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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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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서른 즈음에: 물첨 30주년

프로메테우스의 시간

한국물리학회 SF어워드 당선작

작성자 : 최해린 ㅣ 등록일 : 2022-02-21 ㅣ 조회수 : 3,742 ㅣ DOI : 10.3938/PhiT.31.006

저자약력

최해린 작가는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한국물리학회 SF 어워드” 에 단편소설 <프로메테우스의 시간>이 당선작에 선정되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시간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게 정답이었으면 좋겠어.

햄스터가 우리 안을 돌아다닌다. 만지면 터질 것 같은 분홍색 피부에 검은 털이 반점처럼 나 있다. 어린 녀석은 제 성장 과정을 색으로 증명한다. 어느덧 모래색이 된 녀석에게는 붉은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쳇바퀴가 돌아간다. 녀석이 힘차게 달리고 있다. 이때 털의 색이 변한다. 녀석은 검은색이었다가 갈색이고, 살구색이었다가 줄무늬가 생긴다. 연속적인 상이 아니었다면 같은 햄스터인지 구분조차 못 할 정도다. 힘이 빠졌는지 쳇바퀴가 느려진다. 모래색으로 돌아온 햄스터의 눈에는 이제 생기가 없다. 털이 늘어진다. 쳇바퀴는 완전히 멈추었고 녀석은 눈을 감기 일보 직전이다. 그러나 쳇바퀴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녀석의 눈은 이보다 더 맑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햄스터가 쳇바퀴에서 뛰어나온다.

카메라가 햄스터로부터 멀어진다. 이제 화면은 익살스러운 웃음을 띤 연구자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은 햇빛을 오래 머금은 탓인지 연한 황금빛을 띠고 있다.

“보시다시피, 시간공학의 기술은 완성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연구자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살짝 스쳐 지나간다.

“조금 전 보셨던 것은 한 햄스터의 생애 전반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모든 과정이죠. 그리고 저 햄스터가 살 수 있었던 모든 생이기도 합니다. 털의 색깔 변화가 보여 주는 부분이죠. 같은 개체지만 저렇게 다양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겁니다.”

연구자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과하게 성능 좋은 녹음기다.

“그리고 죽기 직전의 상태에서 다시 생생해진 것도 보셨겠죠. 시간을 돌리는 것도 가능해진 겁니다. 물론 저 우리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지만 말입니다. 다시 말해 시간이 끈이라면 저 우리 안을 지나갈 수 있었던 모든 끈을 한데 묶어 조정할 수 있게 한 셈이죠.”

연구자는 이제 자연스레 발을 옮긴다. 카메라도 그를 따라간다. 그의 뒤에 우주정거장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순백의 거주 장치가 우주를 배경으로 제 존재감을 과시한다.

“아시다시피 이 시간공학은 간단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주여행 같은 걸 할 때, 동면으로 인한 인체의 손상을 막기 위해 만든 거죠. ‘만약 한정된 공간 안에서의 시간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면?’”

곧이어 과학부의 상징이 화면에 나타난다. 영상을 끊어서 다음 것도 보게 만드려는 심산이다. 화면 하단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글씨가 있다. 본 캠페인은 생명안전부의 감독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그 한 문장이 모든 걸 해명한다는 듯이 말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책상들. 왠지 모르게 색만은 여전한 진녹색의 스크린 칠판. 열린 창문과 펄럭이는 커튼.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교실이란 풍경은 바뀌지 않는다. 지나치게 투명한 창문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다. 사이에는 책상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햄스터의 영상이 소리 없이 반복재생되고 있다.

학생은 교사가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에 정신이 팔렸다. ‘아인슈타인, 돌턴이 되다’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다. 특강은 몇 시간 전에 끝났지만, 현수막은 건재했다. 마치 자신이 떨어지기 전에는 특강도 끝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득의양양하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교사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야 학생은 진로상담이라는 당면 과제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상담이 되지.”

교사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른손을 파묻은 머리카락은 마구잡이로 헝클어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피로에 절어 내려앉아 있었다.

“여울아, 나도 집에 가고 싶다…….”

교사는 앉은 채로 기지개를 켜고 학생의 시선을 따라갔다. 여울의 시선은 어느새 창문 밖을 향하고 있었다. 교사도 밖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진로상담을 하자고 시간을 잡았으면 진로상담을 하자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오지 않았다. 교사 본인이 제정신인 이상 나올 리조차 없었다.

노을빛은 창문 밖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자신을 넓게 뻗어 창문 밖의 건물들을 감쌌지만 도통 교실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교사는 불을 켤까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막 떠오른 질문 하나를 던졌다.

“어때?”

이거라도 물어봐야 했다. 여기서 뭐라도 대답한다면 진로상담지를 소설로 채울 필요는 없어지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여울은 특유의 턱을 괸 자세에서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하얘요.”

여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질문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교사는 펜을 들고 기록할 요량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건물부터 도로까지 전부 하얘요. 근데 눈이 부시지는 않아요. 스키장에서 고글 낀 것처럼.”

여울은 이제 의자마저 창문을 향해 돌려 앉았다. 받침대를 잃은 두 팔꿈치는 무릎으로 향했고 자연스레 몸이 수그러들었다.

“근데 가끔 시뻘게져요. 진하게. 건물 위에서부터. 그러면 짜증나죠. 내가 보고 있던 걸 자기들 마음대로 색칠하는 거니까.”

여울의 입은 다시 굳게 닫혔다. 교사는 조금 전의 말을 간략하게 옮겨 적었다. 고등학생이 볼만한 풍경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이대 학생들의 풍경은 양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어딜 가나 네온사인이 있는 찬란한 도시거나 쇠창살뿐인 감옥이거나. 그런데 하얗고 빨갛다니. 표현을 그 정도밖에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만약 후자라면 그렇게 밋밋한 세상이 어디 있을까.

교사는 자기 눈에 보이는 창밖을 다시 확인했다. 대강 한옥처럼 지어진 나무 건물들로 가득했고 땅은 숲과 산책로 그 사이 어딘가로 보였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무성한 숲은 아니었는데, 잡무가 힘들긴 한 모양이었다. 이러다가 스트레스가 극악에 달하면 도시 전체가 휴양림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쌤.”

이번엔 여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눈에는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저 시간 디자이너 할 수 있어요?”

교사는 그것도 빠르게 적었다. 시간 디자이너. 못할 거야 없지. 특히 여울이 같은 성적에는. 그런데 왜?

“왜?”

여울의 입에서 답변다운 답이 나온 것과 의문점은 별개였다. 별개로 다루어져야만 했다.

“그냥요.”

여울은 말끝을 흐렸다. 어느새 교사를 응시하고 있는 눈에는 장난치기 직전 허락을 구하는 짓궂음이 어려 있었다.

“되게 신 같지 않아요?”

창밖으로 참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저것도 저 아이한테는 하얗게 보일까, 교사는 잠시 감상에 잠겼다. 지금 자신이 하는 대화가 고등학생의 진로상담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이라니. 무슨 초등학생이 할 법한 이야기를.

“쌤.”

여울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조금 전까지의 의욕은 사라졌다. 이쯤 하고 그만둘까?

“희주쌤.”

아니다. 해야 한다. 교사는 여울을 마주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근데 발표하기가 영 그래.”

재현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의 뒤에 있는 칠판에는 이러저러한 공식이 적혀 있었다.

“왜?”

희주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이렇게 대단한 이론을 세워 놓고 발표하기가 그렇다니?

“이거 사실상 모든 것의 이론이잖아.”

재현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는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덮었다가 자라난 수염이 거슬렸는지 그 부분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발표해야 하는 거 아니야? 증명도 됐잖아.”

희주가 따졌다.

“근데 생각해 봐.”

재현은 이제 칠판 앞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희주는 그 동작이 은근히 정신 사납게 느껴졌다.

“이걸 발표한다 치면, 바로 기술화될 거란 말이지.”

재현은 칠판 한구석에 가득한 공식을 갑자기 지우더니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희주는 순간 움찔했지만, 칠판에 적힌 공식이 원본일 리 없었다.

“그럼 생각해 봐. 이걸 내가 어디에 팔 수 있겠어? 공식만 공개하면 누구든지 바로 기술화할 수 있는데. 세상에 그런 부자들은 차고 넘쳤단 말이지.”

칠판 속의 글자들은 마인드맵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론’이라는 단어에서 시작한 것들이 ‘기업’ 내지는 ‘정부’ 그리고 ‘기술’로 뻗어갔다.

“그러면 타임머신 만들겠다는 재벌들이 넘쳐나겠지. 그러다가 세상 망하는 수가 있어. 그럼 누가 책임져?”

이번에는 ‘정부’라는 단어에 동그라미가 몇 번 겹쳐졌다.

“그리고 시간 조작하는 게 상용화되면 정부는 거기에 꼴깍 넘어가서 이론 연구는 지원도 안 해 줄 거라고. 이걸로 완성된 게 아닌데.”

재현은 다시 얼굴을 감싸더니 한숨을 내뱉었다. 희주는 턱을 괴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기도 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텅 빈 강의실에서, 단 두 사람만이 우주의 비밀을 담은 공식의 여파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니. 그랬다가 공식이 틀리기라도 하면 또 어쩌려고.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평생 숨겨?”

희주가 물었다. 사실 공식이 틀릴 것 같지는 않았다.

“글쎄…. 그런데 이거 되게 웃긴다.”

재현은 어느새 칠판 아래에 주저앉아 있었다. 넓은 칠판에 비해 그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되게 신 같지 않아?”

재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초라한 신이라니. 밤샘연구에 찌들어 있는 신이라니. 희주도 함께 웃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왠지 모르게 무서웠던 것이다. 이제서야 재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공간의 구조를 완벽하게 분석한 공식. 시공간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공식. 어쩌면 두려운 게 당연했다.

“어떤 신이 되시려고 그래.”

희주가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곧이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소리가 강의실을 채웠다. 인간의 내장이 낸 소리였다.

“치킨을 먹고 싶은 신?”

둘은 동시에 시끄럽게 웃었다. 달빛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와 강의실을 밝혔다. 아직 건재해 보이는 빛은 자신의 힘이 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희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재현이 신음과 함께 뒤따랐다. 둘은 신이기 이전에 만찬을 즐기고 싶은 인간이었다. 신이더라도 배고픈 신이었다.

‘아인슈타인, 돌턴이 되다.’ 이 문구의 현수막이 자리를 가득 채운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무지 변하지 않는 곳이었다. 조금 더 넓은 책상, 조금 더 편해진 교복, 조금 더 다양해진 머리색이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공간의 양상도 변할 줄을 몰랐다. 단상에 선 강연자는 무엇을 해야 저 뒤에서 잠든 이들을 깨울 수 있는 걸까? 현수막은 잔잔하게 들어오는 오후 바람에 맞춰 춤추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돌턴이 뭘 한 사람이죠?”

강사의 오른손에는 초코파이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이제 곧 승냥이 떼가 몰려올 터였다. 원자론을 주창한 사람이요, 원자설 말한 사람이요, 조금 똑똑해 보이는 녀석은 근대 원자론의 시초요, 등등 간단하고 쉬운 질문에 달려드는 짐승들이 손을 드는 것도 까먹고 큰소리로 외쳐댔다. 강사는 대강 먼저 눈에 들어온 학생에게 정답이라 말하곤 초코파이를 던져 줬다. 제일 빠르게 답한 아이가 아니었는지 군데군데서 아우성이 들려 왔다. 그러면 어쩌랴, 이미 초코파이는 던져졌다.

“맞아요, 이건 워밍업으로 한 거지만, 맞습니다.”

스크린 칠판이 켜지고 강사는 터치펜을 집어 들었다. 재미없는 부분이 시작되려는 걸 감지한 짐승들 몇 마리가 나가떨어졌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이 돌턴이라는 사람은 원자론을 처음으로 얘기한 사람입니다. 맞아요.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하나의 알갱이’라는 게 이론의 요지였죠. 하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가?”

말끝을 올리면서 마무리하자 몇몇 기운 없는 목소리들이 틀렸죠, 하고 응답한다. 이것도 강사의 요령이었다.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계속 끌고 가야 했다.

“맞아요. 틀렸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사람을 교과서에서 한 줄만 쓱 읽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시험에는 꼭 나와요.”

약간의 자조 섞인 농담에 반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인슈타인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부모님 세대까지만 했어도 아인슈타인은 신이었어요. 상대성 이론이다 뭐다 하면서 이 사람을 물리학의 최고봉으로 여겼죠. 물론 후에 양자역학이 흥하면서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강사가 중요한 대목으로 넘어가려는 순간에 한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의 난리통에서도 가만히 있었던 앞자리의 학생이었다. 왜 갑자기 기척을 끌었나 확인해 보니, 줄곧 바닥을 향했던 시선이 이제 스크린을 향하고 있어서였다. 마치 다음에 자기가 무엇을 설명할 건지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눈빛이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그 아인슈타인도 여러분의 교과서에는 한 줄짜리 인간이 되어버렸죠. 사실 대학 교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신재현 교수가”

앞자리의 학생이 끼어들듯 답했다. 갑자기 적극적으로 된 모습에 강사는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이를 내색하진 않았다. 어설프게 표정으로 드러냈다간 학생 만족도 조사를 말아먹는 수가 있었다. 원래 조용한 학생들이 제일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맞아요, 신재현 교수가 시간공학이라는 개념을 열어버렸으니까죠.”

스크린 칠판 위에 큼지막한 물음표가 그려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가 이 교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리 많지가 않죠.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 흔적을 안 남기기가 쉽지 않은데, 왜 이 연구를 시작했는지, 어떻게 완성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어요.”

“그리고 돌아가셨잖아요.”

앞자리의 학생이 다시 말을 가로챘다. 이번엔 노골적으로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강사는 속으로 얘, 신재현 교수 팬인가, 하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강사가 곧이어 과학적 지식의 수명이라는 본 주제로 돌아가자 앞자리의 학생은 다시 축 늘어졌다. 다시 교실을 둘러보니 제대로 살아 있는 학생들이 몇 명 없긴 했다. 강사는 마지막에 그놈의 햄스터 영상이라도 틀어줘야겠군, 하고 생각하며 판서를 계속했다.

비가 내린 뒤의 햇빛이 눅눅하게 강의실에 눌어붙어 있었다. 희주는 후문을 열어 그 숨막히는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를 두지 않은 긴 책상들로 가득 찬 이 공간은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 누가 안에 있더라도 막힌 공기의 흐름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단상에 걸터앉아 있는 재현이 눈에 들어왔다. 후줄근한 옷차림은 그대로였지만 얼굴과 손톱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방법을 생각해 봤어.”

재현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바닥을 모았다.

“뭔데.”

희주가 짐짓 퉁명스럽게 물었다. 연락할 수단은 지독하게도 많은데 굳이 불러낸 걸 보면 그만큼 획기적이거나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둘 다일 수도 있고.

“남들이 시간선을 막 섞어 버리기 전에 우리가 손을 먼저 써 놓는 거야.”

희주는 ‘우리’라는 표현이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가능한 모든 시간선을 전부 붙여 버리는 거지. 우리 시간대를 중심으로. 그러면 애초에 시간대가 꼬아질 염려가 없어져. 히틀러가 지배하는 시간선 같은 게 일어날 일은 없는 거지. 덤으로, 같은 공간에서도 어떤 사람은 사막의 도시를 보게 될 거고, 또 어떤 사람은 숲속의 도시를 보게 돼. 각자 자기한테 최선인 형태의 세계를, 그러니까 시간선을,”

말이 잠시 끊기고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에 취한 듯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평소의 재현이라면 짓지 못할 표정이었다.

“갖게 되는 거지. 그리고 거기서 나를 없애버릴 거야. 아니면 내가 존재하는 시간선을 전부 없애버리든가. 그 이후에는 더 큰 이론이 등장하는 시간선을 전부 쳐낼 거고. 그러면 남용을 막을 수 있어.”

“몇백 년 뒤에는 네 공식을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연구가 진행될 수도 있잖아. 그 가능성도 네가 차단하는 거야?”

무슨 권한으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뒷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나온다 해도 그전까지 우리 시간선이 얼마나 엉망이 될까?”

“그렇다고 시간선 죄다 갖다 붙이는 건 괜찮고? 그냥 이 기술을 사람한테 못 쓰는 시간선이라든가, 그렇게 안전한 것만 붙이면 되는 거 아냐? 아니면 현실을 그렇게 바꾸든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근데 그러면 너무 아깝잖아. 기껏 이런 걸 할 수 있게 됐는데. 그리고 그런 시간선 하나 찾는 게 더 어려울걸. 이건 시간공학이지 사람들 기억 조작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세상을 다룰 만큼의 힘을 얻었으니 좀 더 낫게 만드는 게 좋잖아.”

재현은 이제 동의를 강요하는 수준으로 말했다. 조금만 더 따지고 들면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았다. 하지만 질문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재현이야말로 자기 기술을 남용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낫고 아니고는 누가 판단하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잖아. 막다른 길보단 되게 여러 갈래로 찢어진 갈림길이 낫지 않아?”

희주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막막했다. 논리의 흐름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더라, 생각하는 사이에 재현이 더 치고 들어왔다.

“사회에는 윤리가 있어도 되지만, 세계는 윤리를 가지지 않아야 해. 그렇지 않아? 이 무수한 입자들이, 흙이, 물이 그놈의 궁극적인 옳고 그름을 논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닐 거 아냐.”

“무슨 영화 찍어?”

희주가 중얼거렸다. 시간 조작 남용에 의한 범죄 같은 걸 막겠다는 이유로 우주를 자기 마음대로 섞어 놓겠다고? 자기가 신이라도 된다는 뜻인가.

“박수칠 때 떠나라고 하잖아. 난 그대로 하고 싶은 거야. 뭐가 나빠?”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어. 그런데 지독한 자아도취 같아. 이 대답은 입 밖으로 나왔는지 나오지 않았는지 모호했다. 희주로서는 후자이길 바랄 뿐이었다.

“네가 없으면 세계가 행복해진다는 거야?”

이건 재현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거네!”

그리고 너무 쉽게 미끼를 물어 버린 재현이었다.

“그거야. 어차피 시간선 합쳐져 봤자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걸. 잠깐 당황하겠지만 기억도 전부 바뀔 거고. 근데 넌 기억하겠지. 나랑 이 얘기를 이 시간에 했으니까. 아닌가?”

희주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야. 너 지금 피곤해. 이건 나중에 얘기해.”

희주는 이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흰색과 거의 구분이 가지 않는 연분홍색 필터. 여울의 시선을 정리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 너머로 새하얀 거리의 풍경이 들어왔다. 그 어떤 비유도 담기지 않은 표현이었다. 명암의 차이가 있을 뿐, 세상은 거의 흰색이었다. 하얀 도로 위를 하얀 자동차가 달렸고 하얀 나무 위에 붉은 불이 붙었다. 사실 흰색과 붉은색은 여울이 볼 수 있는 유이한 색이었기에, 시간관리과에서 검사하기 전에는 두 색을 어떻게 부르는지도 몰랐던 게 사실이었다.

여울이 자신의 시선을 묘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가 죽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느냐고 물었다. 사실 그 반대였는데 말이다. 너무 생동감이 넘쳐나서 탈이었다. 세상이 온통 같은 색이니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 전부가 여울을 향한 위협이자 선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울은 시간 디자이너가 되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그 너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왜 시간공학은 인간에게 적용되지 못하는 걸까? 인간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가설은 당연히 각하였다. 시간조차 간섭할 수 없는 우주적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육체에 갇혀서, 한정된 시간을 살다가 사라진단 말인가.

인간은 어쨌거나 대체 가능한 존재였다. 나와 완전히 같은 사람은 없어도, 무한히 유사한 존재가 있을 가능성은 언제나 있었다. 어딘가에 사는 A가 사라진다고 해도, A가 없는 세계는 여전히 굴러갔다. 오히려 A의 자리를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차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여울이 대체 불가능한 사람들에 큰 관심을 갖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재현 교수가 딱 맞는 예시였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시간선을 다루는 공식을 만들 수 있었을까?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울은 시간공학을 인간에게 적용할 방법을 찾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시간여행은 가능해질 게 분명했고, 어쩌면 다른 사람이 보는 세상을 함께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충분히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여울 본인도 다양한 색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떠올랐지만, 그건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그 시선이야말로 여울을 대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을 하얗고 붉은 세계로 초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하얀 길을 걷고 붉은 횡단보도를 건너서 또 하얀 문을 열었다. 하얀 아버지가 하얀 주방에서 하얀 냉장고를 뒤적이고 있었다.

“왔어? 오늘 좀 늦게 퇴근해서 밥 되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

하얀 화장실에 들어가 붉은 물로 하얀 손을 씻으며 여울이 툴툴거린다.

“배고픈데요.”

잠시 조용하더니 부엌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 온다.

“그럼 뭐 시켜 먹을래? 치킨?”

여울은 잠시 으음,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내며 하얀 희주쌤과의 짧은 만담을 떠올렸다. 오늘은 기분이 묘한 날이었다.

“에, 그것보단 피자 어때요?”

부엌에서 그래, 하고 동의를 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울은 붉은 물기를 털어내며 희주쌤이 던졌던 질문을 떠올렸다.

‘왜?’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질문이면서도 쉽게 예상하긴 어려운 질문이었다.

‘난 왜 치킨보다 피자를 좋아할까. 그게 더 맛있어서면 왜 다른 사람은 피자보다 치킨이 더 맛있다고 하는 걸까.’

그리고는 조금 전 농담과 뻔한 말들로 얼버무렸던 답의 질문을 되물었다.

‘난 왜 시간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걸까.’

여울이 방문을 열 때까지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생각은 끊기지 않았다. 평소의 잡생각과 비슷했지만, 이번엔 뭔가 주제가 잡힌 잡생각 같았다. 여울은 그게 싫지 않았다. 피자가 도착할 때까지만 한숨 붙일까 했지만 생각이 멈추질 않는 관계로 여울은 그냥 드러눕기까지만 했다.

재현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희주는 이 질문을 계속해서 자신에게 던졌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재현이 발견했다는 공식은 시공간을 조절할 수 있다고는 했지만, 실상 네 가지 힘 사이의 관계성을 밝혀낸 것에 불과했다. 거기에 시간이 존재하는 차원에서는 시간 자체가 하나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간단한 추가사항이었다. 그런 공식을 이용한 장치를 재현 혼자서 만든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고, 더욱이 그것으로 신이 칠 법한 장난을 감행하겠다는 이야기도 어불성설로 느껴졌다.

애초에 기술의 남용이 두려웠다면 (다른 사람이 발견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으니) 공식을 폐기하면 될 일이었고, 공개는 하되 혼란을 막고 싶었다면 사람에게 적용하지 못하게 하면 될 일이었다. 현대의 비둘기 한 마리를 선사 시대에 돌려보낸다고 해서 인류 역사가 크게 바뀌진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재현은 굳이 어려운 방법을 선택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어린아이가 할 법한 메시아적 자아의 구축. 재현은 그걸 이루고 싶었던 것일까?

노곤한 오후였다. 평소대로라면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푸근한 노을빛마저 목을 조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갑갑했다. 지금 재현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사실 그의 주장에 당위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공식은 이미 발견된 셈이었으니 지금으로선 재현만이 그 처분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가 창조하겠다는 ‘여러 시간선을 붙여 버린’ 유토피아도 썩 나쁜 개념은 아니었다. 모든 생명체가, 각자가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을 본다. 그게 유토피아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마음 한구석 불안한 느낌은 여전히 가시질 않았다. 재현의 주장은 그럴싸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대량학살을 정당화하는 영화 속 악당의 궤변 같았다.

희주는 생각의 속도에 보폭을 맞추며 계속 걸었다. 집에 간 뒤 저녁쯤에 다시 재현과 통화를 해 볼 생각이었다. 자신이 먼저 강의실을 박차고 나갔으니 재현도 지금쯤이면 자신의 말을 돌이켜 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건 둘이서 차분하게 대화해야 할 문제였다. 흥분에 가득 차 파편화된 말을 뱉어낸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으며, 희주 혼자의 생각으로 해결될 만한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재현이 만들고자 하는 그 세계를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말이 좋아 지구의 시간선을 엮는다는 거지, 사실상 다중 우주를 전부 합친다는 소리였다. 그중에서 현실이라 부를 만한 것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동안 우리가 살아가던 현실은 무용지물이 되는 걸까? 이러다 철학과 물리학을 동시에 배워야 할 판이군, 하고 희주는 생각했다.

프로메테우스의 시간

별안간 무엇인가 둔탁하게 끊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더니 조금 어두워졌다. 정전이었다. 인공적인 빛은 전부 사라지고 노을빛만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희주는 곧 일어날 혼란을 인식하기도 전에 잠깐이나마 그 광경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묵직한 충돌음이 들려오더니 그 뒤를 경쾌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이었다. 이런 과정이 두세 번 반복되더니 여기저기서 경적이 들려왔다. 희주를 비롯한 거리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퇴근길이 아수라장이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희주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잠들어 있는 신호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희주는 불빛을 찾았다. 혼란스러운 인간이 가장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았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몇 블록 뒤에 있는 ○○대학교의 한 연구실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이미 희주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미묘한 진동이 허리춤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휴대전화를 꺼내자 재현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보통 정전일 때는 통신장치도 난리가 난다던데, 아니었나? 희주는 의아함을 뒤로 하고 전화를 받았다.

피자가 오지 않고 있었다. 여울은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며 고파 오는 배를 달랬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최대한 잠들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어차피 피자를 먹은 다음에 곧바로 침대로 돌아올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래도 되는 날이었다. 그러기로 작정한 날이었다. 이불에 파묻힌 채로 고개를 들자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이 느껴졌다. 하얀 노을빛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조금 잔잔할 뿐 여전히 강했으니까.

빛의 세기가 조금 약해졌다. 여울은 무슨 일일까 싶어 눈까지만 이불 바깥으로 내밀었다. 하늘이 붉게 변하고 있었다. 여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이리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까. 곧 세상이 위에서부터 붉어질 터였다. 도무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여울이 조금이라도 적극적으로 휴식을 취하면 진한 붉은색이 세상을 덮어댔다. 그것이 여울이 발견한 유일한 규칙이었다. 아마 여울이 잠들었을 때 세상은 몇 번이고 그 색을 바꾸었을 것이다.

‘근데 가끔 시뻘게져요. 진하게. 건물 위에서부터. 그러면 짜증나죠. 내가 보고 있던 걸 자기들 마음대로 색칠하는 거니까.’ 여울은 진로상담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날것의 말이었다. 평상적인 대화에서 듣기는 어려운, 붕 뜬 언어. 그러나 그것보다 여울의 느낌을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보고 있던 걸 자기들 마음대로 색칠하는 거니까.

자기들이란 건 또 누굴까? 답을 찾긴 어려웠다. 아마 느낌을 그대로 뱉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실체를 찾기 어렵지도 않을 것 같았다. 여울은 순간 생활과 윤리 수업을 더 잘 들었어야 했나 싶었지만 그게 답을 찾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왜 사람들마다 보는 세계가 다른 걸까? 현대 과학은 그걸 증명하지 못했고, 때문에 이상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지경이었다. 여울은 낮은 소리를 내며 침대에 아예 걸터앉았다.

붉은색이 하늘을 넘어 건물로 내려오고 있었다. 물처럼 흐르듯 칠해지는 건물도 있었고, 누군가가 컴퓨터로 채색하는 것처럼 무심하게 변하는 건물도 있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였다. 그래서 온 도시가 여울을 나지막이 타이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른 할 일을 하렴. 무언가 할 일을 하렴. 뭐 해, 어서.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요? 라고 묻고 싶은 여울이었지만 질문의 대상은 없었으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세상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여울은 붉은 세계를 아주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얀 세계에서 느껴지는 게 살기였다면 붉은 세계에서 느껴지는 것은 지독한 끈적함이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여울 본인도 붉은 도료가 되어 버릴 것만 같은, 대체 가능한 부속품이 되어 버릴 것만 같은 공포감이었다. 그래서 여울은 저 붉은 늪이 싫었다. 시간 디자이너가 되면 항상 세계가 하얗게 보일까, 그럼 붉은 늪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하는 질문이 여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피자가 온 것이다. 붉은 세계는 여울더러 생각하라고 재촉하면서도, 또 너무 깊이 들어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치사한 붉은색이었다.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여울은 붉은 이불을 정리하고 붉은 문을 열어 거실로 나왔다. 아버지는 붉은색이 되어 있었다. 곧 식탁 위에 놓일 피자도 붉게 변해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본인이 변했는지 모를 것이다. 피자와 그 배달원도 두말할 나위 없이 변해 있을 것이다. 여울은 다시 진로상담 때를 떠올렸다. 희주쌤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어 주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런 그도 지금은 붉게 변해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세계가 온통 붉은색인데 희주쌤 혼자 하얗게 있으면 얼마나 이질감이 들까. 실없는 상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신빙성이 있었다. 적어도 여울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뭐.”

차갑게 전화를 받았지만 흥분의 열기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 뭐냐, 했거든? 했는데….”

수화기 너머로 온갖 소리가 들려왔다. 거친 숨소리에 요란스러운 기계 소리, 그리고 컴퓨터 냉각기가 혹사당하는 소리였다. 희주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뭘 한 건데?

“이거 하얗다! 되게 하얀데? 세상이 다 하얘! 무슨 스키장도 아니고.”

재현이 과할 정도로 웃으며 떠들었다. 희주는 대체 무슨 헛소리야, 라고 중얼거린 뒤 휴대전화를 접어 버렸다. 눈앞에 또 기괴한 광경이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경적이 차츰 잦아들었다. 사람들의 비명도 줄어들었다. 희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 그대로 세계가 변하고 있었다. 세계의 모습이 위에서부터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건물 외벽에 틈이 생기더니 나뭇가지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회색의 벽은 은은한 금색과 모래색이 섞인 나무로 변했는데 이 과정은 인위적이지도, 유기적이지도 않았다. 기존의 건물에 나무로 된 부분이 반투명하게 겹쳐 보이더니 이내 기존의 모습이 사라지며,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다는 듯 존재했다.

어느새 바닥까지 변화를 마친 건물은 하나의 거대한 한옥처럼 보였다. 나무 특유의 굴곡이 있었지만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평온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희주의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이 그렇게 변하더니, 이윽고 도시 자체가 하나의 기이한 한옥촌처럼 보이게 되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전화를 꺼내 이 광경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희주는 놀라기 이전에 잠시 정신을 놓고 있었다. 원래 너무 큰 규모의 일이 갑자기 발생하면 실감이 잘 나지 않는 법이었다. 정전까지야 그렇다고 쳐도, 도시가 민속촌처럼 돼 버리는 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심지어 조금 전 추돌사고가 났던 부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전기차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희주의 머릿속에 하나의 짐작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하지만 그럴듯했다. 황급히 휴대전화를 꺼내 재현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신호음만 계속해서 들릴 뿐이었다. 사실 재현이 뭔가를 저질렀다는 해석 외에는 이 난데없는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로 시간선을 붙여 버린 걸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술화를 걱정하던 사람인데, 벌써 스스로 기술화를 끝냈던 걸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 마음대로 진행할 일이었다면 희주는 왜 불렀던 걸까.

다리에 힘이 풀렸다. 희주는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조금 전까지 낡은 버스정류장이었던 벤치는 이제 세련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전단지가 넘쳐나듯 붙어 있던 외벽은 스크린이 되었으며 녹이 슬어가던 쇠기둥은 새하얀 페인트칠이 된 기둥으로 바뀌어 있었다. 희주는 이런 것들을 인식할 여유도 없었다. 지쳤다.

만약 이 현상이 재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면, 세계의 변화는 참 허무하게 일어나는 게 분명했다. 희주가 상상했던 모든 것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종말과 구원을 부르짖는 종교집단도 없었고, 치열한 정치적 논쟁도 없었으며 배경음악 따위도 없었다. 느리고 웅장하지도 않았다. 그냥 일순간에 스르륵, 하고 바뀌는 세상이었다. 떠오르는 질문이 너무 많았다. 학문의 힘에 대해서, 또 윤리에 대해서…. 그러나 질문이 너무 많았기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잘 구축된 질문은 답 없이도 아름답지만, 잘 구축되지 않은 질문들의 덩어리는 사지를 꼰 채 머릿속을 기어 다니는 괴물에 불과했다.

멍하니 앉아 있자니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는지 길거리에 주저앉는 이들이 몇몇 보였다. 희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떡해야 한다는 말인가. 재현은 연락 두절이었다. 만약 이 일련의 변화가 그의 소행이라면 적어도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재현의 소행이 아니라면 더 큰 일인 셈이었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당장 내일은 또 출근해야 하는데.

‘잠깐, 출근?’

희주는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대학원 연구실로 가는 걸 출근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럼 어디로 출근하지? 그렇게 자문하자 머릿속에 학교 하나가 떠올랐다. 생전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는 고등학교였다. 내가 거기로 출근을 한다고? 왜? 또 답이 떠올랐다. 희주 본인이 교사였으니까다.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희주의 안에서 모든 게 뒤엉켰다. 민속촌으로 변해 버린 세상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교사라고? 선생님이라고?

다니지도 않은 교대에서 공부한 기억이 있었다. 응시하지도 않은 시험을 친 기억이 있었다. 존재 여부도 불확실한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희주는 드디어 본인이 미쳐 버린 걸까, 하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금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사실이라는 것 외에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마치 두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본인이 모르는 이중인격이 교사 자격증이라도 따고 있었던 걸까? 그건 불가능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있더라도 절대 시간 안배가 그렇게 될 리 없었다.

‘시간.’

희주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맞다. 이건 재현의 소행이 맞았다.

‘뭐가 각자에게 최선의 시간선이야.’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몸으로 드러낼 방법은 없었다. 조금 더 큰 한숨만이 그 분노를 대변했다. 희주는 교사를 희망했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되도록 피하고 싶었던 직종이었다.

‘뭐가 각자에게 최선의 시간선이냐고.’

피곤함이 몰려왔다. 희주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한숨 자고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희주쌤.”

희주는 여울을 마주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로상담이었다. 말수 적은 아이와 쓸데없는 잡생각으로 찬 자신만으로라도 어떻게든 끝내야 하는 일이었다. 여울의 말을 들어야 했다. 어쨌거나 학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는 것은 좋은 신호였다.

맞다. 질문.

“어. 지금대로만 성적 나오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관련학과 나와서 취직하면 되니까. 근데 왜 디자이너인지 말해 줄 수 있어? 물리학자도, 시간공학자도 아니고.”

마지막 말은 조금 얼버무렸다. 자칫 직업에 귀천을 따지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됐다. 특히 조용한 학생 앞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했다.

여울은 다시 신 같잖아요, 같은 말을 꺼내려다 도로 삼켰다. 굳이 그런 방어기제를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희주쌤은 적어도 조심하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조심하는 사람 앞에서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생각하기 싫어서요. 연구 같은 건 질색이고.”

사실 저 두 마디는 분리되어야 맞았다. 뒷부분만 말했어도 충분했는데 여울의 머리는 굳이 앞부분까지도 목 밖으로 뱉어냈다. 이에 여울은 속으로 다들 내가 생각하는 걸 원치 않잖아요, 라고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고개를 들어 희주쌤의 얼굴을 보자 답변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는지 미간을 짚고 있었다.

“그리고 제가 신재현 교수님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멋있으셔서, 그분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달까.”

이번에는 조금 작위적인 말투였다. 그러나 거짓은 아니었다. 희주는 여울이 본인을 안심시키려고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사실 지금까지의 문답만을 가지고서도 생활기록부는 어렵지 않게 완성할 수 있었다. 다만 희주 본인이 이 학생에게 조금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기에 대화를 조금 더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신재현 교수를? 왜?”

그냥 묻는 말이었다. 희주도 잘은 모르지만, 그 분야에서 상징성이 있는 인물이니 으레 하는 말일 게 분명했다. 어린아이들이 아인슈타인을 동경해서 과학자가 되고 싶어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 왜, 그리스 신화에 그거 닮았다고 생각했거든요. 프로메테우스,”

작위적인 톤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거짓은 없었다. 여울이 말하는 모든 게 예상 밖의 일이었다. 희주는 아예 볼펜을 내려놓아 버렸다. 스크린 책상과 플라스틱 볼펜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시간을 다룰 수 있는 힘을 우리한테 줬는데, 정작 본인은 돌아가셨잖아요.”

불을 훔쳐 왔다, 이건가. 희주는 여울에게서 묘한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신재현 교수라는 사람은 신의 힘을 인간에게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은 거기에 딱히 노하지는 않은 듯했다. 어쩌면 이미 그들이 없는 세상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개인적으로 멋있다고 생각해요, 존경인지는 모르겠고.”

여울이 말을 마무리했다. 사실 이게 왜 그의 꿈이 시간 디자이너인지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신재현 교수는 디자이너라기보단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열어 준 물리학자였으니까.

희주는 그래 여기까지 하자, 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생각해 보니 여울은 신재현을 많이 닮은 것 같았다. 희주가 그 사람을 잘 아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여울은 희주의 머릿속에 있는 신재현의 이미지와 매우 비슷했다. 그의 대체품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익숙함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말은 희주가 신재현을 익숙할 정도로 알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만 굳이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인 세상이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이 아니었잖아.”

희주가 자리를 정리하면서 조용히 덧붙였다. 사실 많은 학생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그거였다. 정작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래요? 그러면 더 멋진데요.”

하며 여울이 가방을 둘러멨다. 양쪽 모두 그 대화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네가 보고 있는 모든 게 정답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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