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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여성이 물리학 하기

작성자 : 이강영 ㅣ 등록일 : 2022-05-26 ㅣ 조회수 : 1,393

저자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등이 있다. (kylee.phys@gnu.ac.kr)

물리학은 인간이 활동하는 주요 분야 가운데 여성 비율이 낮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러한 비율은 노벨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2021년까지 물리학 분야 여성 수상자는 모두 4명으로 화학의 7명, 생리의학상의 12명보다 훨씬 적으며 노벨상의 모든 분야 중에서 가장 비율이 낮다.(마리 퀴리는 물리와 화학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이 물리학을 한다는 것이 어떠한 일이었는지 한번 보도록 하자.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Maria Goeppert Mayer, 1906‒1972, 사진 1)는 2018년의 도나 스트리클란드 이전까지 단 두 사람뿐인 여성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중 한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물론 마리 퀴리다. 마리 퀴리에서 괴페르트 메이어까지 60년, 괴페르트 메이어에서 도나 스트리클란드까지 55년의 간격이 있으니 굉장히 오랜 세월 동안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는 실로 외로운 존재였던 것이다.

사진 1.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Maria Goeppert Mayer, 1906-1972).사진 1.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Maria Goeppert Mayer, 1906-1972).

마리아는 체코 동쪽에 위치한 실레지아의 카토비체(Katowice)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폴란드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독일 제국의 영토였다. 아버지 쪽 괴페르트 집안은 대대로 대학교수를 지냈는데, 마리아의 아버지 프리드리히가 6대째라고 한다. 아버지가 괴팅겐 대학의 소아과 교수가 되어 가족은 1910년에 괴팅겐으로 이사했다. 마리아는 아버지가 과학자라는 사실과 대학교수 집안이라는 데 크게 자부심을 가졌고, 아버지 역시 외동딸인 마리아에게 어릴 때부터 평범한 여자(즉 전업주부)가 되지 말라는 말을 해 왔기 때문에, 마리아가 과학자가 되는 것은 반쯤 운명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좋겠다.

사진 2. 마리아 괴페르트 가족이 살던 집.사진 2. 마리아 괴페르트 가족이 살던 집.

또한 마리아가 자란 곳은 당대 수학과 과학의 성지와 같은 괴팅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괴팅겐은 도시 자체가 대학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사진 2에 보듯 괴페르트 가족이 살던 집은 괴팅겐 대학의 대표적 철학자인 훗설이 살던 집과 같은 집이었다. 이 집은 수학자 힐베르트의 집에서 1, 2백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괴페르트 가족과 힐베르트 가족은 동료이자 이웃으로서 가깝게 지냈다. 힐베르트의 집 바로 옆은 역시 수학자인 리하르트 쿠란트의 집이었고, 얼마 후에는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과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 1882‒1964)가 물리학과에 부임해 와서 역시 가족들과 친구가 되었다. 이렇게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공기처럼 느껴지는 도시에서 수학과 과학을 호흡하며 자랐다.

물론 당시 여성이 대학 공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립여학교에서는 대학 준비를 시키지 않아서, 마리아는 자퇴를 하고 Frauenstudium이라는 사립학교를 다니려고 했다. 그러나 그 학교도 폐교하는 바람에 마리아는 결국 혼자서 입학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 그녀는 무난히 시험을 통과해서 1924년 괴팅겐 대학 수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얼마 후 막스 보른의 권유로 물리학과 세미나에 참가하면서 마리아는 차츰 물리학으로 관심을 옮겨갔고, 결국 보른을 지도교수로 193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0년대 후반의 괴팅겐은 바로 양자역학이 탄생한 곳이고 보른은 그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 학생으로서, 연구원으로서, 혹은 그냥 방문자로서 괴팅겐을 거쳐간 물리학자들만 해도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디랙, 페르미 등을 비롯해서 오펜하이머, 바이스코프, 훈트, 텔러 등 어마어마할 지경이다. 수학의 기초도 탄탄했던 만큼, 마리아는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당대의 선도적인 이론물리학자가 되었다. 마리아의 박사학위 논문은 원자가 광자 두 개를 흡수하는 과정을 다루었는데, 이 과정은 30여 년 후 레이저가 발명된 뒤에 실제로 구현되었다. 이 논문은 훗날 유진 위그너로부터 격찬을 받았으며, 원자물리학의 역사적인 논문으로 남았다. 2 광자 흡수 과정의 산란단면적의 단위를 그녀의 이름을 따서 GM (Goeppert Mayer)이라고 부른다. 1 GM은 10‒50 cm4 s photon‒1이다.

학위과정 중이던 1927년 마리아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괴페르트가 사망했다. 마리아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하숙생을 받았는데, 하숙생 중에는 버클리에서 학위를 받고 록펠러 펠로우로 선정되어 제임스 프랑크의 조수로 와있던 미국의 화학자 조셉 메이어(Joseph Edward Mayer)가 있었다. 마리아는 1930년에 메이어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다. 마리아가 신혼의 달콤함에 너무 빠져 지내서 새신랑이 학위논문을 끝내라고 설득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혼식과 박사학위를 둘 다 무사히 마친 후 부부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조셉이 존스홉킨스 대학의 조교수로 임용되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같은 학교에 친족이 재직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대학에 정식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학교의 활동에 참여하는 자체는 가능했으므로 마리아는 남편을 비롯해 다른 교수와 협력하며 연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양자역학이 막 탄생한 1930년대 초에, 미국의 물리학이 유럽보다 뒤쳐져 있었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아마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그녀만큼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1933년에 딸 메리앤이, 1938년에는 아들 피터가 태어났다. 한편으로 독일에 히틀러 정권이 탄생하자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괴팅겐의 교수였던 제임스 프랑크가 존스홉킨스 대학으로 왔고,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1908‒2003)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텔러는 이후 그녀의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 함께 물리학을 토론했다.

1938년에 남편 조셉은 존스홉킨스에서 테뉴어를 받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음 해 컬럼비아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가족은 뉴저지로 이사했다. 이시도어 라비가 주도하던 컬럼비아의 물리학과는 마리아에게 자리를 주려하지 않았다. 대신 중수소를 발견해서 노벨상을 받은 해럴드 유리(Harold Clayton Urey, 1893‒1981)가 화학과에 강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월급은 받지 못했다. 마리아는 뛰어난 강사는 아니었다. 강의는 너무 빠르고 목소리는 작았으며, 종종 생각과 강의가 어긋나기도 했다. 골초였던 마리아는 강의를 하면서도 줄담배를 피웠으며, 종종 담배와 분필을 혼동해서 분필을 입에 물거나 담배로 칠판에 쓰려고 했다고 한다.

컬럼비아 시절에는 학문적으로 중요한 인연이 또 하나 생겨났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망명한 엔리코 페르미가 컬럼비아 대학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페르미는 전 해의 노벨상 수상자였고, 핵물리학의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었다. 페르미는 마리아에게 핵물리학에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유했다.

2차 대전이 시작하면서 여성들에게 기회가 생겨났다. 페르미뿐 아니라 시대도 그녀에게 핵물리학을 권유한 셈이다. 유리는 마리아에게 군의 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는데, 프로젝트의 내용은 우라늄 238로부터 우라늄 235를 분리하는 일이었다. 지금 우리는 이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안다.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마리아는 처음으로 과학 연구의 대가로 돈을 벌 수 있었다고 한다. 유리의 프로젝트가 끝난 후 이번에는 텔러가 핵물리학 일을 들고 왔다. 역시 우라늄에 관련된 일이었다. 남편 조셉 역시 전쟁 관련 일로 메릴랜드에서 근무했으므로 이 시기 마리아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일을 해야 했다. 과중한 업무와 아이들을 돌보는 부담에, 독일에 남은 어머니 걱정까지 겹쳐서 마리아는 술을 많이 마셨고 건강이 나빠졌다.

전쟁 후 조셉은 시카고 대학의 제의를 받고 자리를 옮기기로 결심했고 가족은 다시 시카고로 이사했다. 이때 시카고 대학은 마리아에게도 비록 유급은 아니었지만 정식으로 자리를 만들어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마리아는 시카고 대학의 이 정도의 배려에도 고마워했다고 한다. 시카고에서 마리아는 행복했다. 대학의 배려 때문만이 아니라, 2차 대전 후의 시카고 대학이 물리학을 하기에는 당대 최고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시카고 대학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잭 슈타인버거를 추모하며> 등, 이 지면에서도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특히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괴팅겐 시절 교수였던 제임스 프랑크, 존스홉킨스에서 가까워진 에드워드 텔러, 컬럼비아 시절에 만난 해럴드 유리와 엔리코 페르미 등 그의 친구이자 최고의 과학자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더욱 좋았다. 마치 괴팅겐의 좋았던 시절을 연상시키는, 물리학에서 헤엄치는 듯한 삶이었다. 또한 시카고에서 가까워진 그레고르 벤첼과는 사돈을 맺게 된다.

마리아는 존스홉킨스에서 로버트 삭스(Robert G. Sachs, 1916‒1999)의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했었다. 이론 핵물리 분야에서 활약한 삭스는 시카고 근교에 아르곤 국립 연구소를 설립하는데 기여했고, 훗날 소장을 지내게 된다. 삭스는 아르곤 국립 연구소에 자리를 만들어 마리아는 비상근 선임 물리학자로 채용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로서 마리아는 전쟁과 무관하게 처음으로 유급 자리를 얻게 되었다.

시카고에서 마리아가 주로 연구한 주제는 원자핵의 구조에 대한 것이었다. 텔러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마리아는 핵의 독특한 구조에 주목했다. 원소들의 중성자 개수가 특정한 수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중성자가 50개인 원소는 여섯 개, 중성자가 82개인 원소는 일곱 개다. 이는 이 개수의 중성자가 특별히 안정된 상태라는 의미였다. 마리아는 이들 숫자를 이해하고자 했다. 마리아의 생각은 중성자와 양성자가 원자 속의 전자처럼 일종의 껍질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이러한 구조 위에서 실험 데이터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자 애썼다.

조셉 메이어에 따르면 마리아가 노벨상을 받게 되는 업적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질문을 한 사람은 페르미다.1)

페르미와 마이어가 그녀의 연구실에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페르미에게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페르미는 방을 나가면서 문 가까이에서 마리아를 돌아보며 ‘스핀-궤도 결합 같은 게 있었던가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단순한 한 마디였지만 마리아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리아의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일거에 명확해졌다. 10분도 채 안 되어 페르미가 돌아오자 마리아는 그에게 설명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마리아는 흥분했을 때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놓는다. 그러나 페르미는 언제나 여유 있게 질서정연한 설명을 요구한다. 페르미는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나갔다. ‘내일 당신이 좀 진정되면 내게 잘 설명해 줘요.’

페르미의 저 질문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던지, 마리아는 논문의 감사의 글에도 이를 그대로 밝히고 있다.2)

‘스핀-궤도 결합 같은 게 있었던가요?'라고 언급해 준 데 대해 엔리코 페르미에게 감사한다. 저 질문이 이 논문의 발단이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한스 옌센(Johannes Hans Daniel Jensen, 1907‒1973)도 스핀-궤도 결합을 고려해서 핵의 구조를 설명했고 논문을 발표했다. 옌센 팀의 논문은 <피지컬 리뷰> 1949년 6월 1일 자에, 마리아의 논문은 15일자에 각각 실려 있다.2)3) 출판 일자는 옌센의 논문이 앞서지만 투고된 날짜는 마리아의 논문이 2월, 옌센의 논문이 4월로 마리아의 논문이 앞선다. 두 사람은 공동 연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해서 편지를 주고받았고, 1955년에는 “Elementary Theory of Nuclear Shell Structure”라는 책을 공동으로 저술하기도 했다.

이 업적을 이루었을 때까지도 마리아는 한 번도 전임 자리를 얻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정식 자리를 제의받은 것은 1960년에 이르러서였다. UC 샌디에이고에서 부부에게 모두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한편 시카고 대학도 정규직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기후를 찾아서 메이어 가족은 샌디에이고를 택했다. 정식 자리라고는 하지만 마리아의 급여는 절반이었다고 한다.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직후 마리아는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이후 회복되어 죽을 때까지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지만 내내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마리아는 스핀-궤도 결합을 도입해서 핵 껍질 구조 이론을 확립한 업적으로 옌센과 함께 1963년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 해의 노벨상은 유진 위그너가 “원자핵과 기본입자 이론에 대한 기여, 특히 근본적인 대칭 원리를 발견하고 응용한 데 대해서” 1/2, 그리고 마리아와 옌센이 “핵 껍질 구조를 발견한 데 대해서” 각각 1/4을 나누어 가졌다. 1965년에는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미국 공로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가 수여하는 황금쟁반상을 받았다. 1966년에 마리아는 마지막 논문을 발표했고 1972년 샌디에이고에서 사망해서 그 곳에 묻혔다.

사진 3. 마리아 (가운데)와 막스 보른 (오른쪽), 그리고 빅터 바이스코프 (왼쪽)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사진(괴팅겐 대학 전시).사진 3. 마리아 (가운데)와 막스 보른 (오른쪽), 그리고 빅터 바이스코프 (왼쪽)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사진(괴팅겐 대학 전시).

마리아는 이렇게 평생을 남자들 사이에서 남자들과 경쟁하며, 또한 협력하며 보냈다. 시카고 시절 교수 사회에서 그녀가 주로 속한 사회는 교수 부인들 그룹이 아니라 남편들과 과학을 논하는 자리였다. 엔리코 페르미의 부인 라우라 페르미는 “교수 부인들은 마리아 메이어에게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고 썼다. 하지만 마리아는 또한 여성으로서의 삶에도 충분한 즐거움을 느꼈던 사람이다. 결혼했을 때는 신혼을 즐기느라 박사학위 논문을 미뤄둘 정도였고, 아이들을 낳았을 때에도 엄마 노릇을 즐겼다. 괴팅겐 시절부터 그녀는 항상 재치 있고 매력적인 존재였다. 사진 3은 괴팅겐 대학에 전시된, 마리아와 지도교수였던 막스 보른, 그리고 빅터 바이스코프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사진이다. 아들 피터는 어머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자들이 그러더군요. 어머니가 방에 들어올 때마다 남자들이 어머니 쪽으로 끌려가곤 했다고.”

마리아가 과학자로 활동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남편 조셉이었다. 조셉은 언제나 마리아를 과학자로서 대했고, 연구를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연구 분야도 가까웠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항상 과학 이야기를 했고, 아이디어를 나누었으며 논문을 같이 쓰기도 했다. 조셉 메이어는 마리아로부터 양자역학을 배웠고, 미국 생활 초기에 마리아는 조셉과 그 동료 화학자들과 함께 연구했다. 이런 점은 마리 퀴리와도 닮은 점이 있고, 아마도 그 시절 여성이 과학자로서 일하는데 거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일까?

마리아 사후 미국물리학회는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 상”을 만들어서 경력을 시작하는 젊은 여성 물리학자에게 수여하고 있다.

각주
1)R. G. Sachs, Physics Today, Feb. (1982).
2)Maria Goeppert Mayer, On Closed Shells in Nuclei. II, Phys. Rev. 75, 1969 (1949).
3)Otto Haxel, J. Hans D. Jensen, and Hans E. Suess, On the “Magic Numbers” in Nuclear Structure, Phys. Rev. 75, 1766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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