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1851 장학금
작성자 : 이강영 ㅣ 등록일 : 2024-06-12 ㅣ 조회수 : 564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등이 있다. (kylee.phys@gnu.ac.kr)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실험 물리학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넬슨 시 근처 마을의 농부 가정에서 열두 아이 중 넷째로 태어났다. 러더퍼드는 넬슨 컬리지와 뉴질랜드 대학의 캔터베리 컬리지에서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새로운 라디오 수신기를 발명하는 등 재능을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대로 뉴질랜드에 머물렀다면 러더퍼드가 성공적인 과학자로 성공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러더퍼드는 1895년 1851 장학금이라 불리는 영국 유학 장학금을 받게 되어 영국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마침 케임브리지 대학이 다른 대학 출신을 받아들이는 제도를 시행해서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톰슨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러더퍼드는 개인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우주의 기운이 합심하여 등을 밀어주어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만국박람회-엑스포 개념은 1851년 영국이 런던에서 “대 전시회(the Great Exhibition)”라는 이름으로 개최한 행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최전성기를 누리던 빅토리아 여왕 치하의 대영제국이 당시 급격하게 증가하는 전 세계의 지식과 기술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본다는 아이디어를 실행한 것이다. 이 생각은 1798년부터 1849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프랑스 산업제품 대전시회의 성공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사실 이면의 더 중요한 동기는 영국이 우리야말로 산업 분야의 리더임을 세계에 과시하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진보를 시대정신으로 하는 19세기에, 대영제국의 전성기라는 배경이 맞물려서 1851 박람회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행사가 개최되었다. 행사가 점점 거대해지자 이를 국제적으로 조율하고 규제, 감독하기 위한 조직으로 BIE (Bureau International des Expositions)가 1928년에 창립되어 만국박람회, 혹은 엑스포의 기획과 선정 및 관리를 맡고 있다. 현재 엑스포는 World Expos, Specialised Expos, Horticultural Expos, and the Triennale di Milano, 이렇게 4종류로 세분되어 치러지고 있는데, 1851 박람회는 가장 규모가 큰 World Expo의 제1회 대회로 간주된다. 얼마 전에 부산을 누르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로 결정된 행사가 바로 World Expo다. 우리나라에서 이전에 개최되었던 1993 대전 엑스포와 2012 여수 엑스포는 둘 다 Specialised Expo였다.
영국은 1851년 만국박람회 the Great Exhibition을 개최하기 위해서 1850년 여왕의 남편인 프린스 앨버트를 위원장으로 하는 “왕립 1851 박람회 조직위원회(The Royal Commission for the Exhibition of 1851)”를 설립했다. 프린스 앨버트 본인이 박람회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고 왕실도 전적으로 행사를 후원했다. 빅토리아 여왕부터 가족과 함께 세 차례, 그리고 혼자서 34번이나 박람회를 방문했다고 한다. 박람회를 열기 위해 조직위는 “The Great Shalimar”라는 유리와 철강 골조로 된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은 당시 매우 파격적인 모습이었고, 영국의 건축 기술을 과시하는 의미도 있었다. 흔히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행사가 끝난 뒤인 1854년 런던 남부의 시드냄 힐로 이전되어 다시 지어졌는데, 1936년 11월 30일 화재로 불타버렸다.
박람회는 크게 성공해서 수익이 무려 18만 6,000파운드에 달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수익금의 규모에, 정부는 이를 운용하기 위해서 추가 헌장을 마련해서 조직위원회를 영구적으로 존속하는 기구로 만들었다. 위원회의 이름은 그대로 “The Royal Commission for the Exhibition of 1851”이다. 위원회는 런던 사우스 켄싱턴의 땅 약 86에이커(한 십만 평쯤?)를 구입했고, 프린스 앨버트의 뜻에 따라 이곳을 과학, 문화 및 교육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이 지역을 소위 “앨버트 도시(Albertopolis)”라 부른다. 하이드 파크 남쪽인 이 땅에는 현재 과학기술 분야의 세계적인 대학인 임페리얼 컬리지 런던을 비롯해서, 왕립 미술 및 음악 대학이 자리잡고 있고, 자연사 박물관과, 과학 박물관, 빅토리아 엔 앨버트 박물관이 있으며, 유명한 공연장인 로열 앨버트 홀도 위치하고 있다. 자연사 박물관은 예전에 흔히 대영 박물관이라고 부르던 브리티시 뮤지엄에서 분리되어 1881년에 문을 열었고, 과학 박물관은 1920년대부터 지금의 장소에서 사우스 켄싱턴 박물관에 소장하던 1851 박람회의 남은 물품들과 특허 박물관 소장품 등의 과학 관련 물품들을 전시하면서 시작되었다. 1851 위원회는 현재 7,600만 파운드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간 200만 파운드 이상을 자선 사업에 지출하고 있다고 한다.1)
한편 1851 위원회는 ‘산업 교육의 기회를 증진하고 과학과 예술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확대하기 위해’, 연구 장학금 Research Fellowship을 만들어서 1891년부터 수여하기 시작했다. 러더퍼드가 받은 장학금이 바로 이 장학금이다. 현재는 이 장학금이 매년 약 8명의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젊은 과학자 또는 공학자’에게 3년간 주어지는데,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러더퍼드 시절에는 두 사람이 선발되었던 모양이다.2) 오늘날 이 장학금은 물리학, 생물학, 수학, 응용과학 및 모든 공학 분야를 포함하며, 모든 국적의 사람에게 열려있고, 이 돈으로 영국 내 어디서나 연구할 수 있다.
이후에 여러 장학금이 추가로 생겨서, 현재는 위원회의 홈페이지에서 총 10개의 펠로우쉽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름에 디자인이 들어간 것이 3개일 정도로 디자인 분야가 많은 것이 눈에 띈다. 지금까지 이 장학금을 받은 사람은 모두 900명에 이른다.
이 장학금이 물리학에 미친 영향은 러더퍼드에 그치지 않는다. 역대 장학금 수상자 중에 노벨상을 받은 사람만 2023년 현재 13명이며 이 중 6명이 물리학상 수상자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폴 디랙일 것이다. 디랙이 양자역학을 만들던 시기인 1925년부터 1928년까지 그는 바로 이 장학금을 받고 있었다. 러더퍼드의 제자들 중에 중성자를 발견해서 1935년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채드윅, 가속기 연구를 선도해서 1951년 노벨상을 받은 존 콕크로프트와 어니스트 월튼도 1851 장학금을 받았다. 그 밖에 피터 힉스도 박사과정 동안 이 장학금을 받았고, X선 분광학 연구로 191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찰스 바클라도 이 장학금 수여자다. 노벨상 수상자는 아니지만 별에서의 무거운 원소 생성을 연구해서 천체물리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기고, 그 밖에 빅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한 프레드 호일, 케임브리지와 닐스 보어 연구소 등에서 활약하고 훗날 인도의 핵물리학의 기틀을 세운 호미 바바 등도 1851 장학금 수여자다.
엑스포의 기원, 1851 위원회의 창립과 활동, 앨버트 도시의 건설, 1851 장학금의 조성과 운영, 그리고 장학금 수여자들의 활약상을 보면, 국가의 부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선진국이 과학과 문화를 어떻게 대하고, 어떤 식으로 진흥시키는가 등등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 각주
- 1)왕립 1851 박람회 조직위원회 홈페이지 https://royalcommission1851.org/.
- 2)“Papers Past-Newspapers-Ashburton Guardian-13 July 1895-European and Other Foreign Items,” paperspast.natlib.govt.nz.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8 August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