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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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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CS PLAZA

재미 물리학자 고 李文鐘(Rhee, Moon-Jhong: 1935-2024) 교수의 일주기를 맞이하여

작성자 : 조성호 ㅣ 등록일 : 2025-04-11 ㅣ 조회수 : 660

이문종 교수
故 이문종 교수

1935 - 2024

약력

1935

평안남도 신안주에서 출생

1954-58

서울대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이학사

1958-60

서울대 대학원 물리학과  이학석사

1966-70


미국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Space Science and  Applied Physics, Ph.D

1970-2005


미국 Univ. of Maryland,  Electrical & Computer  Engineering Dept.
College Park, MD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
서울대, 포항공대, 독일과 아르헨티나 대학에서 연구년

2005-24

Univ. of Maryland 명예교수


지난해 4월 이문종 교수의 부음을 전자 우편으로 받은 지 어느덧 한 해가 지났다. 그는 필자와 대학 4년간 그리고 대학원 2.5년간 매우 가깝게 지냈던 학우이며 필자에게 큰 영향을 준 학형이었다. 1960년 석사학위를 함께 받은 이후 도미 유학길에서 서로 헤어지기 이전까지의 기억을 주로 더듬어 고인을 회고한다.

1954년 대학에 입학한 우리 학년은 행운아들이다. 1950년 6.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고, 1954년 4월 대학에 입학하여 4년간 평화스럽게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입학 우리 동기생들은 같이 잘 어울리고 세미나와 소프트볼 운동도 함께 즐기며 친하게 지냈다. 우리 과에서 이문종과 배명승 두 동기생은 물리 실험의 도사라고 할 만큼 실험에 뛰어난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1955년 물리학과 실험실에 실험무선국 HL2AA를 체신부에서 허가받아 세계 아마추어 무선국들과 교신도 하였다. 그 후 이 두 친구의 도움에 힘입어 진공관 회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 무선국에서 진공관 5구 스퍼 헤테로다인 식 라디오를 밤샘 조립한 적도 있었다.

1957년 4학년이 되었을 때 과 교수님 대부분은 외국 유학을 떠나셨다. 1학년 때 일반물리학과 2학년 때 일반역학을 담당하셨던 윤세원 선생님은 1956년 미국 아르곤 국제 원자력학교에 유학 후 귀국하셨으나 원자력 과장직을 맡으시면서도 학과의 전임교수가 거의 출타 중이시어 양자역학과 연구실험 두 과목을 담당하셨다. 이때 연구실험은 4명씩 조를 짜서 각 조가 서로 다른 주제를 집중적으로 장기간 실험하는 방식이었다. 윤 교수님은 당시 세계 물리학의 중추적인 대형 실험 장치가 입자 가속기임을 보시고 오신 직후여서 우리에게 ‘진공 기술’과 ‘전자석’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권숙일, 이문종, 정명숙과 필자를 포함한 우리 조는 전자석을 만들기로 하였다.

우리 조는 저자가 Bates로 기억되는 전자석에 관한 책 을 함께 공부하며 소형 전자석을 직접 설계해서 제작함을 실험 주제로 삼았다. ㄷ자형 요크(yoke: 자속이 통과하는 철심부)의 가로와 세로를 각각 10.0 cm로 정하고 ㄷ자의 양쪽 끝부분에 8.0 cm의 구멍을 뚫어 여기에 원통형 자극을 양쪽에서 끼게 하였다. 이때 한쪽 자극은 반 고정형이고 다른 한쪽에는 나선을 깎아 자극 간 거리를 가변할 수 있게 하였다. 두 원통형 자극의 서로 마주 보는 끝부분을 약간 뾰족하게 깎아내어 실제 지름은 8.0 cm보다 작게 하였다. 이 설계도를 서울시 영등포 열차역 근처에 있는 大韓重機에 제작을 의뢰하였다. 자극 간 거리 5.0 cm에서 1.5~2.0 T의 자기장을 얻을 수 있도록 필요한 기자력을 계산하여 둥근 자극에 끼울 수 있게 코일 감개에 550회씩 감아 여기에 전류를 공급할 커다란 축전지를 준비하였다. 당시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대용량 축전지는 아마도 6.25 전쟁 중 해군 함정에서 사용했었던 중고품이었을 것이다.

요크의 코일 감개(bobbin) 두 개와 두 개의 자극을 끼워 넣은 전자석을 올려놓을 수 있는 지지대를 이 학형이 나무로 짰는데 여기에 전류계와 스위치 등을 부착해서 올려놓은 전체 질량은 약 250 kg 정도였다. 코일 두 개는 직렬로 연결하고 축전지 전원부와 코일 사이에 가변 저항기를 넣어 전류의 세기를 조절하였다. 전자석 자극 사이의 자기장은 탐색코일(search coil)을 써서 이를 자극 사이에 넣었다가 뺄 때 탐색코일을 꿰뚫는 자기 선속의 변화를 탄동검류계(ballistic galvanometer)로 측정해서 계산해 낼 수 있었다. 이 전자석이 1T 정도의 자기장을 얻을 수 있었던 우리나라에서 설계 제작된 최초의 것이었을 것이다.

전자석 제작을 완성한 것은 1957년 10월 경으로 기억한다. 일단 전자석이 완성되었으므로 이것을 활용할 방도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 전자석으로 제일 먼저 시도했던 것은 강자성체의 이력 곡선(hysteresis curve)을 오실로스코프의 화면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연구실험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음 해 3월 말 졸업하기 전에 치러야 하는 대학원 입시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입시 과목에 전자기학이 포함되어 있으며, 전자기학은 역학에 비하여 훨씬 복잡하고 우리들의 이해 수준도 미흡했었다. 그리하여 우리 조는 대학원 입시 준비를 위하여 세미나를 했었다. 당시 우리가 썼던 책은 미국 McGraw-Hill 출판사에서 1949년에 출간한 G.P. Harnwell 저작의 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서로 돌려가며 세미나 형식으로 공부하다가 책의 중간쯤에서 ‘Nuclear Induction’이라는 소제목을 보았는데, 이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브로흐(F. Bloch) 교수가 중심이 되어 학술지(Physical Review)에 발표했던 내용이었다. 이 업적으로 브로흐 교수는 하버드 대학의 퍼셀(E.M. Purcell) 교수와 함께 1952년 노벨상을 받은 원자핵 자기공명(Nuclear Magnetic Resonance)의 한 가지 실험 방법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간단한 내용을 보았을 때 그의 방법을 흉내 내서 핵자기공명을 실측해 봄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아 이 학형이 먼저 우리가 한번 시도해 보자고 제안했었다. 그는 우선 브로흐의 연구논문을 찾아내어 자세한 실험 방법을 공부한 후, 당시 학과 실험실에서 동원할 수 있는 실험 기기로 가능한지를 알아보자고 하였다. 이 학형은 자신이 잘하는 고주파 회로를 자기가 맡을 터이니 다른 세 사람도 각자 분담해서 할 일을 맞자고 하였다. 이 실험에 꼭 필요한 전자석은 이미 완성해 놓은 상태라서 원자핵 유도 공명을 위하여 자극 사이에 넣을 수 있게 시료와 시료코일을 에워싼 부분을 만드는 일은 필자가 맡았다. 이 실험에는 높은 자기장 값보다 균일성이 더 중요하였으므로 이에 적합하도록 자극의 각도를 새로 가다듬는 일은 다른 사람이 맡아 작업을 분담하였다.

이 학형은 진공관을 써서 고주파 발진기와 수신기 회로를 따로 만들고, 이들을 모두 알루미늄 금속 상자 안에 넣어 외부 고주파 잡음을 차단하였고, 필자는 브로흐 논문에 나와 있는 대로 플라스틱 재료를 깎아서 이 원통 안에 시료 코일을 고정했다. 각자가 맡아서 만들어야 하는 부품들은 대체로 1957년 연말까지 완성되었던 것 같은데, 이들을 조합해서 장치를 가동하고 공명신호를 관찰할 수 있도록 전체 장치를 최적화하는 데는 또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계절은 한겨울 추위를 맞이하는데 실험실 난방은 밤에 작동되지 않았고, 당시에는 야간 통행금지까지 있어서 밤늦게까지 실험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사진 1. 필자가 소속된 실험 조가 만든 1958년 당시 국내 최초의 NMR 장치.
사진 1. 필자가 소속된 실험 조가 만든 1958년 당시 국내 최초의 NMR 장치.

고주파 계통이 만족스럽게 작동하는 상태에서 전자석의 스위치를 켰다가 얼마 후 다시 끄면서 오실로스코프에 나타날 신호를 찾으려고 시도한 지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밤, 드디어 찾아 헤매던 신호를 발견했을 때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며 그 신호를 사진으로 찍었던 때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비록 이 실험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미국에서 1945년에 성공하여 1952년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은 내용을 195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학 재학생들이 전자석과 고주파 장치 일체를 자작하여 재현한 것은 가상한 일이었다고 자평한다.

이처럼 성공적으로 연구실험을 끝낸 후 이 내용을 당시 학부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여 1958년 3월 28일 졸업을 했고, 우리는 논문 내용을 1954년에 창간한 <物理學硏究>라는 학술지 제4권 1호 학위논문 특집호에 실었다.1) 그런데 이 논문은 활자 인쇄가 아니라 골필로 파라핀지에 써서 등사했던 것으로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현재와는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 우리 조가 만든 국내 최초의 NMR 장치의 사진은 왼쪽과 같다.

이 학형은 실험실에만 처박힌 꽁생원이 아니라 권 동문과 필자와 함께 당구를 치기도 했는데, 특히 그는 문리과대학 산악반에서의 열열한 등산 애호가였으며, 당시 매우 드물게 겨울 스키를 즐기는 등 야외 활동도 활발하였다.

1955년 미국 미시간 대학(Univ. of Michigan)으로 유학 가셨던 조순탁 선생님이 3년 만에 학위를 마치시고 1958년 봄에 귀국하시어 우리 팀이 핵자기공명 실험을 재현한 것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시며, 우리나라도 입자 가속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하셨다. 때마침 윤세원 선생님이 원자력 관계 사업에서 인력 양성과 국내 연구 기반 구축을 중점적으로 지원하셨으므로, 조 선생님의 주도로 소형 가속기 건조 계획이 연구비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 연구과제를 이 학형이 중심이 되어 권숙일 동문과 필자 세 사람이 수행하였다.

사진 2. 사이클로트론 건조 중 이문종 학형과 필자(1959년).
사진 2. 사이클로트론 건조 중 이문종 학형과 필자(1959년).

이번에 시도하는 가속기는 1932년 미국의 로우런스(E.O. Lawrence) 교수가 제자인 리빙스턴(M.S. Livingston)과 함께 제작한 최초의 사이클로트론(cyclotron)을 모형으로 삼았다.2) 이 가속기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전자석, 둘째는 진공 계통, 셋째는 고주파 계통인데, 우리가 최초로 만들었던 250 kg 전자석은 너무 작아서 2.5 ton 규모로 새로 설계해서 철재 부분 제작을 대한중기 회사에 의뢰했다. 기자력을 공급할 코일 감개 두 개를 원통형 자극에 끼워 넣을 수 있도록 설계하여 전선 상점에 코일 감개를 주문했다. 전자석 자극 사이에 들어갈 진공상자(vacuum chamber)의 크기와 모양은 우리가 설계하여 공작의 큰 부분은 외부에서, 세부적 부분은 직접 가공했다. 이 진공상자 내부를 기계식 회전펌프와 기름확산펌프로 배기시켜 진공도를 측정하는 문제와, 내부에 D-자로 생긴 전극 두 개를 넣어야 하는데 절연 전극을 설치하는 문제로 고전했던 기억이 새롭다.

전자석 제작에서의 고충은 ㅁ-자 요크의 내부 위와 아래에 붙일 자극 제작의 난관이었다. 원통형 자극 재료 부분을 주조한 후 자극 면을 선반(lathe)으로 깎아내면 주조할 때 생긴 기포가 철재 속에 남아있어서 매끈한 자극 표면을 얻을 수 없었던 문제로 제작사가 고전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결국 고온 단조 공작기계까지 동원해 매끈한 자극 표면을 가공해 주었음을 사후에 알게 되었다.

진공 계통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겼다. 지름 20 cm 크기의 원통 아래위 판을 3~4 mm 두께의 놋쇠로 만들어 아래 판은 용접하고, 위 판은 상자 내용 물품을 모두 제자리에 설치한 후 원통 윗부분에 홈을 파서 커다란 O-링 위에 올려놓고 그 가장자리를 10여 개의 나사로 눌러 고정함으로써 진공을 유지하도록 고안했다. 그런데 이 상자를 배기하면 대기압의 영향으로 위 판의 중앙 부분이 안으로 눌려 진공을 유지할 수도 없었고, 또 내부 설치 물품과 접촉이 일어나는 난제에 봉착했다. 그래서 진공상자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곤경에 처했다.

이를 해결함에는 10 mm 두께의 판 재료가 필요하였는데, 진공상자의 내부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려면 진공상자의 두께가 15 mm 이상 두꺼워지고 결과적으로 전자석의 자극 간 간격을 넓혀야만 헀다. 그런데 자극 간격이 벌어지면 자기회로의 자기저항이 커져 결국 자극 사이의 자기장이 감소하게 된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극 간 간격을 넓힘에는 요크에 철제 끼우개(spacer)를 집어넣고, 진공상자의 위아래 판을 놋쇠 대신 연철(soft iron) 판으로 바꿔 필요한 자기장을 얻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고주파 계통도 전혀 만만하지 않았다. 실험무선국 경험이 많았던 이 학형에게도 가속기에 필요란 고주파 전력을 진공상자 속 D-자 전극에 공급하는 과정은 절대 단순하지 않았으니, 고주파 고전력 임피던스 정합을 시행착오(try and error)로 찾아 들어갔던 이 학형의 노력은 고전압 감전의 위험도 감수한 것이었다.

이 세 가지 계통이 어느 정도 완성된 연후에도 실제로 입자를 가속하는 데는 아직도 많은 어려운 단계를 거쳐야 했다. 우선 가속할 양성자를 얻기 위해 수소 기체를 진공상자 중앙부에서 이온화 시키려고 텅스텐 필라멘트에 직류를 흘렸더니 강자기장에서 직류전류가 받는 힘을 간과했던 문제가 또 생겼다. 다음에는 가속된 양성자를 원 궤도에서 이탈시켜 가장자리로 빼내는 이온 밀어내개(ion repeller)를 작동시키는 단계와, 그렇게 끌어낸 양성자의 숫자를 알아내는 데는 직류증폭기로 증폭된 전류의 세기로 가속된 입자의 매초 당 수효를 어림할 수 있었다. 이때 당면한 새로운 어려움은 전자석 코일에 많은 전류를 공급하였더니 쥴-열이 발생하여 코일의 온도가 올라가 시간적으로 오랫동안 안정적인 작동에 방해가 되었다.

사진 3. 원자력원의 연구논문집에 게재된 사이클로트론 관련논문 초록.[3]
사진 3. 원자력원의 연구논문집에 게재된 사이클로트론 관련논문 초록.3)

석사학위 논문은 공동으로 동일한 것을 제출할 수 없었으므로 세 사람이 각기 제목이 다른 논문을 제출하여 1960년 9월 우리 세 사람이 석사학위를 함께 받았다. 이후 사이클로트론 건조와 관련된 연구논문을 원자력원에서 발행하던 학술지에 두 번에 나누어 게재하였는데 그중 하나의 초록을 앞에 넣었다.3)

1960년 9월 석사학위를 받은 우리 세 사람(권, 이, 조)은 학문적으로 더 성숙하기 위하여 각자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1961년 권 동문, 1963년 필자, 그리고 이 학형은 더 늦었던 1966년으로 기억하는데, 이중 앞의 두 사람은 1970년대 국내 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이 학형은 미국 메릴랜드 대학 전기-전산 공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가까운 소통은 지속되지 못했다. 이 학형이 부산대 물리학과 이범삼 교수님의 장남이었음을 함께 공부할 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고, 1966년 필자에게 혼례식 축전으로 보내준 전보는 지금도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글을 보완하려고 필자가 알아본 이 교수의 매우 간단한 UMD에서의 연구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Collective Ion Accelerator 개발에 참여하여 Electron Ring Accelerator Project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4) 이것을 기반으로 우리나라 서울대 방문 연구 기간에 “SNU”라고 명명된 전자가속기를 개발하였고,5) 1988년 UMD에 Pseudospark Laboratory를 설립하였다.

사진 4. 2005년 골프 모임. 왼쪽부터 필자, 권숙일 교수, 고 윤세원 교수님, 고 이문종 교수.
사진 4. 2005년 골프 모임. 왼쪽부터 필자, 권숙일 교수, 고 윤세원 교수님, 고 이문종 교수.

2005년 6월 초 이 교수가 오래간만에 서울대에서 방문 연구를 하였다. 쉽지 않은 만남의 기회여서 학부 때 은사이신 윤세원 교수님을 모시고 서울대 권숙일 명예교수와 이 교수 그리고 필자 네 사람이 처음으로 골프 라운딩을 함께 하였다, 윤 선생님께서 그날 찍은 사진을 후에 나누어 주셨는데, 그때 주신 사진은 소중한 기념물이 되어 여기에 넣었다.

사진 5. 2008년 동기생들의 경북 안동 여행 때. 가운데 줄 맨 왼편 모자 쓴 이가 고 이 교수.
사진 5. 2008년 동기생들의 경북 안동 여행 때. 가운데 줄 맨 왼편 모자 쓴 이가 고 이 교수.

2008년 10월 우리 물리학과 동기생 일행 20명이 안동 여행을 다녀왔다. 7명은 부부 동반, 6명은 혼자 참석하였는데, 멀리 미국에서 배명승 동문 내외와 이문종, 신석균 동문 등이 함께하였다. 위는 당시 찍은 사진이다.

2023년 연말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냈던 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교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교수의 UMD에서의 활동은 포항공대 남궁 원 명예교수의 도움으로 보완하였음을 밝히며 도움에 감사드린다. 60~70년 전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고, 유가족에게 위로드리면서 삼가 고인의 영전에 명복을 빈다.

각주
1)권숙일, 이문종, 정명숙, 조성호, The Measurement of the Magnetic Moment of the Proton 物理學硏究(서울대 문리과대학 물리학연구회) 4, 52 (1958).
2)E.O. Lawrence and M.S. Livingston, The Production of High Speed Light Ions Without The Use of High Voltages, Phys. Rev. 40, 19 (1932).
3)이문종, 조성호, 권숙일, 이주천, 조순탁, 1.5 MeV 싸이클로트론, 연구논문집(원자력원) 1, 146 (1961).
4)M.-J. Rhee and W.W. Destler, Relativistic electron dynamics in a cusped magnetic field, Phys. Fluids 47, 1574 (1974).
5)이문종, 신희명, 유광호, Intense Relativistic Electron Beam 발생 및 그의 연구, 새물리 18, 175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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