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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과 통합모집에 대한 단상 - 포스텍 무은재학부의 사례

작성자 : 윤건수 ㅣ 등록일 : 2024-05-16 ㅣ 조회수 : 586

저자약력

윤건수 교수는 미국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이학박사 학위 취득 후, 포항공과대학교 물리학과, 첨단원자력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원자론의 관점에서 Brownian motion에 대한 이론을 발표하여 원자의 존재를 증명하였고, 이는 이후 양자물리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전혀 다른 영역처럼 보이는 작은 입자의 움직임에 왜 관심을 가졌을까? 아인슈타인 이전 세대의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은 어떻게 식물학자 Robert Brown의 발견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까? 이들이 특정 전공에 대한 지식과 연구에만 함몰되어 있었다면 식물학자의 관찰 에세이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며, 또 한편으로 당시 원자론과 원소론의 대립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면 Brown의 관찰의 중요성을 간과했을 것이다.

한 분야에서 깊이 있는 전문가가 그 역량을 더욱 폭넓게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역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이 필요할 것이다. 1660년 영국의 Robert Boyle은 30대 초반의 나이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힘을 합하여 Royal Society를 창설했다. Royal Society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 향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과학적인 사유의 확산에 힘썼으며, 그러한 활동은 이후 영국의 과학계와 사회 전반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라부아지에(Lavoisier)는 과학자로서의 역량을 바탕으로 세금 징수 시스템, 담배 유통 시스템 등 사회 시스템을 개선하였다. 다만, 우리가 쉽게 추측할 수 있듯이 그러한 정책들은 대중의 미움을 받았고 라부아지에는 안타깝게도 프랑스 혁명 초기에 단두대의 이슬로 생을 안타깝게 마감하였지만. 19세기 초 스웨덴의 베젤리우스(Berzelius)는 의사로 커리어를 시작한 후 화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하여 화학적인 분석 방법론을 정립하고 유기 화학 및 생물 화학 분야를 개척하였다. 베젤리우스는 당시 스웨덴 사회의 문제였던 알콜 중독 이슈를 개선하기 위해 금주 운동을 열심히 펼쳐 많은 가정의 여성과 아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아르곤 초임계 유체 내에 존재하는 액적들의 브라운 운동.(참고: Seungtaek Lee, Juho Lee, Yeonguk Kim, Seokyong Jeong, Dong Eon Kim* and Gunsu Yun*, “Quasi-equilibrium phase coexistence in single-component supercritical fluids,“ Nature Comm. 12, 4630 (2021))
▲ 아르곤 초임계 유체 내에 존재하는 액적들의 브라운 운동.(참고: Seungtaek Lee, Juho Lee, Yeonguk Kim, Seokyong Jeong, Dong Eon Kim* and Gunsu Yun*, “Quasi-equilibrium phase coexistence in single-component supercritical fluids,“ Nature Comm. 12, 4630 (2021))

포항공대의 초대 학장인 고 김호길 선생은 포항공대 제1회 입학식(1987.3) 연설에서 위와 같은 과학 문화의 토양이 자라길 희망하며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였다고 생각한다. “넓게 배우고, 깊이 생각하며, 단편적 지식보다는 체계적 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습성을 기릅시다. 남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생각 없이 답습하기보다는 창의적 태도로 보다 나은 방법을 추구하는 자세를 가집시다”라는 메세지로 자신의 비전을 담아 신입생들을 격려하였다.[출처: 김호길, <김호길 수상집: 자연법칙은 신도 바꿀 수 없지요>, 동인기획, 1993, pp. 147-149.]

이후 김호길 학장은 이러한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교육방침으로 덕육(德育), 지육(知育), 기육(技育) 세 가지를 설정했다. 덕육이란 지식의 사회적 공헌에 중점을 두는 교육 활동으로 ‘근면 성실하고 봉사 정신이 투철한 인격 배양’을 목표로 두었다. 김호길 학장은 덕육에서 강조되는 봉사 정신을 사랑의 규범으로 보았다. 지육이란 기본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함양시키는 교육활동이다. 마지막으로 기육이란 과학의 원리를 기술로 구현하고 그 위에 고도의 숙련을 쌓아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사람을 기르는 교육활동으로써 실험실습교육 및 고급 기술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포스텍은 김호길 학장의 이러한 교육 철학을 계승하기 위해 2018학년도부터 학부 1~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단일계열 학부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호를 따라 “무은재학부”로 명명된 시스템에서는 전공 탐색, 기숙 대학 생활, 개인 멘토링 등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에게 “학문에 경계가 없음”을 체험하게 하고 각자의 진로를 스스로 선택하고 설계하도록 돕고 있다.

그러나, 무은재학부에 대한 교수들의 의견은 도입 시점부터 현재까지 둘로 나뉘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의견 차이는 전공 선택의 자유와 전공 지식 교육 사이의 우선 순위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간단하게 볼 수도 있지만, “소속된 전공 학과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단점과 장점으로 풀어서 좀 더 구체적이고 체감되는 방식으로 얘기할 수 있다:

- 학생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 학생은 캠퍼스 내의 여러 그룹의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진다.

- 학생은 전공 선택 후에도 학과 내에서 끈끈한 선후배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요즘 학생들이 선후배 사이에 존댓말을 쓰는 것은 이것을 방증하고 있다.

- 학생은 전공 선택 후에도 대학 내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학과의 학생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 비인기 학과는 학생 수가 너무 적어서 전공 수업을 유지하기 어렵다.

- 비인기 학과는 교습 방법 개선, 강의 개발, 학과 내 환경 개선 등의 노력을 통해 발전한다. 소신이 뚜렷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므로 교육의 효과가 높다.

- 인기가 많은 학과는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전공 수업을 운영하는 것이 버겁다.

- 인기 학과는 효율적인 교육 방법 개발 등을 통해 현 시대가 요구하는 전공지식을 갖춘 학생들을 많이 배출한다. 학과 내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우수한 학생들이 더 많이 배출된다.

- 전공 교육의 시작이 늦기 때문에 전공에 대한 지식이 얕아질 우려가 있다.

- 전공 선택 전에 폭넓게 지식을 쌓을 수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상반된 의견에 내재된 질문은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그러한 질문은 무은재학부 시스템과 전공학과 중심의 시스템 중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를 묻는 질문, 즉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견해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우리나라 대학들의 학부 교육이 왜 전공학과 중심으로 정착되었는지, 특정 전공의 커리큘럼이 왜 현재의 구성으로 자리 잡았는지 (예를 들어, 물리학과의 학부 교육에서 왜 고전역학, 전자기학, 열역학, 양자물리 교과목이 필수 과목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일반물리 교재의 챕터들이 왜 현재의 구성을 갖추고 있는지 등 기존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고 논의하는 프로세스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질문들을 통해 교육의 철학과 목표가 분명해지고, 그래야만 비로소 일반물리 과목에서 여전히 도르래 문제를 강의하는 것이 적절한지, 양자물리 과목에서 양자컴퓨팅의 원리를 소개하는 것이 적절한지 등 구체적인 논의와 판단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근대 과학의 체계가 정착되어온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학문 분야의 경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와해되기도 했고 사회의 변화에 의해서 대학의 교육 체계도 함께 변화해 왔다는 점을 상기하면 학문의 경계는 유동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존의 대학 학부 교육 시스템, 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 벌어지고 있는 온라인 교육 방식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변화를 도모하고자 할 때, 근대 과학의 체계가 정착되어온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은재학부 교육의 특성과 관련된 한 가지 경험과 상상을 나누고자 한다. 한때 나는 SimCity라는 시뮬레이션 게임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는데, 이 게임은 매우 현실적인 도시들의 상황과 조건으로 구성된 몇 가지 기본 시나리오를 담고 있었다. 시골 깡촌을 인구 수만의 도시로 발전시켜야 하는 상황(덜스빌 1910), 지역 산업의 몰락으로 실업률이 대폭 상승한 도시의 경제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플린트 1974), 허리케인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도시를 연방정부의 지원금을 활용하여 복구하고 도시 발전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찰스턴 1989) 등, 지금 돌이켜보면 매우 현실적인 시나리오들이었다. 이 게임에서는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고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맞는 여러 가지 정책과 공학적 해결책을 종합적으로 고안하고 실행해야 했다. 이 게임 시리즈가 지금까지 유지되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출생 인구 감소 문제 등 여러 사회적 문제를 담아 게임으로 구현하고 해결책을 모색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태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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