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창
과학의 변곡점마다, 언제나 물리학이 있었다
작성자 : 엄종화 ㅣ 등록일 : 2025-10-26 ㅣ 조회수 : 9
엄 종 화세종대학교 총장
세계 주요국들의 연간 R&D 투자 순위를 살펴보면, 미국이 약 7,000억 달러로 1위, 그 뒤를 중국(5,500억 달러), 일본(1,800억 달러), 독일(1,400억 달러), 한국(1,100억 달러)이 잇는다. 우리나라는 R&D 투자 총액 기준으로 세계 5위권, GDP 대비 비중으로는 약 5%로 이스라엘(약 6%)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한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학장을 지낸 그레이엄 앨리슨은 저서 『예정된 전쟁』에서 “총이 크면 총구가 커진다”고 말했듯, 기술 주도권은 결국 R&D 투자 규모와 비례한다.
한편,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입 총액 비율을 의미하는 ‘무역의존도’는 한 국가의 대외경제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는 약 84%로 세계 8위 수준이다. 이는 곧, 우리는 과학기술력으로 고부가가치 제품을 개발해 세계 시장에 팔아야만 살아남는 구조라는 뜻이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과학기술의 토대인 기초과학, 특히 물리학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국민적 관심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자역학이 탄생한 지 12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기초과학에 대한 국민적 열정이 점차 식어가고 있는 듯하다. 과거에는 “물리학은 모든 과학의 기초다”라는 말만으로도 일정한 설득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일반론만으로는 젊은 세대와 정책결정자, 일반 대중을 설득하기 어렵다. 시대는 바뀌었고, 과학기술 역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물리학이 과거뿐 아니라 미래를 여는 학문임을 실감하게 하는 구체적 사례와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인류의 가치관과 기술의 방향을 바꿔놓은 과학사적 패러다임 전환 속에서 물리학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11년 벨기에의 화학자이자 산업가인 에르네스트 솔베이의 후원으로 시작된 ‘솔베이 회의’는 양자역학의 태동과 현대물리학의 정착을 이끈 지적 격전장이었다. 이 회의를 통해 양자역학의 기초가 정립되었고, 현대물리학의 방향이 결정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과학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어 1940년대의 ‘맨해튼 프로젝트’는 물리학자들의 이론이 현실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이 프로젝트는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해 전쟁의 종결을 앞당겼을 뿐 아니라, 현대 핵무기의 기원이자 냉전과 핵 군비 경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역사적 사건은 과학이 세계정세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냉전 시기의 ‘아폴로 프로젝트’는 우주공학이라는 새로운 프런티어를 열며 과학기술이 국가경쟁력의 상징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1961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NASA가 추진한 이 유인 달 탐사 계획은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 간의 우주경쟁에서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 세 사건 모두의 중심에는 물리학자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양자컴퓨팅과 초지능 AI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기술에서 주도권을 잡는 국가가 미래 패권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천문학적인 R&D 투자를 통해 기술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으며, 영국, 이스라엘 등은 기술특화 전략과 민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AI 반도체, 첨단바이오, 양자기술을 3대 게임체인저로 선정하고, 2024~2028년까지 30조 원 이상의 투자를 계획 중이다. 이들 기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이자 미래 성장의 열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전략으로 물리학 전공의 위축을 되돌릴 수 있을까? 최근 대학가에서 확산하고 있는 ‘전공자율선택제’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 2025학년도에는 수도권 및 국립대 73개교에서 3만 7천여 명을 자율전공으로 선발했다. 이는 물리학이 시대 흐름과 단절된 ‘고전학문’이 아니라, AI와 양자기술 시대를 이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론 기반 전공임을 적극적으로 알릴 기회다.
양자컴퓨팅의 원리를 이해하고, AI를 활용한 양자 알고리즘을 설계할 수 있는 인재는 어디에서 탄생하는가? 바로 물리학을 제대로 배운 이들이다. 이제는 “기초학문이니까 공부해야 한다”라는 당위 대신, “이 멋진 신세계의 열쇠가 물리학 안에 있다”라는 희망과 설렘으로 새로운 세대를 초대해야 한다. 물리학은 지금,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