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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창

양자역학을 가르친다는 것: 임페투스에서 ‘묘르는’ 상태까지

작성자 : 윤선현 ㅣ 등록일 : 2025-12-03 ㅣ 조회수 : 35

캡션윤 선 현
전남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물리학과 강단에서 양자역학을 배우고 가르친 지 40여 년이 흘렀다. 수많은 학생의 초롱초롱하며 혼란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며 늘 같은 고민에 빠지곤 했다. 최근에는 영재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사 교육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어린 지성들과의 만남은 내 오랜 고민을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아이들에게 선행학습이라는 명목으로 복잡한 수식을 던져주는 대신, 나는 인류가 자연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에 대한 긴 여정부터 이야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부터 시작해 중세의 ‘임페투스(Impetus) 이론’을 설명해 주었다. 물체가 던져졌을 때 운동을 지속하는 것은 ‘임페투스’라는 힘이 물체에 주입되었기 때문이며,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그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라는 설명.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히 틀린 이론이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강조한다. 이것이 그 시대의 인류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구축한 지혜의 성이었다고. 우리는 이 이론이 틀렸음을 깨닫고 관성, 뉴턴 역학이라는 더 정교한 체계를 세우며 한 걸음 나아갔다. 이렇듯 과학의 역사는 오답을 수정하며 진리에 점근해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대학 강의실로 이어진다. 왜 학생들은, 아니 물리학을 전공하는 우리조차 양자역학을 직관적으로 받아 들이기 힘들어하는 것일까? 그 원인은 아마도 우리가 너무나 성공적으로 구축해 온 고전적 세계관의 관성 때문일 것이다.

대학 시절, 세미나 발표를 위해 ‘다치 논리학(multi-valued logic)’을 찾아본 기억이 난다. 명제의 진리값이 ‘참’과 ‘거짓’만으로 결정되지 않는 논리 체계였다. 문득 양자역학이 말하는 ‘확률’이란 것이 혹시 그런 의미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전자는 관측되기 전까지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며, 각 위치에서 발견될 확률만을 가질 뿐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학생들은,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질문의 본질을 파고들기 위해 나는 가장 단순한 상황을 가정해본다. 이 광활한 우주에 오직 ‘나’와 ‘전자 하나’만 존재한다고. 이때 나는 이 전자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전자가 지금 어디를, 어떤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가 전자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나는 학생들에게 이 ‘모른다’의 의미를 구별하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은 내 아들의 이름도 모르고, 내 딸의 이름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나에게는 아들이 있으니, 누군가는 그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다. 여러분이 모르는 것은 단순히 그 정보에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딸이 없다. 따라서 딸의 이름은 전지전능한 존재라 할지라도 알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정보이다.

이처럼 ‘정보가 존재하지만 내가 모르는 것’과 ‘정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나는 후자의 경우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 ‘묘른다’를 제안했다. 새로운 개념은 기존의 단어로는 그 의미가 온전히 담기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잘 섞여 뒤집힌 카드의 맨 윗장이 무엇일지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고, 윷이나 주사위를 던졌을 때 어떤 면이 나올지는 우리가 ‘묘르는’ 것이다. 묘른다는 것은 아직 세상에 그 결과가 현현(顯現)하지 않았기에 정보 자체가 부재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전자의 위치는 우리가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묘르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전자의 위치를 ‘묘른다’고 말해야 한다. 전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이는 주사위처럼 아직 그 상태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에 가깝다. 지금 이 순간, 전자의 위치는 하나의 값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가 측정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실체 자체가 특정 값으로 정해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성을 가진 인간은 자유의지로 자신의 생각을 감출 수 있지만, 자신의 위치나 속도 같은 물리적 속성은 객관적으로 관측 가능한 값이기에 숨길 수 없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아무 생각도 없는 전자 하나가 자신의 위치와 운동량 정보를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내어주지 않은 채 ‘묘른’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상식을 송두리째 흔든다. 어쩌면 문제는 전자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류가 전자를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유유자적했을 그 존재를 굳이 우리가 만든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 안에 가두려는 우리의 오만한 생각이 문제일 수 있다.

수많은 실험 결과는 전자가 시공간의 틀 속에서 ‘묘른’ 상태로 존재함을 검증하고 있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려면 이 기묘한 상황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단진자 운동을 배울 때, 현실에서는 마찰로 결국 멈추지만 마찰이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서는 영원히 운동할 것이라고 배우듯, 거시 세계에서는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잘 알 수 있지만 미시 세계로 내려가 더 세밀하게 알려고 하면 그 상태가 ‘묘른다’고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어찌어찌하여 학생들은 전자가 평소에는 ‘묘른’ 상태로 있다가, 우리가 ‘측정’이라는 물리적 상호작용을 하는 순간, 마치 주사위를 던지듯 확률적으로 특정 값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사실까지는 억지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진짜 장벽은 그다음에 나타난다. 바로 ‘법칙’의 문제이다.

무릇 물리 법칙이란 객관적이어야 한다. 즉, 누구나 검증 가능한 사건들에 근거하여 그 인과관계를 설명해야 마땅하다. 뉴턴의 법칙이 그러했듯, ‘시간 \(\small t_1\)에 위치 \(\small x_1\)에 있던 물체가 시간 \(\small t_2\)에는 위치 \(\small x_2\)에 있다’는 두 개의 객관적 사실(사건)을 바탕으로 그 사이를 지배하는 법칙을 기술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법칙의 모습이다.

하지만 20세기가 밝힌 양자역학의 법칙, 예컨대 슈뢰딩거 방정식은 그렇지 않다. 이 법칙은 측정된 두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묘른’ 상태와 또 다른 ‘묘른’ 상태 사이의 시간적 변화를 정밀하게 기술한다. 우리에게 정보를 주지도 않는, 그저 가능성의 뜬구름으로 존재하는 상태들 사이에 엄연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묘른’ 상태의 흐름을 직접 볼 수 없고, 그저 측정을 통해 이따금 확률적인 샘플값 하나를 얻을 뿐이다.

우리가 만든 시공의 틀에 깔끔하게 기술되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관측하는 결과가 아닌 자신들만의 ‘묘른’ 세계에서 따라야 할 법칙이 따로 있다는 것. 이것이 양자역학의 두 번째 충격이다. 지구만큼 넓은 영역에 ‘묘른’ 상태로 퍼져있던 전자가 어느 한 지점에서 측정되는 순간, 그곳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유령처럼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마술을 부린다. 심지어 지구와 안드로메다 은하만큼 떨어진 두 입자가 ‘묘른’ 상태로 얽혀있다면, 지구에서의 측정이 그 상태를 확정하는 순간, 빛의 속도로는 도달 불가능한 시간 안에 안드로메다의 입자 상태 역시 동시에 확정된다. 아인슈타인이 ‘유령 같은 원격 작용’이라 부르며 불편해했던 바로 그 현실이다.

우리는 이런 기묘한 자연의 모습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중세의 학자들이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그것이 물체의 본성’이라 설명했듯, 우리 역시 양자 현상을 설명하며 비슷한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다. “믿기 어렵겠지만, 자연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

물론 우리는 예측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자연에 대한 이해가 수십 년 후, 혹은 인공일반지능(AGI)이 완성된 시대에도 그대로일 리는 없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구석기 시대의 사냥꾼이나 수많은 전쟁터의 궁수들이 뉴턴 역학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잘 된다’는 경험적 확신으로 창과 활을 날렸다는 사실을. 지금의 양자역학은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반도체부터 미래의 양자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그런 ‘좋은 경험’을 무수히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기묘한 세계를 체화하는, ‘양자역학적으로 생각하기’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근본적으로 ‘묘른’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법칙이란 내가 객관적으로 얻어낸 정보들로 구축된 세계가 아니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묘른’ 상태가 또 다른 ‘묘른’ 상태로 흘러가는 것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 전자 하나도 그러할진대, 수많은 것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어떠할까? 더 기묘하게 흘러갈까? 아니면 수많은 ‘묘른’ 상태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통계적으로는 우리가 아는 평범한 ‘모르는’ 상태로 변해버리는 것일까? 모르는 것을 더 명확하게 알게 된다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라면, 어쩜 우리는 양자의 세계를 잘 이해해 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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