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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생각’을 기다리며 - 『제3의 생각』을 읽고

작성자 : 한정훈 ㅣ 등록일 : 2021-08-06 ㅣ 조회수 : 266

저자약력

한정훈 교수는 미국 워싱턴 대학교 물리학 박사(응집 물리학 이론 전공)로서, 현재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hanjh@skku.edu)

그림 1. 『제3의 생각(우리는 이 우주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2020, 스티븐 와인버그, 더숲)그림 1. 『제3의 생각(우리는 이 우주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2020, 스티븐 와인버그, 더숲)

“호랑이랑 사자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시대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질문이다. 서기 100년경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의 원제목은 『비교열전』으로 지금까지도 재미있는 책의 원형으로 전해지고 있다. 호적수(라이벌) 이야기를 좋아하고, 맞수를 만들어 경쟁과 대결을 시키기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은 승부가 곧 생존과 직결되는 수천 년을 살아온 경험이 유전자에 새겨진 탓인지도 모른다. 삼국지의 조조와 유비와 대결, 일리아드의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전쟁 이야기만큼은 아닐지라도 야심찬 동년배 천재들 사이의 대결 구도는 흑백 무성 영화처럼 무미건조해 보이는 과학자의 세상조차 어벤져스급으로 흥미롭게 탈바꿈시킨다. 특히 주어진 시대적 과제가 동일할 때 라이벌이 등장하고 대결은 필연처럼 다가온다. 무한소의 개념과 미적분의 발명이란 과제에는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컴퓨터 대중화란 과제를 두고는 1955년생 동년배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대결했고, 양자전기역학이란 숙제 앞에서는 1918년생 동년배인 파인만과 슈윙거의 대결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독창적인 방법으로 이 과제를 훌륭하게 해결했고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은 두 사람보다 5년 늦게 태어난 탓에 양자전기역학 각축장에 살짝 늦게 등장한 대신 창의적인 천재 물리학자 파인만과 슈윙거가 펼쳐 놓은 양자전기역학의 수학적 구조를 평범한 물리학자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깔끔하게 정리한 ‘정리의 달인’이 되었다. 물리학 역사에 기록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다이슨은 늘 스스로를 정리자 정도 수준의 물리학자로 겸손히 평가했다. 그는 자기 성찰 능력이 아주 뛰어났고, 그 덕분에 역사에 남을 만한 좋은 글을 남겼다. 그의 글모음집 『과학은 반역이다(The Scientists as Rebel)』는 주로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게재했던 서평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필자는 계간지 『서울 리뷰 오브 북스』 6월호에 다이슨의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썼다. 물리학자 다이슨의 업적은 선배 파인만, 후배 와인버그에 비견할 만한 독창성은 부족하다는 게 많은 물리학자들의 평가이지만 그의 대중적 글은 다른 어떤 물리학자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있다. 물리학자의 글쓰기 세계에서 다이슨은 진정 최고봉이다. 1923년 태어나 2020년 생을 마감한 다이슨은 한 세기에 걸쳐 인류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음미하고 그 소감을 글로 남기고 떠난 독보적인 물리학자 겸 사상가다.

그림 2. 스티븐 와인버그(좌), 프리머 존 다이슨(우).(출처: 위키피디아)
그림 2. 스티븐 와인버그(좌), 프리머 존 다이슨(우).(출처: 위키피디아)

과학 글쓰기 분야에서 다이슨에 필적할 만한 물리학자는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다. 다이슨보다 10년 연하인 와인버그는 90세 나이에 근접한 지금도 여전히 학자로서, 저술가로서 묵직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1) 다이슨과 와인버그는 입자 물리학 발전이 급물살을 타던 시절 활약했다. 다이슨은 양자전기역학 이론을 마무리함으로써 지적 탐구의 문 하나를 닫았지만 그 다음 세대 물리학자들이 고민해야 할 주제를 향한 새로운 문을 여는 역할도 했다. 양자전기역학의 이론적 성과가 남긴 교훈은 자연의 기본적 상호작용을 다루는 이론으로 계산하는 물리량이 반드시 유한한 값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막상 양자장론이란 이론적 도구로 어떤 물리량을 계산하면 무한대 숫자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 예사였고 이런 난제를 잘 회피해서 물리적으로 의미있는 유한한 양을 도출하는 게 이론가에게 부과된 과제였다. 20세기 초반부터 잘 알려진 베타 붕괴2) 현상 덕분에 전자기력 이외의 다른 힘이 자연에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물리학자들은 알고 있었고, 이 힘을 유한한 계산량이 나오는 이론으로 이해해보려는 작업이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표적 이론가로 떠오른 사람이 와인버그, 글래쇼, 살람이었다. 그들은 1964년 피터 힉스를 비롯한 몇몇 이론 물리학자가 제안한 힉스 보손(Higgs boson)이란 가상의 입자를 이론 체계에 끌어들여 전기적 상호작용과 약한 상호작용을 포괄하는 통합적 양자장론인 표준 모형을 제안했다.3) 그 이론 체계 속에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자발적 대칭성 붕괴(spontaneous symmetry breaking)라는 현상에 따르면 질량이 없는 광자 말고 질량이 상당히 큰 두 개의 새로운 보손 입자가 존재해야만 했다. 오랜 노력과 투자 끝에 그 두 입자는 1983년 유럽의 거대 입자 가속기 연구소 CERN에서 발견됐다. 파인만, 슈윙거, 도모나가가 양자전기역학의 이론적 완성으로 1965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고, 와인버그, 글래쇼, 살람은 1979년 전기력과 약한 힘을 통합한 이론을 만든 공로로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 파인만과 슈윙거가 동년배이듯, 와인버그와 글래쇼는 브롱스 과학고등학교와 코넬 대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이다.

와인버그는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논문을 쓰는 일에서 종종 시간을 덜어내 그가 사랑하는 입자 물리학과 우주론을 소개하는 대중적인 글과 책을 썼다. 다이슨과 마찬가지로 와인버그도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글을 기고하면서 생각과 영향력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2020년 한국어로 번역된 『제3의 생각 Third Thoughts』은 주로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실렸던 와인버그의 글을 묶었다. 이 지점에서 다이슨과 와인버그의 대중적 저술은 다분히 경쟁 구도를 갖춘다. 둘 다 당대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로서 소립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물리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냈고, 타고난 성찰력과 글솜씨를 살려 같은 잡지에 수십 년간 글을 써왔다. 필자는 이미 다이슨의 글모음집에 대한 서평을 썼으니 여기서는 와인버그의 『제3의 생각 Third Thoughts』에 대한 소감을 주로 다루려고 한다.

와인버그의 글쓰기는 역사가의 서술 방식을 닮았다. 역사적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서술하는 글쓰기 방식을 통해 낭만적 통찰보다는 현실 세계의 사건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다이슨의 글이 인간미와 낭만이 넘치는 수필이라면 와인버그의 글은 역사 서술과 현실 비평에 가깝다. 평소에 역사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그의 취향과 엄밀한 이론 물리학 논문을 오랫동안 쓴 습관이 결합된 덕분일 수도 있다. 그의 글은 마치 이론 물리학자나 수학자의 증명처럼 공리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수학적 증명은 단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문장이기에 오만하게 느껴질 수 있다. 와인버그의 서술은 역사가의 문체이면서 아름답고 견고한 증명을 다루는 수학자의 문체다.

필자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 있던 시절, 와인버그가 세미나를 하러 들른 적이 있었다. 비행기 시간표 때문이라며 세미나 일정을 이른 아침 10시로 정했다. 와인버그 아닌 다른 사람의 요구라면 무례하다고 비난받을 일이었다. 세미나 시간은 오후로 정하는 게 관례였으니 말이다.4) 세미나 내용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인이 새로운 핵물리 계산 방법을 찾아냈다는 주장에 덧붙여 한 말, “진짜 핵물리학자도 이 대목은 잘 모르더군요. 그 점이 기뻤습니다(I take pleasure in the fact that even my nuclear physics colleagues do not seem to know the answer.)”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와인버그는 그런 사람이고, 그럴 만한 사람이다. 그가 후학에게 하는 조언은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하고 쓸모 있었다. “박사 학위를 가능하면 빨리 받으라, 그러고 나서 물리를 계속할지 말지 고민해라. 자기 전공 분야의 역사를 알아라.” 필자는 그 조언을 처음 접한 뒤 20년이 지나도록 마음에 새겨두고 있다. 『제3의 생각』에는 그가 책쓰기를 시작한 사연이 등장한다. 일반 상대론을 대학원생에게 강의하면서 1972년 쓴 전공 서적 『중력과 우주론(Gravitation and cosmology)』이 그의 첫 저술이었다. 그 책을 토대로 쓴 대중서 『처음 3분간(The first three minutes)』은 우주론을 다룬 과학 대중서적의 고전이 됐다. 그는 책을 쓰면서 차츰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최신 이론이 어디로부터 시작됐을까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 역사학자적 탐색의 결과물을 수업을 통해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과 공유하기 시작했다. 와인버그의 대중 과학 서적은 그런 수업의 결실로 하나씩 등장했다. 그 사이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그의 전공 강의도 하나씩 양자역학, 양자장론 교과서로 탈바꿈해 그의 학문적 명성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필수 소장품이 됐다. 20세기 후반 최고의 이론물리학자로 자리 잡으면서 동시에 고전의 반열에 오른 교양서, 교과서를 써내려간 이 인물은 그저 초인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군더더기 없는 인생 관리가 그의 마법 알약이었다.

좋은 연구 결과물로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자기 이름을 드높이기도 바쁜 물리학자들이 굳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대중적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 와인버그는 글쓰기가 외롭고 차가운 학문 세계 바깥으로 손을 뻗어 세상 사람들과 교류할 방법이기 때문이란 답을 내놓았다. “여보게,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라네”라는 파우스트의 입을 빌린 괴테의 일성이 들려온다. 필자는 대중적 글쓰기가 논문 쓰기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학 논문은 과학적 질문에 대한 답과 그 답을 찾기 위해 저자가 기울였던 노력의 기록이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 중에는 논문에 담을 수 없는 종류의 것도 많다. 가령 ‘인생’이란 문제가 걸리면 그 대답을 공유하고 싶어도 논문에 적을 수 없다. 인문학자가 아닌 과학자들에게는 그런 사치가 허용되지 않는다. 과학자라고 인생에 대한 질문이 없을 리 없고 나름대로 찾은 해답이 없을 리 없다. 그 답을 나누고 소통하는 게 책쓰기, 글쓰기라고 필자는 정의한다. 질문의 색깔은 다르지만 둘 다 탐색의 결과를 적는 작업이다.

와인버그는 최고의 물리학자라는 지위에 힘입어 그의 저술을 통해 동시대와 후대 사람들이 입자 물리학이나 우주론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의하다시피 했다. 책쓰기의 위대함이자 위험은 그것이 후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범위를 고정시킬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데 있다. 와인버그는 70년대부터 시작한 글쓰기를 통해 충실하게 자신이 소속된 입자 물리학, 우주론, 그리고 천문학을 대변해왔다. 다이슨은 딱히 입자 물리학이나 다른 어떤 물리학을 대변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다이슨의 관심은 인류의 문명과 미래 그 자체였고 물리학은 그런 관심의 일부였다. 다이슨의 글은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와인버그의 글은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 즉 필로-소피아를 지향하는 사람이 분명하지만 일단 진리의 문 앞에 다다른 다음엔 냉정해진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에 대한 구분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그에 대한 단호한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반면 다이슨의 언어는 고대 동양의 철학자를 닮은 구석이 있다. 지식과 가치관의 회색 지대가 풍부하게 남아있음을 너그러이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실을 즐겨야 한다고 호소한다. 다이슨은 할아버지처럼 말하고 와인버그는 아버지처럼 말한다. 다이슨은 인류가 언젠가 지구를 넘어 우주에서 거주하는 게 필요악이 아니라 자연스런 발전의 단계라고 보는 시각을 갖고 있지만 와인버그는 유인 우주선 계획마저 홍보 사업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인류의 화성 거주는 공상과학 소설일 뿐이다. 다이슨이 이데아를 외친 플라톤이라면 와인버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신이다.

이제 다이슨이나 와인버그의 뒤를 이을 과학 저술가, 과학 사상가가 필요하다. 두 사람의 사상에 무슨 부족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꾸준히 바뀌기 때문이다. 입자 물리학이란 토양에서 성장한 물리학자 중엔 비록 다이슨이나 와인버그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과학을 대중에게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 전달하는 글쓰기 스타들이 즐비하다. 브라이언 그린을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그의 글은 철저히 대중에게 과학의 멋진 면을 전달한다. 최신작 『엔드 오브 타임(Until the end of time)』은 초끈 이론 학자가 쓴 거대 역사(big history) 책이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우주의 탄생부터 지능의 탄생까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유익한 책이긴 하지만, 그의 독자적인 사상은 여기 없다. 해마다 멋진 물리학 대중서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대부분의 책은 물리 해설서일 뿐 물리학자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고도를 기다리듯 와인버그의 대를 잇는 어느 물리학 저술가가 나와 ‘제4의 생각’이란 책을 써주길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소립자 물리학의 현재 상황을 보면 마치 이 자연을 창조한 그 누군가가 ‘이제 그만’이란 문자를 인류에게 보내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뮤온이란 소립자의 g 값이란 걸 정밀하게 측정해 봤더니 2.00233184122를 얻었고 이는 이론값인 2.00233183620과 비교해서 소숫점 여덟 번째 자리에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 큰 화제가 됐다. 과연 새로운 입자 물리학의 시대가 열릴까? 아직까지는 결정적 단서가 없는 암흑 물질의 존재가 마침내 검증되면 인류의 우주관이 크게 바뀔까? 중력파의 실험적 검증은 대단한 성취였지만, 동시에 아인슈타인이 백 년 전에 한 예언을 그대로 검증했을 뿐이다. 끊임없이 우주로부터 전달되는 중력파의 소리를 잘 듣고 분석해서 우주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시시각각으로 인류가 ‘도청’하는 시대가 곧 올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런 놀라운 도청 장치가 갖추어진다 해도 인류가 지구에 발이 꽁꽁 묶여 있는 신세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다이슨은 인류의 우주 진출을 당연시했지만 그가 제시한 방식인 핵추진 로켓이나 혹성에서 자랄 수 있는 유전자 조작된 나무 등은 과학 소설가에게 어울릴 환상적인 것들이다. 와인버그식 글쓰기의 뿌리는 자신이 결정적인 기여를 해서 완성한 표준모형이다. 표준모형 이후 극적인 과학적 발전이 없다면 와인버그를 대체할 사상가가 소립자 물리학 분야에서 등장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지금의 물리학자들은 다이슨이나 와인버그의 전성기보다 훨씬 더 풍요롭지만 덜 낭만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이유는 물리학이 엄청나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입자가 무더기로 발견되던 시절이 있었다. 이론 물리학자들이 어설픈 가설을 내놓아도 용인되었고, 실험과 이론의 건설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서 피차의 오류를 수정해나갈 수 있었다. 이제 물리학 실험은 너무나 값비싼 사업이 되어버렸다. 한 국가, 혹은 한 대륙의 예산을 집중해야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입자 물리학 실험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입자 물리학 실험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거대 입자 가속기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대부분의 입자가 개인의 실험실에서 ‘자그마한’ 장비를 통해 발견됐다. 예외는 힉스 입자와 W 보손, Z 보손, 그리고 질량이 아주 큰 몇 개의 쿼크들뿐이다. 필자가 오랫동안 관여했던 응집 물리학 분야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다. 여전히 개개인이 자기 연구실을 차려 그 안에서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하긴 하지만 그 실험실 하나를 제대로 꾸리기 위해서는 수십억 원의 예산이 들어가야 한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적은 예산과 적은 인력으로 운영하는 실험실도 많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긴 하지만, 과학은 늘 최전선의 결과에만 찬사를 보내는 잔인한 습관이 있다. 최전선에 도달하려면 많은 투자가 필요하고 그런 투자는 소수의 선택받은 과학자만 누리는 특권이다. 이런 값비싼 과학을 정당화할 사상은 무엇일까? 제4의 생각이 답변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궁극의 입자나 인류의 우주 여행보다 시급한 당면 과제인 환경 문제, 에너지 문제, 인공 지능 문제, 양자 컴퓨터가 가져올 파급 효과에 대해 우선적으로 고민하고 설득력있게 답변해야 한다.

와인버그는 다이슨에 비해 강력한 환원주의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열렬한 환원주의 지지자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환원주의 프로그램, 곧 모든 과학의 원리를 추적해 몇 개의 단순한 물리 법칙으로 정리하는 것은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도 아니고, 심지어 물리학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과제도 아니다(제3의 생각, 55쪽)”라고 말한다. 와인버그는 초대칭이나 초끈 이론이 내놓은 우아한 예측이 단 하나도 실험적 검증을 받은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받기 어려울 것이란 사실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그에게 새로운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제4의 생각은 와인버그보다 한참 더, 다이슨보다 조금 더 환원주의에서 멀리 떨어진 과학자가 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그 역할은 한 사람의 과학자가 떠맡기엔 너무 벅찬 일이 될 수도 있다. 우선 물리학은 더 이상 순수한 자연과학이 아니다. 물리학 연구와 연구비의 많은 비중이 자연 그 자체보다는 인간이 만든 인공적 물질 또는 인공적 환경에 대한 연구로 점점 바뀌어왔다. 20세기 물리학의 가장 큰 산업적 효과로 인정받는 반도체 물질은 자연에서 발견된 물질이 아니라 인간이 발전시킨 고도의 정제 과정을 통해 얻어진 인조 물질이다. 레이저는 인간이 창조하고 가공한 순수한 빛이다. 인조 물질에 대한 연구는 결국 기술, 산업,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파급 효과를 고려할 수밖에 없고, 인조 물질 연구자의 사색은 기술, 산업,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공 지능에 적용되는 이론에는 물리학적 개념이 잘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네트워크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전기 공급망의 분포, 질병이 퍼지는 경로 등도 연구한다. 와인버그 같은 천재적 물리학자라고 해도 이 모든 분야에서 다 업적을 남길 수는 없고, 이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철학적 사고를 할 수도 없다. 21세기 만학의 아버지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다이슨, 와인버그같은 천재적인 개인이 아니라 개별 과학을 대표하는 자기 성찰 능력이 뛰어난 과학자 집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인문학적 교양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걸 즐길 줄 아는 삶에 무척 호의적이지만 ‘과학은 결국 철학과 통한다’라는 식의 주장은 과학은 지혜와 통하고, 지혜를 다루는 인간의 행위를 오래 전부터 철학이라 불러 왔기에 과학은 철학과 통한다는 억지스런 삼단논법에서 나왔다고 본다. 철학으로부터 파생한 것이 과학이란 주장도 따지고 보면 터무니없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도구의 도움 없이 인간의 순수한 사유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깨달음을 적극적으로 추구한 사람들이다. 그들만큼이나 진지하게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철학자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5) 현대적 의미의 과학자가 탄생하는 순간은 철학자가 순수한 사변에 덧붙여 수학적, 공학적 도구를 이용해 진리를 탐색하기 시작할 때이다. 과학은 광범위한 의미에서 철학이지만 철학과에서 가르치는 철학은 아니다. 서양 철학사를 보면 철학적 사고방식에도 계보가 있었다. 철학하는 과학자에게도 그런 계보가 있을 것이다. 제3의 생각의 계보를 이을 제4의 생각을 설파하는 과학-철학자가 등장하기를 기대한다.6)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태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과학과 미래 그리고 인류’를 목표로 한 <크로스로드>는 과학 특집, 과학 에세이, 과학 유머, 과학 소설, 과학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과학 글을 통해 미래의 과학적 비전을 보여주고자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Asia Pacific Center for Theoretical Physics)에서 창간한 과학 웹 저널입니다.
http://crossroads.apctp.org/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는 정부의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 지원으로 사회적 가치 제고에 힘쓰고 있습니다.
각주
1)입자 물리학과 표준 모형 완성에 거대한 업적을 남긴 와인버그는 최근(2021년 7월)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2)베타 붕괴(β-decay)는 원자핵에 있는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면서 강한 에너지를 가진 전자를 방출하는 현상이다. 원자핵이 베타 붕괴를 하면 양성자의 개수가 바뀌기 때문에 본래의 원자핵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이런 핵의 변화 과정을 보이는 물질을 방사능 물질이라고 부른다. 베타 붕괴를 유발하는 근본적인 힘을 약한 힘, 혹은 약한 상호작용이라고 부른다.
3)‘신의 입자’라는 별명을 가진 힉스 보손의 존재가 실험적으로 검증된 것은 2012년이다.
4)‘조찬 모임’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을 정도로 사회 생활 속에서는 오전 회의가 일상적이다. 반면 이론 물리학자들은 밤늦게까지 공식과 씨름하다 잠들고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다. 이론 물리학자들에게는 꽤 보편적인 이런 습관 덕분에 세미나는 오후에 하는 관례가 생긴 것 같다.
5)서양 철학을 탄생시킨 고대 그리스는 서양 수학의 시조이기도 하다. 『에우클레이데스(영어로는 유클리드라고 한다)의 원론』은 인류 최고의 수학 저술 중 하나이고 여기서 집대성한 수학은 서양 수학, 아니 수학 그 자체의 뿌리다. 기원전 3세기를 살다 간 시라쿠사 출신의 아르키메데스는 인류 최고의 과학자, 수학자 중 한 명이다. 그가 남긴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저서는 비록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비해 후대 사상가에게 미친 영향은 작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사상보다 훨씬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칭송하는 많은 철학자, 인문학자들은 에우클레이데스나 아르케메데스의 업적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6)와인버그의 『제3의 생각』은 번역이 조금 아쉽다. 다이슨의 글모음집 『과학은 반역이다』는 한국의 뛰어난 수필가가 썼다고 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문장이다. 어쩌면 다이슨은 주로 인문학적 이야기만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은 번역이 탁월하다. 입자 물리학 박사이면서 그 자신이 작가로 독자적인 책을 낼 만큼 뛰어난 필력의 소유자가 번역을 맡은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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