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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이야기

“시대에 낙오되지 말어야지오”: 일제강점기 조선과 아인슈타인의 만남

작성자 : 김재영 ㅣ 등록일 : 2021-07-12 ㅣ 조회수 : 3,853

저자약력

김재영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물리학 기초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물리철학 및 물리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공저로 『정보혁명』, 『양자, 정보, 생명』,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이 있고, 공역으로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에너지, 힘, 물질』 등이 있다. (zyghim2@kaist.ac.kr)


1923년 7월 17일 경성(서울) 경운동에서 독특한 주제의 강연이 열렸다. 장소는 1921년 2월에 준공된 천도교회당, 강연제목은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였고, 연사는 동경제대 이학부에 재학하는 최윤식(崔允植)으로서, “「아인스타인」씨 자신을 위시하야 대가의 강연을 듣기 6,7차이며 기타 오랫동안 연구를 싸은 바” “물리학계의 일대혁명이라고 말하는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강연에는 200여 명이 참석하여 최윤식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열정적인 강의를 들었다.

지금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이라든가 ‘상대성이론’이라는 개념이 천재과학자나 뛰어난 과학이론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아인슈타인이나 상대성이론은 낯선 이름이었으리라. 당시에 과학 특히 이론물리학은 한반도에서 거의 아무런 기반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성격의 강연이 기획된 것일까? 그 강연에 참석한 사람들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런 성격의 강연은 또 어떤 게 있었을까?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이 강연 이외의 매체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되었을까? 아인슈타인과 그의 난해한 이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담론이 중요한 과학적 성취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어떤 맥락에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을까?

1920년 7월, 동경 유학생 학우회는 동아일보의 후원을 받아 전국을 돌며 다양한 주제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하기순회강연회를 시작했다. 최윤식의 강연은 세 번째 순회강연 중 하나였다.

그림 1. “아인스타인 상대성원리의 특별강연”.(동아일보 1923년 7월 17일)
그림 1. “아인스타인 상대성원리의 특별강연”.(동아일보 1923년 7월 17일)

“동경학우회의 제3회 하기강연은 누누히 보도한 바와 가치 예정대로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개최하엿는데 동단의 연사 최윤식씨는 다시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에 대하야 금일 오후 네시부터 역시 천도교당에서 특별강연을 할 터인데 일반이 임의 아는 바와 가치 이 상대성의 원리라는 것은 원래 전문가의 두뢰로도 잘 리해하기 어려운 것임으로 아즉 과학이 유치한 조선에서는 특별한 실익이 업스리라 하야 일반강연에는 그만두기로 하고 따로히 특별 강연회를 열게 되엿는대 강연은 전문적 색채는 일체로 버리고 통속으로 하야 일반에게 잘 알아듯도록 로력할 터이라 하며 동씨는 현재 동경제국대학 리과부에 재학중이며 특히 이 상대성원리에 대하야는 「아인스타인」씨를 비롯하야 기타 여러 대가의 강연을 륙칠번이나 들어 이에 대하야는 매우 조예가 깊다 한다.”(동아일보 1923년 7월 16일)

이 보도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이미 일반인들이 알고 있다고 표현한 점과 최윤식이 아인슈타인의 강연을 직접 들었다는 기록이다. 1923년에도 이미 이 신문의 독자들은 ‘아인스타인’이라는 이름과 그의 대표적인 이론인 ‘상대성원리’ 또는 ‘상대성리론’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반강연을 열기에는 청중의 수준이 “유치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열린 특별강연에는 200명 가량의 청중이 참석했다.

그림 2. “난해로 유명한 상대원리 강연”.(동아일보 1923년 7월 19일)
그림 2. “난해로 유명한 상대원리 강연”.(동아일보 1923년 7월 19일)

“학우회강연단원 최윤식씨가 「아인스타인」의 상대성리론에 대하야 특별강연을 한다 함은 긔보와 갓거니와 지난 십칠일밤 일행 중 두 사람이 인천에서 강연을 하는 같은 오후 팔시로부터 천도교회당에서 강연은 시작은 되엿섯다. 원래 문제가 문제인 까닭으로 입장한 사람은 약 이백명가량밧게 안 되엇스며 중에는 중등학교 전문학교 학생이 대부분이요 또 중등학교 선생님들 중에도 출석한 이가 잇섯다. 세 시간 동안을 계속한 씨의 강연은 첨부터 끗까지 수학공식으로 발뎐되여 나갓슴으로 수학지식이 잇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안타 하나 대부분은 역시 알어듯지 못하는 헛정성만 보엿다. 그러나 청중의 대부분을 점령한 학생들이 끗끗내 필긔를 계속함은 보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으로 하야금 저윽히 마음을 진덧게 하엿다.”(동아일보 1923년 7월 19일)

이 기사에는 비록 최윤식의 강연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적었고, 200명 가량의 청중은 다른 강연에 비하면 많은 수가 아니었지만, 이 강연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최윤식은 이미 7월 8일 마산에서 <뉴톤에서 아이스타인까지>라는 제목의 강연으로 300여 명의 청중에게서 갈채를 받았으며, 7월 14일 수원에서 <뉴톤으로부터 아인스타인>이란 제목의 강연으로 500여 명의 청중에게 “다대한 감동을 여”했다. 7월 21일 사리원에서는 <절대와 상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림 3. 종로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과학강연회.(동아일보 1927년 7월 22일)
그림 3. 종로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과학강연회.(동아일보 1927년 7월 22일)

최윤식은 1926년 3월 귀국한 뒤에도 이와 같은 성격의 강연을 계속했다. 1927년 7월 22일 종로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재일본 고려공업회 주최의 과학강연회에서는 <뉴톤으로 아인스타인까지>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으며, 1929년 2월 8일에는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에서 <수리학적 자연관>이란 제목의 강연을 했다.

그렇다면 최윤식의 강연은 당시에 유일한 것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강연 기록은 최윤식 외에 적어도 여섯 번의 강연이 확인된다.

1922년 8월 17일에는 하동의 하동공립전문학교에서 유학생 친목회 주최의 강연이 열렸다. 여기에서 “강우석(姜佑錫) 군은 「사유의 궁극과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라는 제로 열변을 토하고 ... 사백여명의 청중에게 다대한 감각을 주엇”다. 강우석은 경남 하동 사람으로서, 그는 1919년 9월 진주 광림학교(光林學校) 교사로 재직할 무렵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해 활동했다. 두 차례 옥고를 치른 뒤, 1922년부터 동아일보 하동지국에서 일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강우석의 경력만 보아서는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를 강연한 것이 특이하게 여겨진다.

1925년 10월 31일 ‘학생과학연구회’ 주최로 열린 ‘과학문제강연’의 제목은 <상대성원리에 대하야>였다. 연사는 안일영(安一英)이었다. 안일영은 중동학교 교사로서 1915년 최규동(崔奎東)의 추천으로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의 별명이 ‘최대수(崔代數)’, ‘안기하(安幾何)’였던 것으로 보아, 대수학이나 기하학 등의 수학 과목을 주로 담당했으리라 여겨진다. 어쩌면 1923년 7월 17일에 경운동 천도교회당에서 있었던 최윤식의 강연에 참석했던 “중등학교 선생님들 중에도 출석한 이”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1929년 4월 14일에는 경성에서 출판노조 주최로 열린 신춘강연대회에서 “상대성원리에 대하야”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고, 연사는 이정섭(李晶燮)이었다. 프랑스에 7년 정도 유학했던 이정섭은 「별건곤」에 실린 일문일답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일로 “14,5세 된 소년이 바람결에 우산을 밧고 가면서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를 논하던” 일을 꼽았다.

실상 1922년 12월 15일 총독부 제2회관에서 경성의학교 교수 小港潔씨의 아인슈타인씨의 상대성에 대한 강연이 있었지만, 이 강연은 명시적으로 총독부원을 위한 것이었다. 1923년 4월 30일에 충남 공주 本町錦江館에서 이학박사 今津明이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원리’를 강의했는데, 청중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각각 300여 명이었다는 보도가 있다. 이 역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주된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 1923년 7월에 열린 최윤식의 강연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 동경제대에 유학하면서 상대성이론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이에 버금가는 강연으로 1931년 7월 28일 흥남 학술강연회가 있다. 여기에서 동경대 조수 이학사 도상록(都相祿)이 <상대성원리에 관하야>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도상록은 1945년 8월 16일 창설된 조선학술원에서 이학부장을 맡는 동시에 출판과와 기획과에 속해 있었고 조선학술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림 4. 공우 제1호 표지.(1920년 10월 20일).
그림 4. 공우 제1호 표지.(1920년 10월 20일)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일제강점기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20년 10월 20일에 창간된 「工友」라는 잡지에서였다.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에서 발행한 이 잡지의 창간호에는 “광에도 중량이 잇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고, “과학계 공전의 대발견”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자연계의 모든 원칙을 근저로브터 개조치 안이하면 안 될 일대발견이 최근 오지리의 소장수학자 「아인시다인」 박사로브터 成하엿스니 박사는 차 최대발견으로 인하야 「코별이구쓰」든지 「뉴톤」과 일반으로 최고의 명예를 문명사상에 잔존식힐 터이며 又 내년에는 학계무이의 명예 되는 노별상금의 수령자 됨이 결정되엿다고 전하더라

혁명적 발견은 何요? 즉 광에는 중량이 잇겟다고 환언하면 광은 중량이 有한 고로 행진로는 결코 종래 상상하든 바의 직선이 안이라 인력의 방칙에 종하야 곡선을 작성한다고 한다

탄환에는 중량이 잇는 故로 기 진행로는 소위 탄도요 직선은 안이라 그리하야 其 속력이 速할사록 탄도의 곡선이 少하다 하는 것은 何人이든지 승인하는 바의 물리적 원칙이나 光도 여사한 성질의 物이라고 생각한 이가 「아인시다인」 박사러라 此光은 탄환에 비하야 비상히 중량이 少하고 此 속력이 현저히 速함으로써 기표하는 바 탄력의 곡선은 전연 육안으로서는 인정하기가 불능하도록 少함으로 此 원칙을 증명함에는 기백리이나 되는 원거리에 有한 大體의 관측한 결과라 하나니 此에 대하야는 전문적으로 유입하겟기로 此에는 생략하노라

「아인시다인」 박사의 설에 의하면 광의 중량은 실로 세소한 것으로서 태양으로브터 일일중에 지구를 향하야 발사하는 총중량은 僅히 백육십톤에 불과하다고 하더라.

이 기사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工友」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던 최종환(崔宗煥)이거나 그의 지인일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를 ‘코별이구쓰’라고 쓴 것으로 보아 이 글의 필자가 일본어로 된 문헌을 참고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아인시다인’으로 되어 있고 오스트리아의 소장 수학자로 잘못 소개된다. 아인슈타인은 코페르니쿠스나 뉴턴과 같은 수준의 과학자라고 하면서, 다음 해에 노벨상을 받게 되리라는 잘못된 예측까지 들어 있다. 이 기사에는 1919년 에딩턴이 북아프리카에서 개기일식을 통해 태양 주변에서 별빛이 휜다는 일반상대성이론의 예측을 확인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러나 별빛이 휘는 것을 탄환의 경로가 그 무게 때문에 곡선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하고, 더 상세한 것은 전문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생략하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기사의 필자는 상대성이론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대한 반응과 영향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920년에 불과 1년 전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사 상의 사건이 왜곡된 방식으로라도 알려졌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조선인 졸업생이 과학기술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홍보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인 공우구락부가 현실적인 기술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는 아인슈타인의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림 5. 황진남 “아인스타인은 누구인가”.(동아일보 1922년 11월 18일)
그림 5. 황진남 “아인스타인은 누구인가”.(동아일보 1922년 11월 18일)

아인슈타인을 직접 만난 첫 번째 조선사람은 황진남(黃鎭南, 1896-?)이다. 황진남은 함흥 출생으로 “가주대학, 백림대학, 파리소루본대학” 등을 졸업했으며, 상해임정 외교위원으로 활약했다. 황진남은 베를린 대학에 있을 때 1922년 11월에 4회에 걸쳐 “상대론의 물리학적 원리”라는 해설기사를 동아일보에 기고했으며, 3회에 걸쳐 “아인스타인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뒤이어 기고했다. 황진남이 처음 “물리학과에서 연구하시는 아인스타인”에 대해 듣게 된 것은 191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어떤 ‘여학생’이 ‘아인스타인’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황진남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그 ‘여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불상한 냥반아! 용서하시오 자기시대를 이해 못하는 사람처럼 불상한 사람이 업다합디다. 아인스타인이라는 이름은 우리 시대의 특색임니다. 더고나 당신은 주야로 우주의 原性이니 인생의 原由이니 하시며 상대론 업시 당신의 문제를 어찌 해결하시려 하오. 철학은 항상 夢裡乾布에 잇다가 자연과학이 한번 흔들어 깨워 주면 몃칠 못되야 다시 꿈꾸고 안젓는것! 당신은 꿈 고만 꾸시고 우리 시대의 진상계에 입하야 신파도에 혜엄치고 노라보시오!”

황진남은 철학에 대한 소양을 바탕으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인스타인과 상대론에 대한 해석적 서류도 읽어보고 씨의 저서도 연구하야 보앗으나 상대론의 심연한 의의는 이해치 못하얏다. 책장을 낸길 때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 원문상의 서봉한 ‘수학에 不通하는 자에게는 허입을 금함’라는 구를 기억지 아니치 못하얏다. 아인스타인 자신도 말하기를 상대론의 진의를 이해하는 이가 현재 차세에 5인 이외에 無하다 하얏다는 풍설이 잇다. 고등수학에 정통치 못하고 상대론의 진미를 不知하고 상대론을 이해치 못하는 아인스타인 숭배도 허위라 하겟다.”

그림 6. 황진남 “상대론의 물리학적원리”.(동아일보 1922년 11월 14일)
그림 6. 황진남 “상대론의 물리학적원리”.(동아일보 1922년 11월 14일)

황진남은 1922년 2월에 “덕국의 최고 학술기관인 소위 「과학아카데미」 기념일”에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을 처음 만났다. 황진남은 아인슈타인이 “우리 동아에 여행하려 출발하얏다는 소식을 聞하고 [중략] 상대론의 원리를 소개코자 하얏다.” 황진남은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쓴 논문들을 소개하면서, 그가 어떻게 유명해졌는지 설명하고 있다.

「광선의 출생과 변태에 관한 발견적 관찰점」 「力의 관성」 「뿌라운 진동의 법칙」 등이오 기중 상대론과 직접 관계를 有한 것은 「운동 중 물체의 전기역학적 연구」라는 논문이오 또 동년에 박사학위를 득하기 위하야 「분자용적의 신측정법」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얏다. [중략] 현시 백림대학교수 역량단위론으로 저명한 물리학자 츨람크씨는 私書로 경축까지 有하얏다. 일차 물리학계에 저명하게 된즉 각 大學에서 相爭하며 고빙코자 하야 [중략] 1914년에 백림대학에 고빙되니 瑞西人이오 황국주의를 극히 반대하며 사회주의적 경향이 有한 인격이 당시 제도대학의 교편을 취하게 됨은 덕국 학계에 희유한 事이다. 포앙카레(법국 현시 총리의 장형)와 如한 대학자도 당시에 아씨를 최대한 천재 중 일인이라 찬예하얏다. 이리하야 아인스타인이라는 名은 인류문화사상 최고한 지위 중 일을 점하게 되얏다. [중략] 기후(1915) 저서 일반상대론으로 신우주관을 우리에게 與하얏다. 1919년에 영국 천문학 탐험단의 관찰로 因하야 상대론의 예언이 자연계의 사실임을 공포된 후 아인스타인의 名을 아동까지 찬예하게 됨은 우리가 경험하는 배다. [중략] 然則 인류문화사가 계속될 한에는 아인스타인이라는 名은 불후할 것이며 또한 전세계 인류가 갈릴레이와 뉴톤과 같이 숭배할 것은 부정치 못할 사실이다.

그 무렵의 다른 신문기사나 잡지 투고문과 비교하면 황진남의 서술은 매우 정확하다. 기적의 해 1905년에 나온 아인슈타인의 논문 다섯 편의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플랑크(‘츨람크’) 및 푸앵카레(‘포앙카레’)와의 연관뿐 아니라 1919년 일식관측 원정대도 말하고 있다.

황진남이 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상의 상대론의 물리학적 원리에 대하야 극히 간단히 설명하얏스나, 만일 독자 중에 명백히 이해치 못하신 이가 게시면 그는 자기의 과실이라고 자책하실 수 업슬줄을 밋슴니다. 상대론의 진리는 고등수학의 지식이 업고는 이해키 불능한 까닭임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말고 근세물리학의 삼대발견인 물질의 전소論, 力量의 단위론과 상대론을 열심으로 연구하야 볼 것이외다. 此 삼대문제를 더욱 발전식히여야 전무하든 과학계의 혁명을 起하며 人智의 최대한 공헌을 발휘할 것이외다.”

철학을 공부하던 황진남에게 상대성이론은 철학적 사유의 궁극을 완성하는 핵심적인 인류의 지혜였다. 비록 전문적인 고등수학의 벽에 막혀 상대성이론을 깊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상대성이론은 양자화가설과 함께 과학계의 혁명을 일으킨 물리학 이론이었으며, 열심히 연구해 볼 주제였다.

그림 7. “상대성이론을 가르키라”.(중외일보 1928년 8월 22일 사설)
그림 7. “상대성이론을 가르키라”.(중외일보 1928년 8월 22일 사설)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성이론이 당시에 왜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졌을까? 중외일보 1928년 8월 22일에 실린 “상대성이론을 가르키라”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그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세계적으로 권위 잇는 학자들의 不絶한 연구와 실험으로 지금에 와서는 완전한 진리가 되여버렷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상대성원리를 교과서에 편찬하야 널니 청년자제에게 가르키지 아니함은 무슨 이유인가. [중략] 대개 구 진리는 과거세월에 잇서서 사고적 지반을 갓고 잇슴으로 신 진리는 왕왕 구 진리의 반항을 바더 구축당하는 일이 잇스니 이는 말하면 사상계의 그레샴 법칙 적용이라 말할 수 잇다. 학문상의 이러한 보수주의는 그것이 학문발전에 질곡이 된다는 사실로 吾人은 단연 배척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중략] 이제 더 다시 일반상대성원리를 말할 필요도 업시 문제의 원리는 재래의 역학에 혁명을 일으켜 인류의 문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과학상 발견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물리학교육 당사자까지라도 이 신원리를 등한시하고 연구하지 아니함은 너무나 기괴한 늣김이 잇다. 될수잇스면 속히 이 신원리를 교과서에 편찬하야 널니 청년자제에게 가르켜야 할 것이라 하야 교육당국의 일성을 促하는 바이다.”

이 사설은 낡은 지식을 보수적으로 부여잡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대성이론은 새로운 지식이자 원리인 동시에 낡은 지식과 진리와 원리에 혁명을 일으킨 대표적인 예다.

그림 8. “애인에게 보내는 책자”.(동광 제39호, 1932년 11월)
그림 8. “애인에게 보내는 책자”.(동광 제39호, 1932년 11월)

「동광」의 “애인에게 보내는 책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을 추천하는 기사인데, 1932년 11월호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저자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과학방면에 잇어서는 Eddington “Space, Time and Gravitation”을 읽으라고 권고하고 십습니다. 이 책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소개한 것으로서 고등수학에 소양이 잇는 이는 볼 수 잇을 것입니다. 만일에 고등수학에 소양이 없는 이로서 상대성이론의 개요를 알려면 「아인슈타인」저 「일반 및 특수상대성이론」을 읽는 것이 가장 좋겟지오. 이 책은 누구나 알 수 잇게 맨든 책(allgemeinverstaendlich)이나 이것도 대수학 모르고는 읽을 수 없습니다. 웨 권하느냐고요? 조선사람은 과학을 등한히 하니 그 폐를 교정하자는 것과 무엇보다도 시대에 낙오되지 말어야지오.”

그림 9. “상대성원리의 비약”.(동아일보 1935년 7월 9일)
그림 9. “상대성원리의 비약”.(동아일보 1935년 7월 9일)

비록 최윤식의 상대성이론 강연에 참석한 대부분의 청중이 수학공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고 끝끝내 필기만 계속하던 ‘헛 정성’이 1930년대에 와서도 사실상 극복되지 않았지만, “시대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결코 무의미한 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 조선과 아인슈타인의 조우” (김재영, <철학·사상·문화> 35, 260-288, 2021)의 내용 중 일부를 편집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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