄보다 가벼운 원소가 만들어졌는지를 조사했었고, 납보다 무거운 원소는 없다는 걸 확인했었다. 납에서 조사를 멈춘 이유는 그보다 가벼운 원소가 만들어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페르미 팀이 원자핵이 쪼개진 것을 알아채지 못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로써 핵분열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발견되었고, 원자폭탄이 탄생하면서 원자력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고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6)

그림 2. 1938년 노벨상 시상식에서 페르미와 펄 벅.그림 2. 1938년 노벨상 시상식에서 페르미와 펄 벅.

이 논문들은 아래에 보인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숨에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1934년쯤에는 이미 엔리코 페르미가 국제적으로 최정상의 물리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기도 했다. 결국 이 업적으로 페르미는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수상 이유는 “중성자를 쏘아서 만들어진 새로운 방사성 원소의 존재를 증명하고 느린 중성자에 의해 일어난 관련 핵반응을 발견한 업적”이었다. 1938년의 노벨상 시상식은 조금 특별했다. 수상자로 물리학상의 페르미, 그리고 문학상의 펄 벅 두 사람만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화학상과 생리의학상은 그 해에는 수상자를 정하지 못했고, 노벨상을 한 해 유보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다음 해인 1939년에 1938년 수상자로 화학상의 리하르트 쿤과 생리의학상의 장 프랑수아 에이먼을 선정해서 시상했다.7) 그래서 1938년 시상식을 보면 페르미와 펄 벅만 있어서 좀 단출하다. 이 시상식 영상은 노벨상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5)

페르미의 첫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영국의 러더퍼드는 페르미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론물리학의 굴레를 성공적으로 벗어난 데 대해 축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젊은 물리학자 이시도어 라비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모두 이탈리아어를 공부해야 되겠어.”

페르미의 발견 소식에 고무된 이탈리아의 한 언론은 초 우라늄 원소의 이름을 무솔리늄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기사에는 페르미가 초 우라늄 원소를 유리병에 담아 왕비에게 바쳤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신문의 과학 기사를 읽을 때는 늘 조심해야 한다.

각주
1)E. Fermi, Radioattività indotta da bombardamento di neutroni, Ricerca Scientifica 5(1), 283 (1934).
2)E. Fermi, Radioattività provocata da bombardamento di neutroni, Ricerca Scientifica 5(1), 330 (1934).
3)L. 페르미 지음, 양희선 옮김, 원자가족, 현대과학신서 76 (전파과학사, 1977).
4)E. Amaldi, O. D’Agostino, E. F., F. Rasetti and E. Segrè, Radioattività beta, provocata da bombardamento di neutroni - III, Ricerca Scientifica 5(1), 452 (1934).
5)https://www.nobelprize.org/prizes/literature/1938/award-video/.
6)원자력 시대를 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은 1942년 12월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최초의 원자로가 가동에 성공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의 주역도 역시 엔리코 페르미다.
7)아인슈타인의 노벨상도 이 경우다. 1921년의 노벨물리학상은 한 해 유보되어 1922년에 아인슈타인에게 주어졌다. 1922년의 수상자는 닐스 보어였으므로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같은 자리에서 노벨상을 받는, 20세기 물리학의 하이라이트 같은 장면이 연출될 뻔했으나, 아인슈타인이 일본 방문을 이유로 시상식에 불참해서 그런 장면은 성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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