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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인 과학관

작성자 : 유만선 ㅣ 등록일 : 2023-06-08 ㅣ 조회수 : 879

저자약력

유만선 관장은 연세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열과 에너지 관련 연구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방문 연구원을 거쳐 2007년부터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첨단기술 관련 전시기획을 하였으며, 2011년에는 스미소니언 재단 방문 연구원을 다녀오기도 했다. 현재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창피한 이야기.

작년 하반기에 나는 내가 일하는 과학전시관에 놓인 과학전시물 하나를 개선해야 할 일이 생겼다. 전시물의 이름은 ‘한국형 핵융합 실험로’인 KSTAR(Korea Superconducting Tokamak Ad- vanced Research). 화석에너지의 대안으로서 재료인 수소를 핵융합시키는 과정에서 생기는 에너지를 활용하고자 대전에 위치한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내에 설치하여 실험하고 있는 장치이다. 전시물은 KSTAR의 본체 절개모형과 핵융합 발전의 원리 그리고 핵융합 에너지를 연구하고 있는 주요 국가 등에 대한 소개 영상 2종으로 구성되었다. 개선을 위해 전시물을 관람하는 관람객들을 먼저 관찰하였다. 소형 영상녹화장치를 모형 근처에 설치하고, 조사연구 목적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설치한 후, 관람객들이 많은 시간에 맞추어 약 30분간 녹화를 진행하였다.

그림 1. 문제의 KSTAR 전시물.
그림 1. 문제의 KSTAR 전시물.

결과는 참담했다. 30분 동안 지나간 수백 명의 관람객 중에 KSTAR 모형을 제대로 쳐다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모형 앞에 놓인 수 분짜리의 영상물 또한 터치스크린인 줄 알고 디스플레이를 잠시 매만지는 관람객 몇을 포함해서 30초 이상 머무르는 관람객은 관찰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 전시물이 2008년부터 관람객들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고, 나는 이제야 이 과학전시물이 전시물로서 관람객들에게 잘 역할하고 있는지 확인했다는 것이다. 녹화된 영상을 보는 내내 당황스럽고 또 부끄러웠다. 나는 내가 만든 과학전시물이 핵융합 기술에 대한 ‘과학 대중화’에 실패한 것을 15년 만에 깨달았다!

위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 나는 과학관에서 과학전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되짚어 보았다.

과학관에는 연구직 혹은 연구원이라 불리는 대부분 나와 같은 이공계 전공자로 구성된 그룹이 있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큐레이터와 유사하며 전시관 내 전시물들의 기획 및 제작 설치를 총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시기획자라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전시하고자 하는 과학 주제와 관련한 전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항상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과학관 특성상 전공과 무관한 경우도 있다. 여튼 과학전시물을 그림 1. 문제의 KSTAR 전시물. 만들고자 할 때, 과학관의 전시기획자들은 인터넷이나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거나 관련된 전문가를 만나는 등 주제와 관련된 정보를 모아 정리하여 전시사업 기획서를 만든다. 동시에 이들은 어떤 매체들로 기획한 주제를 관람객들에게 전달할지 고민한다. 과학전시 매체는 일반적으로 모형, 실물, 작동물, 영상물, 설명패널 등 물리적인 특성에 따라 구분하는데 기획자들은 전시주제의 전달성을 높일 수 있는 매체를 취사선택하여 전시 연출계획을 마련한다.

기획과 연출계획이 마련된 후에는 과학전시 내용에 본질적이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과학관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대부분 관장을 포함한 의사결정자들에게 본인의 과학전시에 대한 내용을 발표나 서면의 형태로 보고해야 하고, 이를 통해 적절한 예산을 승인받아야 한다. 관 내부에서 예산을 승인받았다고 바로 전시물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시물을 만드는 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승인받은 예산을 집행해야 하기 때문에 전시회사가 입찰해서 들어 올 수 있도록 업무를 설명하는 제안요청서(Request For Proposal, RFP)를 작성하고, 공고문 등과 함께 공고를 해야 한다. 다음으로 공고된 기간에 접수된 제안서를 전시회사의 발표 혹은 서면 검토를 통해 평가하기 위해 평가회의를 개최해야 하고, 평가된 점수를 바탕으로 계획된 전시물을 제작할 회사를 최종 선정하게 된다. 과학관 입사초기 가장 스트레스였던 때가 이렇게 예산을 따고, 서류를 만들고, 평가를 해서 함께 일할 회사를 찾는 과정이었다.

과학전시 기획자는 이후 선정된 전시회사가 사업 선정 시 제출한 제안서에 기반하여 계획된 전시물을 잘 만들도록 감독한다. 작은 예산 규모의 전시사업의 경우, 실제 제작역량이 있는 전시회사에서 사업을 수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큰 전시물 제작사업의 경우, 기획사에 가까운 전시회사가 사업을 맡아 관리하며, 전시 매체별로 전문성있는 전시회사를 찾아 사업을 진행시키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과학전시 기획자는 전시회사와 때로는 협의, 때로는 지시를 통해 본인이 계획한 전시개념에 맞게 전시물이 만들어져 전시장에 잘 설치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전시물 제작 설치가 완료되었을 때, 전시물을 검사한 뒤, 운영 중 전시물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일정 기간 무상으로 보완하도록 하는 약속을 전시회사와 하고, 사업을 종료한다. 만들어진 전시물은 관람객들에게 선보이며 전시물로서의 역할을 시작한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본 과학관들에서 일하는 기획자들 대부분은 여태까지 내가 설명한 과정에 맞추어 과학전시물을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다.

우선, 과학 주제 및 전시연출 각각에 대한 전문성 부족이 큰 문제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과학전시물을 계획하는 과정에 이공계 전공자가 기획자로서 참여한다. 하지만, 주제 전문성을 갖추기에는 단기간에 기획서를 작성해야 하고, 동시에 사업을 추진하는 데에 필수적인 각종 행정 업무들을 함께 수행하도록 요구받기 때문에 전시기획자가 충분한 조사와 관계자 미팅을 통해 깊이 있는 스토리를 뽑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유튜브 등의 온라인 플랫폼을 바탕으로 적시에 시의성 있고 깊이 있는 과학 주제를 다루는 과학커뮤니케이터들을 볼 때, 오프라인 공간에서 큰 예산이 들어가는 전시를 만들 때 생기는 업무부담이 과학전시 기획자들에게는 상당히 크기 때문에 과학커뮤니케이터들과 같은 기민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종합예술 성격이 강한 과학전시물들을 연출하기에 이공계 전공자들이 갖는 한계점도 있다. 다양한 작가들, 기획자들과 협업하며 전시를 기획하는 미술관 큐레이터들과 비교하면 과학관 기획자들은 다소 폐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두 번째 문제는 과학전시사업 추진과정의 일방향성에 있다. 기획자의 전시기획, 예산확보 및 전시회사의 선정 그리고 과학전시물 제작 설치 및 운영 전 과정에 흔히 말하는 되먹임(Feedback)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전시물 제작 설치 과정에서 기획자와 전시회사가 전시연출을 변경하는 경우가 있지만, 기획자의 직관에 의하거나 추진과정에서의 예산 부족 등이 주요 원인일 뿐, 연출된 전시물이 관람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역할을 하는지 테스트한 결과를 바탕으로 한 계획변경은 아니다.

마지막 문제는 과학전시물의 기획부터 제작 설치까지에 소요되는 기간이 매우 짧다는 점이다. 과학관이나 기획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예산의 대부분은 1년 내에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고, 이 때문인지 대부분의 과학전시는 기획부터 제작 설치까지 1년 이내에 진행된다. 이 때문에 많은 과학전시는 연말 근처에 설치가 끝나거나 최악의 경우, 사업이 다음 해로 넘어가면서 예산 지출 담당자들을 곤란에 빠뜨리게 된다.

그림 2. 익스플로라토리움의 전시물 개발 공간.그림 2. 익스플로라토리움의 전시물 개발 공간.

예전에 좋은 기회로 최초의 과학관으로 알려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익스플로라토리움(Exploratorium)’ 내 전시 전문가들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적지 않은 외부 예술가나 과학자들이 일정 기간 급여를 받으며 상주하는 형태로 전시기획에 참여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있었다. 또한, 전시물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데에 평균 5~6개 정도의 시제작 및 테스트(prototyping and test)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로 단순하게 연출하여 내부 직원들이 테스트하다가 나중에는 세부적인 설계치를 가지고 제작한 물건들을 전시장에 놓고 관람객들의 반응을 관찰하거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을 거친다고 한다.

그림 3. 미국 스미소니언 전시사업 스케줄표 예.그림 3. 미국 스미소니언 전시사업 스케줄표 예.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경우도 전시사업에 공을 들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전 이곳의 전시 큐레이터를 만났을 때, 전시 공간 한 곳을 리뉴얼하는 일정표를 보았는데 200줄에 가까운 세부 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고, 전시설계 과정에만 65주가 소요되는 등 과학전시사업에 거의 3년 반의 시간이 소요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 4. 국립과천과학관의 개발 전시물 테스트 사례.그림 4. 국립과천과학관의 개발 전시물 테스트 사례.

이러한 해외 사례들을 참고하여 앞서 언급한 국내 과학전시 사업의 문제점들을 개선하고자 국립과천과학관에서는 지난 2020년 이정모 관장의 부임 이후, ‘과학관 전시프로세스 체계화 연구’라는 이름의 정책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전시물 개발과 관련한 내부 직원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이공계를 전공한 전시 기획자들과 디자인을 전공한 전시 디자이너들의 역할을 분리하였다. 또한, 전시물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전시물이 설치된 후에 각각 관람객 등을 대상으로 한 전시 테스트 및 평가를 진행하여 그 결과에 따라 전시물 개선이 가능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과학전시 사업의 진행 주기를 기획 1년, 설계 1년 그리고 제작 설치 1년 등 총 3년으로 잡아 각 과정에 참여자들이 보다 많은 고민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처음 해보는 과정이라 불필요한 일들로 힘든 적도 있었고, 기존의 체계에 익숙해 있던 몇몇 동료들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과천과학관은 현재까지도 과학전시 사업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들을 잘 해결해 나아가고 있다.

이렇듯 ‘과학관’이 과학전시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보다 과학적이어야 할 것이다. 시의성 있고 흥미로운 과학 주제를 정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리라 믿는 연출 방법을 정하며,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한 테스트를 통해 그 효과성을 검증하고, 결과가 예상과 다를 때에는 언제든지 기존의 연출 방법을 포기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대중의 과학화’, 그리고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과학관’이 진정한 문화시설로서 시민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일 것이라 믿는다.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태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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