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창
물리학자가 열어가는 과학창의 시대
작성자 : 정우성 ㅣ 등록일 : 2025-05-13 ㅣ 조회수 : 130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
기술패권 시대, 기정학(技政學)의 시대 등의 용어가 자주 들린다. 과학기술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용어는 최근 새로이 등장한 것이지만, 그 의미는 전혀 새롭지 않다. 언제나 우리 삶에 과학기술은 중요했으며, 경제 성장이나 삶의 질 역시 과학기술과 따로 한 적이 없다. 그리고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필요한 근본도 변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과학기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서 우리를 갑갑하게 하는 것들도 바뀌지 않았다.
기초연구가 중요하다는 건 다들 알지만, 막상 연구현장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긴 안목으로 투자하지 못하고, 경제성을 따지며, 특정 산업을 위한 O만 양병설 식의 인력양성에만 주목한다. 특히 그간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빠르게 추격하며, 생산성을 키워 산업 발전을 이룬 경험이 뿌리 깊이 박혀있다. 문화와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은 사회 갈등으로 표출되곤 한다. 기술패권이나 기정학의 흐름이 더욱 강해지고 있는 이때, 더욱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산업 성장과 경제 발전을 향해 쉼 없이 달려왔다. 그간 대학은 산업 역군을 양성하며 사회 부름에 충실히 답했다. 비단 대학뿐 아니라 특성화고를 비롯한 모든 교육 체계가 잘살아보자는 일념으로 달려왔다. 인재의 창의성이나 다양성보다는 사회가 바라보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의 반열에서 잠시 그간 달려온 길을 돌아보며 숨을 고르고 있다. 과연 이렇게 계속 인재를 양성하면, 그리고 지금 하던 식으로 연구개발을 하면 우리는 계속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하며, 국민들은 더욱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 느끼는 것이다. 다만 여전히 그동안 하던 관성에 젖은 문화가 더 강하여, 그다지 큰 변화는 느끼지 못한다.
가령 여전히 대학은 산업에 즉시 투입될 맞춤형 인력을 키우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것도 모든 대학이 획일적인 잣대로 말이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예산이 지원되는 사업에 맞추어서 교육을 해야 한다. 과연 이런 교육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대학이 길러 내야 할 인재에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인력도 포함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기술과 산업을 좇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을 꿈꾸고 만드는 인재들 말이다. 이들은 당장 산업 현장 지식 중심 교육보다는 더욱더 탄탄한 기초 역량과 창의성이 필요하다. 초중등 교육 현장을 들여보면 더욱 암담한 현실을 목격한다. 단지 시험 문제를 빠르게 푸는 요령만 익히는 교육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문제를 개선하려 칼날을 들이대어도 해결은커녕 도리어 더욱 상처만 덧나고 있다.
우리가 인력양성과 기초연구에 목소리를 높여도 사회가 잘 응답하지 않는다. 단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지속적으로 두드리고 노력해야 조금이나마 바뀌는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과학기술계는 더욱 사회와 적극적인 소통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전의 선진국 추격형 전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인력 양성에서부터 연구개발 투자 등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과학기술 활동을 지원하는 사회는 그 차이를 깊이 알지 못한다. 과학기술과 사회가 활발하게 소통해야 하는 이유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같은 과학기술 내에서도 학문 분야끼리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 융합연구를 시작하면, 먼저 서로 언어를 번역하여 소통하고 연결하는 작업부터 한다.
번역과 소통의 대표적인 유산은 ‘로제타’ 석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된 비석인데, 지금은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로제타 석에는 동일한 내용의 글이 이집트 상형문자와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로 나란히 적혀있다. 이 돌이 발견되기 전까지 이집트 상형문자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언어였다. 고대 그리스어를 이해하고 있던 인류는 로제타 석의 번역과 연결을 거쳐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석하게 됐다. 그간 수많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해석이 불가능했던 인류 초기의 이집트 문명이 오랜 기간 굳게 닫혀 먼지가 수북이 쌓인 철문을 단숨에 열고 우리 곁으로 달려왔다. 과학기술과 사회를 연결하는 로제타 석이 절실히 필요하다.
물리학자들은 연결에 익숙하다. 두 물체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고, 웜홀을 통해 아주 멀리 떨어진 두 세계를 연결하기도 한다. 무한의 입자들로 구성된 시스템에서의 연결과 상호작용을 고민하며, 자연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서로 연결하여 법칙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미 우리는 연결에 익숙하고, 소통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 물리학자들이 좀 더 사회를 연결하는 로제타 석이 되어보는 것은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