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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이야기

민코프스키의 시공간과 지속성 논쟁

작성자 : 김재영 ㅣ 등록일 : 2023-01-03 ㅣ 조회수 : 756

저자약력

김재영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물리학 기초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물리철학 및 물리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공저로 『정보혁명』, 『양자, 정보, 생명』,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이 있고, 공역으로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에너지, 힘, 물질』 등이 있다. (zyghim@ksa.kaist.ac.kr)

그림 1. 헤르만 민코프스키. (1864-1909)그림 1. 헤르만 민코프스키. (1864-1909)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연방공과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민코프스키가 본 대학과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거쳐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으로 옮긴 1896년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수학 및 물리학을 위한 교원양성과정에 입학한 해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은 민코프스키의 강의 중 <기하수론>, <함수이론>, <포텐셜 이론>, <타원함수론>, <해석역학>, <변분해석학>, <대수학>, <편미분방정식>, <해석역학의 응용>을 수강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만 그러하고 실제로는 거의 수업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을 ‘타고난 게으름뱅이(Faulpelz)’라 부르면서 “그 친구는 수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이 1900년에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을 졸업하면서 민코프스키와 아인슈타인의 인연은 끝난 것 같았다.

1902년 독일 괴팅겐 대학으로 옮긴 민코프스키는 1905년에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논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수학자로서 아이디어만으로 논문이 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잘 갖추어진 논문을 만들기 위해 논문 출판을 미루고 있었다. 민코프스키는 “운동하는 물체의 전자기 과정에 대한 기본 방정식”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1907년 12월 21일 괴팅겐 학술원 수학-물리학 분과(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Mathematisch-Physikalische Klasse)에서 발표했다. 이 발표논문은 1908년 4월에 출간되었다. 이 논문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4차원 벡터와 전자기장 텐서가 도입되었다.

1908년 9월 21일 독일 쾰른에서 열린 독일 과학자 및 의학자 학술대회(Versammlung Deutscher Naturforscher und Ärzte)에서 민코프스키는 “공간과 시간”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민코프스키는 ‘상대성 원리’ 대신 ‘절대 세계의 가설(Postulat der absoluten Welt)’이라 부르자고 제안하고 있고, 또 시공간 도표를 처음 제시하고 세계점, 세계선, 시간적 간격, 공간적 간격 등의 용어를 처음 정의했다.

그림 2. 민코프스키의 세계선 [출처: Minkowski (1909)]그림 2. 민코프스키의 세계선. [출처: Minkowski (1909)]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로 시작된다.

“제가 여러분 앞에 제시하려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점은 실험 물리학에서 유래합니다. 이 관점의 강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관점의 성격은 급진적입니다. 앞으로 공간 자체 및 시간 자체는 마치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이고, 오직 그 둘의 합체만이 독립적인 실체로 남을 것입니다.”

이 논문을 발표하고 4개월이 지난 1909년 1월 12일 충수돌기염 즉 맹장염 수술을 받다가 불과 44살의 나이로 민코프스키는 유명을 달리했다. 1908년 민코프스키가 시간과 공간을 합한 시공간 개념을 처음 제기한 이후 그와 관련된 여러 다양한 자연철학적 주제들이 널리 다루어졌다.

민코프스키는 수학자로서 과감한 주장을 한다. 물체의 운동이 곧 세계선과 같다는 것이다. 세계선은 스틸 사진들을 붙여놓은 것과는 다르다. 당시에 영화 즉 활동사진이라는 것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와 움직임을 개념화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11년에 출간된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의 책 <창조적 진화>의 마지막 장이 활동사진 즉 영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세계선과 운동을 등치시킨다는 것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어차피 수학자나 물리학자의 눈으로 보면 그래프로 표현된 것과 그래프는 사실상 같은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네 번째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놀랍게도 변화라는 것이 있을 수 없게 된다.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을 구분하면 이곳에 있던 물체가 저곳으로 옮겨가고 그 동안 유한한 시간이 흐르는 ‘운동’이라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된다. 그러나 4차원 시공간에서는 그 모든 운동이 그냥 세계선이라는 고정된 선과 정확히 같다. 4차원 시공간을 볼 수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4차원 세계란 많은 세계선들이 얼어붙어 있는 모습이다. 세계선들이 교차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특정 시간 특정 위치에서 두 물체가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선이 직선이라는 것은 가속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세계선이 곡선이면 가속이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세계선으로 세상을 보면 곧 세계선들의 모음이 된다.

어떤 세계선들은 서로 만났다가 헤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세계선들은 서로 멀어지고 있다. 세계선이 만나는 점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들어 있기 때문에, 이런 교차는 ‘언제’와 ‘어디’가 함께 있고, 이렇게 세계선의 교차점은 복잡한 인연들 속에서의 만남이 일어나는 소중한 인연임을 말해 준다.

시간 좌표가 다른 채 공간 좌표만 같을 수도 있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흔적을 찾아 독일 울름과 뮌헨과 스위스 취리히와 베른을 방문한 21세기의 자연철학자들은 100년쯤 전에 그런 생각을 하고 그것을 글로 남긴 다른 자연철학자와 세계선에서 연결되는 점이 있는 셈이다.

이렇게 우주의 모든 역사가 세계선들의 복잡한 얽힘으로 대치된다. 그러면 이 세계선들을 만들어내는 사물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난다. 이는 사물의 지속성(persistence)과 관련된 문제이다. 1986년 저명한 미국의 분석철학자 데이비드 루이스의 다음 말로부터 지속성 논쟁이 시작되었다.

“사물이 지속한다는 것(persist)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사물이 연장지속한다는 것(perdure)은 사물이 시간적 부분들을 가지면서 시간 전체에 대해 지속한다는 것이며, 이와 달리 사물이 이동지속한다는 것(endure)은 사물이 매 시간 순간적으로 전체가 지속하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움직여 간다는 말이다.”

조금 쉽게 말하자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산이 어제 있던 그 산인지, 그리고 내일도 그 산으로 있을지 근거를 찾아보자는 이야기가 지속성의 문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지, 오늘의 태양이 어제의 태양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 묻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철학자들이나 하는 사변적인 물음 같지만, 실상 물리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제이기도 하다. 윤리학적 맥락에서도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와 내일의 나가 동일한 것인지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법정에서도 맨 처음 하는 일은 지금 재판을 받거나 증언을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과 동일한가 여부를 확정하는 일이다. 아인슈타인을 예로 들면 1879년 독일 울름에서 태어난 아기 아인슈타인, 1890년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을 다니는 대학생 아인슈타인, 1905년 스위스 울름의 특허청 3등 심사관 아인슈타인, 1915년 베를린 대학 교수 아인슈타인, 1935년 미국 고등연구원 교수 아인슈타인이 동일한 사람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물의 지속성에 대해 연장지속론자(perdurantist)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일정한 연장(延長 extension)을 지닌 물체가 있다고 해 보자. 여기에서 연장이란 표현은 공간 속에서 어느 정도의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데카르트가 ‘연장적 실체 res extensa’를 ‘사유하는 실체 res cogitans’와 대비시켰을 때의 그 ‘연장’과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지리산은 하동, 함양, 산청, 구례, 남원 이렇게 다섯 지역에 걸쳐 있다. 하동쪽 지리산과 남원쪽 지리산은 따로 있다. 그런데 이 부분들은 전체가 아니다. 하동쪽 지리산부터 남원쪽 지리산까지 모두 합해야 비로소 전체 지리산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간상으로도 물체가 지속한다는 것은 각 시점마다 시간적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보자는 것이다. 1890년의 취리히의 대학생 아인슈타인, 1905년 베른의 특허국 직원 아인슈타인, 1935년 미국 고등연구원의 교수 아인슈타인이 다 각각 시간 전체에 걸친 아인슈타인의 시간적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다. 연장지속론은 관속론(貫續論)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와 달리 이동지속론자(endurantist)는 물체가 각각의 시간에 전체로서 존재함을 주장한다. 1890년의 아인슈타인은 그 자체로 완결된 전체로서의 아인슈타인이고, 1905년의 아인슈타인도 그러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각의 시각을 하나하나 통과하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동지속론은 내속론(內續論)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동지속론은 우리의 일상적 직관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 어제의 태양은 어제 완결된 전체로서의 태양이고, 오늘의 태양이나 내일의 태양도 그러하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장지속론(관속론)이나 이동지속론(내속론)이란 이름이 낯설다면, 21세기 들어와서 더 많이 사용되는 이름을 써도 된다. 연장지속론의 다른 이름은 4차원주의(four-dimensionalism)이고 이동지속론의 다른 이름은 3차원주의(three-dimensionalism)이다.

직관에 잘 맞는 것처럼 보이던 이동지속론의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니라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개념 때문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대등한 것으로 본다면, 공간에 대해 이곳과 저곳에서 물체(대상)의 전체가 다 있는 것이 아니고 물체의 각 부분만 놓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대해 이때와 저때에 물체의 전체가 다 있지 않고 부분만 놓인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림 3. 시공간 도표와 시공간 관[출처: Minkowski (1909)]그림 3. 시공간 도표와 시공간 관. [출처: Minkowski (1909)]

특히 4차원 시공간에서 세계선을 그리게 되면 연장지속론 또는 4차원주의가 더 설득력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세계선으로 표현된 곡선 전체가 물체의 참된 모습이다. 그래서 이것을 ‘시공간 벌레(space-time worm)’나 ‘시공간 관(space-time tube)’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세계선은 움직이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물체의 시간적 부분들을 다 나타내준다.

그림 3에서 오른쪽 그림을 보면 시간축 방향으로 연장된 길쭉한 사각형 둘이 있다. 이런 길쭉한 사각형이 바로 시공간 벌레 또는 시공간 관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또 여러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여하간 상대성이론 특히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해석에서는 이동지속론보다는 연장지속론을 옹호하는 것이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그 논리적 연결고리의 중간에 있는 것이 영원주의와 현재주의의 논쟁이다. 영원주의(Eternalism)는 대략 결정론을 염두에 두고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블록(벽돌)처럼 모두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이와 달리 현재주의(Presentism)는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분석형이상학이라 부르는 영역에서의 이런 논쟁은 다소 사변적이고 상아탑 속의 논쟁처럼 보이긴 하지만, 의미심장한 부분도 있다.

상대성이론을 자연철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원주의-현재주의 논쟁과 연장지속론-이동지속론 논쟁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만일 상대성이론을 민코프스키 시공간 해석으로 받아들인다면, 상대성이론이 현재주의보다는 영원주의를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상대성이론에서는 동시 개념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재주의를 더 밀고 가면 극심한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에 빠지기 쉽다. 이와 달리 시공간 이해는 영원주의를 아주 매끄럽게 옹호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를 더 확장하면, 이동지속론(3차원주의)이 아니라 연장지속론(4차원주의)이 옳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략 말하면 연장지속론이 영원주의와 맞물리고, 이동지속론이 현재주의와 맞물린다. 영원주의는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모든 것이 이미 다 확정되어 마치 벽돌처럼 굳어 있다는 관념과 연결된다. 이를 흔히 블록 우주라 부른다. 여기에는 결정론이 근본적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이런 결정론적 우주에서 변화라는 것은 겉보기일 뿐 진짜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코프스키가 4차원 시공간을 도입하고 세계선이라는 개념을 만들 때에도 마찬가지의 사유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계선은 어떤 종류의 운동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운동 전체를 한꺼번에 서술한다. 그런 점에서 세계선에는 운동이 없다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물론 언제나 고전의 해석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민코프스키가 불과 48살에 충수돌기염 수술을 받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남긴 저작이 많지 않다. 활달한 성격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과 편지를 많이 주고받은 것도 아니다 보니 민코프스키의 발표된 논문만으로는 민코프스키의 생각을 온전히 추적할 수 없는 면이 있다. 민코프스키의 논문들에서도 백퍼센트 연장지속론과 영원주의를 가정했다고 말할 수 없는 구절들이 보인다. 이와 같은 과학사적 접근이 아니라 그냥 민코프스키 시공간과 세계선 개념을 놓고 초역사적으로 생각을 펼쳐 보더라도 조금 더 상황이 복잡한 면이 있다.

그래서 가령 하스랑거와 같은 물리철학자는 연장지속(perdurance)과 이동지속(endurance)과 조금 다른 단계지속(exdurance)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단계지속론은 거칠게 말하면, 연장지속론과 이동지속론의 장점만 가져다가 짜깁기를 한 느낌도 있다.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어지지만 각 시간에는 부분만 있다는 연장지속론과 달리 매시간 온전한 대상의 존재를 허용한다. 그러나 이동지속론과 달리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계를 인정한다. 그림 4는 이 세 입장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림 4. (a) 이동지속, (b) 연장지속, (c) 단계지속 [출처: Balashov (2010) p. 15.]
그림 4. (a) 이동지속, (b) 연장지속, (c) 단계지속. [출처: Balashov (2010) p. 15]

흔히 볼 수 있는 부지깽이 같은 것을 생각해 보자. 한밤중에는 아주 뜨겁게 달구어져 있다. 한낮에는 식어서 차갑다. 그림 4에서 수평축은 공간을, 수직축은 시간을 나타내고 진한 색으로 된 수평 방향의 선분은 부지깽이를 가리킨다. 회색으로 칠해져 있는 길쭉한 사각형은 그 부지깽이가 그리는 세계선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부지깽이는 점이 아니라 길이가 있기 때문에 세계선들을 모으면 일종의 세계면 비슷한 모양이 된다.

(a)는 이동지속론의 입장이다. 부지깽이는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온전하게 존재한다. 단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스틸사진처럼 여러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b)는 연장지속론의 입장을 보여준다. 상대성이론을 고려할 때 부지깽이는 시간 방향으로도 연장을 가지며, 시간 방향으로 연장된 전체가 비로소 부지깽이의 참된 모습이다. (c)에 표현된 단계지속론의 주장은 매 시간 부지깽이는 온전하게 존재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매번 다른 부지깽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단계(stage)라 부른다.

철학자들은 늘 논쟁을 하는데, 지금도 이동지속론, 연장지속론, 단계지속론 사이의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이 논쟁은 계속 끝나지 않고 점점 더 정교해질 것이다. 다만, 상대성이론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연장지속론과 영원주의의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철학과 과학이 만나서 서로를 강화하는 좋은 예가 된다.

직관적으로 보면 현재주의-3차원주의-이동지속론은 상대성이론의 등장과 더불어 큰 타격을 받은 듯하다. 이에 비해 영원주의-4차원주의-연장지속론은 상대성이론 덕분에 상당히 지지세력이 넓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철학자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꺼낸다. 상대성이론이 등장하여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시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새로운 관념이 실험이나 이론을 통해 확인된 올바른 과학이론임을 인정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송두리째 버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존재론적 관념과 그에 대한 논의는 자연과학의 주장에서 단순하게 유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시간-공간에 대한 존재론적 관념은 자연과학이 최종적인 답을 준다기보다는 자연과학의 최신 결과와 충돌하지 않게 덧붙여지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심지어 자연과학과 충돌하더라도 존재론적 관념을 폐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물리학 이론에서 어떤 새로운 주장을 하고 그것이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동등하지 않다는 느낌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상대성이론을 통해 종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현재주의-이동지속론을 상대성이론과 충돌하지 않는 방향으로 수정하고 개선하는 노력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각주
1)Yu Balashov and M. Janssen, British Journal for Philosophy of Science 54(2), 327 (2003). doi: 10.1093/BJPS/54.2.327.
2)Yu Balashov, Philosophical Studies 99, 129 (2000). doi: 10.1023/A: 1018684803885.
3)Yu Balashov, Persistence and Space-time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4)C. Bourne, A Future for Presentism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5)D. Dieks, The Ontology of Spacetime, Dennis Dieks (ed.) (Elsevier, 2006), pp. 157-176.
6)S. Haslanger, The Oxford Handbook of Metaphysics, M. J. Loux and D. Zimmerman (Eds.),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2003), pp. 315-354.
7)H. Minkowski, “Die Grundgleichungen für die elektromagnetischen Vorgänge in bewegten Körpern”, Nachrichten von der Königlichen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1908), 53-111.
8)H. Minkowski, “Raum und Zeit”, Physikalische Zeitschrift 10, 104 (1909).
9)J. D. Norton, Humana Mente 4(13), 23 (2010).
10)O. Pooley,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Volume 113, Issue 3, pt. 3, pp. 321 (2013). doi: 10.1111/j.1467-9264.2013.00357.x.
11)J. Read and E. Qureshi-Hurst, Synthese 198, 8103 (2021). doi: 10.1007/s11229-020-02560-z.
12)S. Saunders, Royal Institute of Philosophy Supplement 50, 277 (2002). doi: 10.1017/S1358246100010602.
13)J. Turner, The Philosophical Quarterly 70(279), 385 (2020). doi: 10.1093/pq/pqz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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