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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폰테코르보의 갈림길

작성자 : 이강영 ㅣ 등록일 : 2025-05-13 ㅣ 조회수 : 350

저자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등이 있다. (kylee.phys@gnu.ac.kr)

그림 1. 브루노 폰테코르보(Bruno Maksimovich Pontecorvo).그림 1. 브루노 폰테코르보(Bruno Maksimovich Pontecorvo).

1954년 스위스 제네바 근교에 “핵 연구를 위한 유럽 위원회” CERN이 설립되었다. CERN은 개별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운 대형 시설을 공동으로 마련하고 이용하는 걸 목적으로 하는 연구소로 탄생해서, 오늘날까지 여러 나라가 협력하는 조직으로서의 모범적인 운영을 보여 주고 있다. 당시에 핵물리학이란 기초 연구면서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야였고, CERN은 어디까지나 서유럽의 연구소였으므로, 사회주의권에도 이와 같은 연구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힘을 얻었다. 그래서 1956년 3월 26일 모스크바에서 11개 창립 국가의 정부 대표가 협정에 서명하여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핵 연구를 위한 공동 연구소인 “핵 연구를 위한 합동 연구소”, JINR(Joint Institute for Nuclear Research)이 설립되었다. 어느 한 나라에 힘이 실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CERN과는 달리, 사회주의 국가에는 주도국이 뚜렷했다. 창립 당시 소련이 50퍼센트를, 중국이 20퍼센트를 기여했으며, 연구소는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핵 문제 연구소(INP)와 소련 과학 아카데미(EFLAN)를 기초로 했고, 그래서 연구소 자체도 INP가 1940년대 후반부터 싱크로사이클로트론 등을 연구하던 두브나(Dubna)에 설립되었다. 지금도 연구소에 근무하는 다수는 러시아 과학자들이다. 현재 JINR의 회원국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불가리아, 쿠바, 이집트, 조지아, 카자흐스탄, 북한, 몽골, 루마니아, 러시아, 슬로바키아, 우즈베키스탄, 베트남의 15개국이며,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세르비아가 정부 차원에서 상호 협정을 체결해서 참가하고 있다. 냉전 이후에는 연구소도 보다 개방되어, 연구 정책을 결정하는 과학 위원회에는 회원국뿐 아니라 미국, 중국, 프랑스, 독일, 그리스, 헝가리, 인도, 이탈리아, 스위스, 그리고 CERN의 과학자들도 참여하고 있다. JINR은 1957년 2월 UN에 등록되었고, 유네스코, IAEA 등과 긴밀한 협조를 이어가고 있다. 2022년까지 JINR은 CERN의 참관국(observer)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단된 상태다.

JINR의 중요한 업적은 주로 핵물리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무거운 새로운 원자핵을 합성하는 레이스에서 JINR은 독일의 다룸슈타트, 미국의 버클리와 함께 선두를 달렸다. 원자 번호 105, 107, 113, 114, 115, 116, 117 및 118의 원자핵이 JINR에서 합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105번 원소는 JINR이 위치한 두브나의 이름에서 온 “Dubnium”으로, 114번 원소는 JINR의 과학자 플레로프 (Academician G. N. Flerov)를 기리기 위해 “Flerovium”으로, 115번 원소는 모스크바에서 온 이름인 “Moscovium”으로, 118번 원소는 트랜스악티노이드 원소 연구에 선구적인 공헌을 한 오가네시안 (Yuri Oganessian)을 기려서 “Oganesson”으로 명명되었다.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나온 JINR의 또 다른 중요한 연구 결과가 있다. 1957년에 발표된 “역 베타 과정과 렙톤 수 비보존 Inverse beta processes and nonconservation of lepton charge”이라는 논문은 중성미자의 독특함 때문에 한 종류의 중성미자가 양자역학적으로 다른 종류의 중성미자로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논문이었다.1) 이러한 현상을 중성미자의 진동(neutrino oscillation)이라고 부른다. 이 가능성은 1990년대 말부터 여러 실험에서 관측됨으로써 확인되었고, 이를 관측한 업적으로 일본 수퍼-카미오칸데 실험의 카지타(Takaaki Kajita)와 캐나다 SNO 실험의 맥도널드(Arthur B. McDonald)가 201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2) 이 선구적인 논문의 저자는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첨예하게 벌어지던 냉전 중에 철의 장막을 넘어간 브루노 폰테코르보(Bruno Maksimovich Pontecorvo, 1913‒1993)다.

브루노 폰테코르보는 피사의 부유하고 지적인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폰테코르보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브루노의 할아버지 펠레그리노 폰테코르보(Pellegrino Abramo Pontecorvo, 1841‒1916)로서, 그는 최초로 영국의 방적기를 이탈리아에 도입하는 등 이탈리아의 산업 혁명기에 섬유 산업에서 크게 성공했다. 그는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이면서도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서, 기업가들과 노동자들 모두에게 널리 존경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국제 유태인 공동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1880년대에 러시아의 유태인 대 박해에서 도망쳐 온 유태인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1916년에 그가 사망했을 때, 이탈리아 노동계가 전해의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동요하고 있었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노동자들과 산업가들이 함께 대규모로 참석했다고 한다. 펠레그리노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아 영국 기사 작위와 유사한 카발리에레 델 라보로(Cavaliere del lavoro, 노동자의 기사라는 뜻)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편 펠레그리노의 부인이자 브루노의 할머니인 주디타 타글리아코초(Giuditta Tagliacozzo)는 화가 모딜리아니의 사촌이다.

브루노의 아버지 대에서 사업은 더욱 번창해서 종업원이 1,000명을 넘었다. 아버지 마시모는 여덟 자녀를 두었는데, 브루노는 그중 넷째다. 자녀들은 모두 재능이 뛰어났는데, 큰형 귀도(Guido Pellegrino Arrigo Pontecorvo, 1907‒1999)는 유전학자로서, 훗날 무솔리니 정권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해 살았으며 왕립학회의 펠로우가 되었다. 남동생 중 질로(Gilo Pontecorvo, 1919‒2006)는 영화 제작자가 되어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걸작 전쟁 다큐멘터리 <알제 전투 La battaglia di Algeri>를 감독해서 1966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2000년에는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의 기사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할아버지 펠레그리노에서 시작된 가문의 반 파시스트 전통은 아버지를 거쳐 브루노의 형제들에게도 이어져 내려왔고, 브루노의 형제들 중 몇몇은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들의 어머니 마리아도 풍부한 문화적 혜택을 입은 집안 출신이었다. 외할아버지 아리고 마로니(Arrigo Maroni)는 밀라노 파테베네프라텔리 병원(Ospedale San Giovanni Calibita Fatebenefratelli)의 병원장이었으며, 시즌이 되면 라 스칼라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는 밀라노 사교계의 유명인사였다.

브루노 폰테코르보는 1913년 8월 22일 피사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나, 여덟 남매가 모두 뛰어났으므로, 부모는 그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는 그가 온순하고 착하지만, 그리 똑똑하지는 않다고 여겨서, 브루노는 평생 열등감을 가졌다고 한다. 브루노는 스포츠에도 타고난 소질이 있어서, 알파인 스키, 수영, 그리고 무엇보다 테니스를 좋아했다. 16세 때, 이탈리아 주니어 국가대표 테니스팀에 발탁되어 프랑스 훈련 캠프에 초청받았을 정도다. 하지만 부모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브루노는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아쉬움을 드러냈다. 부모는 물리학에서 훌륭한 일을 하지 않았느냐고 그를 위로했지만, 브루노는 “하지만 이탈리아 테니스 챔피언도 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피사에서 공학을 공부하던 브루노가 1931년에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바꾸자, 큰형 귀도가 그에게 로마로 갈 것을 추천했다. 로마에는 젊은 스타 교수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가 자신의 그룹을 이끌며 이탈리아에 현대물리학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도는 페르미 그룹의 2인자 격인 라세티(Franco Dino Rasetti, 1901‒2001)와 친했기 때문에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브루노 폰테코르보는 로마 사피엔차 대학(Università degli Studi di Roma “La Sapienza”) 3학년으로 편입했다. 페르미 그룹은 젊었다. 교수인 페르미가 불과 30세였고, 페르미의 동창인 라세티를 제외하고 그룹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그보다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연구소가 위치한, 로마 중앙역 근처의 파니스페르나 거리의 이름을 따서 “파니스페르나 거리의 아이들 I ragazzi di via Panisperna”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마지막에 합류한 폰테코르보가 제일 젊었다. 그래서 그룹 안에서 그의 별명은 강아지를 의미하는 “Cucciolo”가 되었다. 페르미의 부인 라우라 페르미는 페르미와의 인생을 돌아보는 전기에서 폰테코르보를 ‘보기 드물게 잘생긴 청년’이라고 묘사했다.

폰테코르보에게는 시운도 따랐다. 그가 페르미 그룹에 합류한 1934년에, 파니스페르나 거리의 아이들은 그룹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구를 막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느린 중성자로 인공 핵반응을 일으키는 연구였다. 이 연구에 대해서는 2022년 1/2월호 물리 이야기에서 자세히 소개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설명하지 않겠다.3) 이 연구에 대해 페르미 그룹은 “중성자 타격에 의한 방사성 Radioattivit`a provocata da bombardamento di neutroni”이라는 제목으로 일련번호가 붙은 10편의 시리즈 논문을 발표했는데, 처음 두 논문은 저자가 페르미 한 사람이었고, 3번째에서 5번째 논문까지는 저자가 다섯 사람이다. 폰테코르보는 1934년 11월 1일 왕립 물리학 연구소와 로마 대학의 조교수가 되었고, 11월 7일에 여섯 번째 논문에 처음으로 저자로 참여했다. 그래서 이후의 논문은 폰테코르보까지 저자가 모두 여섯 사람이다. 이들 논문은 속력이 느린 중성자를 이용하면 핵반응을 매우 크게 일으킬 수 있고, 특히 우라늄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원소처럼 보이는 방사성 핵종을 여럿 만들어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연구 결과로 엔리코 페르미는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느린 중성자 공정에 대해서 페르미와 폰테코르보를 비롯한 저자들은 1935년 10월에 이탈리아의 특허를 받았다. 훗날 이 과정은 미국 특허도 받게 되는데, 이 특허가 폰테코르보에게 시련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걸 이때는 물론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38년 11월 17일 왕실 칙령 1728호로 이탈리아에 인종법이 발효되었다. 이 법은 이탈리아의 유태인과 아프리카인들의 시민권을 제한하고, 공직과 고등 교육에서 배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나아가 유태인들의 재산을 박탈하고, 여행을 제한하며, 마침내는 정치범과 마찬가지로 유태인들을 특정 장소에 감금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다른 법률들도 제정된다. 그래서 노벨상을 받은 페르미마저 노벨상 시상식을 이유로 이탈리아를 떠나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미국으로 망명해 버렸다. 부인 라우라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유태인인 폰테코르보는 이때 이미 파리로 떠난 뒤였다. 1936년 이탈리아 교육부의 스칼라십을 받아서 이렌느와 프레데릭 졸리오퀴리 부부의 퀴리 연구소에 합류했던 것이다. 프레데릭 역시 페르미의 느린 중성자 실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비슷한 연구를 하던 참이었다. 사실 페르미가 중성자 실험을 하게 된 것도 이렌느와 프레데릭의 인공 방사능 연구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으니, 폰테코르보는 이 분야 연구의 국제적인 공동체의 한가운데에 있는 셈이었다.

프랭크 클로즈(Francis Edwin Close, 1945‒)에 따르면, 영국 정보국은 브루노가 공산주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파리에서였다고 판단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독일과 이탈리아를 파시즘으로 지배하기 시작해서, 서유럽의 좌파들은 모두 파리로 모여들던 시기였다. 프랑스 정계는 파시즘에 대항해서 중도에서 공산당까지 대부분의 정당을 아우르는 인민전선을 형성했고, 이렌느와 프레데릭 부부는 이들의 지지자였다. 훗날인 1942년 프레데릭 졸리오퀴리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고 1956년에는 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림 2. 브루노 폰테코르보와 그의 아내 마리안.그림 2. 브루노 폰테코르보와 그의 아내 마리안.

그해 봄 파리에서 폰테코르보는 스웨덴 출신의 마리안 노르드블롬(Marianne Nordblom)을 만났다. 마리안은 보모 일자리를 구해서 지내며 프랑스어도 배우고 인생의 모험을 시작할 생각으로 파리에 온 18세의 당찬 아가씨였다. 브루노와 마리안이 만난 곳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몽파르나스의 댄스 클럽 라 보엠이었다. 그들은 거의 첫눈에 둘 다 사랑에 빠졌다. 금발에 날씬한 몸매를 지닌 고전적인 북구형 미인 마리안과, 이탈리아에서도 “보기 드물게 잘생긴 청년”이라는 소리를 듣는 브루노는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브루노는 마리안의 우아한 미모와 보호본능을 불러 일으키는 귀여운 성격에 반했고, 마리안은 지성과 열정이 합쳐진 브루노의 카리스마적인 매력에 빠졌다. 마리안 탓인지, 연구가 잘 되어서인지, 아니면 파리의 다른 매력 탓인지 몰라도 폰테코르보는 다음 해인 1937년 로마 대학에 자리를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소극적으로 대처해서 결국 자리를 놓쳤다. 하지만 다음 해에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시작되었음을 생각하면 아까워할 일은 아니다.

이들은 1938년 1월 4일부터는 아예 마리안이 브루노가 살던 팡테옹 광장의 그랑 옹므 호텔(Hôtel des Grands Hommes)로 이사해서 동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마리안의 비자가 곧 만료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리안은 비자가 만료되기 직전인 7월 30일에 그들의 첫 아들 질(Gil Pontecorvo)을 낳았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이들은 곧장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아이를 탁아소에 남겨둔 채, 함께 스웨덴의 마리안의 집을 방문했다. 1930년대에 미혼모가 된 마리안과 남자친구는 스웨덴의 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브루노만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마리안은 아이에 대한 걱정과 산후 우울증으로 한동안 요양소에 머무는 등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폰테코르보 역시 상황이 어려워졌다. 아버지의 회사는 1929년의 대공황 이후 사정이 크게 나빠졌고, 무솔리니의 인종법이 발효되어 유태인인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의 형제자매들도 탄압을 피해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 큰형인 귀도는 영국으로 이주했고, 누나인 줄리아나와 동생 질로는 파리로 옮겨와 브루노와 합류했다. 다른 형제들도 뒤를 따라 영국과 파리로 옮겨왔다. 다행히 그는 그동안 핵 인광을 발견하는 등, 핵 이성질체에 대한 훌륭한 연구 결과를 얻어서, 퀴리-카네기 펠로우십을 받았고, 프랑스 국립 과학 연구 센터(French National Centre for Scientific Research)로부터 연구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1939년 6월에 폰테코르보는 스웨덴 방문 비자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이 상호불가침을 선언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폰테코르보는 다음날, 소련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9월 1일 드디어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이틀 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 발발 이틀 후, 폰테코르보는 파리로 돌아온 마리안과 다시 만났고, 그들은 1940년 1월 9일에 결혼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0년 5월,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했고, 그들은 떠나기로 결정했다. 영국은 폰테코르보의 동료인 한스 폰 할반(Hans Heinrich von Halban, 1908‒1964)과 루 코바르스키(Lew Kowarski, 1907‒1979) 등의 프랑스 핵 과학자들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폰테코르보는 거부되었다. 아마도 그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도 마침 파니스페르나 거리의 아이들 중 하나였던 에밀리오 세그레(Emilio Gino Segrè, 1905‒1989)가 미국 오클라호마 털사의 일자리에 폰테코르보를 추천해서,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폰테코르보는 1940년 6월 2일에 마리안과 아들 질을 기차를 태워서 누나 줄리아나가 살고 있는 툴루즈로 보내고, 본인은 파리가 함락되기 전날, 동생 질로와 사촌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파리를 탈출해서 툴루즈로 떠났다. 툴루즈에서 만난 그들은 1940년 7월 19일 마드리드와 리스본을 거쳐 미국으로 출발했고, 1940년 8월 19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거기서 폰테코르보는 페르미를 다시 만났다.

그림 3. 1940년 파리에서 촬영된 브루노 폰테코르보 가족.그림 3. 1940년 파리에서 촬영된 브루노 폰테코르보 가족.

오클라호마의 일자리는 웰 서베이스(Well Surveys)라는 광물 탐사 회사에서 핵물리학을 이용해서 광물을 탐사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폰테코르보는 중성자를 이용해서, 땅을 파지 않고도 암석을 구별하고 광물을 발견하는 장치를 개발했다. 이 장치는 중성자를 실용적으로 이용한 첫 번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엔리코 페르미도 브루노를 방문해서 브루노가 개발한 장치에 관심을 보였다. 다음으로 폰테코르보는 캐나다 몬트리올 연구소에 초빙되었다. 폰테코르보가 합류한 팀은 튜브 합금 Tube Alloys이라는 코드명으로 불린, 영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이었다. 앞서 영국은 폰테코르보를 영국에 받아들이는 데 거부를 한 일이 있었던 만큼, 이번에도 그를 채용하는데 우려가 있었지만, 당시 워낙 핵물리학자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폰테코르보처럼 뛰어난 물리학자를 놓치기 아까워서 결국 1943년 1월 15일 그를 임명했다. 폰테코르보는 1943년 2월 7일 가족과 함께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그해 8월, 처칠과 루즈벨트의 퀘벡 협정에 따라 튜브 합금은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합쳐졌다.

1944년 영국의 존 콕크로프트(Sir John Douglas Cockcroft, 1897‒1967)가 몬트리올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가속기를 이용해서 원자핵을 연구한 업적으로 나중에 노벨상을 받게 되는 그는 영국을 위해 미국 핵 프로그램의 내용을 얻어내려는 임무를 받고 온, 사실상 일종의 영국 스파이였다. 한편 당시 폰테코르보와 함께 일하던 영국 물리학자 앨런 넌 메이(Alan Nunn May, 1911‒2003)는 1930년대에 영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의 정보를 빼내는 소련의 지시를 받은 스파이였다. 이런 복잡한 상황을 알지는 못했지만, 폰테코르보는 캐나다에서 잘 지내며 1944년 3월 20일에 둘째 아들 티토를, 1945년 7월에 셋째 아들 안토니오를 얻었다. 둘째 아들 티토의 이름은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지도자이자 나중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대통령을 지낸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의 이름을 딴 것이다.

콕크로프트는 안전을 위해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초크 리버 연구소(Chalk River Laboratories)에 원자로를 건설했다. 폰테코르보는 이 원자로 건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947년 새로운 NRX 원자로가 건설되어 7월 21일에 시운전을 할 때 제어실에서 이를 지켜보았다. 이 원자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연구용 원자로로서 다른 원자로보다 5배의 중성자를 발생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물리학자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므로 폰테코르보는 미국의 여러 대학으로부터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영국 원자력 연구 기관(AERE)에 합류하라는 콕크로프트의 제안을 수락하고 1949년 1월 24일 영국으로 향했다.

폰테코르보는 콕크로프트가 제안한 대로 하웰 연구소(Harwell Laboratory)라고 불리는 AERE에서 원자로 설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폰테코르보에게 다른 압박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FBI가 폰테코르보의 주변을 조사해서 그의 누이와 동생인 줄리아나, 로라, 질로가 모두 공산주의자임을 확인하고, 브루노와 마리안도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왜 FBI는 폰테코르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그의 선배인 세그레가 관련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앞서 말한 대로 세그레는 그들의 느린 중성자 과정에 대한 특허를 미국에 신청했다. 이 분야를 담당하던 미국 정부의 원자력위원회(AEC)는 세그레와 협상을 하면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의 정치적 배경을 조사했다. 매카시의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시절에, 충성심을 증명하는 간단한 방법은 공산주의자의 이름을 대는 일이었다. 반대로, 공산주의자를 알면서 숨기고 있었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이민자로서 신분이 불안했던 세그레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폰테코르보의 가족도 잘 알고 있었으며, 브루노의 형제자매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바로 그를 미국에 불러오지 않았는가. 세그레는 폰테코르보의 관계를 자신이 숨겼다고 여겨질까봐 걱정했다. 결국 1949년 11월 9일, 세그레는 버클리 시절의 오랜 친구이자 당시 AEC의 관리였던 로버트 손튼을 만나 브루노의 공산주의 관련 사실을 털어놓았고, 손튼은 이 정보를 FBI에 전달했다.4)

FBI는 폰테코르보 파일을 영국 정보부인 MI5에 보내고, 미국에 주재하던 MI6 요원 킴 필비에게도 전달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킴 필비 역시 소련의 스파이였다. 하웰에서 폰테코르보는 원자로 설계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핵분열성 물질의 생산과 사용, 원자로에 사용되는 물질 등을 다루고 있었으므로, FBI 파일은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 1950년 2월에는 하웰에서 폰테코르보와 함께 근무하던 클라우스 푹스(Klaus Emil Julius Fuchs, 1911‒1988)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과학자이면서 스파이로 잘 알려진 푹스는 원래 영국의 튜브 합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로스 알라모스로 옮겼던 인물이다. 그는 1942년부터 소련에 정보를 넘겨왔음을 자백하고 14년 형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AERE는 보안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폰테코르보와 면담을 하고, 그가 소련 스파이라는 증거는 없었지만 그를 하웰에 더 이상 남겨두는 건 보안상 위험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를 기밀 자료에 접근할 수 없는 자리로 옮기기로 하고, 리버풀 대학에 지원할 것을 권유했다. 리버풀 대학은 폰테코르보를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고 1950년 6월, 폰테코르보에게 자리를 제안했다.

그림 4. 소련으로 망명한 브루노 폰테코르보의 핵 기밀 유출을 다룬 The Courier-Gazette 기사 일부.그림 4. 소련으로 망명한 브루노 폰테코르보의 핵 기밀 유출을 다룬 The Courier-Gazette 기사 일부.

그해 9월 1일, 폰테코르보는 가족과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갑자기 로마에서 스톡홀름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9월 2일 가족과 함께 핀란드를 거쳐서 철의 장막 너머로 사라졌다. 이후 어디에서도 폰테코르보를 찾을 수 없었다.

소련으로 핵 관련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여러 핵 프로그램을 경험한 유능한 물리학자인 폰테코르보가 소련으로 망명했다면 이는 큰 스캔들이었다. 여러 정보기관이 강력한 우려를 표했고, 미국의 신문에는 “클라우스 푹스와 브루너 폰테코르보, 누가 최고의 배신자인가?”라는 내용의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소련에서 망명한 고위급 인사들이 폰테코르보가 이미 소련 스파이였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증언 중 적어도 일부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5년이 지난 후, 1955년 초 갑자기 폰테코르보가 다시 등장했다. 당시 핵무기 폐지 및 신규 제조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던 세계평화위원회(World Peace Council)의 국제적인 캠페인과 연관되어 2월에 소련 신문 <이즈베스티야 Isvestia>의 지면에 그의 이름이 언급된 것이다. 그는 실제로 신문과 인터뷰를 했지만, 캠페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한편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전쟁에서 소련의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했고, 원자폭탄이 사용된 후에 물리학자로서 도덕적인 고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영국에서 1950년에 경찰 당국으로부터 심문과 협박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핵무기를 개발하는 상황에서 직업적 부끄러움을 느껴 개인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서방을 떠났다고 말했다.

폰테코르보가 스파이였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끝나지 않았다. 폰테코르보 본인은 이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망명한 이유에 관해 설명했지만, 소련의 품 안에 들어간 사람의 인터뷰를 액면 그대로 믿는 건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한편 그는 서방이든 소련이든, 핵무기에 관련된 일을 했다는 것은 단호히 부인했다. 실제로 소련에서도 그가 핵무기와 관련된 일을 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캐나다의 NRX 원자로의 설계도를 소련에 넘긴 사람이 폰테코르보이며, 그는 스파이였다고 믿는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소련은 폰테코르보를 환영했고 극진히 대접하며 많은 특권을 제공했다. 그는 평생을 두브나의 JINR에서 일하면서 주로 입자물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중성미자에 대한 그의 많은 업적은 소련에서 이룩한 것이다. 그는 물리학에 대한 업적으로 1953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55년에는 소련 공산당원이 되었으며, 1958년에 소련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그는 또한 레닌 훈장 2개를 수상했으며 1964년에는 레닌상을 수상했다. 수상 업적은 약한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였다.

영국은 폰테코르보의 인터뷰가 나온 직후인 1955년 5월 24일 그의 영국 시민권을 취소했다. 폰테코르보는 여러 해 동안 소련을 떠나지 않았는데(혹은 떠날 수 없었는데), 망명하고 20년이 넘은 후인 1978년, 파니스페르나 거리의 아이들 중 한 사람인 에두아르도 아말디(Edoardo Amaldi, 1908‒1989)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 후에도 폰테코르보는 이탈리아를 자주 방문했고 가끔 다른 나라도 방문했다. 프랑스는 1982년과 1984년에는 그의 방문을 거부했지만 1989년에는 허용했다. 이렇게 그는 소련의 물리학자 브루노 막시모비치(Maksimovich) 폰테코르보로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

폰테코르보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크게 물리학에 기여한 분야는 중성미자 물리학이다. 중성미자 물리학에 관한 폰테코르보의 첫 번째 중요한 업적은 1945년에 중성미자를 검출하기 위해서 중성미자가 염소 핵과 반응해서 방사성 아르곤 핵으로 변환하는 반응을 제안하고 사염화탄소 CCl4를 이용하는 방법을 고려한 일이다. 이것이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방법을 최초로 제시한 논문이다. 비록 레인즈(Frederick Reines, 1918‒1998)와 코원(Clyde Lorrain Cowan Jr., 1919 ‒1974)은 중성미자를 최초로 발견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데이비스 주니어(Raymond Davis Jr., 1914‒2006)는 일찍이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중성미자를 검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이 방법으로 원자력 발전소에서 베타붕괴를 통해 나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1960년대 후반에 홈스테이크 광산에서 태양 내부에서 생성된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실험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고 이로부터 중성미자 천문학이라는 분야가 시작되었다. 이 업적으로 데이비스는 200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5) 데이비스가 태양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관측된 중성미자의 양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태양 모형에서 예측한 양의 절반 이하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문제는 오랫동안 물리학의 중요한 수수께끼 중의 하나였다.

앞서 소개한, 1957년에 폰테코르보가 중성미자 진동을 제안한 논문은 그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이 논문은 중성미자의 질량이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성미자의 본성에 대한 획기적인 새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훗날 태양 중성미자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 중성미자 진동 자체는, 이미 말했듯이 오늘날에는 여러 실험을 통해 검증되었고, 일본의 카지타와 캐나다의 맥도널드에게 2015년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 주었다.

폰테코르보는 1958년에 초신성이 폭발할 때 중성미자가 분출될 것을 예측했고, 이는 1987년에 초신성 SN1987A이 폭발했을 때 일본의 카미오칸데 검출기 등에서 초신성 중성미자를 검출함으로써 확인되었다. 초신성 중성미자를 검출한 업적으로 일본의 고시바 마사토시(Koshiba Masatoshi, 小柴 昌俊, 1926‒2020)가 2002년에 데이비스 주니어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5) 또한 그는 1959년에는 당시 알려진 가능한 중성미자 반응을 모두 고려해서, 전자 중성미자와 뮤온 중성미자의 두 가지 유형의 중성미자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러한 가정이 대칭성의 관점에서 매력적이라고 제안했다. 1962년 잭 스타인버거(Jack Steinberger, 1921‒2020), 레온 M. 레더만(Leon M. Lederman, 1922‒2018), 멜빈 슈워츠(Melvin Schwartz, 1932‒2006)는 브룩헤이븐의 AGS 가속기를 이용해서 뮤온에서 나온 중성미자는 전자 중성미자와 다르다는 걸 확인했고, 이 업적으로 198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6) 이로부터 가속기에서의 중성미자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 밖에도 폰테코르보는 뮤온의 여러 가지 성질 및 약한 상호작용에 대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스포츠를 즐겼던 그는 소련에서도 평생 열정적으로 여러 스포츠 활동에 참가했다. 두브나에서도 계속 테니스를 쳤고, 열렬한 사이클 애호가였으며, 수상 스키와 스피어 낚시를 즐겼다. 폰테코르보는 1993년 9월 24일 러시아 두브나에서 사망했다. 그의 소원에 따라 유골 중 절반은 로마에, 나머지 절반은 러시아의 두브나에 묻혔다.

브루노 폰테코르보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참여하는 모든 토론이나 세미나는 활기찬 대화로 바뀌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매우 총명하고 현명하며, 물리학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이었고, 매우 친절한 성격이었다. 그가 소련의 스파이였는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를 좋아했고,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캐나다 및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친구로 남았다. 그가 사망하고 5년 후에 일본 수퍼카미오칸데 검출기가 대기 중에서 생성된 중성미자가 진동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보고했고, 이후에 여러 다른 실험에서도 이를 확인했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던, 태양에서 오는 중성미자가 예상보다 적게 관측되는 현상도 대기 중성미자의 관측 결과와 관련지어서 중성미자의 진동 현상으로 차츰 정립이 되어갔다. 지금도 중성미자 진동의 구체적인 양상을 측정하고, 중성미자 질량의 근원을 찾는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중성미자 진동을 완전히 해명하고, 이와 관련해서 중성미자의 매우 작은 질량을 이해하는 일은 현재도 입자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다.

JINR 본관에는 폰테코르보를 기리는 방이 있으며, 이곳에는 그가 사용하던 가구, 그의 원고, 사진 및 개인 소지품이 조심스레 보존되어 있다. 두브나의 거리 중 하나에도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 2013년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로마와 피사에서 컨퍼런스와 전시회가 열려서 그의 삶과 업적을 기념했다. JINR은 1995년 폰테코르보의 업적을 기려서 폰테코르보 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주로 중성미자 물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에게 수여된다. 2016년의 폰테코르보 상은 우리나라 RENO 실험의 김수봉(1960‒), 중국 Daya Bay 실험의 왕이펑(Wang Yifang, 王贻芳, 1963‒), 그리고 일본 T2K 실험의 고이치로 니시카와(Kōichirō Nishikawa, 西川公一郎, 1949‒2018)가 공동으로 수상했다.7)

물리학의 역사와 대중을 위한 물리학에 관한 책을 다수 집필한 옥스퍼드의 물리학자 프랭크 클로즈는 2015년에, 철의 장막 양편에서 인생의 절반씩을 보낸 폰테코르보의 삶을 나타내는 듯한 “반감기 Half-Life”라는 제목으로 폰테코르보의 평전을 펴냈다. 클로즈는 이 책의 1부와 2부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단테의 지옥편을 인용하고 있다.4)

“인생의 여정 한가운데에서,
나는 내가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에 있다는 걸 알았네.”

이 구절을 고른 건 프랭크 클로즈의 관점이다. 클로즈는 폰테코르보가 스파이 활동을 했고 서방의 원자로 설계도를 소련에 넘겼다고 확신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각주
1)B. Pontecorvo, Inverse beta processes and nonconservation of lepton charge, Sov. Phys. JETP 7, 172 (1958), 원문은 Zh. Eksp. Teor. Fiz. 34, 247 (1957).
2)https://www.nobelprize.org/prizes/physics/2015/summary/.
3)이강영, 세상을 바꾼 논문, 물리학과 첨단기술 31(1/2), 55 (2022).
4)Frank Close, Half-Life (Basic Books, 2015).
5)https://www.nobelprize.org/prizes/ physics/2002/summary/.
6)https://www.nobelprize.org/prizes/ physics/1988/summary/.
7)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Trend.do?cn=GTB2017001539.
물리대회물리대회
사이언스타임즈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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