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질량과 무게
작성자 : 김재영 ㅣ 등록일 : 2022-08-17 ㅣ 조회수 : 3,406
김재영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물리학 기초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물리철학 및 물리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공저로 『정보혁명』, 『양자, 정보, 생명』,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이 있고, 공역으로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에너지, 힘, 물질』 등이 있다. (zyghim@ksa.kaist.ac.kr)
물리학을 배울 때 맨 처음에 나오지만 이해하기가 어려운 개념 중 하나가 질량이다. 중등 과학교육 과정에서는 ‘무게’와 ‘질량’을 구별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가령 중력이 지구의 1/6인 달에서는 무게가 지구에서보다 1/6이 되는 반면, 질량은 똑같다고 말한다. 이 말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 1/6이라는 숫자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직접 무게를 측정한 결과일까, 아니면 달의 질량과 반지름으로부터 유도된 값일까? 달에서 질량은 어떻게 잴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물리학의 배경지식과 기본적인 측정값은 무엇일까?
물론 지금의 물리학에서 본다면, 중량의 단위는 힘의 단위와 같고, 질량의 단위는 힘의 단위를 가속도의 단위로 나눈 것과 같으니까, 중량과 질량을 구별하는 것이 물리학 안에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막상 질량을 모호함 없이 잘 정의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질량과 무게의 차이를 선명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물리학, 더 넓게 말해 자연철학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질량과 무게를 구별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글에서는 그 구별에 대해 역사적인 흐름과 개념적인 문제를 살피면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질량(質量)’이란 단어에서 한자만을 따지면 그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질’과 ‘양’은 대립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질량’이라는 용어 자체는 낯설다. 전통적으로 보면 가령 조선시대 문헌들이나 기타의 글에서 重量이나 이와 연결된 표현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質과 量의 두 글자를 조합한 표현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이 두 글자를 붙여 놓은 것이 18세기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오랜 시기에 걸쳐 네덜란드와 교역하면서 유럽의 언어, 특히 플랑드르어로 되어 있는 자연철학의 용어들을 동아시아의 공통어라 할 수 있었던 한자어로 옮기는 고된 작업이 이루어졌다. 질량(質量)이란 말을 만든 사람은 18세기 일본의 란가쿠샤(蘭学者) 미우라 바이엔(三浦梅園, 1723‒1789)이다. 미우라는 네덜란드어로 hoeveelheid(영어 quantity)를 量(りょ, 료)으로, substantie(영어 substance)를 質(しつ, 시츠)로 옮겼다. 이런 한자어로 번역을 한 것은 미우라와 같은 란가쿠샤가 대체로 성리학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미우라는 이 한자들을 두 개씩 결합하여 다른 번역용어를 고안했다. 가령 materie(영어 matter)는 두 개의 한자를 사용하여 物質(ぶっしつ, 붓시츠)로, massa(영어 mass)는 質量(しつりょ, 시츠료)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요컨대 ‘질량(質量)’이라는 용어는 ‘물질(物質)의 양(量)’을 줄인 말이라 할 수 있다.
‘무게’와 ‘질량’은 영어의 weight와 mass의 번역어이다. 영어 단어 mass는 ‘빵 반죽’을 의미하는 라틴어 massa에서 왔고, 이 말은 다시 그리스어 ‘마자’(μάζα)와 히브리어 ‘마세’(מאַסע)에서 왔다. 소위 ‘도량형의 역사’를 생각하면 고대 중국과 메소포타미아와 헬레니즘 시기에 발명된 놀라운 기계야말로 ‘질량’ 개념의 효시이다. 그 기계는 바로 저울과 천칭이다[그림 1]. 전 세계에서 이 무게를 측량하는 방법과 장치가 놀랍도록 유사하다. 결국 저울과 천칭은 ‘물질의 양’을 ‘무게’라는 숫자로 바꾸어 비교하는 장치로서, 경제와 교역과 일상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저울과 천칭의 작동방식을 더 일반화하고 수학(주로 정수와 유리수 이론)을 써서 소위 “천칭의 원리”라 부르는 것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기도 했다.
‘무게’는 어원을 따져보면 “무거움의 정도”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일상 단어이다. 한자어로 하면 ‘중량(重量)’이다. 즉 중량은 무거움을 만들어내는 원천의 양에 해당한다. 따라서 달에서 재는 무게가 지구에서 재는 무게와 다르다는 관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만유인력이라고도 부르는 보편중력의 이론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말을 곱씹어보면 결국 ‘중량’과 ‘중력질량’은 같은 개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중량(무게)과 질량을 구별해야 한다는 중등 과학교육의 강조점은 영어 표현 weight와 mass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영어권에서 이 두 단어는 실질적으로 동의어이다. 지금도 일상어에서 구별할 필요가 거의 없는 weight와 mass를 구별하게 된 계기는 영국 왕립협회의 전천후 실험가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3) 덕분이다. 그는 1678년에 출간된 <용수철론, Lectures de potentia restitutiva, or, Of spring explaining the power of springing bodies>에서 용수철과 탄성의 원리를 상세하게 해명하고 이를 이용하여 무게를 잴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냈다[그림 2]. 어떤 사람은 저울(scales)과 천칭(balance)을 구별하여 저울은 무게를 측정하고 천칭은 질량을 측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초의 용수철 저울이 1770년대에야 처음 사용되기 전의 모든 저울은 천칭과 같은 말이었고, 둘 다 물질의 양을 재는 데 사용되었다. 또 천칭도 중력이 없는 곳에서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질량은 근본적으로 무게에 비례한다.
후크와 동시대에 살았던 아이작 뉴턴은 대표적인 저작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즉 ‘프린키피아’에서 ‘물질의 양(Quantitas Materiae)’을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무게나 중량과 다르다. ‘물질의 양’이란 개념을 자연철학에서 처음 정교하게 논의한 사람은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였다. 케플러는 1611년에 주위 사람들에게 읽힌 <꿈(Somnium)>이란 제목의 글에서 대포알을 타고 달에 간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그림 3]. 이것이 책으로 간행된 것은 케플러가 세상을 떠난 뒤인 1634년이었다. 칼 세이건은 이 책을 최초의 과학소설(SF)이라 부르기도 했다. 바로 이 책에 물질들이 서로 끌어당긴다는 관념이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고, 그 끌어당기는 정도가 물질의 양(quantitas materiae)에 비례한다는 주장이 들어 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중력질량(gravitational mass)’의 개념을 처음 제시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1609년에 출간된 <새로운 천문학 또는 천상의 물리학(Astronomia Nova seu physica coelestis)>에도 이와 관련된 생각이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중력질량의 개념을 상세하게 풀어 놓은 곳은 <꿈>이었다. 케플러는 1600년에 윌리엄 길버트가 낸 <자석론(De Magnete, Magneticisque Corporibus, et de Magno Magnete Tellure)>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길버트의 저서를 만나기 전부터 자석과 자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의 중심을 지구가 아니라 태양으로 삼으면서 천문학상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도 그 이후의 튀코 브라헤도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 특히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계승된 신성한 천구를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 아니었다.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궤적이 타원임을 밝히고 난 뒤 가장 심각한 상황을 만났다. 다름 아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온 신성한 천구를 근본적으로 폐기해야 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달의 천구 위의 운동은 설명할 필요성이 없는 자연스러운 운동이었지만, 행성의 운동궤적이 타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행성과 태양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 무엇인지 새롭게 밝혀야 했다. 케플러는 바로 자석에 주목했다. 케플러는 행성과 태양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 자석에서 비롯하는 힘과 같거나 비슷하다고 보았다. 자석을 여러 개 모으면 자기력이 세지는 것처럼 행성과 태양 사이에 작용하는 힘도 물질의 양이 많아질수록 더 세진다고 믿었다.
케플러의 논의에서 물질의 양은 밀도(덴시타테 densitate)와 부피(몰레스 moles)가 함께 만드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뉴턴은 케플러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수용했다. 1687년에 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서술체계는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원본>과 유사하게 정의를 먼저 제시하고 공리를 열거한 뒤 이로부터 여러 정리와 명제를 제시하고 이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었다. 앞부분에 있는 여덟 개의 정의 중 맨 앞에 나오는 정의가 바로 ‘물질의 양’에 대한 것이다[그림 4]. 정의 1과 정의 2를 비교해서 보면 ‘물질의 양’과 ‘운동의 양’이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4.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정의들.
[정의 1] “물질의 양은 밀도와 부피(크기)가 함께 만드는 것으로부터 잴 수 있다.(Definito I. Quantitas Materiae est mensura ejusdem orta ex illius Densitate et Magnitudine conjuntum.)”
[정의 2] “운동의 양은 빠르기와 물질의 양이 함께 만드는 것으로부터 잴 수 있다.(Definito II. Quantitas Motus est mensura ejusdem orta ex Velocitate et Quantitate Materiae conjuntum.)”
여기에서 ‘물질의 양’은 ‘밀도’와 ‘부피’가 함께 만든다고 정의되어 있다. 이를 보면 질량을 밀도와 부피의 곱으로 정의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인 내용은 조금 더 들어간다. ‘크기’라고도 볼 수 있는 ‘마그니투디네(magnitudine)’는 ‘덩어리’라는 의미의 ‘몰레스(moles)’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영어에서 bulk로 흔히 번역된다. 그래서 현대어로는 ‘부피’에 대응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것은 소금이든 금이든 곡물이든 동전이든 어떤 것의 무게에 더 가깝다. ‘덴시타테(densitate)’가 함께 들어가서 비슷한 덩어리라도 더 빽빽하게 뭉쳐져 있는 것은 ‘물질의 양’이 더 많다는 것을 반영했다.
이런 식의 정의가 순환적이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밀도가 단위 부피당 질량이라면 밀도와 부피를 곱하면 질량이 된다는 말은 밀도의 정의와 똑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뉴턴의 책이 출간된 직후부터 이 정의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현대물리학에 익숙하다면, ‘물질의 양’이 곧 현대적인 ‘질량’과 같다고 쉽게 생각하겠지만, 1687년에 출간된 텍스트에서 당시의 독자들은 그런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질의 양과 운동의 양이라는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번째 정의를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그 정의는 ‘물질의 내재적 힘’이다.
[정의 3] “물질의 내재적 힘은 물체가 정지해 있거나 반듯하게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게 만드는 힘이다.(Definito III. Materiae vis insita est potentia resistendi, qua corpus unumquodque, quantum is se est, perseverat in statu suo vel quiescendi vel movendi unformiter in directum.)”
물질의 내재적 힘을 요즘의 용어로 말하면 ‘관성(慣性)’ 또는 영어의 inertia와 비슷하다. 타성에 젖어서 원래 하던 식으로 그저 현상유지에 급급한 것을 ‘관성’이라고 흔히 부르는데, 내용상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뉴턴의 책을 읽을 때 처음 만나는 난관이 바로 이 ‘물질의 내재적 힘’이다. 현대의 물리학에는 이 개념과 딱 들어맞는 개념이 없다. 일종의 저항력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공기저항 같은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물체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 속에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뉴턴이 이런 이상한 용어와 개념을 1687년에 출간된 그 책에서 계속 사용한 것은 당시의 자연철학에서 ‘임페투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임페투스라는 용어 자체는 14세기에 프랑스의 자연철학자 장 뷔리당이 만든 것이지만, 그 뿌리를 찾아보면 6세기 고대 헬레니즘 시기 그리스의 필로포누스까지 거슬러 갈 수 있고, 그리스 자연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방대한 번역 사업을 펼치고 그 번역된 책을 가지고 더 깊이 탐구하여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낸 이슬람 자연철학이 있다. 11세기의 이븐시나(아비케나)는 필로포누스의 이론을 더 확장했고, 12세기의 이슬람 자연철학자 누르 앗딘 알 비트루지(알페트라기우스)의 손을 거쳐 장 뷔리당이 이를 정리했다.
비잔틴 시대의 자연철학자이자 문헌학자 필로포누스(요아네스 필로포노스, c.490‒c.570)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을 비판하면서, 운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맨 처음 운동을 일으킨 것이 물체에 무엇인가를 전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로포누스는 이것을 ‘호르메(hormé)’라 불렀다.
필로포누스의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킨 것은 11세기 페르시아의 자연철학자 이븐 시나(Ibn Sina, Avicenna, 980‒1037)였다. 이븐 시나는 던져진 물체의 운동은 힘을 가하는 사람과 접촉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마일 mayl’이라 부른 것이 최초의 충격에서 물체에 전해져야 한다는 논의를 전개했다. 이 ‘마일’이 점점 줄어들면 던져진 물체는 운동을 멈추고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븐 시나의 논의를 수용하여 발전시킨 것은 12세기의 이슬람 자연철학자 아불 바라카트(Abu’l-Barakāt Hibat Allah ibn Malkā al-Baghdādī, c.1080‒1164/5)와 알 비트루지였다.
에기디우스 로마누스(Aegidius Romanus, Giles of Rome, c.1243‒1316)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크게 반대했다. 중세 유럽의 자연철학을 염두에 두면, 에기디우스가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물질의 양’이 어떤 상황에서도 그 총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에기디우스는 기독교 신학자로서 매주 교회에서 일어나는 성체성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 성체에 대한 정리들 Theoremata de corpore Christi> (1276)이라는 책을 냈다[그림 5]. 기독교의 성체성사에서는 빵을 먹으면서 이것이 우리를 위해 죽은 예수의 살이라고 하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이것이 우리를 위해 죽은 예수의 피라고 말한다. 최후의 만찬을 기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제가 이 빵과 포도주에 축사를 하면 빵과 포도주가 입으로 넘어가는 순간 이미 성자(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 빵과 포도주를 무게와 부피로만 보면 이 과정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에기디우스는 ‘물질의 양’이라 부르는 세 번째 양이 변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생각을 펼쳤다.
이 생각은 14세기 프랑스 파리 대학의 자연철학자 장 뷔리당(Jean Buridan, c.1301‒c.1359/62)으로 이어진다. 뷔리당은 ‘뷔리당의 당나귀’라는 우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뷔리당은 운동을 유지하는 원천으로 필로포누스의 ‘호르메’의 개념을 확장했는데, 이를 ‘임페투스’라 불렀다. 임페투스는 운동하는 물체가 빠를수록 더 큰 것으로 여겨졌는데, 뷔리당은 여기에 추가하여 ‘물질의 양’이 많을수록 임페투스도 크다고 보았다. 이때 ‘물질의 양’은 다름 아니라 에기디우스가 제안한 그 신학적 개념이었다. 활을 떠난 화살이 운동할 수 있는 것은 손에서 전달된 임페투스가 화살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인데, 공기저항 같은 게 없다면 그 임페투스 때문에 화살이 그대로 반듯하게 일정한 빠르기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공기저항 같은 것 때문에 화살에 전달된 임페투스는 주변에 흩어져 버린다. 임페투스가 다 떨어지면 화살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뉴턴이 새로 정의한 ‘물질의 내재적 힘 vis insita’은 14세기의 임페투스와 완전히 같은 건 아니지만 여러 면에서 그와 유사하다. 또 이 물질의 내재적 힘은 임페투스처럼 물질의 양에 비례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물질의 양’ 즉 ‘질량’은 일종의 ‘관성’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20세기 중엽까지도 ‘질량’과 ‘관성’은 사실상 동의어처럼 사용되었다.
뉴턴은 행성의 운동이 타원 궤적을 그린다면 태양과 행성 사이에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림에 있는 명제 11(문제 6)이 바로 그 증명을 담고 있다[그림 6].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힘, 즉 태양이 행성에 미치는 가해진 힘(vis impressa)은 단지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 힘이 ‘물질의 양’에 비례한다는 이야기는 따로 나오지 않는다.
현대의 물리학 교과서에 흔하게 나오는 \(F = \frac{GMm}{r^{2}}\)이라는 수식은 만유인력이라 흔히 부르는 보편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량에 각각 비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수식은 뉴턴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프린키피아>에는 이런 수식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가장 초기의 서술은 1798년 헨리 캐븐디시(Henry Cavendish, 1731‒1810)의 “지구의 밀도를 결정하기 위한 실험(Experiments to determine the density of the earth)”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그림 7]. 1785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샤를-오귀스탱 쿨롱이 정전기에서 보이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두 물체의 전기의 양(전하량)에 각각 비례한다는 것을 비틀림 저울을 이용한 실험으로 밝히고 발표했다. 이를 \(F = \frac{kqq^\prime}{r^{2}}\)처럼 쓸 수 있다. 이보다 앞서 영국의 자연철학자 존 미첼(John Mitchell, 1724‒1793)은 1783년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이 정말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틀림 저울을 이용한 정교한 실험을 고안했다. 그러나 이 실험을 실제로 하지 못한 채 1793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오랜 벗을 대신하여 이 실험에 성공한 사람이 헨리 케븐디시이다.
\(F= \frac{GMm}{r^{2}}\)이라는 수식은 정전기력의 원천이 전하인 것처럼 중력의 원천이 질량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현상적으로 물체와 물체 사이에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고, 또 이 힘은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상 그 ‘질량’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여전히 논쟁적이다. 정말로 중력의 원천이 질량, 즉 물질의 양인가 그리고 왜 그러한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캐븐디시가 도입한 수식에는 새로운 종류의 상수, 즉 뉴턴 상수 \(\small G\)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중력의 원천이 물질의 양인가 하는 철학적인 문제 못지 않게 정량적으로 뉴턴 상수와 지구의 밀도를 측정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대개 수식을 \(m_{_I} g = \frac{GM_{E} m_{G}}{R_{E}^{\phantom{} 2}}\) (\(M _{E}\)와 \(R_{E}\)는 각각 지구의 질량과 반지름)와 같이 써 놓고 관성질량 \(m_{_I}\)와 중력질량 \(m_{_G}\)가 같기 때문에 지표면에서의 중력가속도는 \(g= \frac{GM_{E}}{R_{E}^{\phantom{} 2}}\)으로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지구에서의 무게와 달에서의 무게를 비교하는 1/6이란 숫자도 여기에서 유도된다. 달의 질량이 지구의 질량의 1/100쯤이고 반지름은 1/4쯤이므로, 이 값을 넣으면 중력가속도가 1/6쯤임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서술은 지구가 타원체라는 것, 지구와 달의 크기와 질량을 결정하는 것이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는 점, 그리고 뉴턴 상수를 확정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간과한 단순화이다. 특히 개념만으로 보면 애초에 상태 변화에 대해 버티는 내재적 힘(관성)과 중력이라는 힘을 만들어낸다는 물질의 양은 서로 무관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이 같다고 말하는 것에 어폐가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상대성이론까지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게를 관성질량과 중력가속도의 곱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중력질량과 중력가속도의 곱으로 볼 것인지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물리학 교과서에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 힘과 같다.”라는 주장이 고전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은 면이 있다. 영국의 자연철학자 버클리는 뉴턴 자연철학에서 ‘힘’이라는 관념이 일상적 경험이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가상적이고 사변적인 개념이라고 비판하면서, ‘힘’이라는 개념을 전혀 도입하지 않고 운동을 설명하려 애를 썼다. 이와 달리 18세기 크로아티아(달마시아) 지역 출신의 자연철학자 루제르 보스코비치(Roger Joseph Boscovich[Ruđer Josip Bošković], 1711‒1787)는 1758년에 초판이 간행된 <자연에 존재하는 단일한 힘들의 법칙만으로 유도한 자연철학의 이론(Philosophiæ naturalis theoria redacta ad unicam legem virium in natura existentium)>에서 힘들 사이의 관계만으로 운동을 설명하려 했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도 이를 계승하여 이와 관련된 논의를 전개했다.
에른스트 마흐가 1897년에 간행된 <역학의 발달 Die Mechanik in ihrer Entwickelung: historisch-kritisch dargestellt>에서 질량을 새롭게 정의한 것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그림 8]. 마흐는 정의가 모호하며 오랜 논쟁에 휘말렸던 ‘힘’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역학의 체계를 세우려 했다. 그래서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출발점으로 삼아 질량 개념으로 나아갔다. 그는 작용-반작용 관계에 있는 두 물체의 질량의 비 \(m_{AB} = m_{A} / m_{B}\)를 가속도의 비로 \(m_A / m_B = -a _{B} /a _{A} \)로 정의하고 특정의 물체를 질량의 기준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속도가 직접 측정할 수 있는 양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의 표준을 정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또 이렇게 가속도의 비로 질량을 정의하는 것은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으로 가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물리학 교과서에서는 마흐의 논의를 단순화하여 질량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질량 개념이 에너지 및 운동량과 직접 연결되어 좌표계의 선택과 무관하게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m= \sqrt {E ^{2} /c ^{4} -p ^{2} /c ^{2}}\)와 같이 에너지의 제곱과 운동량의 제곱의 차로 정의해야 한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장이 에너지를 갖기 때문에 질량을 모호함 없이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질량 개념의 역사에 대해 다음 참고문헌들이 유용하다.
- 각주
- 1)Max Jammer, Concepts of Mass in Classical and Modern Physic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1).
- 2)Jim Baggott, Mass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짐 배것, 배지은 옮김, 물질의 탐구 (반니, 2018).
- 3)Eugene Hecht, The Physics Teacher 44, 40-44 (2006); doi: https://doi.org/10.1119/1.2150758.
- 4)Eugene Hecht, American Journal of Physics 85, 115-123 (2017); doi: https://doi.org/10.1119/1.4972044.
- 5)K. M. Browne, American Journal of Physics 86, 471-474 (2018); https://doi.org/10.1119/1.5027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