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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휘 선생님을 기리며

작성자 : 김진승 ㅣ 등록일 : 2022-11-30 ㅣ 조회수 : 663

서 론

故 이금휘 선생님
故 이금휘 선생님
(1935.7.29–2022.10.8)

물리학계와 과학교육의 발전을 위해 여러모로 애쓰셨던 이금휘 선생님께서 2022년 10월 8일 사랑하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평온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은 1935년 7월 29일 전라북도 김제에서 부친 이보한 공과 모친 유갑녀 여사 사이에 3남 1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미국 유학 중이던 1965년 이수자 여사와 결혼하셔서 두 따님 Grace Lee(영화 감독)와 Jane Lee(건축가)를 두셨습니다.

선생님의 이력에는 남다른 점이 많습니다. 1956년에 일반계 고등학교가 아닌 이리공업고등학교(전라북도 익산시)를 졸업하시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들어가셨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 군복무를 마치신 뒤 복학하여 졸업은 1962년에 하셨습니다. 대학 졸업 후 전주시의 신흥고등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으로 잠깐 계시다가 1962년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Iowa State University)로 유학하여 1966년에 이학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1967년까지 미국원자력원(United States Atomic Energy Commission, USAEC) Ames 연구소의 박사후 연구원으로 계셨습니다. 1967년부터 미주리 대학교(콜럼비아)(University of Missouri-Columbia) 물리학 교수로 계시다가, 1990년에 조기 정년을 하시고 귀국하여 1990년부터 전북대학교 물리학과의 교수로 계시다가 2000년에 정년퇴직하셨습니다. 그 뒤에도 전북대학교 광전자정보기술연구소의 초빙교수 및 연구교수로서 계시면서 한편으로는 대학 물리교육 개선을 위한 방안을 연구하고 교육 현장에 적용하는데 관심과 열정을 계속 쏟으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체격자의 진동 문제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수학적 기법인 유한차분법의 입문 교재를 펴내셨습니다. 후속편인 고급 교재 원고도 쓰셨습니다만 채 마무리하지는 못하셨습니다.

교수 활동기

1. 미국(1967-1990)

선생님께서 미주리 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계시던 1967‒90년의 활동에서는 교육 및 연구 외에도 한국과 관련된 세 가지 면이 두드러집니다. 첫째는 콜럼비아시 주변의 교수, 유학생, 교포로 이루어진 한인 공동체를 만들어 주위의 많은 사람을 도우신 것이고, 둘째는 한국의 여러 대학교와 미주리 대학교의 교류를 활성화시키고자 노력하신 것이며, 셋째는 여러 대학교에 객원 교수로서 자주 오셔서 고급 물리학 이론을 후학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1) 공동체 봉사

선생님께서는 콜럼비아시 주변 한인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어 해마다 연회, 행사, 야유회 등을 열어 유대와 협력을 증진시키셨습니다. 교수 부임 초기에 장학재단을 만들어 미주리 대학교에 유학 온 한국인 학생들을 도우셨습니다. 1986년에는 미주리 중부 한국 문화원(Korean Institute of Mid-Missouri)을 세우시고 매주 토요일 한국어 학당을 열어 한인 사회의 새 세대에게 한글을 비롯한 한국 문화를 접하게 하고, 한국인 유학생에게는 부업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댁에서는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의 명절 연회와 출산 준비, 결혼 준비, 성경 공부 등의 모임을 자주 열어 한국인 유학생 들을 초대하여 격려하시곤 했습니다. 이 모든 공동체 봉사 활동은 이수자 여사와 두 따님의 전폭적 이해와 헌신적 도움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2) 한미 대학 교류 활성화

선생님께서는 한국이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키려면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과 교류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과 선진국은 경제적 격차가 커서 교류가 어려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특유의 친화력과 교섭력을 발휘하여 미주리 대학교의 대학간 교류 사업을 통해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이공계는 물론 예술계까지 교수 여러분을 미주리 대학교로 초청하셔서 교류를 활성화시키셨습니다.

(3) 객원 교수 봉사

선생님께서는 1975년 한국과학원 수학 및 물리학과에 객원교수로 오신 것을 시작으로, 1976‒77년, 1980년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1982, 1986, 1988, 1989‒90년에 전북대학교 물리학과에 객원교수로 오셔서 고체물리학 고급 이론 강의를 하셨습니다. 당시의 한국의 상황과 생활의 불편함을 생각하면 소명의식이 없이는 객원교수로 오기 어려웠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한국(1990-2000)

선생님께서는 1990년에 미주리 대학교를 조기 정년하신 뒤 전북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특별 초빙되어 오셔서 한편으로는 소속 학과의 운영 개선을 위해 애쓰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물리학회와 정부 및 관련 기관의 위원회에 참여하여 활동도 활발히 하셨습니다.

한국물리학회에는 1963년부터 계속 회원으로 참여하셨습니다. 고체물리분과 위원장(1993‒95), 이사(1995‒99)와 부회장(2001‒02)으로서 활동하시면서 물리학회의 발전을 위해 진력하셨습니다.

1990년 한국과학재단이 야심적으로 시작한 과학연구센터 및 공학연구센터 사업에서 서울대학교 이론물리센터와 전북대학교의 반도체물성연구센터가 물리학 분야의 두 연구센터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론물리센터의 소장이셨던 송희성 교수님은 유학 생활을 같이 했던 인연으로 선생님의 역량을 잘 아시기에 1990년부터 9년 동안 운영위원으로 위촉하고 또 2단계 자체평가위원장을 맡기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론물리센터의 효율적 운영과 발전을 위해 여러 방안을 제시하셨고, 특히 신규 박사학위 취득자의 연구역량 유지 및 발전을 위해 박사후 연수 제도를 제시하여 정착시키셨다고 합니다. 1993‒1994년에는 교육부 기초과학심사평가 위원회에 참여하셔서 전국 대학교를 현장 방문하여 기초과학 연구실태를 파악하고 연구예산 증액과 지원기간 연장을 비롯한 여러 지원강화책을 제시하시고 연구실적도 양과 함께 질도 평가하게 바꾸셨습니다. 1995‒2004년에는 국가핵융합연구개발 위원회에 참여하여 핵융합 연구지원을 뒷받침하셨습니다. 현재 프랑스 카다라슈에 짓고 있는 국제핵융합실험로(International Thermonuclear Experimental Reactor, ITER)에 한국이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것은 그 연구지원의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997‒2004년에는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 센터(Asia Pacific Center for Theoretical Physics, APCTP) 평의원으로 활동하시면서 국내 물리학계에 처음 생긴 국제적인 학술교류기관의 조기 정착과 운영을 도우셨습니다.

1999‒2000년에는 과학재단으로부터 정책연구 “연구인력 활용을 위한 2010 프로그램 기획연구(기획 99‒05)”를 위탁 받아 수행하셨습니다. 목적은 연구인력의 효과적 활용을 위한 장기적(10년) 지원 방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제 수행을 위해 선생님께서는 미국, 일본, 영국, 독일, 중국의 연구 지원 관리 기관을 방문하여 현황을 파악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최종 보고서에 담은 주요 내용은 연구자가 박사학위를 받은 뒤, 신진 연구자를 거쳐 중견 연구자로 활동할 때까지 박사후 연수 지원, 신진 연구자의 정착 지원, 중견 연구자의 연구 고도화 지원 등 단계별 특성에 맞게 지원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주기적, 단계별 차등 지원의 개념은 현행 연구 지원 방식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전략적 핵심연구분야로 원자와 분자 수준에서 물질을 연구하는 나노기술연구와 연구용 고급실험계측장비 국내 개발을 제시하셨습니다. 나노기술연구는 바로 이듬 해부터 시작되었고, 고급실험계측장비의 개발은 상당한 지연이 있었지만, 현재 기초과학지원연구원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연구 및 교육

1. 연구

선생님의 연구 분야는 고체(응집물질)물리 이론이었고, 특히 유한 격자 진동 문제를 풀어 엄밀해를 구하셨습니다. 무한 사슬의 진동 스펙트럼 이론은 교과서적 문제로서 교재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실제의 고체는 경계 조건과 불순물 또는 결함이 들어있는 1, 2, 3차원 유한 사슬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까다로운 1차원 문제를 차분 방정식의 기법을 써서 풀어 엄밀 해를 구하셨습니다. 물리학 이론에서 실제 상황을 반영한 문제의 엄밀 해가 드문 것을 생각하면 선생님의 연구 성과는 그 자체로도 큰 가치가 있습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앞으로 누군가가 2차원, 3차원으로 확장한 문제의 엄밀한 해를 구하면 고체 진동에 관한 연구의 수준을 한층 더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2. 교육

선생님께서는 교육도 소홀히 하시지 않았습니다. 교육에 쏟은 열정과 내용의 충실함은 미주리 대학교에 계실 때 학생들의 강의 평가에서 최고점을 받으신 것이 교내 신문에 기사로 났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몇 년 뒤에 정년 보장 심사 때 외국인이어서 강의를 잘 못한다고 트집잡는 심사위원에게 그 기사를 보여주어 침묵시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AAPT 연례 학회에 선생님과 함께 갔을 때, 참석자 중에 미국 대학교 물리학 교수가 선생님을 찾아와 인사하면서 미주리 대학교 졸업생이며, 수리물리학 및 전자기학을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잘 배웠다고 말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신 뒤에는 특히 교육 개선을 위해 애를 쓰셨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리교육 개선 활동

선생님께서 귀국하신 뒤, 책임자로서 수행하신 첫 연구과제가 한국과학재단(지금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은 특정기초연구과제 “과학기술인력양성 개선을 위한 대학기초과학교육용 multimedia software 개발 연구(98-0702-01-01-03)”인데, 그 목적은 정보통신기술의 확산으로 바뀌는 환경에 맞추어 물리과학분야의 다중매체 교육자료 개발을 통해 교육 및 학습 효율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제의 결과물로서 일반물리학 I, II의 2학기분 강의자료가 pdf 형식으로 완성되었고, 그것을 함께 개발한 다른 교육자료 및 동영상과 함께 웹사이트 http://visualphysics.chonbuk.ac.kr에 올려 전국 어디에서나, 언제나 볼 수 있고, 필요하면 내려 받아 고쳐 쓸 수 있게 했습니다. 그 강의자료는 CD에 담아 2002년 봄 학술논문발표회 및 임시총회 때 한국물리학회 회원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강의자료를 웹사이트에 올리는 것이 흔하지만, 20년 전의 상황은 전혀 달랐고, 교육 환경의 변화를 내다보고 선제적으로 적극 대처하신 것에서 새삼 선생님의 지혜와 추진력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물리학회와 AAPT의 상호 협력을 합의한 뒤의 기념 사진(2001.4.30). 왼쪽부터: 이금휘 교수님(한국물리학회 부회장), Marc H. Brodsky(AIP 회장), 송희성 교수님(한국물리학회 회장), Bernard V. Khoury(AAPT 회장), Warren Hein(AAPT 부회장), James Stith(AIP 부회장), 김진승(한국물리학회 교육위원회 실무이사).▲한국물리학회와 AAPT의 상호 협력을 합의한 뒤의 기념 사진(2001.4.30). 왼쪽부터: 이금휘 교수님(한국물리학회 부회장), Marc H. Brodsky(AIP 회장), 송희성 교수님(한국물리학회 회장), Bernard V. Khoury(AAPT 회장), Warren Hein(AAPT 부회장), James Stith(AIP 부회장), 김진승(한국물리학회 교육위원회 실무이사).

송희성 교수님(서울대학교 물리학과)께서 한국물리학회 19대 회장으로 일하시던 2001‒2002년에는 교육담당 부회장을 맡아서 대학물리교육의 개선을 위한 학회차원의 활동을 추진하셨습니다. 그 전략의 하나로 물리교육의 개선 방법에 관한 연구가 활발한 미국물리교사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Physics Teachers, AAPT)와의 교류를 증진하고자 2001년 4월 30일 송희성 교수님과 함께 AIP(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및 AAPT 본부를 방문하여 상호 협력을 합의했습니다(사진 참조). 그 결과 제도적 기틀은 마련되었지만, 학회 차원의 교류 활성화는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AAPT의 여러 활동을 살펴보시던 선생님께서는 능동학습(active learning)의 교육 효과가 현저히 좋다는 실증적 연구 결과를 보시고, 그 방법론을 우리나라에도 널리 퍼뜨리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물리교육에 능동 학습 방법의 활용을 개척한 David Sokoloff(University of Oregon), Priscilla W. Laws(Dickinson College), Ronald Thornton (Tufts University) 교수가 주관하는 워크숍에 직접 참여하여 내용을 파악하신 뒤, 당시 전북대학교 신철순 총장님을 설득하여 일반 물리학 강좌에 능동학습의 방법을 적용할 수 있는 컴퓨터-기반 강의-실험실을 꾸몄습니다. 그 시설을 바탕으로 위의 세 분을 연사 및 지도자로 초청하여 2회에 걸친 능동학습 워크숍을 열어 물리교육의 개선에 관심이 있는 아시아 지역 및 국내 대학의 교수들에게 소개했습니다. 그 시설은 이후로 계속 전북대학교 물리학과의 일반물리교육에 활용되고 있습니다.

마무리

지금의 교육 및 연구 환경은 선생님께서 현장에서 활동하시던 1967‒2000년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습니다. 그러한 발전은 그 시기에 온 힘을 다해 노력했던 많은 분들의 노고에 힘입은 바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미국에 계실 때나, 한국에 오신 뒤에나 한결같이 물리학계의 후학들이 교육과 연구를 더 잘 할 수 있도록 돕는데 진력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하신 일은 명확한 기록으로 남은 주요 연구 논문 외에는 물과 공기처럼 스며들어 흔적이 잘 보이기 않기에,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알 수 있도록 제가 아는 내용의 일부를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깁니다. 선생님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2022년 11월 23일
전북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김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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