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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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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서른 즈음에: 물첨 30주년

마지막 선물

한국물리학회 SF 어워드 가작

작성자 : 이하진 ㅣ 등록일 : 2022-02-21 ㅣ 조회수 : 3,453 ㅣ DOI : 10.3938/PhiT.31.007

저자약력

이하진 작가는 경북대학교 물리학과 학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제1회 포스텍 SF 어워드 단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단편소설 <마지막 선물>이 “한국물리학회 SF 어워드” 가작에 선정되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시간

[양 박사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백영 박사입니다.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뭐, 어차피 답장은 안 올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당신께서는 그때부터 줄곧 그러셨으니까요.

그래도 일단 편하게 적어볼게요. 어차피 귀찮게 격식 차릴 사이도 아니고, 이 메일도 확인 안 하실 거잖아요, 그렇죠?

어젯밤에는 뜬금없이 밤하늘이 빛나면서 대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군요. 그것도 잠시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선 질량체가 지면에 강하게 충돌하는 소리가 났죠.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도 났고요. 1층으로 내려가니 뒷마당과 맞닿은 창문이 깨진 채 바람이 휭 불고 있더라고요.

제가 가평 산다고 말씀드렸던가요? (아마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 소란이 얼마나 컸던지 전국 뉴스에서 가평군 운석 추락을 언급하더군요. 네, 창문 바깥에서 열기를 뿜어내는 듯한 검붉은 물체는 운석이었어요. 우주에서 온 물질이었죠.

운석은 제 사유지에 떨어졌어요. 거창하게 말했지만 저희 집 뒷마당에 떨어졌다는 소리죠. 얼마간은 연구원이니 하는 곳에서 와서 한참을 두들기고 캐고 하더니 결국엔 정체 모를 덩어리만 덩그러니 남더라고요. 사유지에 떨어졌으면 이것도 사유 재산이라고. 그래봐야 제가 운석에 대해 뭘 알겠어요. 내다 팔면 값이라도 천문학적이겠지만 일단 귀찮았어요. 제 성격 아시잖아요. 욕심 없는 거.

이거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다 싶어 뒷마당에 방치해두고 있었어요. 짧은 기간이었으니 풍화되지도 않았고, 몇 달을 그대로 있었죠. 굳이 변화를 찾자면 빗물에 흙먼지와 그을음이 씻겨 내려갔다는 점 정도겠네요. 그 외엔 정말로,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움직이지도 않았고 치울 생각도 없었어요. 보기보다 무거웠거든요. 고작 그거 하나 구석으로 치우겠다고 중장비 부르긴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이고. 아무튼 그래서 그냥 그대로 냅뒀죠.

그런데 어제 퇴근하면서 보니까 이게… 정말 제가 말하는데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네요. 그 돌덩이가 쩍, 반으로 갈라져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일인가,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어 잠깐은 무서웠죠. 근데 도둑이 겉으로 봐선 돌멩이랑 다를 바 없는 운석을 굳이 반으로 쪼갤 이유가 있었을까요? 덜덜 떨면서 경찰까지 불러 봤지만 집안엔 침입 흔적도 없었어요.

정말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명백히 스스로 쪼개진 거였어요. 퍽 매끄러운 절단면이 이를 증명했죠. 인위적이었어요. 지극히. 사람이 쪼갰다는 뜻이 아니라, 의도된 단면 같았어요. 외부 충격에 의해 깨진다면 그렇게 깔끔히 잘릴 수가 없었을 거예요. 결을 따라 잘린 게 아니라, 결에 대해 수직으로 잘린 듯한 단면이 보였거든요. 네, 자연적으로 나올 수 없는 단면이었어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더 기절초풍하실걸요.

[안녕하세요, 백영입니다.]

죄송합니다. 어제 갑자기 업무 메일이 오는 바람에 임시 저장을 누른다는 걸 발송을 눌렀나봐요. 오늘에야 알았네요.

그래도 여전히 박사님께선 확인하지 않으셨네요. 답장도 없고. 박사님의 무응답이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어요. 새삼스럽네요.

아무튼, 오늘도 지난 이야기 이어 말씀드리려 하는데요.

혹시 아보카도 잘라보신 적 있으세요? 반으로 자르면 씨앗만 한 면에 박혀 볼록 튀어나와 있잖아요.

그래서 그 운석… 돌덩이가 스스로 쪼개졌다고 말씀드렸죠. 그 검은 단면의 가운데에는 조그만 회색질의 정육면체 절반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어요. 그 반대편엔 정육면체가 있었던 반쪽이 움푹 파여있었고요. 마치 아보카도 단면처럼요.

처음엔 결정인가 싶었어요. 근데 위치가 너무 정확한 중심이었죠. 그리고 결정이라면 주변에도 소결정이 자라나 있어야 했는데, 없었어요.

완벽히 인공적으로 중심에 박아넣은 모양새였죠. 누군가가, 어떻게든요.

전에 조사 나왔던 연구원에 다시 연락해야 하나 싶었어요. 가이거 계수기를 가져다 대도 방사선 반응은 없었어요. 나뭇가지로 건드려봐도 멀쩡했죠. 열화상 카메라를 구해 온도를 재봐도 상온과 같았어요. 어떤 물질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응이 없으니 위험도 없으리라 생각했죠.

보급형 엑스선 투영기를 통해 내부를 봐도 별거 없어 보였거든요. 뭔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듯한 구조가 보이긴 했지만… 내부도 외피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빛의 투과도가 같았거든요. 외피와 같은 하얀빛. 그러니까, 투영기로 봤을 때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요?

그 정육면체는 지금 제 책상 위에 있어요.

걱정 마세요. 폭발 장치의 구조는 보이지 않으니까. 아예 전자가 흐를만한 구조 자체가 관측되지 않아요. 이 정육면체 자체가 전도성 물질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회로 구조가 보이진 않아서 다행이네요. 아, 혹시 제가 모르는 회로 구조를 그리고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기를 바라야겠는걸요.

오늘은 이만 줄일게요. 아직 해가 밝게 떠 있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백영 드림.

[안녕하세요, 양 박사님.]

그 운석, 아니 정육면체 때문에 메일을 보내는 것도 3번째네요. 여전히 제 메일은 확인하지 않으시고요. 어쩔 수 없죠.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알아요. 제가 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운석이잖아요. 외계에서 왔을지도 몰라요. 어쩔 수 없이 양 박사님 생각이 났어요.

일단 그 정육면체에 이름을 붙여봤어요. 상자.

별로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간단하니 좋잖아요?

상자의 한 변은 10 cm 안팎이에요. 충분히 단단한 회색 금속의 외피로 둘러싸여 있고, 투영기에 뜬 광투과도로 미루어보아 내부 역시 외피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마주 보는 두 면의 중심에 작은 구멍이 하나씩 있어요. 같은 직경으로요. 깊이는 모르겠어요. 구멍이 너무 작아서 볼 수가 없거든요. 하지만 투영기로 어림잡은 외피의 두께로 미루어보아 많이 깊어 보이진 않았어요. 내부와 연결된 것 같았거든요.

송곳이 들어갈 것 같진 않은데, 샤프심은 들어가는 정도의 크기예요. 근데 이 구멍의 용도를 당최 모르겠네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구멍은 사소한 거고요.

상자의 외피가 충분히 두꺼워서 샘플을 취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간이 구조 분석기에 넣었죠. 단일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과가 먼저 떴어요. 그리고 원소 분석 결과가 떴죠. 질량수까지 파악할 수는 없는 간이 모델이라 원자번호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하여튼 그게 뭐였을 것 같아요?

원자번호 91번. 프로트악티늄이었어요.

제가 어쨌을 것 같아요? 당장 자리에서 벗어나 집 바깥으로 뛰쳐나갔죠. 그런데 정신없이 피폭을 걱정하고 있자니 이상하더라고요. 가이거 계수기는 분명 책상 옆에 바로 놓여 있었어요. 프로트악티늄은 어떤 동위원소도 안정하지 않잖아요. 그게 어떤 동위원소든 간에, 일단 프로트악티늄이라면 방사선을 내뿜어서 계수기가 반응해야 정상이라고요. 그런데도 계수기는 조용했어요.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혹시 고장 난 건가 싶어 차폐해둔 ‘진짜 방사성 동위원소’인 우라늄-235 샘플에 가져다 댔을 땐 또 요란하게도 울리더군요.

양 박사님, 정말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그 상자는 붕괴하지 않는 프로트악티늄으로 만들어져 있었어요.

차라리 새로운 안정 동위원소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게 가능한가요? 양성자 수가 이만큼 큰 원소들은 안정한 핵을 가질 수 없다고요.

심지어 프로트악티늄은 자연계에서 이렇게 순수하게 다량으로 발견되지 않는다고요.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모든 상황이 의문스럽지만 일단 더 바라본 뒤 다시 연락드릴게요.

몸조심하세요.

백영 드림.

[안녕하세요, 양 박사님.]

제대로 된 구조 분석기를 구해서 원소의 질량수까지 알아내 봤어요. 235짜리로 100%였어요. 시료 기준으로요. 질량수가 231보다 큰 프로트악티늄은 베타 마이너스 붕괴를 통해 우라늄-235로 붕괴해요. 핵연료로 쓰는 그 우라늄이요. 그런데도 가이거 계수기는 조용했어요. 점점 더 현실을 믿을 수 없더군요.

혹시 몰라 새로운 가이거 계수기를 구해봤는데요, 이제 제 책상에는 한 쌍의 조용한 계수기가 있을 뿐이네요. 우주에서 온 프로트악티늄 상자하고요.

분석기가 잘못된 건 아닌가 몇 번이고 의심했어요. 연필심을 갈아다 넣고 탄소와 약간의 불순물이라는 결과를 7번쯤 보았을 때 인정했어요. 분석기는 잘못이 없었어요. 제가 결과를 잘못 읽은 것도 아니고요. 잘못된 건 저 상자였죠. 세상에, 붕괴하지 않는 방사성 핵종으로 이루어진 상자라니. 그런 물성이 존재할 수 있는 거라니.

이 이상 물성을 의심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아무튼 저게 프로트악티늄이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안정하다면 당장 위험할 건 없는 거겠죠. 아무리 뒤숭숭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저는 일단 계수기와 분석기를 책상에서 치워냈어요. 이 이상 필요는 없겠죠.

그렇다면 저 수수께끼의 구멍을 어떻게 들여다 봐야겠어요. 다행인 건 양 박사님이 없는 동안 탐사의 영역이 보다 넓어졌다는 거예요. 거시적인 스케일이 아니라, 미시적인 스케일로 말이에요.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거대한 방향으로 향하는 건 아니죠. 중시계 스케일의 미세 탐사 로봇, 들어봤어요?

(뭐, 샤프심 직경보다 크다면 충분히 거시적인 스케일이지만 말이에요.)

제 직감이 속삭였어요. 투영기로 봤을 때 반짝이던 선들의 집합이 이상하다고. 투영기의 최소 해상도는 10마이크로미터 스케일이거든요. 그것보다 작아서 가늘게 반짝이는 구조라고요. 이건 충분히 거시적이면서, 미시적이에요.

네, 대충 어림잡아 중시계죠.

중시계는 아시죠? 아, 이 중시 로봇 만들어지기 전까진 생소한 분야였으니 모르시려나. 요약하면 양자역학이 지배적인 미시계와 고전역학이 지배적인 거시계의 중간에 위치한 스케일이에요. 영어로는 Micro와 Macro 사이의 Meso. Mesoscopic. 중시계는 이쯤하면 됐고, 제가 탐사에 이용하려는 게 바로 중시 미세 탐사 로봇이에요. 이건 이름에서부터 감 오시죠?

나노로봇이야 익숙하시겠죠. 이건 몇십 년도 더 된 분야이니. 하지만 그동안의 나노로봇을 통틀어 미세 로봇이라 불렸던 것들은 지금까지 단순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서 그쳤어요. 그저 움직이는 게 전부였죠. 아니면 ‘로봇’이라 부르기 무안할 정도로 단순한 구조거나요.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정말 ‘로봇’입니다. 카메라와 센서가 달려있고, 원격 조종이 가능하며 그에 따른 간단한 동작을 수행 가능한 전자 및 기계공학의 산물이요.

중시 미세 탐사 로봇은 21세기 중반에 중시계 영역으로 들어선 전자 소자의 수리를 위해 고안된 로봇이에요. 정확한 크기는 기억 안 나는데 아마 100나노미터, 그러니까 0.1마이크로미터 정도였나? 고작 원자보다 1000배쯤 클 거예요. 엔지니어가 로봇을 통해 소자를 탐사하고, 조종해서 원자 몇 개 폭에 불과한 회로를 수리하는 등의 고정밀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로봇이죠.

핵심은 중시계 환경 속에서도 이 녀석만큼은 고전역학적 존재 확률을 유지한다는 거예요. 뭐, 양자 어쩌고 통신 덕분이랬나. 자세히는 모르겠네요. 저는 양 박사님의 연구실 동기라 그쪽 분야엔 무지하니까요. 어차피 우리가 모든 기술을 알고 쓰는 건 아니잖아요.

와, 그러고보니 양 박사님도 양자역학도 같은 양씨인데 접점이 없다는 건 좀 놀랍네요.

죄송해요. 꼭 쳐보고 싶었던 농담이었어요.

아무튼, 재밌는 건 이게 ‘무선 조종’이라는 특징 하나 때문에 대중에까지 그럭저럭 보급이 됐다는 거거든요. 전자고 기계고 전혀 상관없는 저조차도 살 수 있으니까요. 특히 교육용으로 인기가 많아요. 이런 게 있는데 현미경이 더 이상 어떻게 새롭겠어요? 게다가 소모품이긴 해도 반영구거든요. 값은 좀 나가지만 말이에요.

뭐, 그걸로 상자의 구멍에 들어가보려 해요. 그 내부를 탐사해보려고요. 그 상자에 남은 미지라곤 그것밖에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외계 문명’ 같은 걸 관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편린이거나.

중시적인 외계 문명이라니, 재밌지 않아요?

새로운 걸 발견하면 연락드릴게요.

백영 드림.

[양 박사님, 이거 외계에서 온 것 같아요.]

대뜸 무슨 헛소리냐고 생각하시겠죠. 분명 내부 구조를 탐사하러 간다고 해놓곤 무슨 근거로 이런 소릴 지껄이는 건지 난감하시겠죠.

아뇨, 이건 확실해요. 대기권과 확실히 마찰하며 냈던 그 소리와, 저희 집 유리창을 깨부순 충격파로 미루어 볼 때 이건 우주에서 온 게 확실해요. 그런데 외계는 무슨 소리냐면요.

죄송해요. 너무 흥분해서 글이 자꾸 흩어지네요. 다시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중시 미세 탐사 로봇… 앞으론 그냥 로봇이라 부를게요. 아무튼 로봇을 배송받자마자 그걸 들고 상자 앞에 앉았어요.

로봇은 화학 비활성 액체가 담긴 마이크로튜브 속에 담겨있더군요. 너무 작으니까 잡아서 옮길 순 없으니, 그 액체를 타겟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거든요. 조작부를 이용해 신호를 내보내면 액체에 들어있는 휘발성 나노입자가 로봇의 신호에 공명해서 색이 바뀌어요. 그걸로 로봇이 제대로 주입됐는지, 어디에 있는지, 튜브 속 물방울에 남아있진 않은지 확인할 수 있는 거죠.

저는 집에 있는 가장 뾰족한 피펫 팁을 피펫에 꽂고, 마이크로튜브 안의 액체를 상자의 구멍으로 주입했어요. 아, 반응성은 걱정하지 마세요. 화학 비활성 액체기도 하고 외피에 미리 테스트도 해봤거든요. 신호를 보내니 마이크로튜브와 피펫 팁에 남은 물방울에는 색 변화가 없었어요. 로봇이 상자 안에 성공적으로 주입된 거죠.

조작부의 디스플레이를 큰 모니터에 연결했어요. 그리고 전원을 켜니까요. 우와.

저는 중시계가 그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어요. 흑백 화면인데도 충분히 아름다웠어요.

미지의 세계는 원래 경이로운 법이라지만 이건 경이라는 단어가 모자랄 지경이더군요. 조작을 익히는 데 조금 애먹었어요. 분명 조작했는데 아무 반응도 없고, 로봇이 뒤집혀있는 걸 알아채고 다시 되돌리기까지 40분이나 걸렸어요. 하긴 저는 운전 면허 따는 데만도 애먹었고, 워프드라이브 면허도 없잖아요?

거시계와 미시계가 공존하는 중시계에서는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어요. 특히 이 로봇을 사용할 때는 더욱요.

특수한 통신으로 인해 로봇의 작은 주변에는 물질의 존재 확률이 고정돼요. 그 덕에 중시 영역의 전자 소자를 수리할 수 있는 거고요.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지면이 생겨나는 느낌이었어요. 동시에 한 발자국 떼어낼 때마다 지면이 사라지는 것 같았죠. 그럼에도 분명히 지면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로봇이 딛을 수 있는 상자의 내면은 확실히 존재했어요….

으, 얘길 꺼낸 건 저지만 양자역학의 존재론적 논의는 이제 지겨우니까 더 하지 않도록 해요. 저도 그만할게요. 머리 아프니까요.

그런데 문득 생각난 건데요, 이런 걸 교육용으로 보고 자란 세대는 양자역학이 그만큼 익숙하겠죠? 이건 조금 부럽네요. 새로운 인지 체계를 습득한 채 자라는 거잖아요. 요즘 물리학과 오는 애들은 양자역학에서 고생 좀 덜하겠어요.

네, 그냥 부럽다는 얘기였어요.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바뀌니 후손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겠죠. 먼저 어른 된 자로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도 마땅해야 하고요. 후세대의 삶을 부러워해봤자 어쩌겠어요. 지금 내 처지가 바뀌진 않잖아요. 우리 때가 더 안 좋았다면, 나아져서 다행인 거죠. 자기 때만큼 힘들어 봐야 한다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사랑받지 못한 거예요. 그렇게라도 자기 고생을, 자기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거겠죠.

뭐, 잡소리는 이쯤하고. 다시 내부 이야기나 해볼게요.

보석은 시야각에 따라 빛을 굴절시키며 다른 광학적 모습을 보이잖아요. 내부가 딱 그런 모습이었어요. 빛이… 그러니까 제 탐사 로봇이 보여주는 화면은, 로봇이 낸 빛을 상자 내부가 반사시켜 보여주는 거잖아요?

내부에서는 빛들이 마구잡이로, 사방으로 산란하고 있었어요. 완전히 미시적인 세계였죠. 고정되어 확정된 것이라곤 제 로봇뿐이고, 내부의 모든 구조들이 중첩되어 존재하면서, 빛들이 번질 수 있는 모든 경로로 번져나가는 듯한 그런. 제 로봇이 저가형 모델이라 광자 하나의 경로를 추적할 수 없다는 게 한이었을 정도였다니까요.

한 마디로, 기묘했어요. 딱 봐도 22세기의 우리 과학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모습이었죠.

중첩의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 형태가 있었어요. 무언지 분간할 수는 없어도 의도하고자 하는 명확한 형태가 있어 보였어요. 그게 현 시점에서 너무나 기묘하고, 아득해 보였죠.

게다가 원자가 공중에 떠 있었어요. 로봇보다 1000배 작아서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공중에 선명히 떠 있는 그것들은 분명 원자였어요. 모든 것이 중첩된 그 공간 속에서 그 공중 원자들만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죠. 이해할 수 없었어요. 원자라면 더 강력히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더 놀라운 건, 그 공중 원자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해진 방향으로 무언가를 쏘는 게 보이더군요. 처음엔 빛이 굴절된 줄 알았어요. 그런데 더 가까이 다가가니까 조작부가 난데없이 전하 주의를 내보내더라고요.

그건 전자살이었어요. 광전 효과요. 공중에 떠 있는 금속 원자들만이 로봇의 빛에 광전 효과를 일으키면서 빛 알갱이에 부딪혀 나온 전자들을 한 경로로 내뿜고 있었어요. 중요하니까 다시 말할게요. 한 경로로, 그것도 전자살이 보일 정도로 집약된 채로.

…상자 안의 물리법칙은 정말이지 제멋대로였어요. 물리법칙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 마치 이런 모습이었을 거예요.

한 원자에서 시작한 전자살은 또 다른 공중 원자로 뻗어나갔어요. 마치 계산하여 의도한 듯 말이에요. 그렇게 전자살이 다시 전자살을 만들고, 무수한 직선의 연쇄가 상자 내부에서 무한히 이어졌어요. 끝을 모를 정도로요.

투영기에 보였던 반짝임은 거미줄처럼 엉킨 선의 구조가 너무 가늘어 점처럼 반짝여 보이는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그것들은 진짜 점이었어요. 공중에 떠있는 점 입자요. 그것도 모든 점이 서로를 향해 완벽히 계산된 듯한 경로로 전자살을 발사하는….

마치 별들의 궤적처럼 보이기도 하더군요.

마지막선물

상자 안의 우주.

그 말이 딱 어울리네요. 게다가 혼재된 확률로 혼란스러운 배경이 마치 우주의 심원감을 더하는 것 같았어요. 그 무한한 경이를 구현한 것 같았어요.

그게 이 상자의 목표였을까요? 작은 상자에 무한한 우주를 담는다?

맞다면, 적어도 그 목표는 성공적으로 달성한 거라고 확언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22세기의 지구에서는 이런 짓 못 해요.

이 외계 상자는 어쩌다 지구로 떨어진 걸까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백영 드림.

[오늘로 한 면에 대한 지도를 완성해냈어요.]

8할은 로봇의 스캐닝 시스템이 해냈죠. 제가 한 건 그저 공중 원자가 내뿜는 전자살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한 면을 돌아다니도록 조작하고 모인 데이터를 수합한 일밖에 없어요.

지도라고 해봤자 복잡한 것도 없어서 높이 데이터에 불과하지만요. 바닥을 계속 보니 100옹스트롬 정도의 정사각형 타일이 반복되더군요. 그것도 단차를 가지고 각자 높이가 다른 모습으로요. 그래서 타일들의 높이만 정리해 봤죠. 신기하게도 정수배로 정리가 되더라고요. 기이하지 않나요? 의도하지 않는 이상 나오기 힘든 모습이잖아요.

뭔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였어요. 높이 데이터를 단순하게 정수배의 상댓값으로 변환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규칙성을 검토해봤어요. 계속해서 임의의 순서 배열을 생성하고 적용해 보았죠.

그랬더니 가장 바깥쪽 한 타일로부터 안쪽으로 반시계 방향 소용돌이를 그리는 순서 배열에서 놀라운 값이 나왔어요.

그 배열은 플랑크 상수의 것과 같았죠.

네. 기본 상수요.

저는 그 결과를 보고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어요.

이게 정말 외계에서 만들어졌다면, 제작자들은 충분히 고도화된 문명과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어요. 플랑크 상수를 알고 있을 정도로 충분히요. 아니지, 충분한 정도가 아니에요.

그들은 우리를 넘어섰어요. 외우주에서 이곳까지 운석의 경로를 조정하여 보낼 수 있을 정도라면, 붕괴하지 않는 프로트악티늄이나 집약된 전자살 같은 이상한 물리 현상을 구현할 정도라면….

어쩌면 이게 외계 문명과의 첫 접촉일지도 몰라요. 양 박사님.

양 박사님이 고대하던 거잖아요.

제발 답장 좀 해봐요. 같이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쨌든, 내일은 다른 면을 탐사해보려고 해요. 이번엔 기본 전하량이라도 나올까요?

이 나이를 먹고도 새로운 게 있다니, 이 외계 상자는 저를 적잖이 설레게 하네요.

백영 드림.

[오늘은 별거 없네요.]

새로운 면을 탐사하면서 그 인위적인 원자 우주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어요.

이건 아무리 봐도 아름답네요.

그 어떤 조각품도 이 근본적인 숭고를 담은 아름다움을 초월할 수 없을 거예요. 확신해요.

별거 없다고 했지만, 분명 제가 뭘 봐도 그 수려함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고 덧없이 느꼈을 게 틀림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여겼을 거예요. 실제로 그 작은 우주 말고는 뭘 봤는지 기억도 안 나네요.

기껏해봐야 전자살? 전자살도 참 아름답죠. 마치 별들이 이어져 별자리를 이룬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이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경이예요.

한 줌 크기로 온 우주를 모사했어요. 여태껏 이런 물건은 없었다고요.

저는 상자를 탐사하는 순간마다 황홀감에 빠져요. 양 박사님도 봤다면 분명 좋아했을 텐데. 정말로 아름답다고요. 저희의 언어로 표현하는 게 실례라고 생각될 정도로요. 이건 결코 언어로 담아낼 수 없어요. 그 자체로 그저 존재하는 거예요.

…정말로 박사님도 좋아했을 텐데.

요즘 그날의 꿈을 꾸곤 해요.

아니다, 이 얘기는 안 할래요. 어차피 원망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잖아요.

하지만… 마음이 현실의 인과에 개입하지 못한다고 해서, 정말로 마음을 갖는 일이 무의미한 걸까요? 그렇다면 너무 잔인할 것 같아요. 되돌릴 수 없는 것에 한 줌 추모를 얹는 게 부질없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하릴없이 바스러지고 말 거예요.

앞에서 원망을 부정했던 건 그저 진실과 진심을 마주하기 두려워 잠시 변덕을 부렸을 뿐이에요. 사실 박사님에 대한 원망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어요. 감정은 희석될 뿐 사라지진 않으니까요.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리 인간은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심장으로 끌어안도록 만들어진 존재인걸요.

어쨌든 근래의 탐사에서는 별일 없이 양 박사님에 대한 감정만 재확인한 것 같네요.

탐사… 탐사라.

양 박사님,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제발 말해주시지 않을래요.

박사님의 그 탐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에요.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역시 더 말하기엔 제가 너무 지쳤어요.

사실 술을 좀 마셨거든요. 이러면 안 되는데.

미안해요. 글에 두서가 없네요. 들어가 봐야겠어요. 탐사는 계속해 볼 생각이에요.

또 소식 전할게요.

백영 드림.

[양 박사님께]

지난번 추태는 죄송했습니다. 적절하지 못했네요. 1년 만에 술을 마셨는데, 주량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요.

오늘도 마시긴 했지만요. 그런데 오늘 일은 꼭 마셔야만 했어요. 그러지 않고선 버티지 못할 것 같았어요.

걱정 마세요. 주량은 어제 속을 게워내면서 제대로 알아냈으니까. 적당히 마셨어요.

음…. 맨정신으론 도저히 마주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알맞게 취했어요. 괜찮을 거예요.

본론을 말씀드리기 두렵네요.

제가 오늘 발견한 걸 정말 말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사실 박사님을 의심하고 있어요. 아니, 확신해요.

하지만 어떻게… 불가능해요. 양 박사님이 떠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 와서?

[전송 버튼을 잘못 눌렀어요. 이어서 보냅니다.]

적당히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취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네요. 하지만 괜찮은 것 같아요. 이제 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지금 타자를 치는 것도 힘들어요. 그래도 이건 너무 이상해요.

저는 상자 한 면에서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원자들의 배열을 발견했어요. 지금까진 정사각형 타일만 반복될 뿐이었는데, 어떤 선과 면을 그리고 있었죠. 천천히 형태를 파악하다가 그 사이에서 글자를 발견하고, 문장을 읽어낸 순간…. 저는 무너지는 것만 같았어요.

“GOOD BYE,

TO BAEK.”

우주에서 온 운석 속에서 명백히 저를 가리키는 메시지를 받는다면,

그 발신자는 당신일 수밖에 없잖아요.

양서아 박사님.

하지만 당신은 죽었잖아요.

어떻게 상자 안에서 당신의 메시지가 발견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메일을 쓰고 있지만 이건 죽은 사람의 계정에 보내는 짓이란 걸 알고 있어요. 이건 박사님을, 아니, 존경하는 동료를 잊지 못한 제 미련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멋진 사람이었잖아요. 동경했다고요. 정말로 어떻게… 떠나시곤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어요?

[양 박사님.]

솔직히 말할게요. 그 메시지를 발견한 이후로 상자 내부 탐사는 그만뒀어요. 무서워서요. 두려워서요.

박사님이 떠난 지도 벌써 8년이 지났어요.

이것이 정말 당신의 작품일까요? 정말 원자로 써놓은 ‘굿 바이’ 한 마디가 당신의 마지막 전부일까요? 그렇다면 그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는 대체 어떡해야 할까요. 당신을 동경하던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요. 떠나는 순간조차 그랬죠.

아니, 취소할게요. 그날은 멋지지 않았어요.

그날을 선명히 기억해요.

외우주에서 잡혀온 신호 탐사를 위해 박사님이 워프드라이브를 타고 이곳을 떠나는 그날을.

평생을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에 헌신하신 박사님이라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생각하긴 했지만요, 그렇게 실행력 넘치는 분이신 줄은 그때 처음 알았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없이 외우주 출장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예요. 마침 웜홀이 적당한 곳에 열려있는 기간이긴 했지만…. 조금만 더 주변을 챙기실 수는 없었던 거예요?

우주국에서는 계속해서 나아가는 박사님께 경고를 보냈어요. 설득했죠.

더 가다가는 구조할 수 없는 영역까지 가게 된다고,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선회하면 돌아올 수 있다고.

우주국의 보고에 따르면 당신은…

그럼에도 나아갔죠.

복귀 연료 한계를 넘어 우리 은하 바깥으로 계속해서 가속하셨죠.

우주국의 레이더는 박사님이 넘은 그 경계에서 관측 한계에 달했다고 해요.

그 너머의 풍경을 아는 건 박사님뿐이라는 거죠.

그때 양 박사님의 눈앞에 비친 풍경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대체 무엇이 박사님을 사로잡았기에 지구를 떠나신 건가요?

[안녕하세요, 양 박사님.]

마지막 메일로부터 두어 달 정도 지났네요.

이젠 잘 지냈냐고 묻기도 두려워요.

여름이 되니 숲이 울창해요. 꽤 외진 곳이거든요.

양 박사님은 항상 저보고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 하셨죠. 숲을 보니 떠오르네요. 예전엔 들을 때마다 무시하곤 했는데, 이젠 이해하겠네요. 당신이 숲을 보는 사람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어요.

하룻밤은 찌꺼기같이 남은 미련과 원망을 긁어모아 다시 상자 안의 우주를 바라보곤 했어요.

똑같아 보였어요. 양 박사님이 떠나던 그 하늘과. 닿을지 모를 빛을 멀리멀리 보내는 그 외로움이.

한숨을 쉬면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별다른 패턴 없는 하얀 천장을 바라봤어요. 한밤중이어서 책상의 스탠드 빛이 조금 닿는 것 말곤 보이는 것도 없었죠. 애초에 아무 무늬도 없는 천장이었지만요. 그런데 별안간 희미한 선이 보였어요. 원래부터 있었던 선은 아니었어요. 낮에도 볼 수 없었던 선이니까요. 의자를 기울이니 시차 때문에 천장에 묻어나지 않고 슬쩍 움직이는 게 보였어요. 공중에 떠 있다는 뜻이었죠.

다시 책상을 바라봤어요. 상자의 구멍 난 면이 천장을 향해 있었죠. 로봇이 안에서 빛을 발하는 채로요.

저는 홀린 듯이 정체불명의 선에 시선을 집중한 채 상자를 살짝 기울여봤어요. 그러니까 공중에 떠 있는 선 역시 같은 각도로 기울여지더군요.

그때 제 머릿속에는 작은 환희가 피어올랐어요.

왜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걸까요. 빛이 그렇게 어지러이 산란하고, 전자살이 내부에 그렇게 가득할 수 있다면, 그것들이 구멍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답은 상자 안에 있지 않았어요. 바깥에 있었죠. 상자 안을 샅샅이 파헤칠 게 아니라, 그 전체를 봐야 했어요.

저는 서둘러 창고에서 가장 강한 광도의 레이저를 꺼내왔어요. 상자를 가만히 고정시키고, 레이저의 빛을 한쪽 구멍에서 다른 한쪽 구멍을 향해 관통하도록 조사했죠.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는, 박사님이 더 잘 아시겠죠.

지구 모양 홀로그램이 나오더군요.

참, 어처구니가 없었죠…. 당신이라면 이걸 만들면서 이렇게 말했겠죠?

우주에서 본 지구는 아름다웠다고.

원자의 존재 분포와 에너지 준위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그것도 모자라 입자살과 빛으로 의도적인 형태의 홀로그램을 그린다?

이건 우리 문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22세기의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당신은 만났던 거겠죠. 그 경계 너머, 우리 은하의 끝에서.

분명 조금만 더 도달하면 됐을 테고, 그러려면 돌아올 연료를 모두 써야만 했겠죠. 당신은 재회보다 조우를 선택할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걸 만든 거죠? 그들과 함께… 홀로 만들었다곤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이건 명백히 외계의 기술이에요.

그러니까 이 상자, 마지막 선물인 거죠? 그렇죠? 그렇게 해석해도 되는 거겠죠?

상자는 아직도 제 책상 위에 있어요.

로봇은 다시 마이크로튜브에 봉해져 있고요.

미안해요. 사실이라면 오늘은 더 쓸 기분이 아니네요.

[돌아올 것도 아니면서 하필 운석에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을 작별 인사와 함께 보낸다? 그것도 제 뒷마당에 넌지시 던져놓을 정도로 태평하게?]

아마 당신의 감상을 담은 거라면 외우주에서 바라본 모습을 담았겠지만, 그래선 지구가 그냥 점으로 찍혀 나올 뿐이잖아요. 아니, 애초에 보이긴 할까요? 이건 그냥 지구의 모습이에요. 마치 기념으로 찍어서 남에게 선물할만한 모습이라고요.

양 박사님은 자기 감상을 담았다고 제가 생각하길 바라셨겠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작별 선물이잖아요.

진짜 욕하고 싶어요.

왜 당신이 이런 짓을 했을지 생각해봤어요.

하지만 모든 의문에 적당한 답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것도 그런 류의 의문 같더군요. 늘 제멋대로였던 사람이었으니.

그날 당신이 바라봤던 풍경은 분명 당신이 줄곧 바라왔던 풍경이었겠죠. 목표에 닿은 거잖아요. 그리고 어쩌면… 살아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건 너무 낙관일까요? 하지만 줄곧 이런 가능성을 바라왔다고요.

어쨌든, 선물을 받았다면 저도 답장을 해야겠죠.

그러니 저도 빛을 보낼게요. 살아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곳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광속조차 아득한 거리겠지만. 그래도…. 돌아오라고 전할 거예요.

아무리 희미한 빛이라도 언젠가는 닿을 수 있겠죠.

우리 은하의 질량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이 작은 상자도, 지금 이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럼 답장 기다릴게요.

백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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