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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현장에서 체감하는 한국 STEM 인재 양성의 위기 신호

작성자 : 채승병 ㅣ 등록일 : 2024-06-12 ㅣ 조회수 : 700

저자약력

채승병 박사는 2006년 KAIST 물리학과에서 이학박사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삼성글로벌리서치에서 재직 중이다. 복잡계 이론을 바탕으로 국내외 경제사회 시스템, 기술 및 경쟁환경 지형 등에 대한 현황 분석 및 미래 예측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기업 연구개발 현장에서 일하는 선배 과학기술 인재들의 푸념

무책임한 글이 될지 모르겠다. 객관적인 수치와 근거를 대라고 하면 밝힐 수 없는 내용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계물리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 대기업 현장에서 18년 동안 미래 기술 트렌드 분석, 디지털 혁신 전략 수립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 왔고, 특히 그 가운데서도 채용, 인력 운영을 비롯한 인사 업무에도 깊숙이 몇 년을 몸담은 경험을 담아 증언해 보고자 한다. 한국의 과학기술 인재 양성은 지금 방향성을 잃고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들은 항상 수많은 고민에 시달린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국내외 정세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세상을 뒤집어 놓을 신기술이 어느새 눈앞에 번쩍하다가 그중 어떤 것들은 신기루로 사라진다. 쏟아지는 실상과 허상이 뒤섞여 모호한 미래 가운데 어떤 미래에 한정된 인력과 자본을 집중해 대비할 것인지 끝없는 의사결정의 연속이다. 신기술 트렌드와 데이터 분석/모델링을 전문으로 하던 필자가 팔자에도 없던 인사 기능에 불려 간 것은 이런 고민 중 하나의 답을 찾아보라는 경영진의 지시 때문이었다. “도대체 우리 기업이 잘 되려면 어떤 인재를 뽑아야 해?”

그 해답을 찾아 많은 데이터를 헤집어 보면서, 여느 물리학도의 길을 갔다면 접하기 힘들었을 많은 기업 현장 관리자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언제나 해답은 현장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팀장님이 느끼시기에 요즘 입사하는 인재들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요?”―참고로 여기서의 ‘현장’은 연구개발(R&D) 현장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관리자’들이라 함은 역시 이공계 박사 출신으로 크고 작은 연구개발 조직을 이끄는 과학기술계 선배들이 대부분이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어지럽게 오고 갔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이면을 관통하는 맥락이 있었다. 우리 교육 시스템에서 양성되어 기업 현장으로 들어오는 과학기술 인재들의 경향 말이다. “스펙은 우리 때에 비해 너무 화려하지. 하지만 데리고 일하기가 너무 힘들어.”

점점 저하되는 기초실력과 팔로워십에 암담해지고 있는 기업 현장

흔한 세대 간 갈등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갈수록 조직에 대한 충성심은 옅어지고 개인 생활만 챙긴다는 기성세대의 편견을 옹호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분명 ‘근면’이라는 미명으로 장시간 근로를 강요하고, 비효율적인 업무 문화를 고집해 온 구태의연한 이전 세대의 관행은 꽤나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즘 배출되는 과학기술 인재에게서 발견되는 우려스러운 점들이 오롯이 가려지지는 않는데, 이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기초실력이 부족하고, 둘째, 팔로워십이 떨어지며, 셋째, 더 나쁜 것은 이 문제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속적인 인재 개발이 중요한 기업의 입장에서 매우 치명적인 결점이다. 일단 기업에서는 이공계 박사라 할지라도 결코 완벽한 인재를 기대하고 선발하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박사는 학계에서 이제 본인의 홀로서기 준비가 된, 스스로의 힘으로 먼길을 나설 인재라 할 수 있다. 이후 학계와 업계에서 새로운 과제를 받고 훌륭한 스승과 동료들을 만나 더 많은 경험을 해보면서 능력을 쭉쭉 확장해 나갈 길목에 있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역량을 어떻게 덧붙이고 연마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가치는 수천수만 배 벌어지게 된다. 기업이 갓 배출된 이공계 박사의 전문성을 높이 사서 채용한다고 보면 오산이다. 전문성의 가치는 10~30%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미래의 확장성, 즉 잠재 능력에 배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인재가 잠재 능력이 우수할까? 거칠게 요약하자면 단연코 기초실력과 팔로워십이 좋아야 한다. 기업에서 부딪히는 현실의 문제는 정답도 없고 기존의 능력만으로 해결이 어렵다. 물리학 전공자가 밤새 특정 공학 분야의 기술문서, 논문을 읽어야 하는 일도 빈번하고, 거꾸로 공학자가 물리학, 화학 교과서를 들고 씨름해야 할 일도 종종 생긴다. 나에게 ‘익숙한’ 지식만으로 해결될 업무는 사실상 없다.

이런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학습 능력은 각 전공 분야에서 가르치는 기초실력을 얼마나 충실히 갖췄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고참 연구자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학문 분야가 많이 달라 보여도 밑바닥으로 내려가면 결국 그 이면을 관통하는 원리와 체계가 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정통한 인재들은 그 본질을 깨닫고 다른 분야의 지식도 쉽게 흡수한다. 물론 그렇다고 대번에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분야 연구자들과의 소통은 훨씬 원활히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기초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게 리더의 도전적인 손길을 맞잡고 지원하며 배워가는 팔로워십이다. 기업에 처음 들어간 이공계 인재들이 종종 하는 푸념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다. “나는 엄연한 박사인데 왜 나에게 이런 생뚱맞은 분야의 일을 시키는 거지? 나를 무시하는 건가?” 사실 이걸 속으로만 삭이지 않고 요즘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이걸요? 제가요? 왜요?”

하지만 거기에는 인재 개발의 암묵적인 원리가 있다. 기업은 기초실력과 팔로워십을 갖춘 인재들을 팀으로 모아 도전적 과업을 부여한다. 그 속에서 각 인재들은 다른 다양한 전공자들과 팀플레이를 하면서 자신이 모르던 새로운 지적 자극을 받게 되고 자연스럽게 지식의 융합을 경험한다. 또한 크고 작은 조직의 역학과 생리를 겪고, 이를 조율해 가는 선배 리더의 모습 속에서 실전적인 리더십도 배우게 된다. 여기서 우수한 자질의 씨앗이 보인다면, 기업은 그 사람에게 더 넓어진, 즉 확장적 직무를 부여한다. 그뿐만 아니라 학계와 달리 상당한 금전적 보상을 함께 제공한다. 가끔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들더라도 물질적 보상으로 보완하고, 반대로도 아슬아슬하게 버티면서 인재의 능력은 종합적으로 성장한다. 약간씩 무리한 운동을 해가며 미세한 상처를 입고, 여기서 회복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더욱 굵어지는 근섬유처럼 말이다.

이 반복되는 선순환 과정에 잘 올라타게 되면, 갓 입사한 박사는 점차 다방면의 지식으로 무장하고 큰 조직을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융합형 리더’로 성장하게 된다. 기업의 성패는 결국 이런 인재들을 얼마나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새로 배출되는 인재들이 ‘기초실력’과 ‘팔로워십’이 부족해진다는 점은 심각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저러한 선순환 고리를 탈 수 있는 인재가 점점 줄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인구 감소로 절대적인 배출량마저 줄어드는 와중에, 질까지 나빠지고 있으니 미래 기업 경쟁력 악화는 불 보듯 뻔해지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기업 관리자들의 높아져 가는 의구심

이런 현실에 기업 관리자들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의 과학기술 인재 양성이 표방하는 표어들만 보면 방향은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감각을 갖추고, 리더십과 창의성이 우수한 융합형 인재 양성. 여기에 누가 토를 달겠는가? 과거에 특정 기능만 달달 가르쳐 배출된 과학기술 인재들이 주기적인 산업의 파도 속에서 정리해고로 휩쓸려 나와 힘들게 치킨집이나 하게 되었다는 울분의 토로가 먼 이야기가 아니니 더욱 그러하다. 초중등교육 현장에서는 과학(S)+기술(T)만 이야기하면 구닥다리이고, 공학(E)에 수학(M)을 덧붙인 STEM 교육이 기본이요, 요즘은 한 단계 넘어 예술(A)까지 접목한 STEAM 교육을 접하고 있다고 하고, 고등교육(대학) 현장에서는 우후죽순 수많은 융합 전공이 생겨나 인재들을 쏟아낸다고 하는데… 그런데 왜 정작 그런 인재들을 받아 쓰는 기업 현장의 체감 현실은 악화되고 있단 말인가?

기업 관리자들은 이 문제가 대한민국 과학기술 인재 양성 파이프라인 전반에 걸친 ‘부적절한 역할 분담’에 큰 원인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들이 사석에서 이야기하는 솔직한 속내는 이거다. “창의 융합형 인재? 그게 학교에서 키워낼 수 있는 건가?” 말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창의와 융합은 대단히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한다. 연구자들은 모두 알 것이다. 세상에 없던 무언가 한 방울을 보태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거기에 참신함과 현실성을 더하기 위해 생소한 수많은 분야의 지식을 결합하려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필자도 전공인 통계물리학의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은 업무를 받아들고 무서운 납기 압박에 시달리며 밤새운 일들이 여럿이다. 그야말로 1940년 독일의 침공을 목전에 앞둔 처칠의 연설에서 나온 “Blood, Sweat and Tears (피와 땀과 눈물)”를 바쳐야 나오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에 따라 막대한 자본이 수백, 수천 배로 뻥튀기될 수도, 반대로 한낱 재로 사라질 수도 있는 현장의 치열함은 직접 느끼기 전에는 전달조차 어렵다. 그런데 풋풋한 대학/대학원생, 심지어 초중고교생 교육 과정에서 창의와 융합을 가르치겠다고?

절대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기업도 창의 융합형 인재는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다만 창의 융합형 인재 양성은 자원이 훨씬 풍부한 기업에게도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교육의 적실성에 의문을 품는 것이다. 창의와 융합은 기예에 가깝기 때문에 결국 이미 경지에 오른 ‘창의 융합형 멘토’로부터 긍정적인 자극을 많이 받아야 그나마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명문 대학원도 명실상부한 ‘창의 융합형 교수’는 제한되어 있고, 대기업 또한 사내의 ‘창의 융합형 임직원’을 모아봤자 얼마 되지 않는다. 이렇게 귀한 인재들의 시간을 쪼개어 멘토링 기회를 마련하느라 많은 인사담당자들이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니 초~고등교육 현장에서 ‘창의 융합형 인재’를 키우겠다는 목표가 너무 공허하게 들린다. 솔직히 아무도 그게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왜 초중고에서 대학과 기업의 역할(창의 융합형 인재 양성)을 미리 하려는 거지?”

그럼에도 우리의 과학기술 교육 현장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STEAM, 창의, 융합 인재를 만드는 데 골몰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장 대학생들은 마치 전공 하나만 하고 오면 사회에서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불안해하는 것 같다. 주전공 외에 부전공은 기본이고 가능하면 복수전공도 해야 하고, AI가 들어간 융합 과목, 전공까지 섭렵해야 마음이 놓인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배출된 지원자들과 채용 면접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기업 관리자들은 나와서 한탄을 쏟아 놓고 있다. “왜 이런 쓸데없는 과목만 잔뜩 수강했을까? 차라리 그 시간에 진득하게 기초를 다져왔더라면…”

이제는 더욱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거품을 뺀 단단한 STEM 교육이 필요하다

이런 실무 기업 현장과 교육 현장의 괴리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으로 들어서고 있다. 초~고등학교에서는 명확히 공감도 안 되고 효과성도 의문인 창의 융합인재 교육 프로그램에 한정된 시수를 낭비하고 있고, 대학/대학원에서는 단순히 부전공, 융합 전공 타이틀을 얹기 위해 정작 중요한 이공계 각 분야의 공통 기초 교육을 부실하게 건너뛰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당장 돋보이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것이라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 마인드까지 주입되며 팔로워십은 부실하고 역시 텅빈 리더십만 내세우는 인력들이 배출되고 있다. 그런 ‘기초실력’과 ‘팔로워십’ 없는, 즉 ‘확장성이 떨어지는’ 인재들을 받아야 하고, 그마저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기업 경영자들은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다. 극심한 저출산으로 국가 과학기술 연구개발 시스템의 축소가 불가피한 마당에, 효과성이라도 반전시켜 이를 상쇄시키지 않으면 미래는 그저 암담할 뿐이다.

그래서 당부드리고 싶다. 각자의 위치에서 거품을 빼고 이제 현실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궁극적으로 멋진 ‘창의 융합형 과학기술 인재’를 만드는 이상은 버리지 말되, 각 교육 단계에서는 훨씬 현실적인 목표를 갖고 역할을 나누어 전략적으로 노력하자고.

우선 초~고등학교에서는 STEM 지식의 유용성과 흥미를 돋우는 데 집중하자. 창의 융합은 잊더라도 충실한 수학, 과학 지식을 갖고, 우수한 선배,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며 배워나가는 기쁨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팔로워십의 배양에 초점을 맞추자. 그 다음, 대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주어 스펙에 골몰하지 않도록 안심시켰으면 좋겠다. 급격한 인구 감소와 주력 선배 세대들의 대거 은퇴가 눈앞에 닥쳐 과학기술 인력 수급은 빠르게 공급 부족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이럴 때일수록 기업의 장기적인 니즈에 맞게 기초역량과 팔로워십을 단단히 다진 인재들이 더욱 각광을 받을 것이다. 자기 전공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중요한 기초 지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 및 기술 환경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을 적당히 가진다면 충분하다. 그리고 나머지의 성장은 그들 자신과 기업의 몫으로 남겨 두시면 좋겠다. 우리 기업들도 더 이상 과거 인구 팽창기, 과학기술 인재 공급 과잉 시대에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관행이 지속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더더욱 귀해지는 과학기술 인재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게 갖은 과학적 인사기법을 동원하고 역량 확장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미래 과학기술 인재 양성 시스템 속에서 기초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금 사회 전체에 각성시켜야 하는 교차로(Crossroads)에 서 있다. 멀리 기업의 현장에서 바라건대 부디 미래 인재들이 옹기종기 열정을 키우고 기초를 다지는 광장(Plaza)의 활기참이 잦아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태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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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rossroads.apctp.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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