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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과학

작성자 : 최정모 ㅣ 등록일 : 2023-02-22 ㅣ 조회수 : 431

저자약력

최정모 교수는 KAIST에서 화학 및 물리학으로 학사 학위(2011)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과학사학(history of science)으로 석사 학위(2015)를, 화학으로 박사 학위(2016)를 받았다. 2020년부터 부산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생물리화학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표준 과학사에 따르면 과학이 새로운 문화권에 성공적으로 흡수된 경우가 여러 번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중세 말기에 유럽으로 전파된 이슬람 과학이었고, 또 하나는 근대 후기에 일본으로 전파된 유럽 과학이었다.(일본의 경우 20세기 초부터 이미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자들을 배출했음을 염두에 둔다면 “성공적으로 흡수된”이라는 표현의 적절한 예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점은 두 경우 모두 과학 문화가 자리 잡고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 전에 많은 양의 ‘번역’이 선행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이 과학을 독점하기 시작한 신호였던 과학 혁명은 보통 16~17세기에 일어난 천문학/역학 분야의 패러다임 변화를 가리키는데, 이 과학 혁명은 중세 말기부터 시작된 번역 작업 없이는 불가능했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여러 이민족이 각축을 벌이던 서유럽에서 그리스-로마의 지적 전통은 올바르게 전수될 수 없었다. 심지어 샤를마뉴 대제가 유럽을 통일하고 정국을 안정시킨 이후에도 오랜 기간 유럽의 학문은 정체 상태에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칠리아와 이베리아반도 일부를 기독교 국가들이 되찾으면서 다량의 이슬람 책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그 안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술과, 그에 대한 이슬람 학자들의 주석, 그리고 이슬람 학자들의 독자 연구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책들을 접한 유럽인들은 먼저 이들을 그들의 언어, 즉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번역 작업이 진행되면서 유럽인들의 과학 이해도 증진되기 시작했고, 그 이해도가 어느 이상 이르자 더 이상 외부의 도서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고, 스스로 의미 있는 지식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과학 혁명은 그 결과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마테오 리치의 초상(17세기 초 작품).▲마테오 리치의 초상(17세기 초 작품).

우리에게 좀더 관심이 가는 예는 역시 일본일 것이다. 16~17세기에 선교사들을 통해 한・중・일 3국에 서양 과학이 처음으로 소개되는데, 이들 3개국이 과학에 대해 처음 보인 태도는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우리는 흔히 중국과 일본은 서양에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과학을 일찍부터 접할 수 있었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매우 늦게서야 과학을 받아들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 서양 과학을 소개하는 주된 통로였던 선교사들의 관심이 중국과 일본에 집중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은 마테오 리치가 1583년 중국에 상륙하면서 서양 과학을 접했고, 일본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1549년 가고시마에서 선교를 시작하면서 서양 과학을 접했다. 그럼 조선은 언제 처음 서양 과학을 접했을까? 1603년이다. 이 해 중국에 사신으로 간 이광정과 권희가 선교사들이 만든 세계지도를 조선에 들고 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마테오 리치가 베이징에 도착해 명 조정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 1601년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중국과 거의 같은 시간에 서양 과학을 접한 셈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 서양 과학을 수용하는 데에도 조선은 딱히 뒤처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청나라가 서양 역법(曆法)을 받아들여 1644년 달력을 개정하자(시헌력), 10년도 안되어 조선 정부는 동일한 달력을 공포한다. 달력을 공포한 것이 뭐 그리 대수냐 할 수도 있겠지만, 유교 국가에서 일식・월식은 왕조의 정통성을 뒤흔들 수 있는 치명적인 일이었기에 정확한 예측이 가능한 달력을 갖는 것이 무척 중요했다. 그랬기 때문에 달력 기술은 국가 기밀 중의 하나였고, 중국 조정 역시 그런 기밀을 쉽사리 조선 조정에 알리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조정이 달력을 공포했다는 것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그 역법을 익혀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학문 체계로서의 서양 과학을 익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도리어 조선이 어떤 측면에서는 일본보다 빨랐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일본의 경우 천문학과 같은 과학 체계보다 조총 등의 기술에 더 신경을 썼고, 서양 학문의 이미지는 과학보다 기독교로 대표되었다.)

“지금 시행하고 있는 시헌력은 서양인 아담 샬이 만든 것인데 이로써 역도(曆道)는 그 극치에 달했다. 일식과 월식이 조금도 틀리지 않게 된 것이다. 성인(聖人)이 다시 살아온다면 반드시 이를 따를 것이다.” - 이익, 『성호사설』

이렇게 서양 과학을 처음 접하고 호기심을 보인 3개국은 금세 기독교의 위험성을 간파했다. 중국은 옹정제(1723‒1736 재위)가 1724년 대부분의 선교사를 마카오로 강제 소개시켰고, 조선은 정조 재위기였던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과학을 비롯한 서구 문화를 거부한 것도 이때부터다. 일본은 청이나 조선보다 일찍 기독교를 탄압했을 뿐 아니라, 서양의 영향력으로부터 나라를 걸어 잠근 시기도 더 일렀다. 이미 1635년 막부의 이름으로 쇄국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그때까지 받아들여진 서양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각 나라가 나름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 노력했으나, 온전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큰 발전은 없었다.

상황이 크게 바뀐 것은 두 가지 사건 때문이었다. 바로 아편 전쟁(1839‒1842, 1856‒1860)과 가나가와 조약(1854)이다. 각각 청나라와 일본의 개국을 불러왔고, 여기서 동아시아 3개국이 보인 태도가 이후의 큰 차이를 불러온다. 일본은 개국 이후 정부 차원에서 ‘번역’에 큰 관심을 보인다.1) 메이지 정부는 번역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정부 기관을 만들어서 온갖 분야를 망라하여 번역서를 계속 찍어냈고, 심지어 이 중에는 정부가 억압했던 공산주의에 대한 책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은 어땠는가? 중국 땅에서도 번역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정부의 지원을 받지는 못했고, 보통 교육에 관심이 있는 선교사와 이에 동조하는 중국인들이 협동하여 책을 번역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선은? 안타깝지만 아무것도 독자적으로 번역해내지 못했고, 그저 일본과 중국에서 수입된 책들을 공부할 따름이었다.

번역의 주체 역시 흥미롭다. 일본의 경우 번역을 하는 주체가 ‘일본인’이었다. 이들은 주체적으로 번역할 서적을 선택하였고 외국인의 도움 없이 번역을 해냈다. 반면 중국의 경우 번역의 주체는 보통 ‘외국인 선교사’였다. 이 선교사들이 중국어로 떠듬떠듬 번역하면 중국인 화자가 그것을 잘 다듬어서 받아적는 형태였다. 이는 결국 일본인들은 서양어를 잘 알고 있었던 반면 중국인들은 서양어를 잘 몰랐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일화가 있다. 1862년 세계 일주를 하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호텔에서 중국 학자를 만났다. 그가 중국에 서양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묻자 그 중국인이 11명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에는 몇백 명은 되리라고 응답했다. 그럼 당시 조선인들은 어땠을까? 1883년까지 서양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1883년 윤치호가 처음으로 일본에서 영어를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일본은 이미 19세기 후반에 서양 과학을 온전히 흡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20세기 초의 일본 과학으로 이어진다. 당시 일본 과학의 위상이 어땠느냐면 1901년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할 때 생리의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일본인이 올라갔을 정도였다.2) 이렇게 과학을 온전히 흡수한 이후에도 일본 과학계는 계속해서 번역에 힘쓴다. 보어에게 사사한 니시나 요시오는 일본에서 이론 물리 연구소를 만들어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 등 걸출한 제자들을 키웠는데, 그가 이 제자들과 함께 집중했던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바로 번역이었다. 폴 디랙이 1930년 양자역학 교과서를 출판하자 니시나는 디랙에게 편지를 보내 번역권을 따내고 제자들과 함께 바로 번역에 착수한다. 여러 이유로 번역이 지연되었지만, 니시나는 마침내 1935년 나온 2판을 완역하여 1936년 일본에서 발간한다. 여기에는 디랙이 직접 쓴 일본어판 서문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아직까지도 한국말로 번역이 안되어 있다.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태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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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는 정부의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 지원으로 사회적 가치 제고에 힘쓰고 있습니다.
각주
1)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마사오, 『번역과 일본의 근대』, 임성모 옮김 (이산, 2000).
2)J. Bartholomew, Osiris 13, 238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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