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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의 눈으로 본 미술사 - 교양이 전공이 된다면?
작성자 : 이병휘 ㅣ 등록일 : 2021-05-11 ㅣ 조회수 : 1,145
이병휘 연구원은 KAIST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2021), 현재 KAIST 자연과학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교양으로 처음 만난 미술
대학생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또래 학생들 사이에서는 원하는 교양수업을 듣기 위한 치열한 수강 신청 경쟁이 있곤 했다. 문과가 없는 대학의 물리학과 학생이었던 필자에게도 교양 수업이란 메마른 수식으로 가득한 전공 수업 사이에서 잠시나마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맛보며 마음의 휴식을 얻는 사막 속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더욱이 평소엔 자주 보지 못하는 다른 학과의 학생들까지 만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재미있는 교양 수업을 수강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였다.
많은 교양 수업 중에서 네 과목으로 이루어진 서양 미술사 강의 시리즈는 꽤나 인기가 많고 경쟁이 치열했다. 미술사 과목이 유독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이공계 대학의 특성상 예술에 대한 전문적인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라이벌 수업으로 서양 음악사 강의가 있었다.), 또 미술사를 강의하시던 교수님들 모두 학생들 사이에선 인기가 많은 교수님이시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아쉽게도 미술사 네 과목을 모두 수강하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필자는 운이 좋게 두 과목 정도를 수강할 수 있었고, 이 수업들은 훗날 대학원에서의 연구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술사 수업 중 교수님께서는 종종 교실 불을 끄고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작품들을 보여주시곤 하셨다. 우리의 미션은 두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말해보는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학생들 모두가 탐정이 되어 추리를 해 나가는 게임 같아서 무척이나 흥미로웠는데 예를 들면, 북부 르네상스 작가들의 작품 속 성모 마리아의 옷은 날카롭게 각져있는 반면 이탈리아 화가들이 표현한 옷은 부드럽게 표현된 것을 찾아내거나, 매너리즘 양식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표현한 마리아의 신체 비율이 유난히 특이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찾아내는 식이었다. 두 번의 미술사 수업을 거치며 작품들을 하나둘씩 눈으로 직접 비교해 보았을 때, 처음에는 마냥 비슷해보이던 작품들에 저마다 독창적인 특징이 있으며, 언뜻 달라 보이는 작품 사이에도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과학으로 다시 만난 미술
인상 깊었던 교양수업은 추억으로 간직한 채로 필자는 전공을 살려 물리학과로 대학원을 진학하였고, <통계물리 및 복잡계 연구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시기에 지도 교수님이신 정하웅 교수님과 당시 학생이셨던 김영호 박사님은 대규모 미술 작품에 관한 통계적인 특성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들을 진행하고 계셨고 나는 자연스레 미술 연구 팀의 멤버가 되었다.
당시 연구실에서 진행 중이던 연구는 서양 회화 속 특징들을 통계 물리학 분야에서 익숙한 프랙탈 차원, 표면 거칠기 지수 등의 척도를 활용하여 객관적인 수치로 정의하고, 이러한 값들이 시대에 따라 어떠한 트랜드를 보이는지 살펴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회화 이미지를 구성하는 픽셀들의 색상들을 바탕으로 색공간에서의 분포정도를 나타내는 프랙탈 차원을 측정하면 시대마다 얼마나 다채로운 색상이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색상 분포의 프랙탈 차원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보면 중세 이후 값이 크게 증가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또 회화 이미지를 각 픽셀의 명도를 높이로 갖는 2차원 표면으로 간주하여 표면의 거칠기 지수를 측정하면 해당 그림의 명암대비 효과를 정량화 할 수 있는데 그 결과 180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이 거칠기 지수가 증가한다는 것도 확인되었다.1) 이후 우리는 색상 사용의 공간적 불균등성을 바탕으로 몬드리안, 모네, 폴록처럼 각기 다른 작가들의 색상대비 효과가 얼마나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수치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고, 현대 미술 시기 폭발적인 다양성 속에서 개별 작가의 스타일의 변화와 특이성을 정량화하여 화가들의 창의성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융합연구의 특성상 이러한 연구들은 문화와 예술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완성될 수 있었는데, 특히 색상 대비에 관한 연구는 KAIST 문화기술대학원의 박주용 교수님과 대전시립미술관 선승혜 관장님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통합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2)
사실 이러한 분석들은 앞서 소개한 서양 미술사 수업시간 학생들이 탐정이 되어 작품들의 특징을 뽑아내고 비슷한 작품들을 찾아 그룹 짓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손수 비교하려면 수십 년이 걸리는 양의 그림을 비록 제한된 특징에 대해서이지만 컴퓨터를 사용해서 수 시간에서 혹은 수 일 만에 비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에 대한 대규모 정량적 분석은 소수의 전문가들이 오랜 기간 정성적인 비교 분석을 통해 쌓아온 미술사의 거시적인 패턴을 오늘날의 통계적인 방법론과 대규모 데이터를 통해 객관적이고 수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회화 속 구성 원리 - 화가들은 정말로 황금비율을 많이 사용하였을까?
약 3년 전, 새로운 연구를 탐색 중이던 시기에 당시 공동 연구자이셨던 충북대 한승기 교수님은 조금 특별한 제안을 하셨다. 역사 속 미술 작품 속에서 황금 비율이 정말로 많이 사용되었는지를 정보이론적인 방법으로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작가가 하나의 문장을 여러 단어들의 조합으로 완성하듯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점, 선, 면, 형, 색 등 여러 가지 시각적 구성 요소들을 잠재적인 구성 원리를 바탕으로 배치함으로 조화로운 최종 작품을 완성한다. 미술사와 미학에서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이러한 작품의 ‘구성 원리’에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공통적인 특징이 존재하는지, 혹은 시대나 문화적 환경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별히 여러 구성 원리 가운데 작품 구도 속 사용된 ‘비율’은 미술사가들과 미학자들의 오랜 관심사였고, 황금비율은 이 주제의 단골손님이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미술사 속 많은 관심과 논란을 야기한 황금비율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림의 구성에 사용된 구도와 구성 비율을 어떻게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기록에 따르면 황금비율의 역사는 시간을 거슬러 기원전 300여 년 전 유클리드에 의해 처음 수학적인 정의가 제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금비율은 한 선분을 둘로 분할하였을 때 전체 선분과 큰 조각의 비율이 큰 조각과 작은 조각의 비율과 같을 때 얻어지는 무리수 비율로서 근사적으로 1.618에 가까운 비율이다. 만약 전체 길이를 1로 둔다면 분할 위치는 약 0.613:0.382의 비율이 된다. 원래 이 비율은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진 비율은 아니었는데, 이탈리아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에 의해 1509년에 신성한 비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가 되면서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고, 19세기 말에는 살바도르 달리나, 휘슬러, 르 코르브지에 등에 의해 의도적으로 사용이 되기도 하였다. 신성한 비율이라는 이름 덕분인지 황금비율이 미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선호되는 비율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파르테논 신전이나, 기자의 피라미드, 다빈치의 작품 등에서도 황금비가 발견된다는 이야기들이 우리나라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대다수는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미술사 속 화가들은 그림을 구성하는데 정말 황금비율을 많이 사용하였을까? 만약 아니라면, 시대에 따라 화가들이 선호한 비율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변해왔을까?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온라인 갤러리에서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20세기 미술까지 500년 이상의 시간에 걸친 서양 미술사 속 풍경화 14,912점을 수집하여 화가들이 많이 사용한 작품 구도의 패턴을 분석하고 작품을 구성하는 비율을 분석했다. 그림 속에서 구도란 간단히 설명하자면 구성 성분들이 캔버스 위에서 어떤 위치에 어떤 방향으로 놓여있는가를 의미하고 구성 비율이란 구성 요소가 얼마만큼의 비율을 차지하는가를 의미한다. 우리는 스페인 지로나 대학 연구팀이 제안한 이미지 분할 알고리즘을 개선하여 그림의 구도를 특징지었는데, 이 알고리즘의 원리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각 픽셀들의 색들을 비교하여 캔버스를 색상이 가장 뚜렷하게 차이나는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 수평선 혹은 수직선을 찾는 것이다. 풍경화를 연구 주제로 삼은 이유는 풍경화의 경우 작품 속에 하늘과 땅과 같은 두드러진 수평선과 건물과 나무들과 같은 수직적으로 배치가 많아 분석에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정보이론으로 풍경화 해부하기
그렇다면 분할 알고리즘은 두드러진 색상 영역을 어떻게 구분해낼까? 그 비결은 그림을 정보를 담은 하나의 메시지로 간주하여 메시지의 불확실성을 가장 낮추는 방향으로 분할을 진행하는 것이다. 갑자기 정보, 불확실성 같은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리 특별할 건 없으니 안심하자. 정보이론에서 어떤 메시지가 가지는 정보란 그 메시지가 갖는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예를들어 날마다 비가 오는 어떤 나라에서 ‘내일 비가 옵니다.’라는 메시지는 아무런 정보를 담지 않는다. 그렇지만 맑은 날과 비오는 날의 비율이 반반인 나라에서는 '내일 비가 옵니다.'라는 메시지는 50:50이라는 불확실성을 제거해 줌으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림의 분할도 이와 유사하다. 하나의 그림 이미지는 여러 색상 값을 가진 픽셀들로 이루어진다. 색상 정보를 많이 담고 있는 이미지란 누군가 이미지 속 픽셀을 무작위로 하나 골랐을 때 픽셀의 색상이 무엇인지 맞추기 힘들다는 뜻과 같다. 다시 말해 색상의 불확실성이 높다. 그런데 만약 그림 속 색상들의 공간적인 배치를 잘 구분짓는 분할 선을 찾아서 그림을 쪼갤 수 있다면, 분할된 각 그림 속 색상은 쉽게 알아맞힐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하늘과 땅으로 구분된 그림을 생각해 보자. 지평선을 기준으로 그림을 분할할 때 가장 뚜렷이 두 영역의 색상이 구분될 것이다. 전체 그림이었을 때는 존재했던 색상의 불확실성이 그림을 분할한 뒤에는 사라졌으므로 우리는 색상 배치에 관한 나름의 정보를 얻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특별히 풍경화에서는 그림을 구성하는 색상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이므로 이를 ‘구성 정보량’이라 부른다.
그림 1. 정보이론적 분할 방법론을 이용한 풍경화 구도와 구성 비율의 수치화 과정. (작품: Seaport with the Embarkation of the Queen of Sheba, 클로드 로랭, 1648)
[그림 1]은 정보이론적 분할 방법론을 이용해 실제 작품을 분할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의 경우 '수평 방향'으로 위에서 227번째 픽셀에서 분할하는 것이 가장 높은 구성 정보량을 제공하므로 이곳이 첫번째 분할 위치가 된다. 높이가 373 픽셀인 그림에서 227번째 위치에서 분할이 이루어졌으니 비율은 227/373=0.608이 된다. 이런 식으로 그림을 분할해 나가면 단계별 분할 방향과 분할 비율을 통해 그림의 구도와 구성 비율을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대와 작가별로 풍경 구도를 잡는데 자주 사용한 구성 비율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풍경화 대다수가 초기에 수평 방향으로 분할되었기에 색상 사용 패턴이 급격하게 달라지는 지배적인 수평선(하늘과 땅 혹은 뚜렷한 색 차이를 주는)의 위치를 기반으로 구성 비율의 분포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조사했는데, 신기하게도 시간에 따라 자주 사용된 구성 비율이 존재했고, 빈번하게 사용된 비율은 시간에 따라 매우 점진적이고도 부드러운 변화 과정을 보였다. 아쉽게도 풍경화 화가들은 황금비율을 특별하게 여기진 않은 듯하다.
작가들이 선호한 풍경화 속 지배적인 수평선은 바로크 시대 17세기 무렵 그림의 절반 아래에 해당하는 낮은 위치에서 발견되었으나, 로코코와 낭만주의에는 절반에 해당하는 위치를 가장 선호하였다. 그 후 지배적인 수평선은 점차 위쪽으로 움직여 19세기 이후에는 작품 위에서부터 1/3 지점에서 가장 많은 빈도로 발견되었다. 흥미롭게도 1/3 구성 비율을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특징은 다양한 현대 미술 주의(-ism)에 걸쳐 유사하게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발견은 미술 양식의 폭발적인 다양성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의 여러 주의들이 색채 사용과 표현 방법에선 다양성과 차별성을 추구하였으나, 구도와 구성 비율의 관점에서는 유사한 사용 패턴을 보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발견이었다. 보다 깊은 내용에 관심있는 독자들은 논문을 참고하길 바란다.3)
글을 마치며
이처럼 미술에 대한 과학적이고 정량적인 분석은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작품들 속 구성원리의 거시적인 패턴을 보여주며, 또한 기존 미술사가들에 의한 정성적인 결과들을 검증하거나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점들도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시대에 따른 점진적인 서양 미술사 속 구도의 변화가 과연 실제 미술의 역사의 모습을 편향 없이 반영하고 있는지, 혹은 그동안 미술사가들과 비평가들 의해 평가되고 정리되어 온 주류 미술사의 편향을 보여주고 있는지에 관해 분야 전문가들의 세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또 컴퓨터 알고리즘은 미술 속 패턴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지만 이러한 패턴을 만들어 낸 작가의 의도나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의 감정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다양한 추가적인 분석과 해석이 요구된다. 미술 외에도 음악, 영화, 건축 속의 스타일은 어떻게 변해왔는지, 궁극적으로는 예술 속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란 과연 존재하는지 등 여전히 풀리지 않은 많은 질문들이 남아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필자는 학부시절 특별한 생각 없이 교양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미술사 수업을 수강하였는데, 당시 수업 중에 교수님과 또래 친구들과 함께 고민하며 토의했던 주제들은 향후 연구들의 지속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학부생들이 있다면, 지루하게 생각하지 말고 생각을 바꿔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여 보자. 혹시 아는가? 어쩌면 오늘 들은 수업 내용 속에 흥미로운 내일의 연구 주제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과학과 미래 그리고 인류’를 목표로 한 <크로스로드>는 과학 특집, 과학 에세이, 과학 유머, 과학 소설, 과학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과학 글을 통해 미래의 과학적 비전을 보여주고자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Asia Pacific Center for Theoretical Physics)에서 창간한 과학 웹 저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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