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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이야기
아인슈타인의 학창시절과 박사학위논문
작성자 : 김재영 ㅣ 등록일 : 2021-01-15 ㅣ 조회수 : 2,324
김재영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물리학 기초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물리철학 및 물리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공저로 『정보혁명』, 『양자, 정보, 생명』,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이 있고, 공역으로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에너지, 힘, 물질』 등이 있다. (zyghim2@kaist.ac.kr)
그림 1. 1898년 아인슈타인. (출처: The ETH Library Zurich, Image Archive)
흔히 기적의 해라 부르는 190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네 편의 논문을 발표했을 뿐 아니라 박사학위논문도 제출했다. 3월 18일에 투고한 논문 “발견법의 관점에서 본 빛의 생성과 변환”은 빛양자(Lichtquanten) 즉 빛알의 개념을 써서 냉광, 형광, 광전효과 등을 통일되게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으며, 5월 11일에 투고한 논문 “열의 분자운동론에 따른 정지 유체 속 입자의 운동”은 기체분자운동론을 써서 브라운 운동을 해명하고 있다. 6월 30일에 투고한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과 9월 27일에 투고한 논문 “물체의 관성이 에너지 함량에 따라 달라지는가?”는 상대성이론의 기초를 마련했다. 8월 15일에 투고하여 1906년에 출간된 논문 “분자 크기의 새로운 결정 Eine neue Bestimmung der Moleküldimensionen”은 아인슈타인의 박사학위 논문을 조금 수정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다닌 대학은 취리히 폴리테히니쿰(Zürich Polytechnikum)이었다. 테히니쿰은 우리말로 대개 ‘공업전문학교’라고 번역되는데, 일제강점기의 ‘고등공업학교’와 유사하다. 테히니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당시 한창 새롭게 확장되고 있던 전기공업과 화학공업 등에서 일할 수 있는 기술자를 키워내는 동시에 관련된 과목을 가르치는 중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특히 아인슈타인이 등록했던 ‘수학 및 자연과학 분과 VIA’의 중심 목표는 수학과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중등교사(Fachlehrer)를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파흐레러(Fachlehrer)는 ‘전문교사’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당시 독일어권 중등학교 즉 귐나지움(Gynmasium)이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고전을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던 것을 고려하면, 수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에서 전문적인 학문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매우 새로운 자리였다.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산업혁명에서 뒤처져 있던 독일어권 나라들에서는 기술입국의 기치 아래 기술을 갖춘 노동자를 양성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말 스위스의 주요 대학은 모두 다섯 개가 있었다.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은 대학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를 이론물리학 및 기술물리학(theoretische und technische Physik) 교수로 초빙했다. 그러나 클라우지우스는 10여 년 만에 취리히를 떠났고 이론 및 공과물리학 교수 자리는 한참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1875년에 이 자리에 클라우지우스의 후임으로 온 사람이 바로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베버(Heinrich Friedrich Weber, 1843-1912)이다. 베버는 실험물리학과 전기공학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의 연구주제 중에는 흑체복사, 저온에서의 고체 비열, 확산이론 등처럼 이론적인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기전도나 열전도의 측정, 측정 장치의 개발 등과 같이 공학적인 것에 가까웠다.
베버는 예나 대학에서, 광학으로 널리 알려진 아베(Ernst Abbe)를 지도교수로 하여 빛의 회절에 관한 이론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871년부터 3년간 베를린에서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의 조교로 일했다. 베버의 업무는 주로 실험실을 세우고 장비를 갖추는 일이었으며, 학생들을 위한 실험에도 충실한 조교 역할을 했다. 베버는 헬름홀츠와 일하는 동안 열과 전기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4년 베버는 호엔하임에 있는 왕립 뷔템베르크 아카데미의 물리-수학 교수 자리를 얻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학교에서 열심히 강의와 교육에 전념하던 베버에게 어느 날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1857년부터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의 학장(Schulratspräsident)을 맡고 있던 칼 카펠러(Karl Kappeler)였다.
클라우지우스가 베를린으로 옮겨간 이후로 그 후임을 열심히 찾고 있던 카펠러에게 헬름홀츠가 추천한 베버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베버의 연구주제는 광학, 열, 전기 분야에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경험적인 법칙을 이용하여 조명, 전신, 전기표준 등과 같이 실제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의 물리학연구소는 바로 베버와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베버는 카펠러가 제안한 물리학연구소의 소장 겸 이론물리학 및 기술물리학 교수직을 응낙했다. 베버는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에 있는 동안 거의 실용적인 연구에 전념했다. 가령 도시 간 전기에너지 수송, 교류를 사용하는 전기 선로, 저전압 및 고전압 장치에 관한 스위스 연방법 표준 등이 베버가 다루었던 주제이다.
베버는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에 부임하자마자 카펠러의 기획에 따라 새로운 물리학연구소를 세우는 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4층짜리 건물을 짓는 데에만 120만 스위스 프랑의 돈이 들었다. 베버에게는 실험실의 장비와 기계 등을 구입할 비용으로 추가로 90만 스위스 프랑 이상의 돈이 주어졌다. 이 연구소에는 42개의 실험실과 세 개의 대형 강의실, 실험 장치를 보관하는 6개의 방, 도서관, 교수와 강사의 연구실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당시 독일어권 대학 중에서 이렇게 훌륭한 물리학연구소가 드물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이와 같은 배경을 보자면 아인슈타인이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에서 받은 교육이 실험물리학과 전기공학 위주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이 대학에 다닐 무렵에 학기에 등록한 학생의 수는 학기당 45~56명 정도였고, 아인슈타인이 입학한 1896년에 아인슈타인의 학과였던 VIA 분과(즉 중등학교 양성과정)에 등록한 학생은 23명에 불과했다. 아인슈타인은 2년 뒤에 자격시험(Übergangs-Diplom- Prüfung)을 ‘5½’의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다. 당시 스위스의 성적평가는 ‘1’이 최하 성적(Note)이고 ‘6’이 최고 성적이었다. 현대 독일어권의 성적평가는 최고 성적이 ‘1’이고 최하 성적이 ‘5’이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대학 시절 성적이 형편없었다는 잘못된 이야기가 퍼지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시절 하인리히 베버의 실험실에 대단히 충실했다. “세련되고 동시에 정확한” 베버의 강의는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감명”을 주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에게 물리학은 일종의 계시처럼 다가온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이 베버 교수의 강의 시간에 필기한 노트가 남아 있는데, 이 노트를 보면 아인슈타인이 베버 교수의 강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아인슈타인이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에서 수강한 교과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수학 또는 수리물리학에 해당하는 것인데,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해당하는 과목들을 무척 싫어했다.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에는 아인슈타인이 속한 VIA 분과의 과장을 맡고 있던 후르비츠(Adolf Hurwitz)라든가 나중에 상대성이론의 기하학적 의미를 명료하게 밝혀주었던 수학자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등과 같이 널리 알려진 권위 있는 수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 필요한 수학은 미적분학이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현실과 유리된 것처럼 보이는 고급수학은 아인슈타인의 흥미를 전혀 끌지 못했고, 강의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두 번째 부류는 베버의 강의와 실험실로 대표되는 실험물리학 과정이다. 아인슈타인이 수강한 베버의 강의는 통년과목 4개, 단학기 과목 7개이다. 무려 15강좌를 수강한 것이다. 게다가 그 성적도 ‘5’가 세 번, ‘5½’이 한 번, ‘6’이 두 번으로 대단히 우수했다. 아인슈타인이 싫어했던 다른 교수 페르네(Jean Pernet, 1845-1902)의 강의는 단 한 강좌를 수강했을 뿐 아니라 성적도 ‘1’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아인슈타인이 베버를 특별히 편애했음이 역력하다.
베버와 아인슈타인의 인연은 아인슈타인이 1895년에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에 지원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멋대로 뮌헨의 귐나지움을 그만 두고 졸업장(Abitur)도 없이 가족이 있는 밀라노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귐나지움 졸업장이 없어도 입학할 수 있는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에 입학지원서류를 제출했다. 하지만 다른 지원자들보다 두 살이나 어린 아인슈타인은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말았다. 이때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알아본 것이 바로 베버이다. 베버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에서 상당한 능력을 보인다는 것을 간파했고, 아인슈타인에게 자기의 강의를 청강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은 1909년 취리히 공과대학(Zürich Techniche Hochschule)으로 되었다가 1911년 스위스 연방공과대학(Eidgenösische Techniche Hochschule)으로 승격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졸업할 무렵,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은 박사 학위를 수여할 권한이 없었다. 대신 취리히 대학(Universität Zürich)과 특별한 협정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폴리테히니쿰의 학생들 중 관심과 능력을 갖춘 학생들은 취리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박사학위논문을 시작한 것은 1900년 10월경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아인슈타인이 학위논문의 주제로 택한 것은 열전기 톰슨 효과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계획은 베버 교수와의 불화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독일어권 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은 사실상 대부분 지도교수가 학생에게 연구주제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연구주제는 주로 지도교수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는 문제였다. 베버가 지도학생에게 연구주제로 준 문제는 주로 전도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장치의 개발이나 전도도의 측정법 등이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처럼 스스로 연구주제를 선택하여 들고 간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던 모양이다. 베버가 평소에 보기에 아인슈타인은 자만심에 가득 찬 무례한 학생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베버를 “베버 교수님” (Herr Professor Weber)이라고 불렀지만, 아인슈타인은 베버를 그냥 “베버 씨”(Herr Weber)라고 부르곤 했다. 독일어권에서는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인정학위(하빌리타치온)를 받은 사람에게 추가로 Professor라는 호칭을 부여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베버를 “베버 씨”라고 부른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베버는 아인슈타인에게 “자네는 정말 똑똑한 학생이야. 하지만 자네는 심각한 결점이 있어. 다른 사람 말을 도무지 듣지 않는다는 거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베버의 논문지도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의 물리학 교수는 베버와 페르네밖에 없었다. 페르네의 경우는 아인슈타인이 대학에 입학한 첫 학기에 수강한 물리학실험입문에서 낙제점에 가까운 “1”이라는 점수를 얻은 것만 보더라도 대안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아인슈타인으로서는 난감한 입장에 처하게 된 셈이었다. 물론 어차피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은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취리히 대학에서 지도교수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취리히 대학은 당시 스위스의 주요 대학들과 달리 물리학 교수가 실험물리학자 알프레트 클라이너, 단 한 명이었다. 클라이너도 베버와 마찬가지로 계측장치의 개발이 주요 연구주제였지만, 베버와 달리 물리학의 기초를 다루는 문제들에도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1901년 11월에 아인슈타인은 클라이너에게 학위논문 초고를 들고 갔다. 11월 28일에 밀레바 마리치에게 보낸 편지에 “클라이너 교수가 감히 내 논문에 퇴짜를 놓을 수 없을 거야”라고 쓴 것으로 보아 논문의 완성도에 상당히 자신을 가지고 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너는 논문의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실험적 증거가 모호하기 때문에 논문을 승인할 수 없다고 응답했다. 이 논문의 초고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은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1901년 4월에 아인슈타인이 밀레바 마리치에게 보낸 편지로부터 그 주제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볼츠만의 기체이론의 한 주제로 기체분자들 사이의 힘을 계산하는 논문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클라이너는 당시 심각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볼츠만의 이론을 신뢰할 수 없다고 보고 있었다.
결국 1902년 2월 아인슈타인은 어쩔 수 없이 논문을 철회했다. 이 사실은 1902년 2월 1일자로 발행된 논문심사비 납부영수증에 근거를 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굳이 박사학위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회의에 빠졌다. 당시 아인슈타인의 심경이 어땠는지는 1903년 1월 22일 미셸 베소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난다. “나는 박사학위는 따지 않을 거야. 나한테 별로 도움이 안 될 테니까. 그리고 이 모든 놀음(langweilige Kömedie)이 지긋지긋해졌어.”라고 쓰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박사학위를 받기 위한 ‘지긋지긋한 놀음’은 안정된 직장을 얻게 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동생 마야 아인슈타인의 증언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1905년 6월에 학술지에 발표된 상대성이론 논문, 즉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의 초고를 처음 학위논문으로 제출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이 보기에 이 논문은 좀 “괴기스러웠기” 때문에 또 다시 퇴짜를 맞았다. 특히 실험물리학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취리히 대학에서 실험과는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순수한 이론물리학 논문을 학위논문으로 통과시켜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여기에서 실망하지 않고 새로운 논문을 구상했다. 그것은 유체역학의 방정식을 이용하여 특정 부피 안에 분자가 몇 개가 있는지 그리고 그 분자는 얼마나 큰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체역학을 써서 분자의 크기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인슈타인에게 떠오른 것은 1903년의 일이었다. 1903년 3월 17일에 아인슈타인이 베소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혹시 이온의 절대적인 크기를 계산해 본 적이 있니? 이온이 공 모양이고 충분히 커서 점성이 있는 유체에 대한 유체역학의 방정식들을 적용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말이야. 전하의 크기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비추어 볼 때, 이 계산은 아주 쉬운 거야. 내 자신이 그 계산을 해 보았지만, 참고할 거리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하군. 용액 속에 있는 중성 소금 분자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확산을 이용할 수도 있을 거야.”
이 아이디어는 결국 박사학위논문으로 연결되었다. 아인슈타인의 박사학위논문에는 따로 참고문헌이 없고 각주만 4개가 있다. 그 각주 중 3개는 모두 키르히호프의 『역학강의』(G. Kirchhoff, Vorlesung über Mechanik)를 인용하고 있고, 네 번째 각주는 이 학위논문이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실릴 예정이라는 정보를 담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이 박사학위논문에는 참고문헌이 단 하나이다.
아인슈타인은 실험교육만을 중시하던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에서 제대로 된 이론물리학을 배울 수 없었다. 고전물리학에는 탁월한 능력을 과시하던 강의의 귀재 베버 교수만 해도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을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생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수리물리학(mathematische Physik)이라고 부르는 강의들이 있었지만, 사실은 순수 수학에 더 가까웠고, 아인슈타인이 필요로 하던 이론물리학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대부분의 이론물리학을 당대의 권위 있는 물리학자들이 쓴 책을 직접 스스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키르히호프의 책이다. 아인슈타인이 인용하고 있는 부분은 이 책의 제26강으로서 유체역학(Hydrodynamik)을 다룬 부분이다.
아인슈타인의 박사학위논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불편하지만 약간의 계산을 해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은 논문에 있는 그대로의 내용이 아니라 가장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 계산에는 약간의 속임수가 있고, 정확하지는 않다. 그 대신 논문에 담긴 모든 복잡한 지식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계산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설탕물과 맹물의 점성계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아주 진한 설탕물을 스푼으로 젓는 것은 당연히 맹물을 젓는 것보다 힘이 더 들어간다. 유체의 점성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유체를 구성하는 분자들이 스푼의 운동을 가로막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점성’은 유체의 마찰력과 마찬가지다. 설탕물이 진한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이 농도이다. 따라서 진한 설탕물의 경우는 “농도가 크다”고 표현한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농도가 클수록 점성이 크리라는 사실이다. 맹물의 경우에도 분명히 점성이 있다. 단지 설탕물처럼 농도가 진한 경우보다 점성이 작을 뿐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점성을 농도의 함수로 나타내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아인슈타인이 학위논문에서 다룬 내용도 점성을 농도의 함수로 나타내는 엄청난 작업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약삭빠르게도 단지 설탕물의 점성계수와 맹물의 점성계수를 비교했을 뿐이다. 그 결과 아인슈타인이 얻은 방정식을 일상적인 용어로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frac{\textsf{설탕물의 점성계수}}{\textsf{맹물의 점성계수}} = 1+\textsf{설탕물의 농도} \]아마 설탕물의 농도가 0이라면 당연히 이 식의 왼편은 1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식의 오른편은 1로 시작한다. 한편 설탕물의 농도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택한 것은 농도를 부피의 비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즉
\[\textsf{설탕물의 농도} = \frac{\textsf{설탕분자의 전체 부피}}{\textsf{설탕물의 부피}}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설탕분자의 전체 부피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textsf{설탕분자의 전체 부피} = (\textsf{설탕분자의 수})\times(\textsf{설탕분자 하나의 부피}) \]만일 설탕분자가 공 모양이라고 가정하고, 그 반지름이 \(\small P\)라고 하면, 설탕분자 하나의 부피는 \(\small (4\pi/3) P^3\)이 된다.
\[\textsf{설탕물의 농도}=\frac{\textsf{설탕분자의 수}}{\textsf{설탕물의 부피}}\times\textsf{설탕분자 하나의 부피}\]이고,
\[\frac{\textsf{설탕분자의 수}}{\textsf{설탕물의 부피}}=(\textsf{1몰의 분자수})\times\frac{\textsf{설탕의 밀도}}{\textsf{설탕의 분자량}} \]이다. 이 식이 성립하는 것은 오른편의 둘째 인수가 다름 아니라 설탕의 몰 값과 같기 때문이다. 이 식들을 모두 모아 보자. 설탕의 밀도와 설탕의 분자량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값이고, 설탕물의 점성계수와 맹물의 점성계수는 정밀하게 측정하면 알 수 있는 값이다. 남은 것은 1몰의 분자 수와 설탕분자 하나의 반지름이다.
설탕물의 점성은 맹물의 점성보다 얼마나 더 클까? 아인슈타인이 인용하고 있는 란돌트와 뵈른슈타인(Landolt & Börnstein)의 물성표에 따르면 20℃에서 농도가 1%인 설탕물의 점성은 맹물보다 1.0245배 더 크다. 이 표는 특히 설탕 용액에 대해 아주 상세한 데이터를 표로 제시하고 있는데 1894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90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아인슈타인이 찾아본 것은 1894년판이다. 아인슈타인이 란돌트와 뵈른슈타인의 물성표에 익숙했던 이유는 취리히 폴리테히니쿰의 교육이 실험 위주였다는 점과 아인슈타인이 베른의 특허청에 취직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란돌트와 뵈른슈타인의 물성표에는 설탕과 설탕물에 대한 상세한 측정값이 있다. 1몰에 들어 있는 분자의 수, 즉 아보가드로의 수를 \(\small N\)이라 하고, 설탕분자가 반지름 \(\small P\)인 공 모양이라고 가정하면, 설탕물의 경우 다음 식을 얻을 수 있다.
\[ N\times P^3 = 200\]이제 이 두 값을 구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정식이 있어야 한다. 연립방정식의 이론에 따르면 미지수가 두 개인 경우는 두 개의 방정식이 있어야 미지수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선택한 또 다른 방정식은 확산계수에 대한 것이었다. 만일 설탕물의 농도가 그릇 안에서 완전히 균일하다면 설탕물은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릇 안에서 어떻게든 농도가 여기저기에서 다르다면, 농도가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으로 설탕분자가 옮겨가려 할 것이다. 이것이 확산이며, 확산의 정도를 나타내는 양이 확산계수이다.
그렇다면 설탕분자의 수나 크기가 어떻게 이 확산계수와 연관될까?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는 단순히 유체에 관한 스토크스의 법칙과 삼투압에 관한 반트호프의 법칙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스토크스는 공 모양의 물체가 유체 안에 있을 때 이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물체가 얻게 되는 속도 사이의 관계를 말해 주는 방정식을 유도했다. 이 방정식에는 물체의 반지름과 유체의 점성이 포함된다. 그러면 이 공 모양의 물체에 작용하는 힘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아인슈타인이 주목한 것은 삼투압이었다. 그릇 한 가운데에 반투막을 놓고 한 쪽에는 진한 설탕물을 넣고, 다른 쪽에는 맹물을 넣는다고 상상해 보자. 물 분자는 반투막을 통과하지만 설탕 분자는 통과하지 못한다. 이것을 가만히 놓아두면 맹물이 있는 쪽에서 설탕물이 있는 쪽으로 물이 흐를 것이다. 이렇게 물이 흐를 때 반투막에는 압력이 작용하는데, 이것이 삼투압이다. 결국 공 모양의 설탕분자에 힘이 작용하는 것은 바로 이 삼투압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릇 안의 위치에 따라 삼투압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삼투압의 차이 때문에 설탕분자에 힘이 작용한다.
반트호프는 삼투압에 대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이로부터 반트호프의 삼투압 법칙이라 알려진 방정식을 얻었다. 이에 따르면
\[ \textsf{삼투압} = \textsf{기체상수} \times \frac{\textsf{설탕물의 밀도}}{\textsf{설탕의 분자량}}\times \textsf{온도}\]이다. 삼투압이 그릇 안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설탕물의 농도가 위치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며, 이것은 곧 설탕물의 밀도가 위치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확산계수는
\[\textsf{밀도} \times \textsf{속도}= -\textsf{확산계수}\times(\textsf{농도의 위치 변화})\]또는
\[\textsf{밀도} \times \textsf{속도}= -\textsf{확산계수}\times(\textsf{밀도의 위치 변화})\]로 정의된다.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설탕분자가 많을수록 농도가 높겠지만 일정 부피 안에 있는 분자의 수는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설탕물의 확산계수는 설탕분자의 수에도 관련되고 동시에 스토크스의 법칙을 빌어 설탕분자의 크기에도 관련된다. 이 방정식들을 모두 모은 뒤, 설탕물의 확산계수라든가 설탕의 분자량이라든가 기체상수라든가 온도 등 알고 있는 값을 모두 대입하고 나면 다음 식을 얻을 수 있다.
\[ N \times P = 2.08 \times 10^{16}\]이렇게 해서 우리는 두 개의 미지수 \(\small N\)과 \(\small P\)에 대하여 두 개의 방정식을 얻었다. 하나는 설탕물의 점성계수와 맹물의 점성계수를 비교하여 얻은 식이고, 다른 하나는 설탕물의 확산계수 등을 써서 얻은 식이다. 앞의 것은 아인슈타인이 유도한 것이고, 뒤의 것은 스토크스의 법칙과 반트호프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이 두 방정식을 연립방정식으로 풀면, 두 개의 미지수를 구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값은 다음과 같다.
\begin{eqnarray}P &=& 9.9 \times 10^{-8}\, \rm{cm}\\ N&=&2.1 \times 10^{23}\end{eqnarray}즉 설탕분자의 크기는 대략 천만분의 1센티미터이고, 1몰에 들어 있는 설탕분자는 1023개 정도이다. 그런데 현명한 독자는 아보가드로의 수가 익숙한 값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아보가드로의 수는 대략 \(\small N = 6.022 \times 10^{23}\)이다. 아인슈타인이 구한 값은 차수는 같지만 앞에 있는 유효숫자가 다르다. 정밀도를 중요하게 여기던 당시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심각한 불일치이다.
이와 같은 불일치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가장 쉬운 대답은 데이터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이 사용한 란돌트-뵈른슈타인 물성표의 값은 1905년의 것이 아니라 1894년의 것이었다. 그러나 1905년에 나온 개정판의 값을 쓰더라도 상황이 그렇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새로 취리히 대학에 교수 자리를 얻은 아인슈타인은 1910년에 자신의 수업을 듣던 호프(Ludwig Hopf)를 시켜 1906년 논문에 잘못이 없는지 다시 확인하게 한다. 호프는 아인슈타인이 찾아내지 못한 중대한 오류를 찾아냈다. 방정식 하나에서 플러스 부호가 되어야 할 것이 마이너스 부호로 되어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이를 고치고 나니 방정식 전체의 값이 조금씩 모두 수정되었다. 앞에서 말한
\[\frac{\textsf{설탕물의 점성계수}}{\textsf{맹물의 점성계수}}= 1 + \textsf{설탕물의 농도}\]라는 식은
\[\frac{\textsf{설탕물의 점성계수}}{\textsf{맹물의 점성계수}}= 1 + 2.5 \times \textsf{설탕물의 농도}\]로 바뀌었다. 그 결과 얻은 아보가드로의 수는 \(\small N= 6.56 \times 10^{23}\)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호프와 함께 두 편의 논문을 썼으며, 1911년에 이 값을 1906년의 논문에 대한 ‘오자 교정’으로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이 이 논문의 초고를 완성한 것은 4월 30일이었지만, 7월 20일에야 비로소 제출되었는데, 7월 24일에 바로 심사를 통과했다.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회고하면서, 클라이너에게 논문 초고를 들고 갔더니 너무 짧다고 퇴짜를 놓았지만, 그 뒤 딱 한 문장을 더 써서 다시 들고 가니까 군소리 없이 받아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한 뒤 며칠 뒤에 볼츠만의 이론을 직접 사용하여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는 논문 “열의 분자운동론에 따른 정지 유체 속 입자의 운동”을 투고했지만, 실험 데이터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론적 작업에 그치고 말았다.
브라운 운동을 이용하여 분자의 크기와 아보가드로 수를 정하는 실험을 대단히 정교하게 수행한 사람은 프랑스의 장 페렝(Jean Baptiste Perrin 1870-1942)이었다. 페렝은 원자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증명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페렝은 결과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이 이론적으로 밝힌 것을 정교한 실험으로 입증한 셈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모른 채 연구를 시작하여 1908년에 처음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페렝은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파리 대학에서 1897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음극선 및 원자물리학과 관련된 실험연구에서 매우 앞서 있던 실험물리학자였다. 1913년에 발간된 유명한 종설 논문 “원자”에는 1908년에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브라운 운동 이론을 다루고 있지만, 아인슈타인의 박사학위논문과 거기에서 유도된 아보가드로 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