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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물리학 수용
작성자 : 최정모 ㅣ 등록일 : 2023-08-23 ㅣ 조회수 : 788
최정모 교수는 KAIST에서 화학 및 물리학으로 학사 학위(2011)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과학사학(history of science)으로 석사 학위(2015)를, 화학으로 박사 학위(2016)를 받았다. 2020년부터 부산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생물리화학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처음 서양 과학을 마주쳤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난 문제는 새로운 개념과 용어를 “번역”하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과학의 내용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번역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 개념을 가리키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어떤 개념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글에서는 그 한 예로서 19세기 일본과 중국에서 물리학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날 물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학문은 19세기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단일한 학문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천체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천문학은 중국의 경우 달력 계산, 일식과 월식 예측 등의 문제 때문에 오래전부터 나름의 연구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17세기 서양 선교사들이 처음 중국에 발을 디뎠을 때에도 청나라 조정이 거의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분야였다. 물리학 이론 전개에 필수적인 수학 역시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연구되어 왔다. 반면 조선과 일본은 천문학과 수학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서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역학, 전자기학, 광학 등은 훨씬 뒤늦게 동아시아에 상륙했고, 그것도 종종 각 분야가 따로따로 소개되곤 했다.
최초로 뉴턴 역학을 동아시아 문화권에 소개한 것은 일본의 난학자 시즈키 타다오(志筑忠雄, 1760‒1806)였다. 그는 처음에 네덜란드어 통역사로 일하다가 책 한 권을 만나 인생이 바뀐다. 이 책은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존 케일(John Keill, 1671‒1721)이 쓴 책으로, 시즈키는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손에 넣은 후 평생을 바쳐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한다. 다만 그는 순서대로 번역하는 대신 자신의 관심에 따라 책의 일부를 번역하여 공개하는 식으로 작업하였다. 그 결과 1782년 『천문관규(天文管窺)』와 『동학지남(動學指南)』을 시작으로 이 책으로부터 총 11편의 번역서를 만들어냈다.
그는 1798년부터 1802년 사이에 상, 중, 하권으로 이루어진 『역상신서(曆象新書)』를 출판한다. 그때까지 출판한 책들은 이 책을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이 책을 만드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책의 제목에서부터 시즈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책의 제목인 역상(曆象)은 달력을 이용해 천체의 운행을 추정하는 작업을 가리키는 말로써, 스즈키는 이 단어를 이용해 “천문학”을 지칭했다. 하지만 번역 과정에 이 단어를 일관되게 사용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천문(天文), 천학(天學), 성학(星學), 건곤(乾坤), 천설(天說) 등의 단어를 혼용해서 사용하였다. 흥미롭게도 마침내 시즈키가 정착한 용어는 천문학(天文學)으로, 한문 고전에서 사용되던 천문(天文)이라는 단어를 차용한 것이었다.
시즈키는 그 외에도 번역 작업 중에 여러 물리학 용어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는 음을 흉내내는 일본어 용어를 만드는 대신 한자를 이용해 그 의미를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force의 번역으로, 그는 이 용어를 “힘(力, ちから)”으로 번역한 후, 이를 활용하여 gravity는 중력(重力)으로 번역하였다. Centripetal force와 centrifugal force에 대한 구심력(求心力)과 원심력(遠心力)이라는 용어 역시 시즈키의 창안이다. Attraction은 초기에는 구력(求力)으로 썼다가 훗날 인력(引力)으로 수정했다. 또한 vacuum은 불교 용어를 차용하여 진공(眞空)으로 번역하였고, eclipse는 한문 고전을 따라 식(蝕)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용어는 corpuscle의 번역어로, 처음에는 속자(屬子)라고 번역했다가 나중에는 분자(分子)라고 번역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이 용어는 훗날 molecule의 번역어로 자리잡게 된다.
시즈키의 번역 이후 더 많은 일본인이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호아시 반리(帆足萬里, 1778‒1852)는 여러 권의 네덜란드어 교재를 종합하여 『궁리통(窮理通)』이라는 책을 쓰는데, 그가 평생을 바쳐 공부한 자연과학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달력 계산법, 은하계, 태양계, 지구에 대한 내용과 더불어 역학, 기상학, 생물학에 관한 내용이 소개된다. 안타깝게도 그의 생전에는 이 책이 공개되지 않았고, 사후 1856년 일부 내용이 출판되었다. 1827년에는 아오치 린소(靑地林宗, 1775‒1833)가 쓴 『기해관란(氣海觀瀾)』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대기의 물리학과 화학을 다루고 있다. 그 외에도 일본에서는 19세기 전반에 걸쳐 많은 물리학 관련 서적이 등장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 사이에서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점차 증진될 수 있었다.
그렇게 반세기가 지나면서 일본인들의 물리학 이해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1868년 출판한 『훈몽궁리도해(訓蒙窮理圖解)』이다. 후쿠자와는 젊은 시절 난학 서적들을 통해 자연과학을 공부했고, 이후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한 후 미국과 유럽을 방문하여 서양 학문을 직접 경험하였다. 후쿠자와는 서양이 일본에 비해 앞서 있는 것은 과학 때문이라고 믿었고, 특히 과학적 세계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과학을 일본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그가 집필한 책이 『훈몽궁리도해』였다. 이 책은 재미있는 그림과 친절한 설명으로 큰 인기를 구가하였다(삽화 참고). 1868년은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해이기도 한데, 이후 들어선 새 정부에서는 1871년 교육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고, 1872년 『훈몽궁리도해』를 소학교의 이과 교과서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19세기 후반이 되면 일본은 번역서에 의존하는 대신 자국인이 집필한 책을 물리학 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르게 된다.
한편, 중국에서는 1850년대부터 강남제조국을 중심으로 물리학에 관련된 서적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물리학 번역어들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은 1855년 『박물신편(博物新編)』에 등장한 전기(電氣)와 행성(行星), 1859년 『담천(談天)』에 등장한 광행차(光行差), 성단(星團), 섭동(攝動), 쌍성(雙星), 1866년 『격물입문(格物入門)』에 등장한 역학(力學), 양극(陽極), 음극(陰極), 1876년 『광학(光學)』에 등장한 광학(光學) 등이 있다. 다만 이 작업을 주도한 번역가들은 천문학, 역학, 광학, 음향학, 전기학, 열역학에 관한 서적을 별도로 번역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이들 분야들을 “물리학”이라는 단일 학문의 세부 분야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1890년대에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기 전까지 중국에는 학교에서 쓸 수 있는 “물리학” 교재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일본과 중국은 최초의 물리학자를 만들어내는 데 큰 시차를 보이게 된다.
일본은 늦어도 1873년부터 물리학을 중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1875년에는 물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생들을 활용해 대학에서 물리학 강의를 시작했다. 1877년 도쿄 대학교가 설립될 때 이학부 아래 수학·물리학·천문학과를 만들었고, 4년 후에는 물리학과가 독립하였다. 1883년에는 일본 최초의 물리학 전공 졸업생이 탄생한다. 한편 중국은 1868년 경사동문관에서 서양 과학 교육의 일환으로 일부 물리학 내용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체계적인 물리학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이징 대학교의 전신인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이 설립된 1898년에도 과학은 독립된 전공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1902년에 와서야 일본인 교사들을 고용하여 대학에서 과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경사대학당에 과학 전공이 생긴 것은 1910년이나 이마저도 화학과 지질학에 한정되어 있었고, 물리학 전공은 1912년이 되어서야 추가되었다. 반면 이 시점에 도쿄 대학교 물리학과가 배출한 졸업생은 186명에 달했다.
마지막으로 “물리학”이라는 번역어의 역사를 생각해보자. physics라는 단어가 처음 동아시아에 유입될 때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는 많은 고민을 낳았다. 앞서 살펴본 스즈키 타다오는 이를 격물학(格物學)으로 번역하였고, 호아시 반리는 궁리(窮理)로 번역했으며, 아오치 린소는 이과(理科)로 번역했다. 그 외에도 이학(理學), 격치(格致) 등도 사용되었다. 1868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훈몽궁리도해』에서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궁리학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유교 경전에서 유래된 말로서, 궁리(窮理)와 격물(格物) 등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는 주자학의 방법론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당시 번역자들은 유교 경전에 익숙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쩌면 당연한 차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어 물리(物理)는 고대 중국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오늘날의 의미는 아니었고, 일반적으로 “사물의 이치”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Physics의 번역어로 물리학(物理學)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오가타 고한(緖方洪庵, 1810‒1863)이 1834년 출판한 『물리약설(物理約設)』에서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메이지 정부에 의해 이 용어가 발굴된다. 메이지 정부가 반포한 여러 규칙에서 물리학을 가리키는 용어가 점차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870년 2월에는 격치학(格致學)으로, 동년 10월에는 궁리학(窮理學)으로, 1872년 8월에는 이학(理學)으로, 1872년 11월에는 다시 궁리학(窮理學)으로 불린다. 1873년에 발표한 규칙에서 비로소 물리학(物理學)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후 일본 내에서 급격히 “물리학”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고, 1883년 물리학 용어 통일을 목적으로 발족한 ‘물리학 역어회’에서 “physics”의 번역어로 “물리학”을 선택하면서 용어가 확립되었다. 이 시기 중국과 조선은 일본 문헌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동아시아 전역에서 “물리학”이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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