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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이야기
프리츠 론돈(1900-1954)과 양자이론의 초기 역사
작성자 : 김재영 ㅣ 등록일 : 2025-01-14 ㅣ 조회수 : 22
김재영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물리학 기초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물리철학 및 물리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상대성이론의 결정적 순간들』, 『정보혁명』(공저), 『양자, 정보, 생명』(공저), 『뉴턴과 아인슈타인』(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사이버네틱스』,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맥스웰의 전기자기론』,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에너지, 힘, 물질』 등이 있다. (zyghim@ksa.kaist.ac.kr)
독일 출신의 물리학자 프리츠 론돈(Fritz London 1900‒1954)은 새롭게 등장한 양자역학을 화합물의 공유결합에 적용하여 그 기본 물성을 해명한 양자화학 분야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초전도체 현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론돈 방정식을 발표하고 초유동 현상을 해명했다. 그러나 론돈의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론돈은 디랙 및 요르단과 독립적으로 변환이론의 기초를 연구했고, 수학에서의 힐버트 공간을 양자역학에 적용하여 정준변환을 일반화하는 문제를 처음 다루었다. 그의 기여는 하이젠베르크, 디랙, 보른, 요르단, 슈뢰딩거의 이름 밑에 가려졌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로서 당시 처음 만들어지고 있던 양자이론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음에도 적절하게 평가받지 못한 론돈의 업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림 1. 1928년 뮌헨에서 열린 분젠 학술대회 참석자 사진 일부. 오른쪽 맨 아래 있는 사람이 프리츠 론돈이고 그보다 왼쪽에 모자를 쓴 사람이 피터 드베이에이며 그 위에 안경과 모자를 쓴 사람이 프란츠 지몬이다. 사진 맨 왼쪽 가장자리에 프리드리히 훈트가 있다.
1913년 닐스 보어는 양자이론을 적용한 원자모형을 처음 제시했다. 이 모형의 목표는 보어 자신이 요약한 대로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에 플랑크의 복사 공식을 적용하여 분광선의 측정값들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르놀트 조머펠트는 보어의 아이디어와 이론을 크게 환영하면서, 이를 당시 알려져 있던 난제 특히 제만 효과를 설명하는 문제 등에 적용할 것을 제안하고, 보어의 모형을 확장했다. 먼저 원 궤도를 타원 궤도로 확장하여 소위 ‘원자 케플러 문제’로 정리하고, 보어의 양자화 조건을 해밀턴 역학의 틀 안에서 수학적으로 정식화했다. 해밀턴-야코비 정식화의 작용-각변수 이론을 적용하여 보어의 양자화 조건을 재해석했다. 즉 일반화 운동량의 위상적분 작용량이 플랑크의 작용량 양자(\(\small h\))의 자연수 배라는 것이다.
보어-조머펠트 이론은 당시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던 원자 현상을 정교하게 계산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수소 및 수소 유사 원자의 에너지 수준(분광선 파장)과 궤도 각운동량 값을 정확히 예측하고, 자기장에서 분광선이 나뉘는 정상 제만 효과를 설명했다. 그러나 헬륨 원자나 수소 분자 이온(H\(\small {}^{+}_{2}\))의 분광선이나 전기장에서 분광선이 나뉘는 슈타르크 효과 및 비정상 제만 효과 등에서는 정밀성이 떨어지거나 설명을 시도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해밀턴-야코비 이론을 적용하는 대상이 전자와 같은 입자인지 아니면 복사나 이와 연관된 빛알(광자)에도 적용되는지 등의 문제에서 임의성이 너무 많아서 여하간 새로운 동역학 이론이 나와야 한다는 믿음이 널리 공유되었다.
1924년 막스 보른은 “양자역학을 위하여”란 제목의 논문에서 ‘양자역학 Quan- tenmechanik’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안하면서 새로운 동역학 이론으로서 양자역학이 충족해야 할 요건들을 제시했다. 1925년 여름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직관적인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파스쿠알 요르단까지 합류하여 세 명의 저자가 “양자역학을 위하여 II”(삼인작 Dreimänner- arbeit)를 발표하면서 양자역학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이젠베르크의 첫 번째 논문은 1925년 7월 말에 투고되어 9월에 출간되었다. 9월 말에 투고되어 11월에 출간된 보른과 요르단의 논문에서 처음 행렬역학이 등장했다. 디랙의 논문은 11월 초에 투고되어 12월에 출간되었다. 삼인작은 11월 중순에 투고되어 이듬해 2월에 출간되었다. 보른과 노버트 위너의 연산자 역학 논문은 1926년 1월 초에 투고되어 3월 중순에 출간되었다.

그림 2. 1928년 베를린에서 슈뢰딩거와 론돈.
1926년 1월부터 에르빈 슈뢰딩거가 “고윳값 문제로서의 양자화” 4부작 논문을 발표했다. 슈뢰딩거가 제안한 파동역학은 행렬이론처럼 당시의 이론물리학자들에게 매우 낯선 수학이론이 아니라 표준적인 교과과정에 포함되는 편미분방정식의 고윳값 문제를 풀어낼 방법을 마련함으로써 새로운 동역학 이론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볼프강 파울리가 괴팅겐 학술회의의 참가자에게 보낸 공개서한에 적은 것처럼,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새로운 동역학을 모색해 왔는데, 갑자기 새로운 동역학이 두 가지나 나타난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두 동역학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모였다.
양자역학은 행렬역학, 파동역학, 디랙의 이론, 보른과 위너의 이론(연산자 역학) 등의 형태로 제시되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로 보어-조머펠트 이론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비정상 제만 효과, 슈타르크 효과, 헬륨 문제 등)를 풀어낸 정도였다. 새 이론의 계산결과는 실험으로 측정한 값과 잘 맞아떨어졌지만, 이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적 형식체계는 아직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양자역학의 수학적 형식을 처음 체계화하고 정리한 것은 요한 폰노이만이었다. 폰노이만은 1932년에 출간된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에서 제곱적분가능한 내적벡터공간, 즉 힐버트 공간을 이용하여, 양자역학의 형식체계를 처음 구성하고 이로부터 행렬역학의 확장판과 파동역학을 상세하게 유도했을 뿐 아니라 수학적으로 그 형식체계들이 동등함을 증명했다. 여기에서 행렬역학의 확장판이라 부르는 것은 디랙이 보른-하이젠베르크-요르단의 이론에 상태 벡터가 포함되도록 확장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양자역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수학 이론인 힐버트 공간을 양자역학에 처음 도입한 것은 누구일까?
다비트 힐버트는 괴팅겐 대학에서 1926/27년 겨울학기에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에 관한 세미나 수업을 개설했다. 세미나에서 다룬 내용을 로타르 노르트하임이 정리하고, 폰노이만이 함수해석학 내용을 덧붙여 <수학연보>에 1927년 4월 6일 투고했다. 이 논문에는 ‘힐버트 공간’이란 용어는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그 개념이 처음 제시되었다고 평가된다. 폰노이만은 그중 일부를 5월 20일에 괴팅겐 학술원 수학 및 물리학 분과에서 발표했다. “양자역학의 수학적 정초”라는 제목의 이 논문에서 “하이젠베르크, 디랙, 보른, 슈뢰딩거, 요르단이 형식체계를 정립한 양자역학”을 수학적으로 어떻게 새롭게 다듬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7쪽에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힐버트 공간 Hilbertscher Raum’이다. 거기에 뒤이어 양자역학을 확률이론으로 구성해 발표했다. 폰노이만은 양자역학과 조금 다른 맥락에서 에르미트 함수연산자의 일반적인 고윳값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논문에서도 ‘힐버트 공간’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이렇게 해서 힐버트 공간을 양자역학에 처음 도입한 것은 폰노이만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런데 실상 그보다 먼저 1926년에 발표된 논문에서 ‘힐버트 공간’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했으며, 논문의 저자는 프리츠 론돈이었다.
프리츠 론돈은 21살에 뮌헨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역체계에 대한 주제로 반실증주의와 반환원주의를 논증하는 내용의 학위논문을 썼다. 지도교수는 당대의 저명한 현상학 철학자 알렉산더 펜더였다. 펜더는 에드문트 후설의 계보에 속했지만, 의지 문제를 중심으로 후설과 다른 견해를 주장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론돈은 귐나지움에 교직을 얻었고 철학자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돌연 사직서를 내고 괴팅겐으로 갔다. 막스 보른의 지도를 받아 물리학의 철학을 연구하겠다는 것이었다. 프리츠 론돈의 부친 프란츠 론돈이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고, 그에게서 수학을 배운 사람 중 하나가 보른이었다. 보른도 프리츠 론돈처럼 브레슬라우(폴란드의 브로츠와프 Wrocław)에서 태어났고 유대계 혈통이었으며 부친이 브레슬라우 대학 교수였다.
보른은 철학이 아니라 물리학을 공부하라고 제안했고, 결국 보른의 추천을 받아 론돈은 뮌헨 대학으로 가서 조머펠트의 지도로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26년 아직 두 번째 박사학위를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슈투트가르트 이론물리연구소의 페터 에발트의 조수로 가게 되었는데, 론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바로 그 무렵이 보른-하이젠베르크-요르단 삼인작이 나오고 디랙과 파스쿠알 요르단이 ‘변환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역학, 즉 행렬역학을 이해하려 애쓰던 때였다.

그림 3. 1926년 9월에 투고한 론돈의 논문 중 ‘힐버트 공간’이 처음 등장하는 페이지(197쪽).
론돈은 1926년 3월 17일 “양자역학에서 에너지 법칙과 뤼드베리 원리”라는 제목의 논문을 투고했다. 이어 5월 22일 “양자역학의 야코비 변환”을, 8월 19일 “파동역학에서 분산전자의 수”를 투고했다. 9월 19일에는 “파동역학의 각변수와 정준변환”을 투고했다. 이 논문들은 론돈이 슈투트가르트로 옮기기 전과 후에도 괴팅겐과 뮌헨의 동료들과 소통하며 새로운 이론에 끼어들 길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론돈이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의 핵심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9월 19일에 투고한 논문의 2절 제목이 “힐버트 공간에서의 회전으로서의 정준변환”이다. 프리츠 론돈의 논문에 나오는 ‘정준변환’은 보른-하이젠베르크-요르단의 행렬역학에서 등장하는 좌표변환을 가리키지만, 실상은 해밀턴-야코비 이론의 정준변환과 같다. 그 논문의 제목도 “파동역학의 각변수와 정준변환”으로서 해밀턴-야코비 이론의 틀 안에 있다. 즉 해밀턴-야코비 이론의 양자역학 버전을 만들려던 것이다.
삼인작에서 가정으로 제기되었지만 증명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새로운 역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교환관계식 \(\small p q - q p = h/2 \pi i\)를 불변으로 만드는 변환은 항상
\[P=S p S^{-1},~~~ Q=S q S ^{-1}\]
의 형태라는 것이다. 이 식은 고전역학에서 해밀턴-야코비 이론의 정준변환과 같다. 1926년 파스쿠알 요르단이 이 가정의 증명을 거의 완성했지만, 무한차원의 행렬에 대해 역행렬 \(\small S^{-1}\)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론돈은 요르단의 투고논문을 모른 채 5월 22일에 투고한 논문에서 그 어려움을 깨끗하게 해결했다.
론돈의 관심은 요르단과 마찬가지로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의 관계를 연산자의 변환으로 이해하는 데 있었다. 론돈은 9월 19일에 투고한 논문에서 과감하게 행렬역학이 아니라 파동역학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초기 버전의 행렬역학에서는 상태 개념이 불분명했고, 연산자가 정의되는 물리적 공간의 개념이 없었다. 배위공간을 정의역으로 하는 \(\Psi\) 함수를 기본으로 하는 파동역학에서는 \(\small \Psi\) 함수가 충족시켜야 할 방정식이 있었고, 이 방정식은 표준적인 편미분방정식의 고윳값 문제와 직접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 고윳값이 분광선의 파장과 같은 물리량과 직접 연결되기 위해서는 \(\small \Psi\) 함수의 변환 중에서 고유값을 불변으로 만드는 변환을 선택해야 했다. 론돈은 \(\small p \rightarrow \frac{h}{i} \frac{\partial}{\partial q}\)이라는 대응을 이용하여 행렬로부터 미분방정식을 얻을 수 있음을 제시하고, 고유함수 \(\small \Psi_i (Q)\)를 새로운 고유함수 \(\small \Psi_k \ast (Q)\)에 대해 전개할 때 전개계수 \(\small T_{ik}\)가 유리터리 변환이 됨을 보였다. 론돈은 요르단의 증명과 자신의 5월 투고논문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요건이 다름 아니라 힐버트 공간의 회전에 해당한다고 서술했다.

그림 4. 론돈의 논문 199쪽의 각주에 핀케를레와 카차니가의 함수연산자 이론이 인용되어 있다.
물리사학자 막스 야머는 새로운 양자이론과 함수공간의 선형연산자 이론을 처음 연결하여 다룬 것이 론돈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론돈은 논문의 출간이 진행되던 중 카차니가와 살바토레 핀케를레의 분배범함수 연산에 대한 연구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선형 미분연산자가 분배연산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힐버트 공간의 아핀 사영과 대응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수학자들이 탐구한 함수공간의 선형연산자 이론은 1844년에 출간된 헤르만 그라스만의 <선형확장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에서는 그라스만의 접근이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페아노의 <그라스만의 확장이론에 따른 기하해석학>(1888)을 시작으로 체사레 부랄리-포르티나 핀케를레 등이 함수해석학을 발전시켰다. 이탈리아 수학자들의 연구가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자양분이었음에도 이제까지 양자역학의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림 5. 1927년에 출간된 힐버트-폰노이만-노르트하임의 논문 첫 페이지 각주 3번에 요르단의 논문과 함께 론돈의 논문이 잘못된 서지사항으로 인용되어 있다.

그림 6. 미국 듀크 대학 재직시절의 론돈.
힐버트-폰노이만-노르트하임의 논문(1927) 첫 페이지에는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 슈뢰딩거의 논문에 대한 일반적인 형식체계를 파울리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요르단이 처음 서술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각주에서 이와 독립적으로 론돈의 논문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론돈의 논문이 요르단의 논문보다 3개월가량 이르게 투고되었지만, 론돈의 논문을 언급하기만 하고 실질적으로 처음 양자역학의 기초를 놓은 논문이 요르단의 것인 듯이 잘못된 서지정보로 인용하고 있다.
정작 요르단은 자신의 논문의 첫 번째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논문의 형식적인 결과 일부는 필자의 원고가 완성된 후 출간된 프리츠 론돈의 논문에 매우 명확하고 철저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전체의 일관성을 고려할 때 [프리츠 론돈의 논문에 대한] 몇몇 구절의 추가적인 요약은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 (교정 중 추가).” 즉 요르단은 론돈의 결과가 자신의 논문보다 선행되었음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있다. 요르단의 논문은 당시까지 등장한 양자역학의 네 가지 형식화, 즉 행렬이론, 보른과 위너의 이론, 파동역학, \(\small q\)수 이론이 모두 일반적인 형식이론의 특수한 경우임을 주장하고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론돈의 논문보다는 더 명확하게 양자역학의 일반적인 형식체계를 서술하고 있다고 사후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론돈의 논문이 더 먼저인 것은 틀림없다.
론돈은 양자역학의 기초에 대한 자신의 연구가 주목을 받지 못하자 연구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헤르만 바일이 통일장이론을 위해 제시한 척도불변이론을 게이지이론으로 바꾸어 결국 양자장이론의 기반을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일은 중력을 리만기하학으로 서술하는 일반상대성이론에 전자기력을 포함시키기 위해 스케일 변환에 대한 불변을 도입하는 이론을 전개했으나 이는 현상과 충돌했다. 론돈은 바일이 도입한 스케일 변환 대신 복소수 단위를 곱하여 위상 변환으로 바꾸면 현상과 충돌하지 않는 이론으로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론돈보다 한 해 먼저 블라드미르 포크가 이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론돈은 1927년 말 겨울학기에 슈뢰딩거의 초청으로 베를린 대학으로 옮겼고 슈뢰딩거의 조교이자 사강사로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했다. 베를린으로 옮기기 전 취리히에 머무는 동안 발터 하이틀러(Walter Heitler 1904-1981)와 함께 수소분자의 공유결합을 순전히 양자역학만으로 계산하는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1930년 분자 간의 힘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통해 판데르발스 인력을 유도했다. 슈뢰딩거는 화학연구에 파동역학을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중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와 로버트 멀리컨은 론돈-하이틀러의 방법을 변형하여 복잡한 분자의 양자역학적 서술을 위한 틀을 차근차근 마련해 가고 있었다. 실상 그 이론적 틀은 매우 불안한 기반 위에 있었고 실용주의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실험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었다. 론돈은 그런 미국인들의 태도를 좋지 않게 여겼다. 이들이 더 근본적인 이론 구축이라는 물리학의 핵심과제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보았다.

그림 7. 프리츠 론돈의 초상화.
1933년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디랙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위해 나란히 스톡홀름으로 가는 배에 승선했지만, 그해 론돈은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영국으로 가는 배에 올라야 했다. 나치가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면서 다음 학기 강의도 사라지고 어쩔 수 없이 독일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대학에서 론돈의 선임자였던 슈뢰딩거와 폰라우에는 적극적으로 나치의 정책에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를 냈지만, 론돈의 자리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론돈을 끌어준 것은 클라렌던 연구소의 소장 프레데릭 린데만이었다. 발터 네른스트의 제자였던 린데만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고, 론돈이 자신의 연구에 직접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 그를 옥스퍼드로 초빙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린데만은 역시 네른스트의 제자였던 프란츠 지몬을 옥스퍼드로 데려갔는데, 지몬은 저온물리학 연구팀을 만들려 했고, 론돈은 주저하지 않고 지몬의 실험실에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론돈은 헬륨 초유동의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초유동을 보슈-아인슈타인 통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의 첫 단계를 열었으며, 1950년대에 초유체에 대한 두 권의 선구적인 저서를 냈다.
론돈은 양자역학의 초기사에서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의 연결고리를 찾는 과정에서 변환이론에 주목하고 특히 함수공간의 선형연산자 이론을 도입함으로써 힐버트 공간 정식화의 첫걸음을 뗀 사람이지만, 그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론돈이 슈트르가르트로 옮겨간 탓에 당시 막 생겨나던 새로운 양자이론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소외되었던 탓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론돈은 괴팅겐과 뮌헨에서 이미 새로운 양자역학을 학습하고 이를 더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으며, 편지로 보른과 계속 소통하고 있었다. 다른 측면으로 원래 전공이 철학 특히 현상학이라서 그의 접근 자체가 철학적인 면에 치우쳐 있던 탓이라 추측해 볼 수 있지만, 론돈의 논문을 상세하게 살펴보면 오히려 매우 엄밀한 수학적 증명을 추구했으며, 현상학 특유의 추상적 모호함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화학결합의 양자이론에 대한 기여가 주로 조명을 받다 보니 초기의 기여는 주목받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론돈은 양자역학의 여러 형태들 사이의 동등성을 일반적으로 증명하고 변환이론과 힐버트 공간 이론을 중심에 두어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면밀하게 밝히는 일을 꾸준하게 진행하기에는 너무 아이디어가 풍부했던 걸지도 모른다. 화합물의 공유결합을 양자역학으로 설명하거나 초전도성, 초유동 등을 연구한 론돈의 접근을 피상적으로 보면, 완결된 양자역학을 현상에 실용적으로 적용하는 전형적인 물리학자의 모습인 것 같다.

그림 8. 1939년에 출간된 론돈과 보에의 책 첫 페이지.
그러나 실상 론돈의 가장 큰 관심은 세계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더 근본적이고 더 보편적인 이론이었다. 1923년 괴팅겐 대학에서 론돈을 처음 만나 평생의 벗이었던 노르트하임은 “론돈의 일생의 업적은 보기 드문 통일된 전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가 더 오래 살 수 있었다면 무엇을 더 발견했을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매우 다양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옷감 전체에서 잘라낸 단위이자 과학적 사고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돋보인다.”라고 말하고 있다.
론돈이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까닭은 여러 형식의 양자역학 논의에서 다른 물리학자들이 적절하게 인용하거나 더 깊이 다루지 않은 탓이 클 것이다. 힐버트-폰노이만-노르트하임이나 요르단의 논문에는 사후에 교정 과정에서 론돈의 논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언급만 있을 뿐이다.
양자역학의 기초에 대한 론돈의 접근을 통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연속성 문제를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양자역학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최종적인 모습으로 바라보면 고전역학과는 사뭇 다르지만, 해밀턴-야코비 이론이라는 매개적인 관점을 통해 보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차이는 수학적 상세함에 있을 뿐 근본적인 개념적 전환과 거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보어의 직관적인 모형과 달리 조머펠트는 고전역학의 해밀턴-야코비 정식화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고전역학을 라그랑주 정식화나 해밀턴 정식화가 아니라 해밀턴-야코비 정식화로 이해하면, 파동광학과 기하광학을 통일적으로 다룰 수 있다.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보른-하이젠베르크-요르단의 행렬역학도 해밀턴-야코비 정식화를 통해 통일적으로 다룰 수 있으며, 그 동등성을 힐버트 공간에서의 ‘회전변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해밀턴-야코비 정식화의 수학적 형식체계에 주목하면, 그 세부적인 내용이 고전역학부터 보어-조머펠트 이론을 거쳐 변환이론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점진적으로 변했다는 주장이 가능하며, 소위 입자-파동 이중성도 기학광학과 파동광학의 관계를 통해 다른 관점에서 다룰 수 있다.
프리츠 론돈의 생애를 양자역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여러 공동체가 맞물리는 접점으로 이해하면, 양자역학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과학사학자 스티브 하임스는 론돈의 연구가 세부적인 물리학의 주제보다 오히려 메타과학으로서의 특징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1939년 론돈은 프랑스 물리학자 에드몽 보에(Edmond Bauer)와 함께 양자측정 이론을 다룬 책을 발표했다. 이 책에 담긴 새로운 접근에는 철학적 현상학의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그동안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계보의 코펜하겐 해석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최근에 다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