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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양자 100주년 특집: 한국 양자과학의 성취와 도전

강대원 박사의 생애와 업적

작성자 : 박용섭 ㅣ 등록일 : 2026-03-17 ㅣ 조회수 : 22 ㅣ DOI : 10.3938/PhiT.35.005

저자약력

박용섭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및 석사를 마치고 미국 Northwestern 대학에서 1994년에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Rochester 대학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경희대학교 이과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광전자분광 관련 기술을 이용하여 유기 전자소자를 연구하고 있다. (parky@khu.ac.kr)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Dr. Dawon Kahng

Yongsup PARK

Dr. Dawon Kahng(1931-1992), a pioneering Korean-American physicist and engineer, co-invented the MOSFET-the foundational transistor powering modern electronics-with Martin Atalla at Bell Labs in 1960, enabling scalable integrated circuits despite initial skepticism. This article traces his life from early brilliance in Seoul and rapid U.S. degrees in physics and electrical engineering, through key innovations like floating-gate memory (1967, with Simon Sze) for non-volatile storage, Schottky diodes for ultrafast switching, and electroluminescence advances, to his leadership as founding director of NEC Research Institute (1988-1992).

들어가며

강대원 박사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93년 11월이다. 당시 필자는 미국 Northwestern 대학 물리학과 대학원 학생으로 시카고 시 근교의 아르곤 국립연구소(Argonne National Laboratory)의 재료과학부(Materials Science Division)에서 학연 연구생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시간이 날 때마다 재료과학부 빌딩의 2층에 있던 도서관에서 최신 저널이나 여러 분야의 책들을 훑어보곤 했었다. 한국물리학회의 『물리학과 첨단기술』처럼 미국물리학회도 홍보잡지 『Physics Today』를 발간하는데, 물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즐겨 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1993년 11월호 『Physics Today』에서 Dawon Kahng이라는 이름을 달고 부고(obituary)가 실린 것을 발견한 것이다.1) 분명히 한국 사람의 이름인데 이휘소 박사 등 당시에도 잘 알려진 재미 물리학자들과는 달리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Physics Today』의 부고는 단순히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망자의 업적이 물리학계 전반에 영향을 줄 정도로 지대할 경우에, 그리고 후배 누군가가 그런 업적을 기려서 『Physics Today』에 원고를 기고할 정도가 되어야 실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매우 이례적이며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부고를 작성한 사람은 당시 NEC 연구소의 부소장이던 Joseph Giordmaine인데 레이저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 역시 AT&T 벨 연구소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 필자의 전공 분야는 반도체가 아닌 자성 박막이었고 반도체 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스마트폰 혁명은 고사하고 인터넷도 극초창기였기 때문에 반도체 소자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은 물론 물리학계에서의 관심도 관련 전공자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흘러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고 핸드폰이 거의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져 있을 2000년 초반에 필자의 연구 주제도 유기 반도체가 되면서 반도체 소자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때 강대원 박사의 업적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끔 글을 쓰던 블로그에 강대원 박사에 대해서 한 꼭지를 썼는데, 당시만 해도 영문 Wikipedia에는 강대원 박사에 대해서 열 줄 정도의 소개가 있었을 뿐이고, 한글 위키피디아에는 아예 소개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이 몇몇 분야에서 세계를 제패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반도체 소자에 쏠리게 되면서 강 박사도 재조명되었다. 이 글에서는 강대원 박사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의 대표적인 업적의 의미와 당시의 배경, 그리고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강대원 박사의 생애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강대원 박사는 진주 중고와 보성고의 교장을 지낸 강정용의 장남으로 1931년 5월 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6년제 경기중학교를 월반하고 검정고시로 1949년에 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명석한 학생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 해병대 통역장교로 복무한 후 1955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조기 졸업한다. 이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Ohio State University)로 유학을 간 후 1년 만인 1956년 “The Thermionic Emission Microscope”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물리학과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은 전기공학과로 옮겨서 3년 만인 1959년에 “Phosphorus Diffusion Into Silicon Through an Oxide Layer”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2) 이어 당시 세계 최고의 연구소인 미국 AT&T 벨 연구소에 입사한다. 이후 약 1년 후 1960년에 Martin Atalla와 함께 MOSFET (metal-oxide-semiconductor field-effect-transistor)을 최초로 발명한다. 연이어 1967년에는 Simon Sze와 함께 현대 비휘발성 플래시 메모리의 시초가 되는 플로팅 게이트 메모리(floating gate memory)를 발명하고 이후에도 쇼트키 장벽 다이오드와 반도체 박막의 발광 현상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했다. 벨 연구소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일본 NEC가 미국 프린스턴에 설립한 NEC Research Institute 초대 소장으로 1988년부터 재직하다가 1992년 5월 13일에 세미나 후 귀가하던 중 공항에서 대동맥류 파열로 쓰러진 후 사망한다. 가족으로는 강대원 박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결혼한 김영희 여사와 의학 및 예술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1남 4녀의 자녀가 있다. 김영희 여사는 2024년 1월에 사망했다.

Fig. 1. Dr. Kahng, his wife, and the MOSFET invention patent.
Fig. 1. Dr. Kahng, his wife, and the MOSFET invention patent.

박사학위 논문과 MOSFET 발명

널리 알려진 것처럼 최초의 반도체 트랜지스터는 1947년에 벨 연구소의 Walter Brattain과 John Bardeen이 발명한다. 이들이 발명한 소자는 점접촉 트랜지스터(point contact transistor)인데 약 50 마이크로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금(Au)으로 만들어진 이미터 전극과 컬렉터 전극을 n-타입 게르마늄(Ge)에 접촉한 형태이다. 이미터에 바이어스 전압을 건 후에 약한 교류 신호를 추가로 가하고 컬렉터에 더 강한 바이어스 전압을 건 후 전류를 측정하면 이미터에 가해준 교류 신호가 증폭되어 나타나는 것이 원리이다. 이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바이폴라 접합 트랜지스터(bipolar junction transistor, BJT)에서 볼 수 있는 이미터-베이스-컬렉터 접합구조가 아니고 게르마늄 전체가 베이스로 동작하는 구조이다.

브래튼과 바딘의 점접촉 트랜지스터는 당시 널리 사용되던 진공관 소자와는 달리 고체 증폭 소자라는 측면에서 혁명적이었으나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공학적으로 일정한 성능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려워서 실제로 응용되지 못했다. 또한 이 소자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지만 Julius Lilienfeld가 비슷한 소자에 대한 개념특허를 이미 1926년에 출원한 기록이 있어서 등록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벨 연구소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가 더 심각했다. 브래튼과 바딘의 연구를 감독하는 위치에 있던 William Shockley는 점접촉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자 이 발명은 자신의 지시에 의해서 브래튼과 바딘이 일한 것이므로 그들의 공로는 전혀 없고 자신이 유일한 발명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조사를 해 본 결과 쇼클리의 실질적 기여는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최초의 점접촉 트랜지스터의 발명 특허에는 쇼클리의 이름이 없다. 이에 크게 실망한 쇼클리는 점접촉 트랜지스터가 동작하는 것이 벨 연구소 내부에서 시연된 후 두문불출하고 홀로 연구를 거듭하여 약 4주일 만에 BJT 개념과 동작 원리를 창안하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점접촉 트랜지스터와 BJT의 발명으로 진공관 소자에서 고체 전자소자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면서, 쇼클리는 캘리포니아로 가서 ‘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실리콘 밸리의 창시자가 되었다. 바딘은 일리노이 대학으로 가서 초전도 현상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브래튼은 벨 연구소에 남아서 연구를 계속한다. 그리고 1956년에 세 사람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점접촉 트랜지스터는 산업적 가치가 없어서 사라지고, 쇼클리의 BJT는 점점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1926년 릴리엔펠트의 개념특허에서 도입된 전계효과 트랜지스터(field effect transistor, FET)는 실리콘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유를 잘 몰랐으나 트랜지스터의 개발을 위해서 고체물리와 표면물리가 발전하면서 실리콘 표면의 비결합 전자에 의한 표면 상태(surface state) 때문임이 밝혀지게 되었고, 이들을 안정화(passivation) 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표면 상태를 안정화하는 방법 중 하나가 실리콘 표면에 실리콘 산화막을 형성하는 것인데, 산화막이 형성된 후에 아래에 있는 실리콘에 불순물 도핑을 하려면 도펀트 원자인 인(P) 같은 물질의 원자가 산화막을 어떻게 지나가서 아래의 실리콘에 도달할 수 있는지 밝혀져야 하는데, 고온에서 도펀트 원자가 확산을 통해서 산화막 아래의 실리콘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바로 강대원 박사의 학위 논문의 주제였던 것이다.

이런 연구 배경을 가진 강 박사가 벨 연구소에 취직을 했을 때 같이 일하게 된 사람이 바로 Martin Atalla 박사다. 아탈라 박사는 1924년에 이집트 포트 사이드(Port Said)에서 태어나 카이로 대학을 졸업하고 1949년 미국의 퍼듀대학 기계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벨 연구소에 입사한다. 초기에는 당시 전화 교환기에 널리 사용되던 계전기(relay)의 접점 열화에 대해서 연구했다. 계전기는 전자석에 의해서 금속 접점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면 표면에 금속 산화층이 형성되어서 결국 동작하지 않게 되는데 이런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했다. 그러다가 1956년경부터 실리콘 표면에 형성되는 산화막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는데, 이는 1950년대 중반에 반도체 산업이 게르마늄에서 실리콘으로 전환하고 있었지만 실리콘의 표면이 불안정하여 전기장이 내부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는 표면 상태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쇼클리가 BJT를 발명하기 전에 릴리엔펠트의 개념 특허에 있는 FET를 소자로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탈라 박사는 1957년경에 실리콘 웨이퍼를 산화 분위기에서 가열하여 얇고 균질한 실리콘 산화막을 만들면 표면 상태의 밀도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3) 이 표면 안정화 기술을 적용하면 소자 누설전류가 100배 줄어들어 실제 전계효과 트랜지스터를 구현할 바탕이 마련된 것이었다.

Fig. 2. Dr. Atalla, circa 1963 photo.
Fig. 2. Dr. Atalla, circa 1963 photo.

여기서 MOSFET의 동작 원리를 잠시 살펴보자. 예컨대 p 타입으로 도핑된 반도체 기판(substrate or body)에 n 타입으로 도핑된 소스와 드레인을 적당한 간격으로 만들어 주고 소스와 드레인 사이에 전압을 걸어주면 소스-기판이나 기판-드레인 중 하나는 pn 접합의 역방향으로 바이어스가 걸리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전류가 흐르지 않게 된다. 이때 소스와 드레인 사이의 영역인 채널 부분에 절연체를 올려놓고 그 위에 금속 전극인 게이트를 둔 후에 높은 전압을 걸어주면 절연체 바로 아래의 얇은 층에 음전하가 모이게 되고, 이들이 n 타입으로 도핑된 소스와 드레인 사이에 전자가 움직일 수 있는 통로인 역전층(inversion layer) 채널(channel)이 만들어져 전류가 흐르게 된다. 게이트 전압을 조절하여 소스-드레인 사이의 전류를 제어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가 되는 것이다.

1926년 릴리엔펠트의 특허는 이러한 개념을 제안했고, 1940년대 후반 쇼클리는 이 개념을 실제 소자에 구현하기 위해서 상당 기간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실리콘 표면 원자들의 미결합 전자(dangle bond)들이 표면 상태를 형성해서 게이트에 걸린 전압이 실리콘 내부에 전기장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바딘 등의 연구로 알게 되었지만 마땅히 이를 제어하는 수단이 없었는데, 아탈라의 산화막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강대원 박사는 아탈라 박사의 연구 결과에 본인이 박사과정에서 수행했던 산화막을 지나서 반도체에 불순물을 확산을 통해서 주입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형성된 산화막 아래에 소스와 드레인 영역을 채널 영역과 반대 극성으로 도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전계효과 트랜지스터가 탄생한 것이다. 쇼클리는 별도의 절연체 박막을 반도체 위에 올려놓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표면 결함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었다. 강대원 박사의 기념비적인 MOSFET 특허(US3102230)는 1960년 5월 30일에 출원되어서 1963년 8월 27일에 등록되었는데, 발명자로는 강 박사가 단독으로 게재되어 있다. 아탈라가 산화막을 통한 표면 상태 안정화에 기여한 것을 고려하면 다소 이례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탈라 박사는 표면 안정화 기술을 이용해서 당시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BJT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 관심이 더 많았고, 강대원 박사가 MOSFET의 대부분의 소자 구현을 했기 때문에 단독 특허로 등록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MOSFET 소자와 산화막에 의한 표면 안정화 기술을 구별해서 별도의 특허로 나누는 특허 포트폴리오 전략의 일환으로 각각의 특허를 출원한 점도 있다. 그래서 강박사 단독 출원 특허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MOSFET은 강박사와 아탈라가 공동발명한 것으로 여긴다.

Fig. 3. Diagram of MOSFET: Structure of the MOSFET.
Fig. 3. Diagram of MOSFET: Structure of the MOSFET.

MOSFET: 초기의 냉담한 반응과 폭발적 성장

1960년에 강 박사와 아탈라 박사가 MOSFET을 최초로 구현했지만 벨 연구소 내부에서 MOSFET에 대한 평가는 꽤 냉담했다. 당시에 신뢰성 있게 대량생산하고 있던 BJT는 1954년에 Regency TR-1이라는 포터블 라디오에 사용되었고, 1955년과 1957년에는 일본의 소니가 셔츠 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의 라디오를 만들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비해서 MOSFET은 공정이 복잡하고 당시에는 잘 제어되지 않던 산화막 내부의 소듐(Na) 이온의 존재로 게이트 동작 전압이 변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실제 응용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 박사가 단독으로 특허를 출원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사정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1960년 피츠버그에서 열린 Device Research Conference에서 MOSFET을 공개하면서 제조가 쉽고 집적화에 유리하며 전력 소모가 적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미 잘 작동하는 BJT를 두고 왜 이런 복잡한 소자를 사용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 학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RCA와 Fairchild Semiconductor의 연구원들은 독자적인 연구에 착수했고 이를 발전 시켜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반도체 소자의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벨 연구소는 미국의 전화 사업을 모기업인 벨 전화 회사가 독점하는 대가로 정부와 협약을 맺고 있었는데, 그 내용에 벨 연구소에 출원하는 모든 특허를 저렴한 라이선싱 비용으로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서 다른 회사에서 벨 연구소의 특허를 이용하는 데 큰 제약이 없었던 것이다.

벨 연구소가 BJT에 안주하고 있을 때 RCA의 Hofstein과 Heiman은 1962년 말에 실리콘 산화막을 이용하여 최초의 MOS 집적회로를 성공적으로 시연한다. 16개의 트랜지스터로 구성된 이 칩은 MOSFET을 개별 소자가 아니라 거대한 회로의 기본 단위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최초의 사례인데, 이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은 좁은 영역에 여러 개의 소자를 집적하는 데에는 MOSFET이 매우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BJT를 집적하기 위해서는 개별 소자의 간격을 멀리해서 간섭을 줄이는 것이 필요한데, MOSFET은 그런 점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1964년에는 General Microelectronics 사에서 최초로 상업용 MOS IC를 시장에 내놓는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독립한 기술자들이 세운 이 회사는 120개의 게이트가 집적된 20비트 시프트 레지스터(shift register)를 발표하여 당시 BJT 기반의 집적회로보다 훨씬 높은 집적도를 자랑하면서 군수용 및 초기 계산기 시장을 공략했다.

이런 발전의 와중에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Frank Wanlass가 CMOS (complementary MOS) 기술을 발명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된다. 1960년대 초기의 MOS 집적회로는 n 타입 반도체를 기판으로 사용하고 역전층이 p 타입인 PMOS나, 그 반대인 NMOS밖에 없었다. 그런데 단위 소자 여러 개를 이용해서 집적회로를 만들 때, MOSFET이 스위치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떤 스위치는 열려있고 어떤 스위치는 닫혀 있을 것이므로 평균적으로 총 MOSFET 숫자의 반에 해당하는 소자는 전류를 흘리고 있다. 게이트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정적인 상태에서도 전력이 소모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자의 집적도가 증가하여 개수가 늘어날수록 전력 소모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서 발생하는 열을 감당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배터리도 빨리 소모되어 실용적이지 않았다. 이는 휴대용 기기나 고집적 컴퓨터를 만드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그런데 완라스가 NMOS와 PMOS를 서로 대칭적이 되도록 쌍으로 묶는 아이디어로 소자가 꺼지거나 켜지는 순간에만 전류가 흐르고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면 전력소모가 없는 CMOS를 발명한 것이다. 1963년 2월의 IEEE ISSCC 학회에서 처음으로 CMOS를 발표하면서 기존의 회로보다 전력 소모가 만 배 이상 줄어든다는 것을 알렸지만 CMOS 역시 초기에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제조 공정이 복잡했고 BJT에 비해서 속도가 10배나 느려서 주류 시장에서 외면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전력이 적게 든다는 이점 때문에 배터리 하나로 일 년 이상 구동해야 하는 1970년대 초의 Seiko의 디지털 손목시계나 Sharp에서 내놓기 시작한 휴대용 계산기 등에 사용되기 시작한다. 인텔에서 발표한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에는 2300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 있었는데 모두 PMOS였고 이후의 8008 역시 PMOS였으며, 1974년에 발표된 8080은 NMOS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로 CMOS를 채택한 것은 RCA의 CDP1802라는 모델인데, 극도의 저전력, 정적 설계, 그리고 방사선 내성 때문에 보이저 1, 2호 같은 우주 탐사선의 제어 시스템에 일부 사용되었다.

Fig. 4. First CPU Intel 4004 (top) and first CMOS CPU RCA CDP1802 (bottom).
Fig. 4. First CPU Intel 4004 (top) and first CMOS CPU RCA CDP1802 (bottom).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자의 집적도가 칩 하나에 수백만 개의 트랜지스터로 증가하면서 CMOS의 장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는데, 인텔은 원래 NMOS로 발표된 8086을 CMOS로 다시 제작한 80C86을 1982년에 출시한다. 물론 세상을 뒤흔들면서 1981년에 발표된 IBM PC에 처음으로 채택된 인텔의 CPU는 8088인데 NMOS를 사용했다. PC에 CMOS가 사용된 것은 1986년에 발표된 랩톱 컴퓨터에 80C88이 사용된 것이 최초이다. 1987년에 등장한 IBM PS/2 이후부터는 모두 CMOS로 만들어진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사용하게 된다. 이후 80386, 80486, 펜티엄 등이 등장하면서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의 PC 시장 독주, 그리고 최근의 인공지능 GPU까지 CMOS의 독무대가 지속되고 있다. 물론 N/P/CMOS 모두 강대원 박사의 MOSFET이 사용되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CMOS의 발명으로 획기적인 저전력 소자 구현이 가능해진 것이 오늘날 MOSFET이 모든 디지털 소자의 기본 단위가 된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1960년의 MOSFET, 그리고 1963년의 CMOS가 주류가 되기까지 25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플로팅 게이트 트랜지스터와 비휘발성 메모리

대학의 전자공학과나 물리학과에서 반도체 소자 물리 과목을 수강하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교재가 Simon Sze가 저술한 『Physics of Semiconductor Devices』라는 책이다. “반도체의 바이블”이라 불리며 1969년에 초판이 발간된 이후 2021년 4판이 나올 때까지 수십만 명의 엔지니어가 이 책으로 반도체를 공부했다. 이 책의 저자 제 박사가 벨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강대원 박사와 함께 1967년에 플로팅 게이트 메모리(floating gate memory)를 발명한다.

제 박사는 중국 난징에서 태어나서 대만에서 성장한 후 국립대만 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벨 연구소에 입사하여 강대원 박사가 속해 있던 소자물리 부(Device Physics Department)에 배치된다. 당시 강 박사는 이미 MOSFET 상용화와 실리콘 산화막의 물리적 특성 연구에 깊이 빠져 있었고, 사이먼 제 박사는 수리적 분석과 소자 모델링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제 박사는 초기에는 박사학위 논문 주제와 관련이 있는 쇼트키 장벽(Schottky barrier)과 항복 전압(avalanche breakdown)에 대한 논문들을 주로 썼지만 두 사람은 곧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가 되었다. 강대원 박사가 나이는 다섯 살이 더 많고 벨 연구소 경력으로는 4년 선배인데 같은 동양인 유학생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친해졌고 자주 점심을 같이 먹는 동료 관계가 되어 자연스럽게 연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기 시작했다.

1967년 당시에는 컴퓨터의 데이터를 장기간 저장하려면 크고 무거운 자성 코어 메모리를 써야했다. 반도체 메모리는 전원을 끄면 데이터가 날아가는 휘발성 문제 때문에 보조 기억 장치로 쓰기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던 두 사람은 어느 날, 벨 연구소 근처의 한 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치즈케이크를 먹고 있었는데, 4층짜리 치즈케이크를 본 제 박사가 층층이 쌓인 치즈케이크와 유사하게 실리콘 산화막에 묻힌 절연(floating)된 게이트를 삽입하여 전자를 가두는 ‘샌드위치’ 구조를 만들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졌다.5) 강대원 박사는 이미 MOSFET을 만들면서 실리콘 산화막의 절연 특성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추가된 플로팅 게이트 위아래를 산화막으로 완전히 감싸면 전자가 갇혀서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장 소자 제작에 들어간 두 사람은 1967년 5월 4일에 게이트에 높은 전압을 걸어서 플로팅 게이트에 전하를 주입하면 이후 게이트의 전압을 제거해도 그 상태가 10년 이상 유지되는 비휘발성 메모리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이 결과가 1967년 7월 1일에 “A Floating Gate and Its Application to Memory Devices”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출간된다.5)

하지만 이 발명 역시 초기에는 벨 연구소의 경영진과 동료 학자들의 미온적 반응에 부딪힌다. 당시 벨 연구소의 최대 관심사는 벨 전화회사가 사용하는 전화 교환기의 속도 향상이었는데, 나노초(ns) 단위로 움직이는 BJT 기반의 메모리 개발이 주류였으며 플로팅 게이트에 전하를 주입하고 빼는 과정은 수 밀리초(ms) 이상 걸리는 매우 느린 작업이라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 또한 원래 대체하려고 했던 자기 코어 메모리에 비해서 제작 단가가 훨씬 비싸고 속도도 더 느린 반도체 비휘발성 메모리를 쓸 이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실제 공정에서 대량으로 신뢰성 있는 플로팅 게이트 메모리를 양산하는 것은 당시 공정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여겨졌다.

Fig. 5. Structure of the floating-gate device.
Fig. 5. Structure of the floating-gate device.

벨 연구소에서 재밌으나 쓸모는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묻혀가던 이 논문은, 1971년 인텔의 Dov Frohman이 이 구조를 응용해 최초의 상업적 비휘발성 메모리인 EPROM (erasable programmable read only memory)을 만들어내면서 빛을 본다. 이 소자가 원래 강대원-제 박사의 논문과 다른 점은 기억을 지우는 데 강한 전기장 대신 자외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강대원-제 박사의 원래 아이디어는 전하를 주입할 때와 같이 전하를 제거할 때도 강한 전압을 거는 것인데, 당시 공정 기술로 만들어진 산화막에 이런 과정이 산화막에 손상을 입혀 내구성이 좋지 못했지만 인텔 프로만의 EPROM은 자외선을 사용해서 전하를 빼내기 때문에 그런 위험이 적었다. 이 역시 벨 연구소의 너그러운 특허 전략 때문에 인텔이 EPROM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이후에 산화막을 훨씬 얇게 만들 수 있게 되자 플로팅 게이트에 전하를 주입된 전하를 전기적으로 제거하는 일이 가능해지면서 EEPROM (electrically EPROM)이 된다. 강대원-제 박사의 원래 논문의 방법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PROM에서는 기억을 지울 수 있지만 한 번에 칩의 모든 기록이 삭제되는 반면 EEPROM에서는 전기적으로 특정 부분만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게 되어 훨씬 편리한 소자가 되었던 것이다. 강대원-제 박사의 원래 아이디어대로 구현하면 모든 트랜지스터의 ON/OFF 상태를 제어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할 경우 이 과정을 제어하는 추가의 트랜지스터가 필요해서 전체적인 소자의 집적도가 떨어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지울 때는 수 메가바이트 크기의 블록을 통째로 지우도록 설계된 것이 오늘날 사용하는 플래시 메모리이다. 이때 통째로 지워지는 영역에 존재하는 데이터는 다른 곳에 재기록한 후에 지워야 하기 때문에 복잡한 상황을 인지하고 제어하는 플래시 메모리 컨트롤러의 성능이 매우 중요하다.

인텔이 1971년 EPROM을 개발했을 때, 초기 시장은 주로 컴퓨터의 BIOS나 산업용 제어기 성능을 테스트하는 용도였다. 하지만 이 비싼 소자를 대량으로 구매한 곳은 바로 아케이드 게임기 회사들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닌텐도를 비롯한 아타리, 남코 등의 일본 아케이드 게임기 회사들이 게임 소프트웨어를 저장하기 위해 EPROM을 대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게임들은 버그 수정이나 업데이트가 빈번했는데, 공장에서 구워져 나오는 마스크 ROM은 수정이 불가능했지만, EPROM은 자외선으로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게임기 개발과 초기 양산에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인텔이 80386 CPU로 대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인텔을 먹여 살린 가장 수익성 높은 효자 상품이 바로 EPROM이었는데 그 배경에 이러한 게임 산업의 폭발적 수요가 있었다. 이후 1980년대에 일본 도시바의 마스오카 후지오 박사가 지우는 데 사용되는 트랜지스터를 없애고 쓰고 읽는 것은 페이지 단위로 가능하지만 지우는 것은 수천 개의 페이지를 묶은 블록 단위로만 가능한 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한다. 그의 동료인 아리이즈미 쇼지는 블록 단위로 데이터가 한꺼번에 지워지는 모습이 마치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것 같다고 해서 플래시 메모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SSD는 모두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한다.

쇼트키 다이오드와 전계발광

강대원 박사가 1960년 MOSFET 발명한 다음으로 시작한 주제는 금속-반도체 접합(metal-semiconductor junction)이었다. 반도체 교과서에 나오는 금속-반도체 접합 이론에 의하면 쇼트키(Schottky) 접합과 오믹(Ohmic) 접합이 가능한데, 쇼트키 접합을 이용하면 스위칭 속도가 빠른 쇼트키 장벽 다이오드를 만들 수 있다. 금속 바늘을 반도체에 접촉시켜서 만드는 점접촉(point-contact) 다이오드가 바로 쇼트키 다이오드다. 반도체의 역사 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다이오드는 광석 라디오에 사용되었고 2차 대전 당시 폭탄의 기폭 회로에도 사용되었지만 접합계면 결함 때문에 노이즈가 심하고 신뢰성이 떨어져서 성능 예측이 불가능했다. 강 박사는 이 문제를 물리학적으로 그리고 공학적으로 완전히 해결하여 현대적인 쇼트키 다이오드를 완성했다. 강 박사와 아탈라 박사는 MOSFET에서 사용했던 열 산화막을 통한 표면 안정화 기술을 금속 접합에 도입하여 N형 실리콘 층 위에 산화막을 형성하고, 포토 리소그래피로 산화막에 정밀한 구멍을 낸 뒤 진공 상태에서 금(Au)을 증착하는 평판 구조를 제안한 것이다. 쇼트키 접합 이론에 나오는 thermionic emission 모델을 완벽히 구현한 것이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처럼 일반적인 P-N 접합 다이오드는 소수 캐리어(minority carrier)의 주입과 축적으로 인해 전원을 꺼도 전류가 바로 멈추지 않는 역회복 시간 문제가 있다. 반면, 강 박사가 구현한 Au-Si 쇼트키 장벽 다이오드는 다수 캐리어(majority carrier)가 금속의 일함수가 만든 쇼트키 장벽을 넘어가는 것이다. 강박사는 쇼트키의 금속-반도체 접합 이론을 실험으로 완전히 구현하고 이미지 전하(image charge) 효과에 의한 쇼트키 장벽 강하 현상도 실험적으로 완벽히 규명했다. 그는 이 소자를 핫 캐리어 다이오드(hot carrier diode)라고 명명했다. 실리콘의 전도대에서 장벽을 넘어 금속으로 넘어간 전자는 금속의 페르미 준위보다 훨씬 높은 에너지를 가지는 ‘hot'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소수 캐리어의 축적이 없으므로 이 다이오드의 스위칭 속도는 오직 외부 RC 시상수에 의해서만 결정되며, 피코초(ps) 단위의 초고속 동작이 가능하다. 이는 훗날 고성능 컴퓨터의 쇼트키 TTL(transistor-transistor logic) 회로와 극초고주파 믹서(mixer)의 핵심이 되었다. 금속과 반도체 계면의 페르미 준위 고정(Fermi-level pinning) 현상을 이해하고, 계면을 얼마나 원자 단위로 깨끗하게 제어해야 이상적인 쇼트키 장벽 높이를 얻을 수 있는지 증명한 연구이다.6)

1960년대 후반, 강대원 박사는 전자의 에너지를 빛으로 변환하는 광전자(optoelectronics) 분야로 연구를 확장했다. 당시 화합물 반도체에 불순물을 도핑하여 빛을 내는 연구가 한창이었으나, 효율이 낮았다. 강 박사는 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Lumocen (luminescence from molecular centers)이라는 방법을 제시한다. 기존의 반도체 발광 연구는 황화아연(ZnS) 같은 모체 결정격사(host lattice)에 희토류 원자를 도핑하는 방식이었지만 강 박사는 원자가 아닌 TbF3, ErF3, SmF3 같은 분자를 얇은 박막 안에 함께 도핑(co-doping)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불소(F) 이온이 희토류 이온 주변을 감싸는 결합 구조를 유지함으로써, 발광 중심의 양자 효율이 향상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소자는 얇은 절연막 사이에 발광층을 샌드위치처럼 끼운 교류 구동 박막 전계발광(ac thin film electroluminescence, ACTFEL) 구조였다. 양단에 106 V/cm 이상의 강력한 교류 전기장을 걸면, 절연막과 ZnS 계면에 갇혀 있던 전자가 터널링을 통해 튀어나와 강한 전기장 속에서 가속되어 hot 전자가 되고, 결정 내부에 박혀 있는 희토류 불화물 분자와 강하게 충돌한다. 이 충격 여기(impact excitation) 과정을 통해 테르븀(Tb3+) 이온의 내부 4f 전자가 들떴다가 바닥 상태로 떨어지면서 매우 선명한 약 545 nm의 녹색 빛을 낸다. 에르븀(Er)을 넣으면 적외선/적색, 사마륨(Sm)을 넣으면 주황색을 냈다. 강 박사는 희토류 이온의 이온 반경과 모체 결정의 격자 상수 불일치가 충격 여기 단면적에 미치는 영향을 양자물리학적으로 세밀하게 계산해 냈다.7) 이 발광 소자는 한때 PDP, LCD, OLED 등과 주류 디스플레이 기술의 후보로 경쟁했지만 범용 디스플레이 시장은 LCD와 OLED에 내주고, 스마트폰 이전의 피쳐폰 키패드의 백라이트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고, 현재도 산업 현장이나 자동차 등에서 투명 디스플레이 용도로 채택되고 있다. 강 박사의 연구가 오늘날 OLED 이전 세대의 평판 디스플레이와 고효율 무기물 LED 기술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NEC 연구소 설립 및 초대 소장 역임

1988년, 강대원 박사는 벨 연구소에서 조기 은퇴하고 연구 경영자로 변신한다. 당시 일본의 거대 IT 기업 NEC (Nippon Electric Company)가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설립한 NEC Research Institute (NECI)의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일본 기업들은 응용 공학에서는 미국을 압도했지만 기초과학의 원천 역량이 부족하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NEC 수뇌부는 미국의 기초과학 인프라를 이용하기 위해 프린스턴 대학 근처에 전폭적인 투자를 단행하여 독립된 연구소를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소를 이끌 세계 과학계가 인정하는 학문적 권위자이자 벨 연구소의 기초연구 문화를 이식해 줄 수 있는 인물을 찾았는데 MOSFET과 플래시 메모리를 발명한 강대원 박사야말로 최적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강대원 박사는 당시 NEC 이사회 의장직을 맡고 있던 우에노하라 미치유키(Michiyuki Uenohara)와 오랜 친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인이 미국에 위치한 일본 기업 연구소의 소장을 맡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강 박사는 초대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연구소의 비전을 명확히 했다. “단기적인 수익이나 응용 제품 개발은 철저히 배제한다. 오직 10~20년 뒤 인류의 컴퓨팅과 통신을 근본적으로 바꿀 물리 법칙과 컴퓨터 과학의 원천 연구만을 수행한다.” 그는 학제간의 벽을 허무는 극도의 융합연구를 강요하다시피 했다. 강 박사의 리더십 아래, 프린스턴의 NECI는 양자 컴퓨팅 이론, 비선형 광학, 뇌과학을 접목한 신경망 컴퓨팅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논문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연구소가 막 궤도에 오르던 때에 사망하고 말았다.

나가며

이상으로 강대원 박사의 업적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살펴보았다. 강 박사가 받은 여러 가지 상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인터넷을 찾아보면 잘 나와 있다. 필자가 2000년대 초반에 강대원 박사에 대한 글을 개인 블로그에 올릴 당시만 해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2017년 반도체 학술대회에서 강대원 상을 제정하는 등, 우리나라 반도체 과학과 산업이 발전하면서 강 박사의 업적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특히 MOSFET이 기본 단위인 로직 및 메모리 반도체의 비약적인 발전, 그리고 SSD로 대표되는 비휘발성 반도체 메모리 소자의 압도적 성장을 목도하면서 이 두 분야에서 기념비적 업적을 남긴 강 박사를 다시 발굴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물리학과 첨단기술』 1994년 9월호에 당시 고려대 김종오 명예교수가 “전계효과 트랜지스터를 최초로 실현하신 강대원 박사의 서거를 추도한다”는 제목의 기고를 했다. 강대원 박사와 대학 동기인 김 교수의 기사에서 강 박사의 학창 시절 면면을 살필 수 있다. 다만 해당 기사에 강 박사의 업적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의 부고 내용 이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의 업적을 간략하게 살펴본 이 글이 김 교수의 기고에 대한 때 늦은 보완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각주
1)J. A. Giordmaine, Nonlinear Optics, Physics Today 46, 106 (1993).
2)D. Kahng, Phosphorus diffusion into silicon through an oxide layer, Ohio State University, Doctoral Dissertation (1959).
3)M. M. Atalla, E. Tannenbaum and E. J. Scheibner, Stabilization of silicon surfaces by thermally grown oxides, in The Bell System Technical Journal 38, 749 (1959).
4)https://youtu.be/YKUjPXACaQQ?si=kZWjiuWQKoFOZry-.
5)D. Kahng and S. M. Sze, A floating-gate and its application to memory devices, The Bell System Technical Journal 46, 1288 (1967).
6)D. Kahng, Conduction properties of the Au-n-type—Si Schottky barrier: Solid-State Electronics 6, 281 (1963).
7)E. W. Chase, R. T. Hepplewhite, D. C. Krupka and D. Kahng, Electroluminescence of ZnS Lumocen Devices Containing Rare-Earth and Transition-Metal Fluorides, Journal of Applied Physics 40, 2512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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