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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이야기

도모나가 신이치로, 1933년 여름

작성자 : 이강영 ㅣ 등록일 : 2024-11-29 ㅣ 조회수 : 25

저자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등이 있다. (kylee.phys@gnu.ac.kr)

그림 1.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 유가와와 통화하고 있는 도모나가 신이치로.그림 1.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 유가와와 통화하고 있는 도모나가 신이치로.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 振一郎, 1906‒1979)는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학자로서 도쿄 신슈대학의 교수였고 집안은 넉넉했으므로, 그는 어려서부터 풍부한 교양 교육을 받고 책을 많이 읽었다. 도모나가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아버지 도모나가 산쥬로(朝永 三十郎, Tomonaga Sanjūrō, 1871‒1951)가 교토 제국대학의 교수로 부임하게 되어 온 가족은 교토로 이사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어, 나머지 가족은 다시 도쿄로 돌아와 친척들과 함께 살았고, 도모나가도 도쿄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가족이 다시 교토에 모여 살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온 1913년부터다.

도모나가는 어려서부터 몸이 매우 약해서 자주 병을 앓았고, 학교도 종종 나가지 못했다. 부모는 주치의와 함께 어린 신이치로의 건강을 위해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썼으나, 허약하고 마른 몸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도모나가는 교토 일중(一中)을 거쳐 삼고(三高)에 진학해서 이과 을(乙)반이 되었다. 그보다 한 살 어린 유가와 히데키(湯川 秀樹, 1907‒1981)는 1년 아래였지만 중학교를 4년만에 수료하고 같은 고등학교 이과 갑(甲)반에 진학해서 동기가 되었다. 유가와 역시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지질학자였던 아버지가 교토대학에 부임하면서 교토로 옮겨왔던 것이다. 도모나가와 유가와는 모두 어릴 때부터 수학을 잘했고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도모나가는 또한 관찰력이 뛰어나고 물건을 잘 만들었다. 손재주가 있어서 유리세공이나 스케치도 잘했으므로 실험을 했어도 잘했을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반면 유가와는 손재주는 엉망이어서 그림이나 수공도 아주 못했고, 실험은 질색이었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의 인생은 이후로도 어떤 면은 놀랍게 겹치고 어떤 부분은 극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것이 재미있다. 이후 두 사람은 1926년 나란히 교토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도쿄에서는 유럽에 유학했던 나가오카 한타로(長岡 半太郎, 1865‒1950) 등의 영향으로 새로운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으나, 교토대학의 물리학 교수들은 양자론과 원자물리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는 젊은이들은 교수들의 지도 없이 외국에서 날아오는 학술지의 논문들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특히 몸이 약했던 도모나가는 학교 공부를 해나가는 것만 해도 힘에 겨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도모나가에게 대학 생활은 지저분한 실험실과 무미건조한 수식들로 가득했던 어두운 기억으로 남았다. 한편 유가와는 물리학을 평생의 목표로 삼아서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한다. 1929년 두 사람은 졸업을 했으나 취업을 하지 못하고 무급의 조수 보조생 정도의 자리로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했다. 유가와는 원자의 물리학이 해결되고 있으니 다음은 원자핵을 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신만의 페이스로 거침없이 물리학 연구를 해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유가와의 모습은 도모나가에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구란 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도모나가는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양자론과 고전물리학을 착실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가와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하루 종일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가 버리는 괴로운 일을 하며 절망감에 빠져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유가와는 “나에게는 독단적인 점이 있다 ... 내가 모르는 사이 너무 앞서가고, 어떤 때에는 너무 비약한다. 하지만 도모나가 군은 이러한 실수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를 알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타입이다...”라고 하며 오히려 도모나가를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1929년 9월 니시나 요시오(仁科 芳雄, 1890‒1951)는 하이젠베르크와 디랙을 초청해서 도쿄대학과 리켄에서 양자역학 강의를 했다. 유가와와 도모나가도 도쿄에 가서 강의를 들었다. 강의는 강자성과 블로흐의 전도 이론, 밀도 행렬과 디랙 방정식 등 당대 최첨단의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도모나가는 관련 논문들을 읽었기 때문에 “이상하게도 (?)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또한 “나가오카 한타로 선생님이라든가 니시나 요시오 선생님 등 대단한 분들의 모습을 보고, 또 보기에도 머리가 좋을 것 같은 도쿄대 출신의 수재들 사이에서 압도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뒤쪽 자리에 몰래 숨듯이 앉아 강연을 듣고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래서 아무도 만나거나 인사를 나누지 않고 교토로 돌아왔다.1)

리켄

리켄은 이화학연구소(理化學硏究所)를 줄인 말인 理硏을 일본어로 읽은 것이다. 일본의 실험실이나 연구소는 이런 식으로 ‘무슨무슨 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리켄은 이름 그대로 물리와 화학을 위한 국립 연구소로서 1917년 3월에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리켄의 모델은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협회였으므로, 기본적인 구조는 국가가 출자를 하는 민간 조직으로 하고 황태자가 이사장을 맡았다. 카이저 빌헬름 협회 역시 민간 조직이면서 카이저가 이사장에 해당하는 역할을 맡고 정부와 민간의 후원을 받아서 개개의 연구소를 설립하는 형태였다.

국가가 주도해서 기초 과학을 진흥하기 위한 연구소를 만든다는 생각을 제안한 것은 1913년, 아드레날린을 세계 최초로 분리해낸 것으로 유명한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高峰 譲吉, 1854‒1922)가 도쿄의 레스토랑 츠키지 세이요켄(築地 精養軒)에서 했던 강연에서다. 이 강연은 다카미네와 친분이 있던 실업계의 거물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 栄一, 1840‒1931)가 주선한 것으로, 농상무성 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무원과 실업계의 중요 인물들이 다수 참석했다. 시부사와는 저명한 사업가이자 일본에 현대적인 은행을 도입해서 제일국립은행을 창립하고 총재를 지내면서 일본에 근대적인 회사 설립을 적극적으로 도와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는 말까지 듣는 사람이다. 강연에서 조키치는 “외국을 모방하기만 해서는 안되고 새롭고 유익한 것을 발명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초를 쌓아 올려야 한다”고 강조하며 “전함 한 대 값이면 국립 과학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다”라고 제안했다.2)

시부사와는 이 강연을 시작으로 연구소 설립을 여러 가지로 모색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유럽과의 무역이 막히자, 재계와 정계에서도 독자적인 연구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데 힘입어 당시 수상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 1838‒1922)를 설득해서, 1915년 마침내 물리와 화학의 기초 및 응용연구를 수행하는 이화학연구소의 창립을 결정했다. 이후 조사위원회가 설치되고 1916년 6월에는 발기협의회가 열렸으며, 10월에는 창립위원장으로 시부사와가, 물리학부 위원으로 나가오카 한타로, 화학부의 위원으로는 아지노모토를 발명한 이케다 기쿠나에(池田 菊苗, 1864‒1936)가 각각 위촉되었다. 정부의 예산 200만 엔도 결정되고 재계의 기부금도 모여서 1917년 3월 20일 마침내 재단법인 이화학연구소의 설립 인가가 내려졌다.

리켄의 도모나가

1931년 봄, 니시나 요시오는 도쿄의 리켄에서 양자역학 강의를 열었다. 교토의 도모나가와 유가와도 찾아와서 강의를 들었다. 양자역학이 태동하던 시절, 바로 그 현장인 닐스 보어 연구소에서,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과 함께 연구하고, 클라인-니시나 공식을 만들어내는 등 활약하고 돌아온 니시나는 그들 신참 연구자들에게는 한없이 우러러 보이는 거대한 존재였다. 강의에 감명을 받은 도모나가는 “그 강의는 물리학에 살을 붙이고, 상당한 철학적 배경을 가진 것으로, 지금까지 안개가 낀 것처럼 가물거리던 것들이 강의를 듣고 나니 명확해졌다”고 말했다. 방황하던 도모나가는 망설임 끝에 니시나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는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얼마 후 니시나로부터 온 답장에는, 놀랍게도 리켄에 자신의 새로운 연구실을 만들 계획이니 도쿄에 와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권유가 담겨 있었다. 연구에는 성과가 없고 건강은 좋지 않아서, 하찮은 일이라도 좋으니 뭔가 할 일을 하면서 한적한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도모나가에게,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일이었다. 도모나가는 당황해서, 리켄은 천하의 준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자신은 거기에 끼어서 일할 자신이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니시나는, 그러면 우선 2‒3개월만 방문해 보라고 했다. 도모나가는 이 말대로 리켄을 방문하기로 했다. 하지만 감기를 심하게 앓는 바람에 도모나가가 리켄에 나타난 것은 예정보다 늦은 1932년 4월의 일이다.

리켄에서 니시나의 연구실은 아직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도모나가는 1호관의 창고 구석에 책상을 놓고 지냈다. 공부를 하다가 고개를 들면 가끔 쥐가 나타나서 눈이 마주치곤 했다고 한다. 니시나는 매일 찾아와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연구의 진행 상황을 묻거나 건강을 염려해 주었다. 매주 니시나는 콜로퀴움을 열었는데, 이름은 그렇게 붙였지만 아마도 요즘의 저널 클럽 같은 모임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에는 니시나 그룹의 연구원들뿐 아니라 나가오카 연구실의 스기우라 요시카쓰, 니시카와 연구실의 기코치 세이시, 다카미네 연구실의 후지오카 요시오 등 원자물리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모임은 당시 일본의 대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게도 상하 구별 없이 토론이 벌어지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도모나가는 젊고 활기찬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3개월이 지난 후, 도모나가는 리켄의 분위기는 마음에 들었지만 여전히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고 니시나에게 말했다.

“모두가 뛰어난 사람만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니시나는

“아니야,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네. 자네라면 할 수 있어.”

라고 격려해 주었다.2) 그래도 도모나가는 생각을 좀 더 해 보고 상의도 하겠다고 니시나에게 말하고 일단 교토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때 도모나가는 이미 결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리켄에서 지내던 하숙집을 해약하지 않고 짐도 그대로 두고 몸만 돌아갔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9월에 다시 돌아온 도모나가는 드디어 정식으로 리켄의 연구원이 되어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니시나의 연구실에서 이론물리학자는 처음에는 도모나가뿐이었는데, 다음 해 역시 교토대 출신인 사카타 쇼이치가 합류했다. X선 분석을 위해 합류한 응용화학과 출신의 다케우치 마사(竹內柾, 1911‒2001)는 도모나가에게 만담을 소개해 주었는데, 도모나가는 만담에 재미를 붙여, 나중에는 좋아하는 만담가의 흉내를 내는 등 자주 보러 다니게 되었다. 연구실의 장이면서도 연구원들을 격의 없이 대하던 니시나는 소속 연구원들을 별명으로 불렀고, 니시나 본인도 선생님 대신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별명은 얼굴이 하얗고 네모나다고 해서 하쿠반(白板)이었다. 니시나는 보어 연구소에서 경험한 바가 있어서인지, 토론하기를 좋아해서 연구실이든 도서관이든 일단 토론에 불이 붙으면 끝날 줄 몰랐다. 연구에 몰두하는 니시나였지만, 연구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 종종 긴자의 카페에 가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고 일요일에는 자주 하이킹을 다녔다. 걷기를 좋아하던 도모나가도 하이킹에 따라가곤 했는데, 허약했던 도모나가의 체력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니시나 연구실의 이러한 유쾌한 분위기에 도모나가는 빠져들었고, 건강도 차츰 좋아져서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매주 열리는 콜로퀴움에서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두뇌 회전이 빠른데 압도되었다고 했지만 곧 도모나가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의견이 분분할 때면 도모나가에게 조언을 구하게 되었고, 그의 명쾌한 설명에 모두 만족하곤 했다. 니시나는 “도모나가 군만큼 머리가 좋은 사람은 없다”고 할 만큼 도모나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도모나가가 리켄에 합류한 1932년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물리학에서는 중요한 발견이 잇달았던 특별한 해다. 채드윅이 중성자의 존재를 확인했고, 칼 앤더슨이 우주선 속에서 양전자를 발견했으며, 해럴드 유리가 전년도에 발견한 중수소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또한 러더퍼드의 제자들인 콕크로프트와 월튼은 제대로 작동하는 가속기를 처음으로 만들어서 양성자로 리튬 원자를 때렸다. 이에 따라 니시나의 콜로퀴움도 열기를 더해갔다. 도모나가는 니시나와 함께 디랙의 이론을 이용해서 전자와 양전자의 쌍생성을 연구했다.

그림 2. 현재 도잔소의 모습.그림 2. 현재 도잔소의 모습.

1933년 여름 니시나, 도모나가, 사카타 세 사람은 연구를 위해 시즈오카 현 고텐바 시(御殿場 市)에 위치한 호텔인 도잔소(東山莊, Tozanso)를 찾았다. 고텐바 시는 후지산 남동쪽의 작은 도시이며, 하코네 산기슭에 자리잡고 아름다운 숲과 들판에 둘러싸인 도잔소는 1915년 YMCA가 컨퍼런스 센터로 위탁한 이래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용해 왔고 지금도 영업하고 있는 유서 깊은 호텔이다.

그림 3. 도잔소 위치.
그림 3. 도잔소 위치.

이들의 목표는 고에너지 감마선이 물질을 만나서 전자와 양전자가 쌍으로 생겨나는 과정을 디랙 이론을 가지고 계산하려는 것이었다. 지금은 현대물리학 교과서에 광전효과와 컴프턴 산란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다. 가시광선이나 자외선 영역의 빛이 금속을 만나면 일부가 흡수되고 전자가 튀어나오는 광전효과가 일어난다. X선 정도의 에너지가 되면 전자를 튕겨내고 나오는 X선의 파장이 길어지는 컴프턴 산란을 볼 수 있다. 전자기파의 에너지가 더욱 높아져서 전자의 정지질량에너지의 2배를 넘는 감마선이 물질을 만나면 이제 전자와 양전자를 만들어내는 쌍생성이 일어난다.

세 사람은 아침부터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계산을 했다. 그렇다고 일만 한 것은 아니다. 오후가 되면 크리켓을 하고, 일요일에는 가까운 골짜기로 피크닉을 갔다. 도모나가는 이렇게 회상한다.2)

연구도 즐거웠지만, 그곳에서 지냈던 시간은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즐거움이 넘친 것이었습니다. ... 나는 숙소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혼자 산책을 하곤 했는데 ... 밖은 아직 어둑어둑하고 아침 안개 속에서 저수지만이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 아침 안개 끝을 넘어서면 갑자기 떠오르는 아침 햇빛을 받으며 선명한 색을 띠는 붉은 후지산이 눈을 막 뜬 파란 하늘 속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후지산 중간에는 토성의 띠와 같은 하얀 구름이 둘러싸면서 산의 표면에 조용히 그림자를 던집니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물리학 연구와 자연의 아름다움에 젖어서 보낸 여름은 도모나가의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여름이 끝날 무렵 이들은 원하는 결과를 얻어서, 만족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돌아와 리켄에서 강연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참고문헌 [3]이 이들의 논문이다. 이렇게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훌륭한 논문으로 결실을 맺고, 이것을 계기로 도모나가가 세계적인 학자로 발돋움을 했으면, 평범한 해피엔딩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물론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알고 보니 이미 외국의 다른 연구자들이 같은 연구를 해서 논문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미국 칼텍의 오펜하이머와 플레셋의 논문 “On the Production of the Positive Electron”,4) 그리고 영국 브리스톨 대학의 하이틀러와 사우터의 논문 “Stopping of fast particles with emission of radiation and the birth of positive electrons”5)이 그것이다. 이 논문들은 도모나가들의 논문에 인용되어 있다. 게다가 니시나, 도모나가, 사카타의 논문에서 사용한 근사 방법은 특정 영역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6)

도모나가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역량이 부족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서 무척 창피했고, 자신의 존재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신은 학문의 진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괴로워했다고 쓰고 있다.2) 도모나가와 같은 사람도 젊은 시절에는 이런 일을 겪는 것이다. 물론 그런 약점이 있어도, 이들의 논문도 역시 오펜하이머-플레셋의 논문과 하이틀러-사우터의 논문을 확인한 독자적인 업적으로 충분히 인정받고 있기는 하다.7)

다음 해인 1934년 사카타는 오사카 대학이 신설되면서 강사로 부임하는 유가와의 조수가 되기 위해 리켄을 떠났다. 그다음 해인 1935년에 유가와는 훗날 그에게 노벨상을 가져다 준 메손을 통한 핵력 이론을 발표했다. 1937년 도모나가는 하이젠베르크 그룹에 합류하기 위해 일본을 떠났다. 일본의 이론물리학이 막 꽃봉오리를 피우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각주
1)도모나가 신이치로 지음, 윤라현 옮김, 스핀은 돈다 (참과학, 2019).
2)미야타 신페이 지음, 김정식 펴냄, 과학자의 자유로운 낙원 (약산출판사, 2005).
3)Y. Nishina, S.i. Tomonaga and S. Sakata, On the photo-electric creation of positive and negative electrons, Sci. Pap. Inst. Phys. Chem. Res. 24S17, no.Supplement 17, pp.1-5 (1934).
4)J. Oppenheimer and M. Plesset, On the Production of the Positive Elec- tron, Phys. Rev. 44, 53 (1933).
5)W. Heitler and F. Sauter, Stopping of fast particles with emission of radiation and the birth of positive electrons, Nature 132, 3345 (1933).
6)P. A. Krachkov, R. N. Lee and A. I. Milstein, Photoproduction of e+e pair in a Coulomb field near the threshold, Phys. Lett. B 835, 137498 (2022).
7)J. H. Hubbell, Electron-positron pair production by photons: A historical overview, Rad. Phys. Chem. 75, 6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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