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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이야기
핼리 혜성 이야기
작성자 : 김재영 ㅣ 등록일 : 2025-08-01 ㅣ 조회수 : 176
김재영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물리학 기초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물리철학 및 물리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상대성이론의 결정적 순간들』, 『정보혁명』(공저), 『양자, 정보, 생명』(공저), 『뉴턴과 아인슈타인』(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사이버네틱스』,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맥스웰의 전기자기론』,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에너지, 힘, 물질』 등이 있다. (zyghim@ksa.kaist.ac.kr)
2024년에 핼리 혜성이 돌아와서 천문학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다음에 오는 것은 2061년이라서 이번이 아니면 핼리 혜성을 볼 수 없으리라는 얘기도 있었다. 핼리 혜성은 1222년 고려와 중국에서 관측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려사에는 한낮에도 혜성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전에 기록된 것은 1066년 영국의 역사학자 말메스버리의 윌리엄(William of Malmesbury)이 남긴 것이다. 나중에 다시 살펴본 결과 그 관측기록이 모두 핼리 혜성이었다.

그림 1. (2+1)차원 공간을 보여주는 Coelifer Atlas.
유럽에서 튀코 브라헤 이전까지의 우주관은 지구(땅의 구)가 우주 또는 세계의 중심이고 그 주위에 일곱 개의 행성 천구가 동심구를 이루며, 다시 그 바깥에 항성 천구가 있고 그 바깥에 신이 거주한다는 것이었다. 달의 천구보다 아래에 있는 지상계는 네 가지 원소(뿌리), 즉 흙, 물, 숨, 불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상계는 변화무쌍하다. 이와 달리 달의 천구 바깥에 있는 세계는 다섯 번째 원소, 즉 에테르(아이테르)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무런 변화도 없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림 1).
따라서 머리를 풀어 헤친 채 하늘을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혜성은 달의 천구보다 아래의 세계, 즉 지상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믿었고, 혜성은 불미스러운 재난의 전초로 여겨졌다. 혜성의 영어인 comet이 ‘긴 머리카락’이란 뜻의 그리스어 ‘코메투스’에서 온 말이다. 혜성이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 apparition은 ‘환영’, ‘유령’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튀코 브라헤는 1577년 혜성을 처음 보았다. 그는 측지술과 비슷한 방식의 시차를 사용하여 혜성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측정했는데, 놀랍게도 달의 천구보다 바깥에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즉 혜성은 지구 대기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요하네스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가 수장이었던 우라니보르 천문대의 관측 데이터를 가지고 행성이 수정천구에 있는 에피사이클(주전원)에 박혀 있는 반짝이는 별이 아니라 타원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케플러 법칙 세 개 중 첫 번째가 그것이다.
이 법칙은 대단히 심각한 주장이다. 행성이 우주 한복판에서 태양을 가운데 놓고 타원궤도를 그리며 움직인다는 것이 요즘 관점에서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그전까지 세상의 중심이 지구이며, 상하 방향과 수평 방향이 별개라는 (2+1)차원 공간 관념을 믿고 있던 사람에게는 엄청난 주장이었다. 상하 방향, 즉 지구 중심을 향하거나 벗어나는 방향은 원래 모든 것이 그래야 하는 자연스러운 위치가 있는 것이고, 달의 천구 바깥에서는 원래 모든 것이 원운동을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신성한 천구가 사라지고 행성의 궤적이 타원이라고 하면, 행성이 어떻게 그런 운동을 하게 되는가, 행성과 태양 사이에 무슨 힘이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가 완전히 새로운 질문으로 등장한다. 공간이 세 방향 모두 대등하다면, 이 타원 궤적을 설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제가 된다.
케플러도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1600년에 영국의 의사 윌리엄 길버트가 <자석론(De Magnete, Magneticisque Corporibus, et de Magno Magnete Tellure)>이란 책을 냈다. 작은 자석뿐 아니라 자석에 끌리는 물체를 다루고 지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라는 신비주의적인 주장을 담은 것이었다. 길버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어의이기도 했다. 케플러는 길버트의 주장을 신봉하여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자석의 힘 같은 것이 작용한다고 믿었지만, 이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다.

그림 2. <프린키피아>에 있는 정리와 그림.
케플러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 것이 바로 아이작 뉴턴이다. 뉴턴은 자석이 주는 자기력이 아니라 이와는 성격이 다른 인력이 어떤 물체에나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즉 만유인력이라고도 부르는 보편중력이다. 이것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여하간 모든 물체가 서로 상호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끌어당긴다고 가정하면 케플러의 행성 법칙이 모두 설명된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즉 속칭 <프린키피아>에 있는 정리와 그림이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그림 2).

그림 3. 핼리가 뉴턴에게 혜성의 출현에 대해 적은 1695년 9월 28일자 편지.
이 아이디어를 맨 처음부터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이다. 핼리는 뉴턴을 만나기 전부터 혜성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핼리는 1680년과 1682년 무렵에 혜성을 직접 관측했다. 1531년 페트루스 아피아누스(Petrus Apianus)와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가 이 혜성을 상세하게 서술해 놓았는데, 핼리는 이들의 저작을 통해 혜성이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믿음을 증명할 길은 없었다(그림 3). 그러다가 아이작 뉴턴의 명성을 알게 되었고, 1684년 런던에서 마차를 타고 케임브리지까지 가서 뉴턴을 만났다. 대뜸 뉴턴에게 케플러의 법칙이 옳고 태양과 행성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면 궤적이 어떤 모양인가 하고 물었고, 뉴턴이 바로 타원이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뉴턴이 한창 유명해진 뒤에 나온 이야기라 신빙성은 낮다. 여하간 핼리는 뉴턴에게 그 이론을 책으로 낼 것을 아주 강하게 재촉했고, 그래서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출간되었다. 200부 남짓 인쇄하면서 출판 비용이 꽤 들었는데, 이 비용도 핼리가 거의 부담할 정도였다.

그림 4. 핼리의 <혜성의 천문학 개요(Synopsis of the Astronomy of Comets>(1705) 표지.
핼리는 1705년 <혜성의 천문학 개요(Synopsis of the Astronomy of Comets)>라는 제목의 책을 라틴어와 영어로 출간했다(그림 4). 50여 쪽에 불과한 얇은 책이었지만, 1337년부터 1698년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혜성 관측을 정리하고, 특히 1682년의 혜성이 1531년 아피아누스가 상술한 그 혜성과 같다는 주장을 펼쳤다. 뉴턴의 이론이 맞다면 이 혜성은 1607년, 1531년, 1456년의 혜성과도 동일하며 1758년 말이나 1759년 초에 이 혜성이 다시 나타나리라고 예측했다.
핼리도 뉴턴도 이 세상을 떠난 뒤인 1759년에 과연 그 혜성이 핼리의 예측대로 다시 나타나 뉴턴의 이론이 옳음을 온 유럽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다소 과장되어 있긴 하다. 혜성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고 다시 나타난 혜성도 핼리의 예측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역사 속의 상세한 과정을 보면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는 대체로 맞지 않는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에는 1682년에 관측된 혜성 이야기가 지나가듯 언급되었을 뿐이었고 뉴턴은 혜성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뉴턴 자신은 혜성은커녕 달의 운동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어서 깊이 고심하고 있었다. 일차 어림으로 보면 지구 주위의 달의 운동은 깔끔한 타원 궤적을 그리겠지만, 달은 지구뿐 아니라 태양으로부터도 힘을 받고 있으며 달의 운동을 상세하게 서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뉴턴은 현대적인 의미의 미적분학을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유율법(method of fluxions)을 통해 미분 개념을 도입하긴 했지만, 이를 써서 달의 운동을 풀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였고, 뉴턴 이외에는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뉴턴은 달의 궤적에서 장축선(apside, apse)의 섭동을 다루는 데 애를 먹었다. 장축선은 달의 궤적에서 근지점과 원지점을 연결하는 현으로 정의된다. 장축선의 운동은 심각하게 불규칙하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히파르코스도 이 현상을 잘 알고 있었고, 2천 년 전에 만들어진 최초의 컴퓨터라 불리는 안티키테라 장치에도 장축선의 운동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역제곱힘으로부터 이 운동을 서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하물며 혜성의 운동을 역제곱힘으로부터 제대로 서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과제였다.

그림 5.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에드먼드 핼리의 명판.
핼리가 혜성에 깊은 관심을 가진 동기도 물리학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영국 국교회 주교였던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는 기독교 성서의 기록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여 지구가 4004 BCE 10월 23일(일요일) 정오에 창조되었다는 어리석은 발표를 하여 지금까지도 웃음거리가 되어 있지만, 어셔와 동시대 자연철학자 중에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핼리가 1691년 무렵부터 혜성을 탐구한 중요한 동기는 이것이 노아의 대홍수와 관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그림 5).

그림 6. 윌리엄 위스턴의 <새로운 지구 이론(A New theory of the Earth)>(1696) 표지(a)와 삽화(b).
튀코 브라헤의 논의 이후 혜성이 지구 대기권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태양 둘레를 돌고 있는 행성들과 같은 부류라는 생각이 당시에 확립되어 가고 있었다. 핼리와 비슷한 믿음을 가졌던 윌리엄 위스턴(William Whiston, 1667‒1752)은 1696년 <새로운 지구 이론(A New theory of the Earth)>을 냈다(그림 6(a), 6(b)). 이 책의 부제에 “6일 동안의 세계 창조, 대홍수, 대격변을 성서에 쓰인 대로 그리고 이성과 철학에 완벽하게 합치함을 보이도록” 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으며, 뉴턴의 이론을 적용하여 혜성이 지구와 거의 충돌할 뻔했을 때 혜성의 꼬리에 담겨 있던 많은 물이 지구로 쏟아지는 바람에 대홍수가 일어났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 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대홍수를 물리적 사건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실상 기독교적 서술에 국한하지 않아도 당시의 학자들에게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서술된 대홍수와 대격변 이야기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뉴턴의 이론을 더 파고들면 단지 혜성의 꼬리에 담긴 물이 지구에 떨어질 뿐 아니라 지구 표면의 바다와 강이 모두 교란을 받아서 대격변이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혜성의 출현을 정교하게 계산하려면 태양, 지구, 달뿐 아니라 목성과 토성의 영향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계산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길다. 뉴턴의 기하학적 방식으로는 이런 계산을 하기가 매우 불편하고 어려웠다. <프린키피아>의 곳곳에 미분 개념과 적분 개념을 기하학적으로 논의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지만, 유율법에 바탕을 두고 있는 뉴턴의 기호법은 운동의 서술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의미 있게 풀어내기 시작한 것은 영어권의 자연철학자들이 아니라 프랑스어권의 수학자들이었다. 뉴턴의 접근과 달리 라이프니츠의 관점과 기호법은 운동의 서술에 유용했고, 다니엘 베르누이나 레오나르트 오일러 등을 통해 새로운 미적분학이 틀을 잡아갔다. 미적분학의 언어로 서술한 운동방정식을 처음 도입한 것은 오일러였다.

그림 7. 알렉시 클레로(Alexis Claude Clairaut 1713‒1765).

그림 8. 니콜-렌 르포트(Nicole-Reine Lepaute 1723‒1788).

그림 9. 제롬 랄랑드(Jérôme Lalande, 1732‒1807).
혜성의 출현을 정확히 계산해 낸 사람들은 프랑스의 수학자/천문학자 알렉시 클레로(Alexis Claude Clairaut, 1713‒1765), 니콜-렌 르포트(Nicole-Reine Lepaute, 1723‒1788), 제롬 랄랑드(Jérôme Lalande, 1732‒1807)였다(그림 7, 8, 9). 당시에는 수학자와 천문학자는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가령 독일 괴팅겐 대학 천문대에서 오랫동안 천문대장을 역임한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는 저명한 수학자였다.
혜성의 궤적을 알아내려면 태양과 혜성 사이의 힘뿐 아니라 지구, 달, 목성, 토성 등 굵직한 다른 행성들이 미치는 힘도 고려해야 했다. 이는 소위 ‘삼체문제’로서 그 풀이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다. 이를 세 개의 방정식으로 처음 정립한 것은 오일러, 장 르롱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 클레로였다.
클레로는 뉴턴의 기호법 대신 라이프니츠의 기호법에 기반을 둔 미적분학을 이용하여 혜성의 운동을 매우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미분방정식의 이론을 세우고 이를 정교하게 풀어내는 기법도 만들었다. 특히 달의 운동을 서술하는 상세한 이론을 정립했다.
클레로는 자신의 이론을 혜성의 운동에 적용했다. 실제의 계산은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프랑스 왕립학술원에서 알게 된 제롬 랄랑드를 공동연구자로 삼아 혜성에 목성과 토성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게 했다. 랄랑드는 클레로에게 탁월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니콜-렌 르포트를 소개했다.
에드먼드 핼리는 그 혜성이 1758년 말 또는 그 이듬해에 돌아오리라는 개략적인 예측을 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더 정확한 날짜를 계산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클레로-르포트-랄랑드 팀은 1758년 내내 식사도 거르고 잠도 못 자면서 계산에 매달렸고, 드디어 1758년 11월에 혜성이 나타날 시기를 1759년 3월 15일과 5월 15일 사이로 좁혀서 발표하는 데 성공했다. 천문대에서 매일 새로운 혜성이 나타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보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두 달 정도의 오차 내에서 예측한 것이 이미 대단한 성취였다. 실제 그 혜성이 근일점에 다시 나타난 것은 1759년 3월 13일이었다.

그림 10. 클레로의 <혜성 운동의 이론(Théorie du mouvement des comètes)>(1760) 표지.
클레로는 1760년에 출간된 <혜성 운동의 이론(Théorie du mouvement des comètes)>에서 “1682년의 혜성이 뉴턴의 이론으로부터 얻어낸 시점에 되돌아온 것은 물리학의 위대한 승리 중 하나이자 과학에서 기념비적인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그림 10). 클레로는 르포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혼자 모든 것을 계산한 것처럼 적었다. 하지만 랄랑드는 <혜성의 이론(Théorie des Comètes)>에서 르포트의 엄청나게 세세하고 열정적이며 정확한 계산이 없었다면 혜성의 운동을 제대로 풀어낼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르포트의 기여를 칭송했다. 그러면서 클레로는 여성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하다고 비판했다.
핼리 혜성의 역사적 일화는 예측적 앎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준다. 케플러의 행성 법칙을 뉴턴 역학이 ‘설명’한 것보다 더 강렬했던 것은 그 새로운 지식/이론/가설을 써서 새로운 상황을 ‘예측’하고 또 이를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핼리 혜성은 예측적 앎의 중요성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준 좋은 역사적 사례이다. 동시에 유명한 과학사의 일화가 다소 과장되어 있고 신화화되어 있다는 점도 잘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