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콜럼버스의 달걀
작성자 : 김영균 ㅣ 등록일 : 2023-10-09 ㅣ 조회수 : 792
김영균 교수는 고려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이학사)하고 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과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ygkim@gnue.ac.kr)
1. 1893년 5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6개월 동안, 미국 시카고에서 열렸던 세계박람회의 공식 명칭은 “The World’s Columbian Exposition”이다. 시카고 세계박람회는 1492년 ‘제노바 출신의 모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1507)가 ‘신대륙’에 도착한 지 40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박람회였으며, “미국이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하려는 도약대였다.” 시카고 박람회의 특별위원 A. B. de Guerville는 1892년 조선을 방문해 고종(高宗)을 알현하고 박람회 출품을 권유하였다.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표방하고 싶었던 고종은 “미국 및 각국과 공히 우의 화목을 돈독히 할 것”이라며 정3품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정경원(鄭敬源, 1851‒1898)을 박람회의 출품사무대원(出品事務大員)으로 임명하고 미국으로 보냈다. 공식적인 박람회 대표단은 정경원과 더불어 사무원 최문현, 통역원 안기선 그리고 궁중음악을 담당하는 장악원(掌樂院) 악사 10명 등 모두 1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893년 3월 23일 제물포를 떠나 요코하마, 샌프란시스코 등을 거쳐 4월 28일에 시카고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세계박람회 참가였다.
박람회 개막일인 5월 1일,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1837‒1908) 미국 대통령이 박람회 개막식을 끝내고 제품전시관을 둘러볼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장악원 악사들이 (궁중에서 왕 앞에서 연주하는 악곡인) 어전법악(御前法樂)을 연주하였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정경원을 끌어안으며 장악원 악사 파견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가장 작은 규모의 전시관 중 하나였던 한국 전시관은 기와로 지붕을 얹고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가마, 도자기, 방석, 장롱, 병풍, 각종 의복, 갓, 태극선(太極扇), 투구, 갑옷 등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되었다. 전시를 위해 미국에 보내진 물품은 약 25톤에 달했다. 진주 무늬를 박아 넣은 궤, 비단 자수품 등 여러 물품이 박람회가 수여하는 상을 받기도 하였다. 장악원 악사들은 5월 3일 귀국길에 올랐지만, 정경원은 약 6개월간 미국에 머물면서 외교활동을 했다. 워싱턴에 가서 미국 대통령을 다시 만났고, 여러 나라에서 주최하는 사교 파티에 참석했으며, “박람회 개최기간 일요일에 상점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싼 5시간이 넘는 열띤 시민공청회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9월 5일에는 고종의 42세 생일을 맞아 오디토리움 호텔(현재는 루스벨트 대학 건물)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각국 전시관에 보낸 초청장에는 국호가 한글로 ‘ᄃᆡ죠션’(대조선, 大朝鮮)이라고 쓰여 있었다. 조선의 시카고 박람회 참가는 의외의 효과를 낳기도 했다. 미국의 북태평양철도회사(Northern Pacific Railway)에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맥헨리(Edwin Harrison McHenry)는 한국관에 게양된 태극기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침 북태평양철도회사는 회사의 상표(로고)를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었고, 맥헨리는 태극(Monad)을 상표로 쓰자고 회사에 건의하였다. 결국 태극 문양은 북태평양철도회사의 공식 상표로 채택되었다.
2. 1893년의 시카고 세계박람회는 미국의 기업가 조지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 1846‒1914)와 전기의 ‘마법사’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에게도 아주 중요한 박람회였다. 웨스팅하우스는 박람회의 조명을 담당하는 계약을 체결했는데, “박람회장 건물들은 백열등 20만 개로 장식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웨스팅하우스에게 박람회는 교류 전류가 도시 전체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이상적인 기회였다.”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는 1893년의 여름 동안 최선을 다해 완전히 통합된 교류 전류 시스템을 선보였고, 테슬라는 “교류 전류의 마법과 잠재력을 강조하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박람회에서 선보인 것 중의 하나가, 다상(多相) 교류 전류를 사용하는 유도 전동기와 관련된, “콜럼버스의 달걀” 장치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400주년을 기념하는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잘 어울리는 이 전시물은 매일 많은 관중을 끌어들였다.
테슬라는 현재의 크로아티아에 속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변방의 작은 마을 스밀랸(Smiljan)에서 1856년에 태어났다. 부모는 세르비아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전기(electricity)에 관심이 많던 테슬라는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에 있는 요아노임(Joanneum) 기술대학에 입학해 전기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당시 물리학 수업을 맡고 있던 푀슐 교수는 ‘그람(Gramme) 발전기’라고 불리는 (직류 전류를 생산하는) 직류 발전기를 써서 학생들에게 전류를 가르쳤다. “그는 전력의 전달을 보여주기 위해 그람 발전기를 전동기로서 작동하려고 전지에 연결했다. 직류 발전기를 직류 전동기로서 작동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불꽃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류자의 브러시를 세심하게 조정해야 한다.” 서로 절연된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금속 실린더로 구성되는 정류자는 (발전기/전동기의 회전하는 부분인) 회전자(rotor)의 안팎으로 전류가 흐르게 하는 장치로, 전류의 방향을 바꾸어 주며 회전자와 함께 회전한다. 브러시는 정류자를 외부 전선과 연결하는 부분이다. (고정된) 브러시와 (회전하는) 정류자는 접촉 상태에 있어서 회전자가 회전할 때 불꽃이 튈 수 있다. 테슬라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푀슐 교수가 발전기를 전동기로서 작동하면서 실연하는 동안 브러시가 문제를 일으켜 불꽃이 심하게 튀었다. 나는 이 장치들 없이도 전동기를 작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술과 노름에 빠져 학업을 중단하고, 발명에 집중하기로 했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정류자가 없는 전동기’에 대한 해결책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바로슐리게트 공원을 산책하는 가운데) “유레카의 순간처럼” 테슬라의 머리에 떠올랐다. 전동기의 회전자에 유도된 맴돌이 전류(eddy currents)를 이용해 회전자를 돌릴 수 있다, 전동기의 고정된 부분인 고정자(stator)의 코일에 회전자기장(rotating magnetic field)을 만들어서 회전자 속에 맴돌이 전류를 유도할 수 있다, 교류를 써서 회전자기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다. 1882년, 테슬라가 26세 때의 일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를 이해하기 위해 이른바 ‘아라고의 회전 원반’(Arago’s wheel)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19세기의 과학자들은 축이 있는 구리 원반 밑에서 말굽자석을 돌리면 구리 원반이 회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의 위대한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는 이 움직임이 전자기유도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구리 원반 밑에서 자석이 도는 동안 자기장의 움직임이 구리 원반에 (패러데이가 맴돌이 전류라 부른) 전류의 소용돌이를 유도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였다. 이렇게 자기장 속에서 전류가 흐르면 자기력을 받게 되어 결국 원반이 회전하게 된다. 회전하는 자석이 구리 원반에 유도한 맴돌이 전류가 아라고의 구리 원반을 회전시키는 것처럼, 교류를 써서 만들 수 있을 (전동기 고정자의) 회전자기장이 전동기 회전자 속에 맴돌이 전류를 유도해 전동기 회전자를 회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회전자 속에 전류가 유도될 테니, 회전자에 전류를 보내는 정류자가 필요가 없을 터였다.
그 후 수년 동안, 테슬라는 프랑스 파리의 에디슨 회사에 들어갔다가, 미국 뉴욕의 에디슨 회사로 옮겼다가, 퇴사하고 자신의 이름이 붙은 회사를 차렸다가, 사업 후원자로부터 버림받아 도랑을 파는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했다가, 다른 사업 후원자를 만나 (1887년 4월에) 테슬라 전기회사를 설립했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교류 유도 전동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하려 노력하던 테슬라는 마침내 전동기의 고정자 속에 회전자기장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위상(phases)이 다른 여러 교류 전류들을 적절히 결합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미래가 교류 전류에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기에, 테슬라는 후원자들에게 회전자기장이 실제적이고 상업적인 교류 전동기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극적인 실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이야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전설에 따르면,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이사벨 여왕의 궁정에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달걀을 세워보라고 했다. 사람들이 모두 실패하자 콜럼버스는 달걀의 한쪽 끝을 살짝 깨뜨려서 달걀을 똑바로 세웠다. 이것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사벨 여왕은 자신의 보석을 담보로 콜럼버스에게 항해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테슬라는 후원자들에게 달걀의 껍질을 깨뜨리지 않고도 달걀을 똑바로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콜럼버스보다 잘할 수 있다면, 후원자들은 교류 전동기 실험에 자금을 지원할 것인가? 그들은 “우리에게는 저당 잡힐 왕관의 보석은 없지만 지갑에 돈이 있으니까 자네를 돕겠네.”라고 대답했다. 테슬라는 코일 네 개로 만든 자석을 나무 탁자의 아래쪽에 붙이고, 구리 도금된 달걀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서로 위상이 어긋나는 두 전류를 그 자석에 보내자, 구리 달걀이 저절로 돌기 시작하더니 똑바로 세워졌다. 이 실연에 깊은 인상을 받은 후원자들은 테슬라의 교류 전동기 작업을 열렬히 후원했다. 테슬라의 다상 교류 전동기에 대한 특허는 1888년 5월 1일에 승인되었다. 직류를 고집하는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에 맞서 이른바 ‘전류 전쟁’(the current war)을 벌이고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현금 2만 5000달러, 약속어음 5만 달러와 전동기마다 마력당 2달러 50센트의 로열티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테슬라의 특허를 구매했다.
3. “교류 전류로 전기 조명 장치와 동력 장치에 모두 전력을 공급하는 첫 번째 설비로서 세계박람회의 웨스팅하우스 전시는 미국과 유럽의 전기기술자들에게 교류 전류의 위력을 확신시켰다.” 당시 월가의 은행가 애덤스(Edward Dearn Adams)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이용한 전력 생산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테슬라는 애덤스에게 다상 교류(polyphase AC)를 소개하는 노력을 계속 기울였다. 그 결과, 애덤스는 1893년 10월에 웨스팅하우스와 발전기 건설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 “나이아가라 폭포 발전소의 성공으로 미국과 유럽의 전력 회사들은 다상 교류로 전환했으며, 이것은 오늘날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표준 전류로 사용되고 있다.”
테슬라는 초등학생 때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한 글을 읽고는 커다란 물레방아를 만들어 그 폭포의 힘을 붙잡아 보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삼촌한테 미국에 가서 이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말했는데, 30년 뒤 나이아가라에서 내 아이디어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