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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Fulde 교수님에게 작별을 고하며
작성자 : 방윤규 ㅣ 등록일 : 2024-08-02 ㅣ 조회수 : 468
방윤규 소장은 미국 럿거스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전남대 물리학과와 포항공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한 후 현재 아태이론물리센터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2024년 4월 11일, 피터 풀데 교수님께서 독일 드레스덴 자택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날아온 이 슬픈 소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혼란스런 마음을 품고 저는 드레스덴으로 날아가 5월 3일 드레스덴의 알터 안넨프리드호프 묘지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많은 참석자들과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풀데 교수님의 별세는 20세기 응집물질 물리학을 형성한 한 세대의 역사적 퇴장을 상징합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초전도체와 강상관 전자계 연구 분야의 저명한 학자였고, 뛰어난 과학 행정가였으며, 학생, 비서, 많은 동료 연구자들은 물론, 가족과 친구들을 포함하여,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쾌활하고 따뜻한 품격의 소유자셨습니다. 독일인이셨지만, 한국에 유난히 애정이 많으셨고, 우리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신 (저와는 34년이란 긴 세월을 교류하였습니다) 풀데 교수님의 살아오신 여정을 간략히 회고하는 글을 적어 봅니다.
피터 풀데 교수님은 1936년 Breslau (현재 Wroclaw, 폴란드)에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1945년, 그가 9살이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 말 연합국 측이었던 러시아 붉은 군대의 서진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쳐야 했으며, 잠시 동안 드레스덴 외곽에 있는 어머니의 친구 집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이곳은 드레스덴 중심에서 불과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그 유명한 드레스덴 폭격에서 주변의 모든 건물들이 무너지고 불타는 가운데 기적적으로 생존했습니다. 이후 종전의 혼란기 동안 러시아와 미국 군대가 번갈아 점령하던 시기를 겪은 후, 그의 가족은 동독(GDR, 독일 민주 공화국)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1955년 동베를린의 훔볼트 대학교에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1956년, 20살이 되던 해에 점점 심해지는 교조적인 공산주의의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서독(FRG, 독일 연방 공화국)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56년 잠시 괴팅겐 대학교에 머문 후, 당시 양자장론의 선구자인 Harry Lehmann 교수 아래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함부르크 대학으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입자 물리학으로 Diploma (석사) 학위를 마친 후, 그는 양자장론으로 박사 학위를 계속할 계획이었으나 Lehmann 교수는 그에게 필드 이론 도구를 사용하여 고체 물리학을 연구할 것을 권유하고,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의 Richard Ferrell 교수 밑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피터는 이 조언과 주선이 그의 삶에 있어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하였으며, 이후 평생 동안 경험 많은 조언자들의 말을 듣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그는 Richard Ferrell 아래에서 1963년 유명한 Fulde-Ferrell Larkin-Ovchinikov (FFLO) 상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원래 이 연구는 Ferrell이 밀접하게 협력하던 버클리 실험 그룹에 의해 처음 발견된 에너지 갭이 없는 초전도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이후에도 버클리 대학의 실험, 이론 연구자들과 활발한 공동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유럽의 권위적이고 경직된 분위기와 다른, 미국의 연구자들 사이의 개방적인 학문 분위기와 새로운 물리학 주제의 활기찬 발전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초전도체와 고체 물리학 분야에서 선도적인 미국 연구자들 ‒ M. Tinkham, W. Knight, K. Maki, and J.J. Hopfield, etc. ‒ 과의 활발한 공동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1965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초빙 제안을 받아들여 독일로 귀국하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돌아보면, 196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반도체와 초전도체 연구와 같은 고체 물리학이 미국에서 새로운 물리학 분야이자 잠재적인 산업으로 번창하고 있었지만, 독일과 유럽에서는 막 성장하는 고체 물리학 연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독일과 유럽의 많은 대학 및 연구소에서 당시의 풀데 교수처럼 미국에서 학위를 마친 젊고 촉망받는 연구자들을 공들여 영입하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습니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프랑크푸르트 시절 동안, 그는 1967년부터 1974년까지 뮌헨의 Laue-Langevin 연구소 이론 그룹의 책임자로 일했으며, 동시에 1968년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이론 물리학과의 학과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같은 기간 동안 Karlsruhe 핵물리 연구 센터의 고체 물리학 연구소에 월 1회 자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중복되는 책임들을 탁월한 지적 능력과 성실함으로 훌륭히 완수하였고. 결국, 1972년 슈투트가르트에 막 설립된 막스 플랑크 고체 물리학 연구소(MPI-FKF)의 소장이 되어서 1993년까지 그 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슈투트가르트 시절 동안 그는 독일 전역의 젊은 학생들과 전 세계에서 온 포닥과 방문 연구자들을 끌어모았고, 그의 그룹은 독일에서 초전도체와 강상관계 전자계 이론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또한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동구권의 물리학자들에게 연구의 기회를 제공하여 많은 동유럽 및 러시아 물리학자들을 초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는, 막스 플랑크 협회의 물리화학 분과 위원장으로서 전 동독의 과학 연구소 재건 프로젝트에 참여하였으며, 곧 풀데 교수는 드레스덴의 막스 플랑크 복합 시스템 연구소(MPI-PKS)의 창립 소장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연구소 창립 초기인 1993년부터 임시 막사 건물에서 시작하여 1997년 연구소의 신축 건물이 개관할 때까지, 그는 그의 학생들 및 연구원들인 Hurbert Scherrer, Beate Paulus, Burkhard Schmidt, Steffen Mallwitz, Kurt Fisher, Ingo Allekotte 등과 함께 새로운 막스 플랑크 연구소를 맨땅에서부터 세우기 위한 기념비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예를 들어, 연구소 초기에는 매주 월요일마다 오전 6시 30분 슈투트가르트에서 출발하는 첫 비행기를 타고 오전 8시 30분에 드레스덴 사무실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현재 MPI-PKS는 세 명의 소장인 Jan-Michael Rost, Frank Jülicher, 그리고 Roderich Moessner와 함께 해당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최고 수준의 연구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풀데 교수는 2007년에 소장직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은퇴 직후, 풀데 교수는 우리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의 소장으로 초빙되어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재임하셨습니다. 그는 특히, “아시아 태평양 물리학 커뮤니티는 국제 물리학 커뮤니티의 강력한 파트너가 되기 위하여 먼저 아태지역을 중심으로 상호 협력해야 한다”는 APCTP의 창립 이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소장직을 수락하였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그는 이미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 한국 등 아시아권의 많은 친구와 동료들을 알고 있었으며, 여기에는 Yu Lu, Fuchun Zhang, K. Ueda, H. Fukuyama, N. Nagaosa, Ngyuen Van Heu, G. Baskaran, 그리고 원혜경 등이 포함됩니다. 풀데 교수의 재임 기간 동안, 그는 특히, 이론물리학 연구소로서 APCTP의 내부 연구 역량을 강화했습니다. 그는 막스 플랑크 협회로부터 후원 자금을 들여와, 독일 본토의 MPI와 같은 조건과 같은 수준의 Junior Research Group (JRG)을 APCTP에 창설하였습니다. 이 JRG 그룹은 매우 성공적으로 정착되어 전 세계로부터 촉망받는 리더급 젊은 이론 물리 연구자들을 국내로 끌어들이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후 IBS와 같은 국내의 다른 연구소에서도 유사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의 리더십 하에 우리 APCTP는 전 세계의 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을 끌어들이는 명실상부한 국제 물리연구소로 성장하였습니다.
풀데 교수는 또한, 한국 기초과학연구원(IBS) 설립 초창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2010년, 한국 정부는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MPI)와 일본의 이화학연구소(RIEKEN)에 상응하는 50여 개의 기초과학 연구센터를 설립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였으며, 풀데 교수의 평생에 걸친 연구와 과학 행정 경험은 IBS의 초기 틀을 구축하는 데 매우 귀중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풀데 교수는 이후 IBS 연구 단장의 선정 및 평가 위원회(SEC) 의장으로, 이후에는 과학 자문 위원회(SAB)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하기 전까지, 그는 IBS 관련 업무와 APCTP 명예 소장으로서 한국을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이처럼,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태평양 물리학 커뮤니티 전체는 풀데 교수의 헌신과 우정에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피터 풀데 교수의 유산과 정신은 아태 물리학 커뮤니티 내에서 계속될 것이며, 우리는 그를 뛰어난 물리학자이자, 탁월한 과학 행정가, 그리고 국경을 초월한 인류애의 소유자로서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피터 풀데 교수님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과학과 미래 그리고 인류’를 목표로 한 <크로스로드>는 과학 특집, 과학 에세이, 과학 유머, 과학 소설, 과학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과학 글을 통해 미래의 과학적 비전을 보여주고자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Asia Pacific Center for Theoretical Physics)에서 창간한 과학 웹 저널입니다.
http://crossroads.apctp.org/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는 정부의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 지원으로 사회적 가치 제고에 힘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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