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S PLAZA
물리학계가 같이 사는 길 - 적정연구비
작성자 : 박제근 ㅣ 등록일 : 2025-05-13 ㅣ 조회수 : 261
박제근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이자 응집물질물리 분과위원장이다. 서울대에서 학사(1988)와 석사(1990)를 마친 뒤,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에서 박사학위(1993)를 받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박사후연구원을 거쳤다. 이후 인하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를 거쳐 현재 서울대에 재직 중이다. 2016년에는 세계 최초로 2차원 자성 반데르발스 물질을 보고하며 해당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한국과학상(2016), 한국물리학회 학술상(2015), 포스코청암상(2023) 등을 수상했다. (jgpark10@snu.ac.kr)
2024년 대한민국 과학계는 전례 없는 연구비 삭감을 겪으며 국가 연구개발 정책의 근본적 재검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후 일부 예산이 복원되었으나, 이는 구조적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연구 현장에서 체감하는 바에 따르면, 현재의 국가 연구개발비는 규모만 크고 실질적인 효과는 미미하다. 연간 30조 원에 달하며, GDP 대비 4.96%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정작 연구자들은 이런 혜택을 체감하지 못한다. 연구비의 양극화—소위 ‘0책 0공’과 천문학적 연구비의 극단적 공존—는 지난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왔다.
응집물질물리 분과는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난 4월 23일 봄 학술대회에서 특별 토론회를 개최하고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다음 날 열린 물리학회 주관 정책세션에서 필자는 현재 문제의 본질은 연구비의 부족이 아니라, 급증한 예산이 적재적소에 배분되지 않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전국에는 약 780명의 물리학과 교수들이 1,800명가량의 대학원생을 지도하며 매년 약 1,000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서울대, KAIST,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차지하는 비중은 15% 수준이며, 나머지 85%는 전국의 다양한 연구자들이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4단계 BK21 등 국가연구비 배분 구조를 보면, 이와 같은 실적 분포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결국 지난 20여 년간 국가 연구개발 정책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목 아래, 특정 대학과 개인에게 자원을 몰아주는 방향으로 운영되어 왔다.
그렇다면 왜 실적이 검증된 수많은 연구자들이 정당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가? 실제로 현장에서는 연구비 부족으로 연구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있는 반면, 일부 기관은 예산을 소진하기 위한 무리한 집행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경험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분이 실제로는 연구비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포장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로 인해 한쪽은 연구과제를 전혀 받지 못하고, 다른 한쪽은 예산을 소진하기 위한 고민에 빠지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시니어가 정리하겠다’는 메일이 돌며 기존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진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선택과 집중’이라는 개념 자체는 추격형 구조에서는 일리가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종종 벌어지듯 외국에서 수입된 개념이 현실에 맞지 않게 왜곡된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橘化爲枳), 외국의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도입한 결과는 불공정한 구조를 고착화하는 데 쓰이고 있다. 더욱이 외국에서는 글로벌 경쟁에 나서야 하는 기관들에게는 구성원이 세계 최고를 향한 자격심사와 정기적인 평가 등의 제도적 장치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글로벌 기준에 맞는 기준과 평가 장치가 작위적이기 때문에 한번 몇몇 기관에 속하면 탈락하지 않는 시스템으로 특정 그룹에만 혜택이 집중되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학문 생태계’를 말하지만, 그 핵심에는 “공정하게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코 연구비를 나눠 먹자는 것이 아니다. 연구 실적과 필요에 따라 적절한 연구비가 배분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런 일의 시작은 적정 연구비의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이미 많은 통계자료가 나와 있는 상황에서 대학원생, 보유장비, 연구성과(최근 5년간) 등을 고려하여 연구비 배분을 위한 적정지표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물리학회가 앞장서서 정의롭고 공정하게 해야 한다. ‘의대 광풍’ 속에서 기초과학, 특히 물리학은 의대처럼 제도적으로 보장된 안정적 진로(B 플랜, C 플랜)가 없기 때문에, 연구비 배분에서 더욱 높은 수준의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 또한 물리학자들의 몫이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기존 패러다임과 시스템을 답습하는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 어떻게 새로운 과학혁명을 방해하는지를 설파했다. 2025년의 한국 과학이 가야 할 길은 미국, 유럽, 중국, 일본이 하지 않는, 우리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현행 연구비 선정과 배분 구조는 오히려 이런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 교수/연구자 사회가 평준화되었고, 이는 전국 각 대학과 연구소에서 발표되는 연구성과로 증명되고 있다. 이제는 정상과학의 추종자가 아닌 과학혁명을 주도하는 한국 과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몰아주기식 ‘선택과 집중’ 정책의 대대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올림픽 대표 선수를 뽑기 위해 아시안게임과 전국체전 등의 과정으로 엄정하고 공정한 평가가 필요한 것처럼, 과학계의 연구비 또한 공정한 경쟁을 거쳐 지원해야 한다. 잊지 말자. 양궁처럼 공정한 시스템을 갖춘 종목은 세계 정상의 자리를 10년 넘게 지키고 있는 반면, 일부 기득권에 의해 좌우되는 종목에서는 그렇지 못한 일이 되풀이된다. 한국 과학계가 이런 문제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연구비 배분의 공정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한국 과학의 지속가능한 미래는 보장될 수 없다. 각 연구실 상황이 고려된 후, ‘어떤 연구를 하는 데 얼마만큼의 연구비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적정 연구비의 개념을 반드시 전면 도입해야 한다. 이제는 물리학회가 중심이 되어, 연구비의 공정한 배분을 위한 적정 연구비 논의를 본격적으로 이끌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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