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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CS PLAZA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 100주년

작성자 : 조성호 ㅣ 등록일 : 2024-12-20 ㅣ 조회수 : 726

저자약력

조성호 교수는 Brown대학교 이학박사(1968)로 1971년부터 고려대학교 이과대학 물리학과 교수, 1989-1993년 한국물리학회 부회장 겸 학술지 편집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동대학교 명예교수, 영국물리학회 펠로,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springchoh@daum.net)

<물리학과 첨단기술> 2024년 9월호 물리 이야기 “막스 보른의 양자역학과 그 해석”에 의하면 양자역학(Quantenmechanik)이란 용어를 1924년에 처음 제안한 사람은 막스 보른(Max Born)이고1) 따라서 2024년은 양자역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생긴 지 만 100년이 되는 해다. 그러면 양자역학(量子力學)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일까? 어느 물리학 사전에 ‘전자기파와 원자 구조 모두를 시종일관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양자론(量子論: Quantum theory)에 기초한 역학의 한 체계로서, 주로 물질과 복사선의 상호작용, 원자의 구조와 원자 내 입자의 운동 및 관련된 현상들을 다룬다’라고 되어있다. 전에 배웠던 양자역학 과목으로 ‘양자역학 수립과정’을 얼마나 잘 이해하였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봄도 의미 있을 것 같아 정리해 보았다.

양자역학은 위 정의에서 보듯이 1900년 12월 막스 플랑크(Max Planck)가 발표한 양자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 시점은 엄밀히 말해 아직 19세기이다. 왜냐하면 1901년부터가 20세기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19세기에 이룩한 대표적 이론과 실험을 한 가지씩 꼽으라면 필자는 서슴없이 막스웰(J.C. Maxwell) 방정식과 마이컬슨-모올리(Michelson-Morley)의 실험을 들겠다. 이 이론과 실험으로 ‘빛은 전자기파의 일종으로 파동의 전파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매질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진공 중에서 광속도 c로 퍼진다’라는 개념이 정립되었다.

그런데 양자론이 나오기 직전,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발견들이 줄지어 보고되었다. 1895년 뢴트겐(W.C. Röntgen)은 음극선 방전 과정에서 투과력이 매우 강한 복사선을 발견하여 아내의 반지 낀 손가락 사진을 찍었으나 그 정체를 확인하지 못하여 이를 미지의 광선이라는 뜻으로 X-선으로 명명하였다. 같은 해에 마르코니(G. Marconi)는 헤르츠(H.R. Hertz)가 1887년에 실험실에서 처음으로 발진시킨 전자기파를 무선 통신에 이용하였고, 브라운(K.F. Braun)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텔레비전과 디스플레이의 원조인 오실로스코프를 발명하였다.

1896년 광학을 주로 연구하던 베크렐(A.H. Becquerel)은 형광 물질인 우라늄 염에서 방사선이 나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였고, 1898년 큐리 부부(Pierre and Marie Curie)는 우라늄광(pitchblende)을 대량으로 농축하여 원소들을 분리하고 분석해서 두 개의 새로운 원소 폴로늄(84Po)과 라듐(88Ra)을 발견하였는데, 폴로늄은 큐리 부인의 조국 폴란드(Poland)를, 라듐은 방사능(radioactivity)을 상징하는 뜻이다. 이와 같은 공적으로 1901년부터 시상한 첫 노벨 물리학상은 뢴트겐이, 1903년 노벨상은 베크렐과 큐리 부부 3인이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1909년 노벨상은 1901년 대서양 횡단 무선 통신에 성공한 마르코니가 브라운과 함께 무선 통신의 발전에 이바지한 업적으로 받았다.

19세기 말 당시 물리학의 큰 미해결 문제 중 하나는 흑체복사(blackbody radiation) 이론이었다. 대장간에서 쇠붙이의 온도가 낮으면 검게 보이다가 온도가 높아지면 점점 붉어지고 쇠붙이에서 방출되는 전체 에너지는 절대온도 T4에 비례한다는 스테판-볼츠만(Stefan-Boltzmann) 법칙이 1879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절대온도 T인 흑체는 그 물체가 받는 모든 전자기파를 완전히 흡수하고, 또 온도 T에서 방출할 모든 열 복사선(thermal radiation)을 내뿜는 이상적인 흡수-방출체이다. 이를 속이 빈 3차원 입방체로 이상화하여 이 공동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파동을 계산해서 각 자유도 당 kT/2 씩 (k: 볼츠만 상수) 에너지가 등 분배된다는 가정을 적용하여 이 공동의 작은 구멍을 통해서 나오는 복사선의 에너지 분포를 이론적으로 계산한 것이 래일리-진스(Rayleigh-Jeans) 공식이다. 이를 수식으로 나타내면

\[I _{\nu} =8 {\pmb{\pi }} c ^{-3} \nu ^{2} kT\]

이다. 여기서 c는 광속도, \(\small\nu\)는 파동의 진동수이다. 이 식은 낮은 진동수 영역에서 실험적인 복사선 강도와 일치하나 높은 진동수 영역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고 전체 복사량이 무한대로 발산하는 결점이 있다. 한편 온도 T 때 방출되는 최대 세기의 복사선 파장(λ)은 T에 반비례한다는 빈(W. Wien)의 자리옮김 법칙(Wien’s displacement law)과, 자유도 당 평균 에너지가 \(\small k β\nu/\exp(β\nu/T)\)를 쓰면 복사선의 에너지 분포는 다음과 같다:

\[\begin{align} &λ_{\max} T = \textsf{상수}\\&I_\nu = 8{\pmb\pi}c^{-3} kβν^3 / \exp(βν/T)~~~~(\beta = \textsf{상수})\end{align}\]

이 관계식들은 높은 온도 영역에서 실험과 잘 일치하였다.

위 두 식(\(\small I_\nu\))이 각각 낮은 진동수 영역과 높은 진동수 영역에서의 실험 결과와 일치함에 착안한 플랑크는 1900년 12월 위 두 식을 동시에 만족하는 수식을 다음과 같이 찾아냈다.

\[I_\nu = 8{\pmb \pi}c^{-3} ν^{2} hν / [\exp(hν/kT) – 1]~~~~(h=\textsf{상수})\]

플랑크는 위 식을 얻기 위해서는 흡수나 방출되는 에너지가 연속적이 아니고, 어떤 일정하고 더 나눌 수 없는 에너지 덩이인 양자(量子: quantum)의 배수로만 가능하다는 즉,

\[E=nhν~~~~(n=1, 2, \ldots \textsf{정수})\]

형태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해야만 함을 알아내었다. 여기에서 h는 플랑크 상수이다.

한편 1897년 전자를 발견한 톰슨(J.J. Thomson)을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Cavendish) 연구소로 찾아온 뉴질랜드 태생의 러더퍼드(E. Rutherford)에게 최근 발견된 방사능의 정체를 알아보자고 제안하였다. 러더퍼드는 1899년 방사선 중 알파선(\(^2_4\)He 원자핵)과 베타선(전자)을, 감마선은 2년 후 다른 사람이 확인하였다. 1903년부터 러더퍼드는 소디(F. Soddy)와 함께 U→Pb로 14번이나 원자핵이 달라지는 방사성 감쇠(radioactive decay) 계열을 연구하여 1908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11년 러더퍼드는 가이거(H. Geiger)와 마르스덴(E. Marsden)에게 알파 입자를 금박에 쪼였을 때의 산란 현상을 실험으로 측정하게 한 후, 실험 결과가 러더퍼드의 산란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제시함으로써 원자에는 원자의 크기보다 매우 작은 원자핵이 거의 모든 원자의 질량과 양의 전하를 띠고 있음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1905년 한 해 아인슈타인(A. Einstein)은 세 편의 논문을 모두 단독으로 발표하였다. 첫째는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라는 실험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한 것이고, 둘째는 특수 상대성 이론, 셋째는 브라운 운동의 해석이었다.

광전효과를 설명하려면 빛이 입자처럼 행동한다고 보아야만 했다. 빛의 간섭, 회절, 편광 등의 특성은 이미 19세기에 확립되었고, 빛의 속도 c 값도 막스웰의 전자기파 속도임이 증명되었을 뿐 아니라 대륙 간 전자기파 통신 등 빛의 파동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아인슈타인은 새롭게 빛의 입자성을 제시하였다. 즉 빛은 분무기로 뿜어낸 매우 작은 입자처럼 행동하고 각 입자는 E=h\(\small\nu\)의 에너지를 지녔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빛 입자 하나하나를 광자(光子: photon)라 명명하였는데, 뉴턴(I. Newton)의 빛에 대한 미립자 이론(corpuscular theory)을 우아하게 계량화하여 돌아온 것은 양자론 발전에 커다란 하나의 이정표이다.

X-선의 정체는 바클라(C.G. Barkla)에 의하여 밝혀졌다. 그는 1906년 실험으로 X-선이 빛과 같은 횡파이며 편광성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 후 라우에(M.T.F. von Laue)는 X-선이 결정체 내 밀집된 원자 간 공간에서 발생하는 회절 현상으로 X-선의 파장을 측정하는 개척적인 연구로 1914년 노벨상을 받았고, 브래그 부자(W.H. and W.L. Bragg)는 X-선으로 결정구조를 밝힘으로써 1915년 노벨상을 공동으로 수상하였으며 바클라도 1917년 노벨상을 받았다.

1911년 원자 속에 원자핵이 있다는 러더퍼드의 원자핵 모형이 확인된 직후, 1913년 보어(N.H.D. Bohr)가 원자 중에서 가장 간단한 수소(1H) 원자의 모형을 성공적으로 제안하였다. 그는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도는 태양계 모형에 정상상태와 진동수 조건을 가정함으로써 수소 원자의 스펙트럼, 즉 라이만, 발머 등의 계열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었다. 햇빛의 스펙트럼에서 수소 다음의 원소인 헬륨(2He)이 당시 아직 지구상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태양에 있는 원소라 하여 태양을 뜻하는 이름으로 붙여졌는데, 이것도 보어가 설명하였다. 그러나 스펙트럼선의 밝고 어두운 세기에 대해서는 전혀 근접할 수 없었다. 이듬해 프랑크와 헤르츠(Frank-Hertz)는 수은 증기에 전자를 쏘아 충돌시키는 실험으로 수은 원자에도 정상상태가 존재하고, 이때 전자의 에너지 변화도 양자화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실험으로 원자 내 정상상태의 존재가 입증되고 보어의 원자 모형이 타당함을 아인슈타인도 인정하게 되어 결국 그 업적으로 프랑크와 헤르츠는 1925년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다. 1916년 보어는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며 동시에 연구소 건립도 약속받았다. 1921년 건축이 완료된 2층짜리 연구소(Universitets Institut for Teoretisk Fysik)에 60명 이상의 세계적 이론물리학자들이 방문하였는데, 그중 대표적 학자는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라 할 수 있다.

1914년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도이칠란트(Deutschland)의 패배로 끝났다. 양자론의 창시자로 1918년 노벨상 수상자인 플랑크를 위시한 이 나라의 양자물리학 발전에도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1921년 노벨상을 받았을 때 그의 수상 업적은 상대성 이론 [특수 상대론(1905년)과 일반 상대론(1916년)]의 수립 업적이 아니라 광전효과(1905년)의 설명이었다. 1922년 노벨상은 1913년 수소 원자의 모형을 최초로 제안하고 보어-좀머펠트 모형 (\(\oint\)p dq=nh, p: 운동량, q: 좌표, n: 정수)으로 발전시킨 덴마크의 보어가 수상하였다. 이 해 슈테른과 게를라흐(O. Stern and W. Gerlach)는 불균일 자기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특수한 전자석을 제작하여 은(Ag) 원자의 빔을 이 불균일 자기장 영역으로 통과시킴으로써 은 원자의 공간 양자화(space quantization)의 증거를 발견하였다. 이후 1925년 고우드스밋(Goudsmit)과 울렌벡(Uhlenbeck)은 고전적 모형으로 전하를 띤 전자가 그 축을 중심으로 자전함으로써 고유 각운동량을 지니게 된다고 제안하였는데, 1928년 디랙(P.M. Dirac)은 상대론적 이론으로 전자의 전하와 질량을 가진 입자들은 고유 각운동량과 자기모멘트를 가짐을 증명하여 앞선 실험 결과의 이론적 제안을 설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전자의 스핀이고 스핀 양자수 s=1/2이다. 1913년 미국 물리학자 밀리컨(R.A. Millikan)은 기름방울 실험으로 전자의 전하를 측정하였고, 또한 1916년 광전효과를 실측하여 플랑크 상수(h) 값을 확정한 공적으로 1923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 해 컴프턴(A.H. Compton)은 X-선을 탄소에 투사시킨 산란 실험으로 X-선에도 입자성이 있음을 최초로 발견하였다. 즉, X-선도 빛과 같이 파동성뿐 아니라 입자성도 있음을 증명한 컴프턴은 1929년 노벨상을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4년, 프랑스의 왕족 드 브로이(L.V.P.R. de Broglie)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물질파 이론(theory of matter wave)을 제창하였다. 즉, 운동량 p인 물질파의 파장 λ는 플랑크 상수 h와

\[λ = h / p\]

로 연관된다는 것이다. 이 논문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의 도움을 청하였으며, 이에 아인슈타인은 ‘매우 인상적’이라 언급하였다 한다. 빛과 X-선이 모두 파동성과 입자성이 있음이 확인되어 전통적인 입자에도 파동성이 있다는 개념의 확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모든 아원자 입자들은 입자나 파동의 형식으로 운동을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1924년 드 브로이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보른은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학술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1927년 전자의 회절(파동 현상)을 미국의 데이비슨(C.J. Davisson)과 저머(L. Germer) 그리고 영국의 톰슨(G.P. Thomson)이 발견하였는데, 이는 드 브로이의 가설을 실험적으로 확증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드 브로이의 새 개념은 1929년도 노벨상으로 인정받았고, 데이비슨과 톰슨은 1937년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1924년 또 다른 중요 발견은 오스트리아 출생 스위스 물리학자 파울리(W.E. Pauli)의 배타 원리(exclusion principle)이다. 이 원리는 원자 내 전자들이 똑같은 양자상태를 취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그는 이 원리로 원소의 주기율표를 설명할 수 있었다. 파울리는 배타원리의 발견 업적으로 1945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1931년 방사능의 베타-붕괴에서의 미지 입자로 ‘중성미자(neutrino)’의 존재를 예언하였는데, 중성미자는 1956년에야 실험적으로 확인되었다.

사진 1. 1932년 노벨상 수상자안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사진 1. 1932년 노벨상 수상자안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

1925년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는 보어의 수소 원자 모형의 미진한 숙제를 해결하였다. 정상상태와 진동수 조건에 더하여 정상상태 간 전이확률을 구할 수 있도록 양자 상태와 연산자를 행렬 형식으로 기술하여 양자역학을 최초로 수식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그가 24세 때였고, 그후 보른, 조던(P. Jordan)과 함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dg(p,q)/dt = -2{\pmb \pi}i (gH – Hg)/h~~~~(H:~ \textsf{해밀턴 함수})\]

1926년 슈뢰딩거(E. Schrödinger)는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을 이론적으로 발전시켜 파동 형태의 방정식을 다음과 같이 수립하였다.

\[\{ (- \hbar ^{2} /2m) \nabla ^{2} +V( {\pmb{r}} ,t) \} Ψ ( {\pmb{r}} ,t)=i \hbar \partial Ψ ( {\pmb{r}} ,t)/ \partial t\]\[\begin{align} & Ψ : \textsf{파동함수(고유함수), 복소수} \\&V : \textsf{퍼텐셜 에너지} \\&\hbar ~ : h/2\pmb{\pi} \end{align} \]

그뿐 아니라 양자역학에 대한 행렬 형식과 파동 형식이 수식화 차이뿐이고 두 식의 결과가 같다는 것을 슈뢰딩거가 증명하였다. 이 식에 나오는 파동함수(Ψ)는 복소수여서 |Ψ|2이 실수가 되고, 보른은 이것을 입자의 존재 확률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래서 파동함수 Ψ는 확률 파동이라는 것이다. 보른은 파동함수에 대한 의미와 해석의 업적으로 1954년도 노벨상을 받았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가 성립함을 이론적으로 증명하여 고전물리학에서의 인과론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Delta x \cdot \Delta p > h\]\[ (\Delta x : \textsf{위치의 불확정도}, \Delta p : \textsf{운동량의 불확정도})\]

이때 코펜하겐 해석이라고도 불리는 보어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의 행렬, 확률, 불확정성, 파동-입자 상보성 등이 발표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을 창설한 업적으로 1932년 노벨상을 단독 수상하였다.

1927년 디랙은 양자역학의 슈뢰딩거 방정식과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론을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소위 디랙 방정식이라고 불리는 다음 수식을 도출하였다.

\[i α ∇Ψ + (mc/\hbar) βΨ = (i/c) ∂Ψ/∂t\]\[\begin{align} & Ψ, α, β~:~ \textsf{정방형 행렬}\\ &Ψ ~:~\textsf{파동함수} \end{align} \]

이 이론으로 입자(particle)에는 반드시 반입자(anti-particle)가 존재해야 함을 예언하였다. 1932년 앤더슨(C. Anderson)이 우주선(cosmic ray) 측정 실험에서 양전자(positron; 전자의 반입자)를 발견하여 디랙 방정식의 예측을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하이젠베르크는 ‘우리 세기에 물리학이 이룩한 모든 도약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1932년 디랙은 케임브리지 대학 수학과 루카스 석좌교수에 취임하였는데, 이는 과거 뉴턴이 지녔던 명성 있는 직함이었다. 이듬해인 1933년 디랙은 슈뢰딩거와 함께 양자역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1930년 로런스(E.O. Lawrence)는 자기장을 이용하여 입자를 가속하는 최초의 사이클로트론(cyclotron)을 발명한 후 이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인공 방사성 원소를 만드는 등의 업적으로 1939년도 노벨상을 받았다.

1932년 채드윅(J. Chadwick)은 원자핵에 있는 중성자(neutron)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양성자(proton)와 질량이 거의 같으나 전하를 띠지 않아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이 발견의 업적으로 채드윅은 1935년도 노벨상을 받았다. 20세기 후반 물리학의 큰 주제는 원자핵을 이루는 양성자와 중성자를 구성하는 소립자(elementary particle)들이었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 장치는 초대형의 입자 가속기로 미국 페르미 연구소의 테바트론(Tevatron)은 원형궤도의 지름이 2 km나 되고, 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CERN)의 대형 강입자 충돌기(LHC)의 둘레는 무려 27 km에 달한다

사진 2. 1933년 노벨상 수상자인 (위) 슈뢰딩거(E. Schrödinger)와 (아래) 디랙(P.M. Dirac). 사진 2. 1933년 노벨상 수상자인 (위) 슈뢰딩거(E. Schrödinger)와 (아래) 디랙(P.M. Dirac). 사진 2. 1933년 노벨상 수상자인 (위) 슈뢰딩거(E. Schrödinger)와 (아래) 디랙(P.M. Dirac).

양자역학 수립에 공헌한 주요 학자 10명을 꼽는다면, 막스웰, 볼츠만, 플랑크. 아인슈타인, 러더퍼드, 보어, 하이젠베르크, 드 브로이, 슈뢰딩거, 디랙 등이라면 어떨까?

1933년 1월 히틀러(A. Hitler)가 도이칠란트의 총리가 되면서 유럽의 정치적 환경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물리학의 거장인 아이슈타인, 페르미, 보어의 행적과 업적이 어떻게 되었는지 간단히 언급하며 이 글을 마친다.

아인슈타인은 베를린 소재 빌헬름 황제 연구소(Keiser Wilhelm Institute)에 재직하며 1921년 노벨상을 받고, 1925년 통일장 이론 연구로 연구 영역을 확장하였다. 1930년과 1931년 두 번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칼텍(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초청을 받았으며, 1933년 미국 동부 뉴저지(New Jersey)주 프린스턴(Princeton) 대학의 고등연구소(Advanced Institute) 초대 교수로 초빙되었다(계약 조건: 5년간 200만 달러, 부대조건 없음; 미확인). 1935년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에서 얽힘(entanglement)을 최초로 언급하였는데,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 등의 EPR 논문을 통한 반론은 유명한 화젯거리였다.3)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도이칠란트가 원자 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고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미국은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을 실행하게 되었다. 빛(광자)과 같이 정수 스핀을 지닌 입자를 보존(boson)이라 하며, 이러한 입자 무리의 통계적 거동을 보즈-아인슈타인(Bose-Einstein) 통계라 한다. 보존(boson)계의 파동함수는 대칭적 특성을 갖는다.

이탈리아 로마대학 교수였던 페르미(E. Fermi)는 원자핵에 중성자를 때려 새로운 방사성 동위원소(radioisotopes)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고 에너지 중성자를 열중성자(thermal neutron)로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어 저 에너지 중성자에 의한 원자핵 반응을 실험하였다. 이 연구는 장차 원자핵 에너지와 원자폭탄을 가능케 하는 기초가 된다. 이 업적으로 1938년 노벨상 수상 후, 출국한 기회에 독재자 무솔리니가 통치하는 조국을 떠나 미국 시카고 대학 교수로서 1942년 인류 최초의 원자로를 건조하였으며, 이후 맨해튼 계획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전자같이 스핀 값이 반기수인 입자들을 통칭하여 페르미 입자(fermion)라 부르며 이들 입자 무리를 통계적으로 다루는 수학적 표현을 페르미-디랙 통계라 한다. 페르미온 계의 파동함수는 반대칭 적이다. 오늘날 미국 최대 규모의 가속기 연구소가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다.

덴마크의 보어 교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13년 수소의 원자 모형을 최초로 제안하고 1916년 코펜하겐 대학 교수로 취임한 후 1921년 이론물리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원자 구조 연구 업적으로 1922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직관으로 세계의 구성 성분을 감지하고, 철학자처럼 사색하고 시인처럼 단어와 씨름한다는 평을 받았다. 1927년 코모 학회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물리학적 이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다. 그 내용은 i) 파동․입자의 상보성 개념, ii) 불확정성 원리, iii) 양자역학 해석에서 측정 등으로, 이를 ‘코펜하겐 해석’이라고도 하며 에 투고하였다. 그의 이론물리학 연구소를 다녀간 젊은 학자 중 대표적인 인물로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 디랙 등을 꼽을 수 있다. 파울리는 1922년 이 연구소를 방문한 후 1924년 배타원리를 발표하였고,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 2주간 방문을 시작으로 1944년까지 가장 여러 번 방문한 학자로 1925년 행렬 형식의 양자역학을 발표하였다. 이 연구소에서 1927년 2편의 논문을 발표한 디랙은 그중의 첫째가 자신의 보물이고, 둘째가 양자장 이론이라 하였다. 1943년 나치 돌격대가 코펜하겐 거리를 휩쓸며 유대인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유대인인 보어는 급히 가족과 함께 소형 어선으로 해협을 건너 스웨덴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서 맨해튼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1941년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에게 보여주었던 반응장치 설계도를 보어가 지참하였다가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인 오펜하이머(J.R. Oppenheimer)에게 보였더니, 무기 개발에는 쓸모없다고 결론지었다 한다.

끝으로 초벌 원고를 읽고 조언해 준 서울교육대 과학교육과 박일우 교수에게 감사한다.

각주
1)김재영, 막스 보른의 양자역학과 그 해석, 물리학과 첨단기술 33(9), 36 (2024).
2)Transnational College of LEX, 양자역학의 모험(What is Quantum Mechanics? A Physics Adventure), 김종오, 박성근 역 (과학과 문화, 2001); 토비아스 휘터, 불확실성의 시대(Das Zeitalter der Unschärfe Die glänzenden unt die dunkeln Jahre der Physik 1895-1945), 배명자 옮김 (흐름출판, 2023); 朝永振一郞, みすず書房, 量子力學 I, II(I: 1952, II: 1953); A. Beiser, Perspectives of Modern Physics (Mc Graw-Hill Book Co., 1969); The Essential Dictionary of Science, edited by J.O.E. Clark (Barnes & Noble Books, 2004); A Dictionary of Physics, 6th Edition (Oxford Univ. Press, 2009)
3)조성호, 양자 얽힘에서 양자 기술로, 물리학과 첨단기술 33(9), 3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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