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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이야기

발렌틴 텔레그디, 물리학의 ‘또 하나의’ 양심

작성자 : 이강영 ㅣ 등록일 : 2021-09-08 ㅣ 조회수 : 1,504

저자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 LHC > 등이 있다. (kylee.phys@gnu.ac.kr)


그림 1. 발렌타인 텔레그디.(https://www.wikidata.org/wiki/Q672378)그림 1. 발렌틴 텔레그디.(https://www.wikidata.org/wiki/Q672378)

물리학에서 업적을 발표한 후에 가장 빨리 노벨상을 받은 사람으로 1957년의 C. N. 양(C. N. Yang), T.-D. 리(T.-D. Lee) (저자 순서는 노벨 홈페이지를 따름), 1987년의 베드노르츠(G. Bednorz), 뮐러(K. A. Müller), 1984년의 루비아(C. Rubbia)와 판데어메르(S. van der Meer)를 꼽을 수 있다. 양과 리는 약한 상호작용에서 패리티가 보존되지 않을 가능성과 검증 방법을 제시해서, 베드노르츠와 뮐러는 고온 초전도체를 발견해서, 그리고 루비아와 판데어메르는 W와 Z 보손을 발견해서 각각 노벨상을 수상했다. 세 경우 모두 노벨상에 해당하는 업적을 담은 논문은 전 해에 출판되었다. 노벨상 후보가 되려면 해당 업적이 그 해 이전에 출판되어야 하고 1월 말까지 후보로 추천되어야 하므로 아무리 위대하고 획기적인 업적이라도 절차상 그 해에 상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이들보다 빨리 노벨상을 받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업적이 당대에 얼마나 충격적으로, 그리고 중요한 업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베드노르츠-뮐러와 루비아-판데어메르의 경우보다 양-리의 경우가 더욱 놀랍다. 그 이유는 베드노르츠-뮐러와 루비아-판데어메르의 경우는 그들이 새로운 결과를 직접 발견했으므로 더 이상의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양 리의 업적은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었으므로 실험적으로 확인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의 논문이 출판된 것은 1956년 10월이니 다음 해 초까지는 불과 3개월 남짓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실험적인 검증이 3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양과 리가 그들의 논문을 쓸 때, 리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베타붕괴 실험의 전문가였던 C. S. 우(C. S. Wu)와 베타붕괴에서 패리티를 확인하는 문제를 두고 상의를 했었다. 우의 말에 따르면, 스핀을 정렬시킨 코발트 60(Co60)의 베타붕괴를 관찰하는 방법을 제안한 사람도 우였다.1) 양과 리는 우의 조언을 듣고 논문에 코발트 60의 베타붕괴에 관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한편으로 우는 실험을 준비했다. 그래서 1956년 5월에는 이미 우가 실험을 시작하고 있었다. 양과 리의 논문이 투고된 날짜는 6월 22일이다.

그 해에 우는 20년만의 중국 방문도 취소하며 실험에 집중했다. 이 실험에서 어려웠던 점은 코발트 60(Co60)의 스핀을 정렬하려면 절대 0도에 가까운 극저온에서 실험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는 극저온을 다루는 기술이나 경험이 없었으므로, 워싱턴에 위치한 국가 표준국(National Bureau of Standards, NBS) 팀과 협력해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이 워싱턴에서 수행되었으므로 우는 학교가 있는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야 했다. 그 해 12월 27일 마침내 첫 번째 결과가 얻어졌다. 양과 리의 예측대로 베타붕괴에서는 패리티가 보존되지 않았다.

실험 결과가 긍정적이라는 우의 말을 들은 리는 1957년 1월 4일 학과 교수들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고, 이 말을 듣고 영감을 얻은 리언 레더먼(Leon M. Lederman)은 친구인 IBM 연구소의 가윈(R. Garwin)과 함께 대학의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서 나흘 밤낮을 거의 쉬지 않고 실험한 끝에 파이온 붕괴에서도 패리티가 보존되지 않음을 증명해 버렸다. 레더먼의 이 이야기는 지난 2018년 6월호 물리 이야기의 <신은 살짝 왼손잡이>에 소개한 바 있다. 아무튼 레더먼은 우보다도 먼저 논문을 완성해 버려서 오히려 우가 논문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두 사람의 논문은 1월 15일에 피지컬 리뷰에 투고되었다.

그런데 여기 패리티에 대한 또 하나의 실험이 있었다.

시카고 대학의 발렌틴 텔레그디와 제롬 프리드먼(Jerome I. Friedman)은 1956년 10월에 실험을 시작했다. 이들은 컬럼비아 대학의 외부인이었으므로, 우의 실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양과 리의 논문을 보고 실험을 착안한 것이다. 이들의 실험은 시카고 대학의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서 만든 파이온의 붕괴를 원자핵 건판을 이용해서 관측하는 것이었다. 텔레그디는 1954년 엔리코 페르미가 사망한 후 시카고 대학의 원자핵건판 실험 그룹을 맡고 있었고, 페르미의 마지막 학생이었던 프리드먼은 원자핵건판 실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므로, 이들이 원자핵건판을 이용하기로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의 실험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결과를 주었다. 가속된 양성자가 표적을 때리면 파이온이 생성된다. 생성된 파이온은 1밀리미터 두께의 원자핵건판에서 멈추고 붕괴해서 뮤온과 뮤온 중성미자가 되고, 뮤온은 다시 붕괴해서 뮤온 중성미자와 전자-전자 중성미자 쌍을 만든다. 이 원자핵건판을 현상해서 현미경으로 파이온과 뮤온, 전자의 궤적을 관측한 후 이들 사이의 각을 측정하면 파이온과 뮤온이 붕괴할 때 패리티가 보존되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패리티가 보존된다면 붕괴해서 나오는 입자의 각이 대칭적이고, 보존되지 않는다면 비대칭적일 것이다.(실제로는 중성미자를 감안해서 대칭성을 나타내는 양을 정의해야 한다.)

원자핵건판 실험은 반응이 일어나는 동안 건판을 노출시킨 후, 건판을 현상하고,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므로 전기적인 검출기를 이용할 때보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게다가 그 해 가을에 텔레그디의 아버지가 사망해서 텔레그디가 이탈리아 밀라노를 다녀와야 했으므로 실험은 더욱 지체되었다. 그래도 텔레그디가 시카고에 돌아온 12월 초에 프리드먼은 패리티가 보존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1,300개의 이벤트를 얻어놓고 있었다. 우의 베타붕괴 실험보다도 먼저 결과를 얻은 셈이다. 그들의 원래 목표는 2,000개의 결과를 얻는 것이었지만, 이만큼의 결과로도 결론은 명백했으므로 그들은 논문을 쓰기로 했다. 이때쯤에는 그들도 컬럼비아의 경쟁자들을 알아채기도 했을 것이다.

이들의 논문은 우의 논문과 레더먼의 논문보다 이틀 늦은 1957년 1월 17일에 피지컬 리뷰에 도착했다. 그런데 피지컬 리뷰의 편집진은 컬럼비아의 논문 두 편을 2월 1일자로 발간된 105권 4호에 나란히 실은 반면, 시카고의 논문은 별다른 이유 없이 (공식적으로는 “for technical reasons”) 3월에 발간된 5호로 미루었다. 게다가 컬럼비아 팀은 논문을 투고하면서 1월 15일에 기자회견을 열어서 약한 상호작용에서 패리티가 보존되지 않음이 실험적으로 검증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렸고, 그 여파로 2월 6일에 뉴욕에서 열린 미국 물리학회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청중이 몰려들었고 양과 리는 스타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3월호에 실린 프리드먼과 텔레그디의 논문은 확실히 뒷북으로 보였으리라. 텔레그디는 이 일로 대단히 분개했으며, 오랫동안 잊지 않았다.2)

지금은 이들의 논문까지 세 편의 논문이 모두 약한 상호작용에서 패리티가 보존되지 않음을 보인 최초의 논문들로 동등하게 인정받고 있다. 그 결과 우와 레더먼과 텔레그디는 각각 1978년, 1982년, 그리고 1991년에, 흔히 노벨상 다음 가는 상이라고 불리는 울프 상을 수상했다.

발렌틴 텔레그디는 1922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헝가리의 유태인이었던 그의 부모는 불가리아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를 낳기 위해 어머니가 친정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태어나자마자 불가리아로 가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가 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가족이 헝가리로 돌아오게 되어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1932년에는 다시 빈으로 이사를 가서 빈에서 김나지움을 다녔다. 김나지움에서 그는 과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해서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화학 책을 읽곤 했다.

가족이 다시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이사를 했지만 텔레그디는 김나지움을 마치기 위해 빈에 남았다. 하지만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함으로써 텔레그디는 빈의 김나지움을 중도에 그만둬야 했다. 텔레그디는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브뤼셀의 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전쟁과 함께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하면서 또 다시 이탈리아로 탈출해 와야 했다. 전쟁이 확대되면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워지자 텔레그디는 3년 동안 이탈리아의 특허를 다른 나라에 제공하는 기술 번역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1943년 독일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텔레그디와 가족들은 다시 스위스 로잔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런 파란만장한 경험 탓에 텔레그디는 자연스럽게 여러 나라 말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텔레그디는 로잔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로잔 공과대학(EPUL, 현재는 EPFL)에서 텔레그디는 화학공학을 공부했고, 물리화학 분야의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텔레그디는 학위 과정에서 슈튀켈베르크(E. C. G. Stueckelberg von Breidenbach)의 이론물리학 강의를 듣고 엄청난 감동을 맛보게 된다. 텔레그디는 차츰 화학보다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물리학 전공으로 취리히 연방공과대학 ETH의 파울 쉐러(Paul Scherrer)에게 입학을 지원했다. 쉐러는 처음에는 텔레그디를 받으려 하지 않았지만 슈튀켈베르크의 추천을 받고 나서 그의 입학을 허락했다. 텔레그디는 1946년 가을부터 쉐러의 핵물리학 그룹에 합류해서 방사화학 일을 하며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룹의 다른 멤버들에 비해 전자식 검출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텔레그디는 그 대신 원자핵건판을 이용한 실험을 배워서 연구에 활용했고, 박사학위 논문도 이에 관련된 내용으로 썼다. 1948년 가을에는 지도교수인 쉐러의 도움으로 당대 원자핵건판 연구의 중심으로서 파이온을 발견한 영국 브리스톨의 파웰 그룹에 파견되어 실험을 배우기도 했다. 그는 또한, 전쟁 동안 미국에 피신해 있다가 돌아온 파울리와 파울리의 절친한 친구인 그레고르 벤첼(Gregor Wentzel) 등의 이론물리학자들로부터도 물리학을 배웠다. 텔레그디는 파울리에게 경외심을 가졌지만, 의외로 파울리는 텔레그디에게 친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텔레그디는 레스 조스트(Res Jost), 펠릭스 빌라르(F. Villars) 등 파울리의 그룹과도 어울렸다. 문헌에 따라서는 텔레그디가 쉐러와 파울리의 공동 지도를 받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훗날 텔레그디는 “파울리가 5년 동안 나를 바보 취급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내 대학원 생활 중에서 제일 격려가 되는 일이었다.”라고 말했다.2) 파울리와 함께 지내서인지 텔레그디 역시 훗날 신랄하고 날카로운 비판으로 이름 높았으며, 그래서 파울리에게 붙여졌던 “물리학의 양심 conscience of physics”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 시기에 ETH에서 안식년을 지냈던 바이스코프(V. F. Weisskopf)는 당시 텔레그디에 대해 이런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쉐러의 연구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다 잘 알고 있고, 파울리의 이론적인 일도 좀 알고 있다.”2) 파울리의 연구를 좀 알고 있다는 것은 웬만한 이론물리학자 못지않다는 말이다. 이렇게 실험에 뛰어나면서도 이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겸비한 것이 텔레그디의 특출한 점 중 하나였고, 그가 훗날 뛰어난 업적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훗날 시카고에서 그의 친구가 되는 프로인트(P. Freund)도 “발렌타인은 보기 드문 실험 물리학자였다. 그는 전문적 이론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이 측정되어야 하고 무엇이 측정될 수 있는지, 어떻게 측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엄청난 정확함과 효율성을 갖고 자신만의 착상을 할 수 있었다”라고 표현했다.3)

바이스코프는 텔레그디에게 MIT에 지원하라고 했으나, 그 해에는 MIT에 별다른 자리가 생기지 않아서 대신 그를 시카고 대학의 엔리코 페르미에게 추천했다. 마침 텔레그디를 잘 아는 벤첼도 시카고로 자리를 옮겨 있었으므로 벤첼의 추천이 더해져서 페르미는 텔레그디를 받아들였다. 텔레그디는 정말로 기뻐했다. 그의 생각에 당시 물리학의 메카는 페르미가 지도하는 시카고였기 때문이다. 페르미 외에도 시카고 대학에는 텔러, 해롤드 유리 등의 뛰어난 학자들이 있었고, 1951년에는 당대 가장 큰 출력을 내는 450 MeV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이 가동을 시작하게 되며, 또한 멀지 않은 곳에 페르미의 원자로를 이어받은 아르곤 국립 연구소가 있었다. 텔레그디가 페르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훗날 그가 시카고 대학과 엔리코 페르미를 회상한 글에 잘 드러난다.2)

“금세기의 어떤 개인도, 실험과 이론을 통해 엔리코 페르미 만큼 물리학에 기여한 사람은 없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시카고 시절 페르미의 가장 큰 기여는 교육에 있다고 본다. 그의 학생들과 학생들에게 준 가르침을 통해 페르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시절의 시카고에는 페르미의 명성에 힘입어 수많은 뛰어난 학생과 젊은 물리학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앞부분에 이야기한 인물 중에서만 해도, 리와 가윈과 프리드먼이 모두 페르미의 제자고, 양도 페르미의 지도를 받았으며, 텔레그디도 페르미와 함께 일했을 정도로 절반 이상이 페르미와 관련되어 있다. 텔레그디는 시카고에서 원자핵건판을 가지고 실험을 하면서 또한 머레이 겔만과 함께 이론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 시절에 대해 텔레그디는 “당시는 내가 가장 바보 같았다는 사실마저도 자랑스러웠던 시절이었다”라고 회상했다.4)

텔레그디는 1956년에 앞에서 소개한 패리티 실험을 하고나서 다음 해에는 후속 실험에 들어갔다. 베타붕괴는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면서 베타선을 (그리고 중성미자를) 내놓는 과정이지만, 그때까지 베타붕괴 실험은 주로 방사성 원소를 가지고 하는 일이었지, 중성자 자체를 가지고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텔레그디는 아르곤 국립 연구소의 과학자들을 이끌고 실험용 원자로에서 나오는 낮은 에너지의 중성자를 이용해서 베타붕괴를 관측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몇 년에 걸친 실험을 통해 이들은 원자핵에서의 약한 상호작용의 구조에 대해서 중요한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베타붕괴에서 패리티가 보존되지 않음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이 실험에서 베타붕괴의 상호작용의 구조가 소위 V-A라는 것도 보였다.

텔레그디는 또한 뮤온에 천착해서 뮤온의 다양한 성질을 규명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뮤온의 전자기 상호작용 및 약한 상호작용을 규명했고, 또한 원자의 전자를 뮤온으로 바꾸어 놓은 뮤온-원자나 반-뮤온과 전자의 속박상태인 뮤오늄 등의 성질을 측정하고 연구했다. 특히 텔레그디는 1959년부터 리처드 가윈과 함께 CERN에서 뮤온의 자기 모멘트의 \(\small g-2\) 값의 측정을 처음 시작했다. 이 실험은 오늘날까지 물리학의 가장 정밀한 실험 중 하나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밖의 텔레그디의 중요한 실험을 보자면 뮤온 중성미자의 헬리시티를 결정한 일과 중성 케이온의 재생성을 연구한 일 등이 있다. 이 실험은 시카고 근교의 바타비아에 새로이 생긴 국립 가속기 연구소(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 NAL, 후에 페르미 연구소로 이름이 바뀜)의 초기 연구 중 가장 유명한 일이다.

텔레그디는 1976년까지 시카고 대학에서 엔리코 페르미 교수(Enrico Fermi Distinguished Service Professor)를 지냈다. 1976년에 그는 ETH의 교수직을 받아들여서, 유럽으로 돌아왔다. 유럽에서는 주로 CERN에서 활약했는데, CERN의 과학 정책 위원회에서 활약하며 의장을 맡았고, CERN의 NA10 실험을 시작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수행된 NA10 실험에서 텔레그디와 동료들은 하드론과 하드론이 충돌할 때, 그 안의 쿼크들이 충돌해서 뮤온 쌍을 만드는 드렐-얀 과정을 실제로 보였다. 한편으로 그는 미국의 칼텍과 UC 샌디에고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내며 겔만이나 골드버거, 파인만 등과 어울렸다.

그가 흠모하던 페르미처럼 텔레그디 역시 좋은 선생으로서, 뛰어난 강의로 이름이 높았다. 강의 준비는 세심했고, 발표 방식은 독창적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과학의 역사, 특히 20세기 물리학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위대한 과학자들에 관해서도 직간접적으로 많이 알고 있었는데, 사실 그 중 상당수는 그의 친구와 동료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풍부한 지식과 위트, 그리고 과학에 대한 열정 때문에 텔레그디는 콜로퀴움 강사로서 인기가 높았다. 그는 하버드의 룁 강연, 예일의 페이지 강연, 스탠퍼드의 쉬프 강연 등의 강연 시리즈를 맡았으며, 칼텍의 셔먼 페어필드 석좌교수와 CERN의 방문교수 등을 지냈다. 이렇게 물리학을 전달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1995년에 미국 물리학회의 줄리우스 릴리엔펠트 상을 받기도 했다.

텔레그디의 인간관계는 흑백이 뚜렷해서, 불화를 빚은 사람은 철저하게 미워했다고 한다. 대신 친구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충실했으며 한 번 쌓은 우정은 진정으로 소중히 여겼다. 2006년 그가 사망했을 때 피직스 투데이에 실린 부고에 카비보, 프로인트, 겔만, 골드버거, 남부, 외머, 오큰, 윈스턴 등 무려 8인이 공동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물리학자들에게 사랑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5)

각주
1)M. Hargittai, Credit where credit’s due?, https://physicsworld.com/.
2)L. M. Brown, Valentine Louis Telegdi 1922-2006,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Biographical Memoirs (2008).
3)피터 프로인트 지음, 김경태, 최귀덕 옮김, 발견의 기쁨 (솔과학, 2015).
4)조지 존슨 지음, 고중숙 옮김, 스트레인지 뷰티 (승산, 2004).
5)N. Cabibbo et al., Physics Today 59(7), 6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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