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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행동하는 과학자, 필립 모리슨

작성자 : 이강영 ㅣ 등록일 : 2023-08-23 ㅣ 조회수 : 504

저자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등이 있다. (kylee.phys@gnu.ac.kr)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 로스알라모스의 과학자들이 독일이 항복한 뒤에 모여서 폭탄의 정당성과 의미에 대해서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펜하이머는 연구소를 완전히 민주적으로 운영했으므로 이러한 모임에 전혀 제한을 두지 않았고, 종종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모임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핵무기를 인간에게 사용해도 될까요?”라고 발언하는 사람이 필립 모리슨(Philip Morrison, 1915‒2005)이다.1)

1915년 미국 뉴저지주의 서머빌에서 태어난 모리슨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선물해준 광석 라디오를 조립하면서 과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지하실을 자기만의 실험실로 삼아 마음껏 고물들을 모아서 놀았다. 열두 살 때는 아마추어 무선 자격증을 따서 전 세계 사람들과 교신을 하기도 했다. 모리슨은 라디오 기술자가 되고 싶어서, 현재는 카네기멜론 대학이 된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는데, 1학년 때 물리학 수업을 듣자마자, 이쪽이 훨씬 더 재미있고, 자기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2) 그래서 모리슨은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버클리 대학원에 진학했고 오펜하이머의 제자가 되었다. 양자역학과 핵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가득한 1930년대의 물리학은 그를 진정으로 매료시켰다. 모리슨은 1940년에 학위를 받았는데, 학위논문의 제목은 “원자의 전기역학에서의 세 가지 문제 Three Problems in Atomic Electrodynamics”였다. 학위를 받고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과 어배너의 일리노이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던 모리슨은 1943년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모리슨은 처음에는 시카고의 금속연구소(Met. Lab.)에서 일했고, 1944년 그의 스승이 지휘하는 로스알라모스로 옮겼다. 모리슨이 속한 그룹은 오토 프리쉬(Otto Robert Frisch, 1904‒1979)가 책임을 맡고 있는 Critical Assembly 팀이었다. 여기서 모리슨이 한 일은 플루토늄이 폭탄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임계질량을 찾는 일이었다. 당시 원자로 실험을 통해서 임계질량을 어느 정도 추산하고 있었지만, 원자로는 느린 중성자가 일으키는 핵반응이고 폭탄에서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중성자가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원자로의 결과를 직접 이용할 수는 없으며, 정확한 값을 얻기 위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했다. 모리슨은 조금씩 반응을 늘려가며 임계질량을 찾는 실험을 했다. 잘못해서 임계질량을 넘어서 버리면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여기에 대해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 1918‒1988)은 “용의 꼬리를 간질이는 거랑 비슷한 일이야”라고 논평했다. 그는 또한 폭탄 전문가인 키스티야코프스키(George Bogdanovich Kistiakowsky, 1900‒1982)와 함께 내폭 방식 폭탄을 위한 구조 설계에도 기여했다. 키스티야스코프스키는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트리니티 테스트 직전에 오펜하이머에게 내폭 방식 폭탄이 성공하는데 한달 치 봉급 대 10달러로 내기를 거는 인물이다.

모리슨은 폭탄 연구에서의 다양한 기여와 핵심적인 역할로 인해 폭탄 제조 과정을 가장 잘 목격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다. 사실 원자폭탄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리슨과 비견할만한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에 비해서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편이다. 우선 그는 로스알라모스에서 트리니티 실험이 수행된 그라운드 제로까지 플루토늄을 직접 싣고 간 사람이다. 그 후 현장에서 시험용 폭탄을 조립했고 돌아와서 폭발을 지켜보았다. 여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가 로스알라모스의 과학자들 가운데서도 폭탄과 관련해서 두드러진 사람인 이유는 폭탄과의 관계가 트리니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폭탄과 함께 공군기지가 위치한 티니안섬에 파견되어서 B-29에 폭탄을 싣기 전에 현장에서 우라늄 폭탄을 조립하는 일을 맡았으며, 나가사키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플루토늄 폭탄을 최종 조립했다. 또한 그는 그로브스 장군의 명령으로 원자폭탄의 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토머스 파렐(Thomas Francis Farrell, 1891‒1967) 장군의 일행으로, 폭탄이 투하되고 난 31일 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과학자로서는 모리슨 외에 로버트 서버(Robert Serber, 1909‒1997)가 동행했다. 조사관들은 가이거 계수기를 들고 9월 8일부터 14일까지 히로시마를, 9월 19일부터 10월 8일까지 나가사키를 순회하며 조사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이 두 사람이 히로시마의 참상을 알리는 모임을 가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비유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폭탄과의 밀접한 관계를 이야기하니 마치 그가 원자폭탄의 강력한 지지자라는 인상을 주었을지 모르겠다. 이 글 첫 부분에 보였듯이 그는 로버트 윌슨(Robert Rathbun Wilson, 1914‒2000)과 함께 폭탄의 의미를 묻고, 폭탄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한 토론회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폭탄을 조립하게 된 것은 그가 플루토늄 폭탄의 미묘한 부분을 설계했기 때문이며, 폭탄 투하 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간 것은 역사의 증인으로서 모든 과정을 스스로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전쟁 후에 군비 축소운동의 핵심에 서는 등 대표적인 “행동하는 과학자”가 되었다. 폭탄을 직접 만들고 참상을 직접 목격한 사람으로서 그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대중은 폭탄이 단순히 전쟁을 끝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비용과 위험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3) 모리슨은 원자력에 대한 국제적 통제를 주장하는 로스알라모스 과학자 협회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이들은 소련이 5년 이내에 원자폭탄을 개발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후에 벌어질 핵무기 경쟁을 우려했다. 또한 이들은 원자력의 민간 통제를 보장하는 법안에 대해 지원했고, 핵무기의 국제 통제를 주장했으며,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다. 로스알라모스 과학자 협회는 그 밖의 여러 과학자 모임과 연합해서 1946년 미국과학자연합(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FAS)을 설립하게 되는데, 모리슨은 여기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949년까지 회장을 맡았다.3)

지금까지 말한 모리슨의 성향으로 본다면 모리슨이 1946년에 버클리의 어니스트 로런스(Ernest Orlando Lawrence, 1901‒1958)의 제안을 거절하고 한스 베테(Hans Albrecht Bethe, 1906-2005)의 제안을 받아들여 코넬 대학으로 옮긴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모리슨 외에 로버트 윌슨도 코넬로 갔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파인만도 코넬에 자리를 잡았다. 베테의 인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모리슨은 학생 시절에 공산당에 입당했었고, 버클리에서는 당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영화에도 나오듯 당시 오펜하이머의 많은 학생들은 대체로 이상주의적이었고 급진적이었다. 모리슨은 공산당에서 1942년 탈당했지만, 그 이후에도 급진적인 지식인으로서 사회 활동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용기와 뛰어난 두뇌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폭넓은 시야, 뛰어난 글솜씨와 웅변 솜씨 등을 두루 갖추었기에,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냉전에 따른 군비 경쟁이 가속화되던 1950년대에 활약할 곳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익 진영의 주요 표적이 되어 무수한 공격을 당해야 했다. 1953년 어느 우익 뉴스레터에서는 그를 가리켜 ‘학계를 통틀어 가장 죄상이 큰 친공산주의 경력자’라고 칭하기까지 했다.4) 코넬 대학, 특히 물리학과는 그를 가능한 한 보호했으나, 모리슨은 정교수 승진이 오랫동안 지체되었고, 정부의 여러 보안위원회에 소환되어 추궁을 받았다. 그의 FBI 파일은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그리는 대로 오펜하이머와 같이 유명한 사람조차 배척을 받았으니, 그 시대에 활발히 운동에 참여하던 모리슨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는 저항을 멈추지 않고 1950년대 내내 평화와 민주주의 운동을 주도했으며, 그리고도 학계에 살아남아서 전설이 되었고, 1960년대에는 물리학자뿐 아니라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거의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

이렇게 행동하는 과학자로서 유명했던 모리슨이지만, 그는 교수로서의 업무에도 뛰어났다. 그는 코넬 대학에 19년 동안 재직하며 좋은 교육자로도 유명했는데, 함께 코넬 대학에 있었던 다이슨은 “필립은 타고난 교사였다.”며 물리학과 대학원생의 절반 정도는 모리슨이 돌봐줬다고 말했을 정도다. 한편 물리학에서 그의 관심사는 핵물리학에서 천체물리학 쪽으로 방향을 넓혀서 우주선(cosmic ray)의 근원과 초신성 등에 대해 연구했고, 그 밖의 다양한 주제를 통합해서 연구하는데 관심이 많아서 여러 업적을 남겼다. 1962년에 중성미자 천문학을 제안한 것을 보면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5) 그는 1964년 MIT로 옮겨서 과학교육에도 헌신했으며 물리과학연구위원회(Physical Science Study Committee, PSSC)에서 활약했다. 그는 그 밖에도 일반 대중을 위해 과학을 해설하는 활동을 다양하게 전개했는데, 폭넓은 지식과 시야, 뛰어난 글솜씨를 가진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사이언티픽 어메리칸>에 연재했던 그의 서평은 전설이 되었으며, 그밖에도 과학 영화나 대중 과학책의 저술에도 힘썼다. 그가 참여한 대표적인 작품 <10의 제곱수 Powers of Ten>는 원래 영화로 제작되었고, 나중에는 책으로도 나왔는데, 이 책은 번역되어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6)

각주
1)크리스토퍼 놀란 지음, 오펜하이머 각본집 (동아시아, 2023).
2)Interview of Philip Morrison by Charles Weiner on 1967 February 7, Niels Bohr Library & Archives,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College Park, MD USA, www.aip.org/history-programs/niels-bohr-library/oral-histories/4343.
3)Leo Sartori and Kosta Tsipis, Philip Morrison 1915‒2005, A Biographical Memoir,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2009).
4)Spence R. Weart and Melba Phillips 편집, 김제완 옮김, 인물로 본 현대물리학사 중에서 필립 모리슨의 프로필 (일진사, 2002).
5)Philip Morrison, “Neutrino Astronomy,” Scientific American 207(2), 90 (1962).
6)필립 모리슨, 필리스 모리슨, 찰스와 레이 임스 연구소 지음, 박진희 옮김, 10의 제곱수 - 마흔두 번의 도약으로 보는 우주 만물의 상대적 크기 (사이언스북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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