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S PLAZA
크로스로드
지식인과 활동가들의 만남, 과학이 문화가 되려면
작성자 : 정우현 ㅣ 등록일 : 2025-11-04 ㅣ 조회수 : 23
정우현 교수는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MD 앤더슨 암센터(MD Anderson Cancer Center)와 베일러 의과대학(Baylor College of Medicine)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암 생물학과 분자유전학 연구를 수행했다.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약학대학 교수로 재직 중으로 미생물유전학, 세포분자생물학, 신경과학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또한 과학 대중화에도 힘쓰고 있으며, 일반 대중이 과학을 쉽고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강연, 칼럼, 대중 과학 콘텐츠 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과학은 한 사람의 작은 호기심에서 출발하기 마련이지만, 결코 연구실 안에서만 곱게 자라는 나무가 아니다. 실험대 위에 놓인 시약과 현미경을 붙잡고 겨루는 조용한 씨름만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 새로운 생각은 언제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솔한 대화, 뜻밖의 만남, 그리고 즐거운 사교의 자리에서 자라나곤 한다. 과학이 특정 개인의 머릿속 번뜩임만으로 진보하지 않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 간의 집단적 토론과 교류 속에서 꽃피운다는 사실은 역사가 여러 차례 증명해 주었다.(아, 물론 ‘기적의 해’를 일군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의 성과는 예외다. 그게 바로 ‘기적’이라는 말이 따로 있는 이유가 아닐까.)
루나 소사이어티, 달빛 아래의 혁신가들
18세기 영국 버밍엄 일대에서는 산업혁명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당시의 그 작은 지역의 발명가, 철학자, 의사, 화학자들이 우연히 모여 만든 모임이 바로 ‘루나 소사이어티(Lunar Society)’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날 저녁마다 만나 토론을 벌였다. 그래서 우리말로 ‘만월회’라고도 불린다. 하필 왜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을까? 한 번 시작된 모임은 자정을 지나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였고, 가로등이 없던 그 시절 깜깜한 밤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길은 밝게 빛나는 달빛에 의지하는 방법뿐이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와트, 조지프 프리스틀리,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였던 이래즈머스 다윈, 기업가 매튜 볼턴 같은 인물들이 주요 회원이었고, 모임의 주제는 과학뿐 아니라 철학, 정치, 경제 전반을 넘나들 정도로 스케일이 컸다.

그림 1. 루나 소사이어티.
그들의 만남은 단순한 지식 나눔을 넘어,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증기기관의 개선, 화학적 발견, 사회 개혁 논의 등이 달빛 아래 마련된 이 작은 자리에서 오갔다. 화학의 발견이 산업의 발명으로 이어지고, 경제적 통찰이 새로운 사회적 비전을 불러일으켰다. 루나 소사이어티는 과학과 기술이 사회 변화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그뿐이 아니다. 이 멋진 모임에서는 사랑도 맺어졌다. 남자들로만 가득한 모임에서 사랑이라니? 오해하지는 마시길. 웨지우드 도자기를 만든 유명한 사업가 조사이어 웨지우드도 이 모임의 멤버였는데 의사였던 이래즈머스 다윈의 집안과 자녀 혼인을 통해 사돈 관계를 맺게 된다. 바로 여기서 진화론으로 인간의 기원을 밝힌 찰스 다윈이 잉태될 수 있었으니 어찌 역사적인 모임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살롱 문화와 사교의 힘, 유럽 지성의 온실
루나 소사이어티보다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 보자면, 17~18세기 파리와 빈, 베를린 등 유럽 전역에 걸쳐 번성했던 살롱 문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파리의 살롱은 귀족 여성들이 주최하는 사교 모임이었지만, 단순한 유흥의 자리가 아니라 철학과 과학, 문학과 예술이 뒤섞이는 지적 교류의 장이었다. 볼테르와 디드로, 라마르크 같은 사상가들이 살롱에 드나들며 자신만의 새로운 생각을 가감 없이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계몽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가 힘을 얻어 사회 전반에 퍼져나갔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살롱 문화는 오늘날 학제 간 연구(interdisciplinary research)의 선조라 부를 만하다. 물리학자가 시인을 만나고, 의사가 철학자와 논쟁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이 태어나곤 했다. 살롱은 곧 지식을 전유한 전문가 집단만의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어울려 사고를 확장하는 토양이었다. 작년에 있었던 전 세계 커피 소비량 조사 결과 한국인의 커피 사랑이 드디어 프랑스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랐다고 하니, 바야흐로 살롱 문화의 열매가 우리나라에서도 맺힐 시기가 무르익은 것은 아닌지.
학문과 예술의 대화, 블룸즈버리 그룹과 제네바의 작은 여름 모임
과학만이 아니라 예술과 인문학의 세계에서도, 지성인들의 작은 모임은 혁신을 낳았다. 20세기 초 런던 블룸즈버리 지역에서 활동한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 버지니아 울프, 버네사 벨, E.M. 포스터 등 예술가와 경제학자, 철학자가 어울린 모임이었다. 그들은 정치와 미학, 경제와 문학을 함께 논했다. 비록 직접적으로 과학적 발견을 낳은 것은 아니었지만, 블룸즈버리 그룹은 학문과 예술이 서로 반사광처럼 빛을 주고받으며 사고를 넓혀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기에 늘 어른스러운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멤버 중 몇몇은 동성애자였지만 그룹 내 이성들과 복잡한 관계를 즐기다 아기를 낳기도 했고, 또 다른 동성 연인이 그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는 일도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 그룹에서 들려왔던 자유분방한 일들을 잘 묘사하는 유명한 말이 하나 있다. “그들은 광장에서(in squares) 살았고, 그룹을 지어(in circles) 예술을 했으며, 삼각관계의(in triangles) 사랑을 나눴다.” 이들의 얽히고설킨 사생활마저도 페미니즘과 평화주의, 그리고 성에 대한 현대적인 학문적 담론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전 세계적인 이상기후로 인해 ‘여름이 없는 해’로 불렸던 1816년의 여름,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 별장에서 열린 모임은 또 다른 예를 보여준다. 메리 셸리와 그녀의 남편 퍼시 비시 셸리,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 그리고 소설가이자 의사였던 존 폴리도리가 장마에 갇혀 긴 밤을 보내며 과학과 생명, 초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최초의 SF 소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다. 전기 자극으로 생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당시의 실험적 논의가 문학적 상상력과 결합해 인류 최초의 과학소설이 쓰였다. 곧이어 폴리도리의 소설 <뱀파이어>도 세상에 등장해 새로운 장르의 문학을 열었다. 이처럼 세상이 천재지변으로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조차 과학적 문제의식과 문학적 감수성이 만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허락된다면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문화가 탄생한다.
RNA 타이 클럽, 비록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실패했지만
과학자들만의 모임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전공을 가진 경우 꽤 유쾌한 영감을 준다. 1950년대 초, 왓슨과 크릭의 발견으로 DNA가 유전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그 암호가 어떻게 특정 단백질로 번역되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이 수수께끼를 풀고자 몇몇 젊은 과학자들이 만든 것이 바로 ‘RNA 타이 클럽(RNA Tie Club)’이다. 놀라운 점은 이 모임을 처음 결성한 인물은 빅뱅 이론의 선구자였던 러시아 출신 물리학자 조지 가모프였다는 사실. 그러나 아무리 가모프였을지라도 내로라하는 생물학자들이 가득한 방에서 새로운 생물학 연구를 제안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과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도 멤버로 참여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재림도 아니고 이 무슨 신선한 조합이란 말인가?

그림 2. RNA 타이 클럽.
이 모임은 정식 학회도, 연구비가 지원되는 기관도 아니었다. 단지 우정과 호기심으로 연결된 비공식 모임이었다. 20가지 아미노산을 대표하는 20명의 정회원과 네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를 대표하는 명예회원 4명은 각자 금빛 RNA 나선을 수놓은 4달러짜리 촌스러운 넥타이를 하나씩 매고서 한 방에 모여 암호 해독의 가능성을 논했다. 이들이 머리를 맞대 짜낸 ‘다이아몬드 가설’은 결국 틀린 결론으로 드러나며 클럽은 큰 성과 없이 해체되었다. 이 가설은 ‘과학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틀린 아이디어(the most beautiful wrong idea in science) 중 하나’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얻었다. 그럼에도 이들 사이의 열띤 지적 교류는 유전암호 연구의 초석이 되었고, 결국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분자생물학 혁명의 한 축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림 3. RNA 타이 클럽 멤버들의 서명.
역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21세기에도 과학은 여전히 사교와 문화의 힘을 필요로 한다. 학술 논문 데이터베이스와 온라인 회의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적 만남과 자유로운 토론에서만 나올 수 있는 창의성이 분명 존재한다. 과학이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알려지고, 학문 간 경계가 허물어져 새로운 시각이 열리기 위해서는 ‘소통의 문화’가 필요하다. 시민 과학 모임, 과학 카페, 대중 강연, 과학을 소재로 한 예술 공연 같은 활동들이 그 현대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지난 여름 소백산 천문대에서 경험했던 2박 3일간의 ‘과학과 문화예술 소통 워크숍’1) 21기 모임은 더없이 짜릿한 하나의 결정체였다. 10년 넘게 지속되어 왔다는 이 귀한 모임에 이제야 초대를 받게 된 것이 아쉬울 정도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천문학자, 로봇공학자, 기업인, SF 작가, 생물학자와 화학자, 애니메이션 제작자, 공연 제작자, 기자, 그리고 뮤지컬 배우이자 영화감독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의 소개와 발표를 들으며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한 꿈을 꿀 수 있었다. 열심히 자기 연구에 임하는 진지한 과학자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원하는 대중들에게 높은 설득력과 지명도를 갖춘 셀럽 과학자도 여럿 생겨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임은 최근 뇌과학과 휴머노이드를 소재로 한 과학 연극 공연으로 이어지며, 앞으로도 더 단단하고 끈끈한 만남이 계속되고 확장될 것임을 예고했다.
과학은 실험실의 닫힌 문 안에 머무를 때보다, 카페나 강연장, 혹은 무대와 스크린 위에서 사람들 사이로 흘러나갈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우리가 과학을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문화적 경험으로 확장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의 의사이자 물리학자였던 아르망 트루소의 말이 떠오른다.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 예술성이 결여된 과학은 힘이 없으며, 과학에 기초하지 않은 예술 역시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지식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묶어 주는 방식이다. 한 잔의 술 또는 커피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 속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온 이들이 서로의 경험을 연결할 때, 우리는 비로소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상상력을 얻는다. 그 작은 만남의 순간들이야말로 내일의 과학과 과학 문화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어줄 걸로 믿는다.
1)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와 한국천문연구원이 매년 공동 개최하는 ‘과학과 문화예술 소통 워크숍’은 충북 단양의 소백산천문대에서 열리며, 과학자와 예술·문화 분야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주와 과학을 새로운 시각으로 탐색하고 학문 간 경계를 넘는 창의적 대화를 나누는 자리이다. 자연 속 천문대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행사이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과학과 미래 그리고 인류’를 목표로 한 <크로스로드>는 과학 특집, 과학 에세이, 과학 유머, 과학 소설, 과학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과학 글을 통해 미래의 과학적 비전을 보여주고자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sia Pacific Center for Theoretical Physics)에서 창간한 과학 웹 저널입니다.
http://crossroads.apctp.org/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는 정부의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 지원으로 사회적 가치 제고에 힘쓰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