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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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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창

수소원자에서 암흑물질로의 여로

작성자 : 신상진 ㅣ 등록일 : 2026-04-15 ㅣ 조회수 : 43

캡션신 상 진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1979년 늦가을의 어느 날 오후, 물리/수학과를 지망하던 대학 초년생 동기들과 나는 부모님이 출장 중인 친구의 집에 모여 세상사 모든 것에 대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계엄령 하의 휴교령으로 갈 데가 전혀 없었던 때에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그래도 우린 운이 좋았다. 여러 얘기들이 지나간 다음, 화제는 물리학으로 건너와, 인력이 모든 것을 끌어당김에도 별과 행성들은 왜 건재할 수 있느냐의 주제에 머물렀다. 설익은 수준이었으나 우린 열심을 내어 답을 짜냈고 그 일을 즐기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은하와 태양계와 원자의 안정이 모두 각운동량과 원심력 때문이라는 결론이었다. 지금 보면 지나친 단순화이지만, 다른 현상들에 동일한 원리가 관통한다는 사실에 감명받은 우리는 “신성한 각운동량을 위해 건배”하였다. 학교가 열린 후 오히려, 그때의 좋았던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시간이 좀 흘러 양자역학을 공부한 뒤, 보어의 원자 행성모형은 기저상태에 대해서 정성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기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양자역학은 기저상태의 각운동량이 0이라 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기저상태는 다른 이유 즉, 불확정성원리 때문에 안정하다. 그런데 이 말은 서로 돌지 않고도 전자와 핵 간의 재앙적 충돌이 없다는 것인데 당시의 내 직관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더 황당한 것은 틀린 이유를 가지고도 행성모형의 에너지 준위는 양자역학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이 무슨 우연의 일치란 말인가? 어쩐지 물리학을 이해했다기 보다는 채플시간에 다녀온 느낌이었다. 각운동량에 기초한 행성모델의 에너지 준위는 어쨌건 옳았고 이는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있어 불확정성원리가 제공하는 운동에너지 효과가 회전이 주는 원심력 효과와 정확히 일치하도록 신비한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일이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쿨롱 포텐셜의 동역학적 O(4) 대칭성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 것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 대칭성은 고전적으로는 궤도가 닫히게 하고, 양자적으로는 같은 에너지를 갖는 다른 상태들의 개수를 조절하여 주기율표의 구조를 결정한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동역학적 대칭성이, 추상적 미학의 세계에서 내려와 실제 세계의 양상과 다양성에 그토록 심원한 자취를 남긴다는 사실은 20대의 한 청년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후 나는 습관처럼 수소원자 문제를 되새김질하곤 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미국에서 끈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마친 후 포스닥을 하고 있었다. 당시 끈이론은 비수기 때여서 이론물리학의 다른 토픽들에 대해서도 내 눈길이 가고 있었다. 때마침 같은 그룹에 있던 Pierre Sikivie 교수가 암흑물질의 분포가 주는 은하회전곡선엔 물결 모양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입자물리학자로서 액시온의 발견에 관심이 있었고 우주에서 이들이 암흑물질의 주성분일 때의 분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하회전곡선의 측정값은 당연히 평균의 위아래를 꿈틀거리고 오갈 수 있다. 그런데 시키비 교수는 이러한 물결이 관측 오차 때문이 아니라 어떤 물리적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룹 세미나시간에 균일분포의 암흑물질도 시간이 지나면 중력수축에 의해 위치-운동량 공간에서 나선형 구조를 만들며, 이를 위치공간으로 사영하면 암흑물질 밀도에 첨점들이 생기므로 회전곡선에 물결 모양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멋진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고전 역학의 리우빌 정리를 사용하여 끌어낸 위의 결론을 세밀한 계산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는 상태공간에 수평으로 뿌려진 점들의 중력에 의한 시간 진화를 다루는 일인데 해석적으로 다루기엔 너무 복잡하고 수치해석으로 접근하면 이미 천문학자들이 하고 있던 전산모사의 특별한 경우여서, 이런 일로 이론물리학자의 인정을 받아 교수가 되기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생각한 끝에, 나는 이런 일이 내 경험이나 능력 밖의 일이라 대답했다.

그러나 얼마 후, 쉬면서 가끔 하던 수소원자 생각을 하다가 암흑물질의 분포가 양자역학에 의해 기술될 수도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회전곡선은 은하 내의 물질분포에 의해 결정되므로, 파동함수가 입자 하나의 확률분포뿐 아니라 다수 입자의 분포도 결정한다고 가정하면 파동함수의 정보는 바로 회전곡선의 모양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암흑입자가 충분히 가벼우면 물질파 파장이 길어지고 이는 입자의 파동함수들을 서로 겹치게 하여 보즈-아인슈타인 응축이 일어나고 은하 전체가 하나의 파동함수로 기술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삼아 수소원자 여기상태의 파동함수를 대입하니 당장 물결이 있는 은하회전곡선이 얻어졌다. 생각의 방향이 서자 이를 정식화하는 일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한순간에 진행되었다. 파동함수는 한 입자의 슈뢰딩거 방정식

\[- \frac{\hbar^{2}}{2m} \nabla^{2} \psi  +V(x) \psi  (x,t)=i \hbar  \partial  _{t} \psi \tag{1}\]

의 해로부터 올 것이고 이 방정식의 퍼텐셜은 입자들의 분포 \(\small\rho\)가 결정하는 중력 퍼텐셜로 결정될 것이었다. 즉,

\[\nabla ^{2} V=4 \pi  G \rho. \tag{2}\]

전체 입자의 분포가 그 위치에서 입자의 존재확률에 비례한다고 가정했으니 암흑물질 분포의 전체 질량을 \(\small M\)이라 하면

\[\rho = M |\psi (x)|^2 \tag{3}\]

로 주어질 것이다. 세 식을 연립하면 물질의 분포는 간단히 결정된다. 나중에 알고보니 방정식 (2)와 (3) 대신 \(\small V=|\psi|^2\)이라 하면 방정식 (1)은 Gross-Pitaevski 방정식으로 불리는 평균장 이론이었다. 내가 적은 파동방정식의 해는 수소원자의 경우와 정성적으로 같다. \(\small M\)을 전형적인 큰 은하의 질량이라 하고 은하회전곡선 물결의 파장을 중력적 보어 반경으로 두니 입자의 질량 \(\small m\)은 10‒23 eV로 결정되었다. 회전곡선상의 물결 외에도 물질 분포에 대한 예측이 쉽게 나왔고 은하의 회전속도와 물결파장의 곱은 일정하다는 간결하고 흥미로운 결론들이 도출되었다. 입자 질량이 너무 작다는 것 외엔 이론이 너무나도 간단하기에 틀리기도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내가 당시까지 했던 끈이론과는 다른 종류의 쾌감이었다.

몇 주 후 그룹세미나에서 내 생각을 발표했을 때 이론그룹의 수장이었던 Pierre Ramond 교수는 대단히 유쾌해 했다. “그래, 은하가 하나의 수소원자란 말이지, 하하하.” 그러나 시키비 교수에게 “교수님 질문에 의해 야기된 일이니 함께 논문을 쓰면 어떨까요”라고 청했는데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일 한 바도 없으니 저자가 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그러나 15년 후 그는 내 논문을 모티브로하여 액시온 관련 논문을 썼는데 그것이 내 논문의 인지도를 높이는 한 기폭제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일 뿐 아니라 높은 수준의 고결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분야의 이방인이던 내가 혼자 쓴 탓에 이 논문은 출판 후 10년이 지난 다음에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엔 그렇게 작은 질량을 갖는 입자가 어색했었기 때문이다. 관심이 몰린 데는, 기존의 유망했던 암흑물질 후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퇴출되어 연구자들에게 선택지가 별로 남지 않았고, 설명되지 않던 많은 문제들이 이 모델에 의해 하나씩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끈이론의 발전에 힘입어 극미질량입자의 생성 기작이 제시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최초의 관련 논문을 쓴 사람은 우연히도 한국인이었다. 당시 과학원 학생이었고 지금은 중원대에 있는 이재원 교수는 평생 이 아이디어의 발전과 응용에 헌신해 왔다. 이 일이 비교적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당시 프린스턴의 연구원이었던 Wayne Hu 등이 2000년에 쓴 논문 때문이다. 암흑물질이 차갑고 무거운 입자들로 이루어졌다면 은하 가운데의 밀도가 뾰족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관측이 없었다. Hu는 내 모델이 이 문제를 간단히 풀어준다는 것을 지적하고 극미질량으로 구성된 암흑물질을 fuzzy dark matter라 불렀다. 이것이 천체물리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이로써 그는 시카고대의 교수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 양자거동을 하는 암흑물질에 관해 5,000여 편의 논문이 씌어졌으니 한 분야가 탄생했다 해도 큰 이견은 없을 듯하다.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론물리학자인 프린스턴의 위튼 교수가 동료인 오스트라이커 교수와 함께 이 분야를 정리하면서 우주론적 관점으로 확장한 2018년의 논문에서 내 일을 이 분야의 첫 논문으로 언급해 주었으니 늦었지만 참 행복한 경험이었다. 결국 이 일로 한국물리학회의 성봉상이라는 큰 상도 받게 되었으니 나의 행운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논문을 쓴 지 33년 후의 일이다. 은하와 수소원자가 같은 물리학에 의해 지배된다는 그때의 생각은 즐거운 추억이기도 했지만, 내 인생과 연구의 궤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일로 나는 의도치 않게 천체물리와 응집물리라는 생소했던 두 분야에 동시에 발을 담그게 되었고, 천체물리학에 관심있던 한양대 이론그룹과 내가 인연을 맺은 한 원인이 되었다. 양자유체와 평균장 이론의 개념은 내 무의식에 숨어서 응집물리학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게 했고 결국 20년 후 끈이론의 홀로그래피와 함께 강상관 양자유체를 향한 내 연구의 한 기둥이 되었다. 지난 10년간의 내 일을 반추하니 결국 홀로그래피 평균장이론을 정립하여 강상관 페르미온계를 기술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물리학에 홀렸던 청년은 어느덧 정년을 앞두고 있다. 후학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풀어야 할 문제로 승부하고 새 관점에서 쉽게 풀라는 것이다. 모든 물리학자는 풀어야 할 문제와 잘 풀리는 문제 사이에서 고민하는데, 千古一才도 후자에 안주하면 결국 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래된 문제를 새 관점으로 쉽게 풀면 한 분야를 열게 되지만 옛 방법의 큰 노력으로 풀면 기껏해야 그 분야를 닫는다. 이제 기계가 초월적인 막노동으로 답을 찾아주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물리학은 답이 아니라 그 과정이며, 답은 그에 이르는 길이 단순할 때만 인간의 의식에 이해를 선사한다. 그래서 물리학은 사람의 학문이다. 풀어야 할 문제들은 아직도 책상 위에 쌓여 있지만 새 술은 새 부대를 기다리고 있다. 후학들의 건승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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