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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반(反)한 과학자들 - 아리스토텔레스: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자였을까

작성자 : 정우현 ㅣ 등록일 : 2026-06-16 ㅣ 조회수 : 12

저자약력

정우현 교수는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MD 앤더슨 암센터(MD Anderson Cancer Center)와 베일러 의과대학(Baylor College of Medicine)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암 생물학과 분자유전학 연구를 수행했다.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약학대학 교수로 재직 중으로 미생물유전학, 세포분자생물학, 신경과학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또한 과학 대중화에도 힘쓰고 있으며, 일반 대중이 과학을 쉽고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강연, 칼럼, 대중 과학 콘텐츠 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마치 잡학사전처럼 다방면의 박식가로, 형이상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학, 윤리학은 물론이고 자연학과 동물학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한 주제의 책을 저술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구성한 인물로 현재까지도 추앙받으며,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군림하고 있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에는 고대로부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널리 알린 54명의 철학자와 수학자가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함께 서 있다. 플라톤은 전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해 적은 자신의 책 『티마이오스』(Timaeus)를 들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데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 책을 든 채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있다. 미술사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이상주의를 중요시했던 스승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건 매우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철학이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의 관심사는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였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상적인 이데아의 세계보다는 발아래 놓인 자연의 원리와 생명체의 움직임을 직접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평생을 바친 학자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후대 과학자들의 평가는 조금 달라서, 꽤 의견이 엇갈리는 편이다. ‘고대 과학을 집대성한 자’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근대 과학 발전을 가로막은 막강한 권위’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공존한다. 특히 17세기 과학혁명 이전과 이후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그는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관념적인 사변에 머물지 않고, 경험과 관찰, 논리적 추론과 같이 과학에서 요구되는 많은 미덕을 실천하며 진지하게 연구에 임했던 학자였다. 또한 여러 학문 분야를 분류하고 체계화했으며, 연구 기관을 설립해 제자들과 공동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등 전에 없던 과학적 탐구 방법의 기초를 확립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생물학에 있어서는 19세기 초까지도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철학자로 더 유명했던 그가 생전에 남긴 모든 책의 3분의 1은 생물학에 관한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삶의 많은 부분을 자연 현장에서 생물학 연구에 바친 사람은 역사상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이다. 1969년 노벨상 수상자였던 독일의 생물학자 막스 델브뤼크(Max Delbrück)는 DNA의 원리를 발견한 공적을 인정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노벨상을 수여해야 한다며 그의 오래전 생물학적 업적을 극찬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째서 야박한 평가를 받게 된 걸까?

그림 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가운데 부분도.
그림 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가운데 부분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밑바탕이 된 동물 탐구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남부 할키디키(Chalkidiki) 반도의 동쪽 해안에 자리한 작은 도시 스타게이라(Stageir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국왕 아민타스의 친구이자 주치의였으므로 금수저로 태어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려서부터 마케도니아의 왕자 필리포스와 절친이 되어 궁정에서 함께 자랐다. 마케도니아는 초기에는 소국이었지만, 국력을 착실하게 키워가며 후에는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는 패권국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엄연히 그리스의 고대 왕국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당대에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을 야만적으로 보아 그리스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분위기가 없지 않아 있었다. (기원전 357년 마케도니아와 아테네 사이에 전쟁이 터졌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집안이 마케도니아 왕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 때문에 친마케도니아 세력으로 몰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지도하는 학원 ‘아카데미아’에 들어가기 위해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아테네로 유학을 온 뒤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오랫동안 머물며 수학했기 때문에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20년 동안 공부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만 매달렸던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과학에 있어 처음으로 생물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서양 최초로 방대하고도 체계적인 생물 분류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동물지』(동물 탐구, Historia Animalium)는 그 대표적 산물인데, 총 9권으로 구성된 ‘동물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120종의 물고기와 60종의 곤충을 포함해 500여 종에 달하는 다양한 동물종의 내부 기관과 발생, 생식, 행동 등이 그 차이점과 함께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동물의 부분에 대하여』(동물부분론), 『동물의 운동에 대하여』(동물운동론), 『동물의 발생에 대하여』(동물발생론) 등 관련 소책자도 후에 여럿 저술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복잡한 자연 세계를 설명하려는 ‘질서와 체계의 인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사망한 기원전 348년 아테네를 떠났다. 그리고 에게해 건너편 연안에 위치한 아타르네우스(Atarneus) 왕국의 아소스(Assos)까지 가 정착했다. 그곳은 아카데미아에서 한때 함께 수학했던 동문 헤르미아스(Hermias)가 통치하던 왕국이었던 데다, 자신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가 마침 근방의 섬 출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융숭한 대접을 받고 맘 편히 지내면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약 3년간 머물며 아카데미아 분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며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40세 무렵부터는 아예 레스보스(Lesbos)섬으로 건너가 콜포스 칼로니(Kolpos Kalloni)라고 알려진 내해 부근에서 생활하며 넓고 아늑한 석호 라군(lagoon)에서 다양한 생물을 관찰하며 탐구했다. (레스보스는 고대 그리스 최초의 여성 시인으로 알려진 사포(Sappho)가 태어나고 활동한 섬이다. 사포가 주로 여성 간의 사랑과 감정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고향 레스보스는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레즈비언(Lesbian)’의 어원이 되었다.) 『동물지』에 실린 연구는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동물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무혈동물(무척추동물, anaima), 유혈동물(척추동물, enaima), 그리고 인간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명확한 분류의 기준을 제공했다기보다는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했다는 정도로 보는 게 옳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책에서 당시 그리스인들이 듣도 보도 못한 아주 희귀한 동물까지 소개하며 설명하고 있는데,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제자였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신이 정복한 그리스와 아시아 전역에 사람을 보내 이국적인 동물과 식물 표본을 얼마든지 구해 스승에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로 평생 에게해 근방을 떠난 적이 없다.

이때 쓰인 방대한 생물학 저서는 로마 시대를 지나는 유럽의 중세 암흑기 동안 저 멀리 이슬람 세계로도 전해져 변함없는 인기를 구가했다. 800년대 초반 아랍의 사상가 알 자히즈(Al-Jahiz)가 쓴 19권짜리 『동물서』(Kitab Al-Hayawan) 중 앞부분 10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를 그대로 소개한 것이고, 나머지 9권은 자신이 추가로 쓴 것이다. 이 책에는 놀랍게도 훗날 찰스 다윈의 진화론으로 소개되는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의 개념이 이미 담겨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는 다윈보다 거의 1,000년 앞선 시대였다.

레스보스섬에서 약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 아테네로 돌아가 리케이온(Lykeion)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길러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형이상학』 등 사회, 철학적인 책들이 쓰인 것은 이때였다. 생물학을 포함한 그의 자연사 연구는 철학적인 저작들보다 훨씬 더 앞선 시대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생물학에서 자라난 셈이다. 따라서 그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자연사 관련 연구를 바탕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림 2.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 사본.
그림 2.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지』 사본.

아리스토텔레스의 특별한 자연관과 우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모든 것이 ‘형상(eidos)’과 ‘질료(hyle)’로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형상이 ‘형태(form)’를 의미한다면, 질료란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matter)’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이는 훗날 인간이 ‘사유(정신, Res Cogitans)’와 ‘연장(육체, Res Extensa)’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원론’을 주장했던 데카르트의 생각과도 흡사하다. 데카르트는 인간과 동물의 몸을 기계로 보아 과학적 탐구의 대상을 명확히 규정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형상과 질료의 개념은 어떤 면에서 ‘현실성(actuality)’과 ‘잠재성(potentiality)’의 차이에 더 가깝다. 형상은 질료에 담긴 잠재적 능력의 실현인 셈이다. 오늘날 유전학적 관점으로 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형(phenotype)’이 바로 형상이고, 그 표현형을 만드는 ‘유전형(genotype)’은 질료가 된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유전자 결정론자의 표현을 쓰자면 DNA는 질료로서 모든 생명의 주인공이고, 생명체의 몸뚱이는 형상으로서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돕는 껍데기에 불과한 셈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형상을 완전히 실현하려는 ‘내재적 목적’을 가진다고 믿었던 반면, 도킨스에게 생명체는 목적이 있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렇게 설계된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과정에 가깝다.

또 어떤 학자들은 질료가 변화를 겪게 되면 다양한 형상을 만들게 된다는 이유로 이 개념에서 ‘진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진화와 같은 지식까지 탐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믿은 것은 동물이 자신을 닮은 자손을 생산하는 데 있어 수컷이 형상을 제공하고 암컷은 질료를 제공한다는 수준이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유정란의 부화 과정 등을 관찰하며 생물 발생에 대한 체계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리하여 생물이 성장하면서 형상이 완성된다는 관점에서 500종이 넘는 생물의 해부학적 구조와 발생 과정을 연구한 것이 바로 『동물지』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저술 중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 있다면 바로 『자연학』(Physics)일 것이다. 그러나 원제목인 ‘Physics’를 ‘물리학’이라고 생각하면 이 책의 내용을 오해하기 쉽다. 총 8권으로 구성된 『자연학』에서 다루는 내용은 ‘변화와 운동’의 본질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개념은 오늘날 거의 다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모든 내용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합리적인 전체를 이룬다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그가 제안한 우주의 모형이 천동설의 바탕이 되어 오랫동안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 여러 학자들에게 지지를 받은 이유는 각 개념들이 강력한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이 물과 불, 흙, 공기로 되어 있다는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겼다. 그는 원소의 성질은 촉감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네 원소 사이에 각각 따뜻함, 차가움, 건조함, 축축함의 성질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4원소가 가지고 있는 네 가지 성질 가운데 하나만 바꿔 주면 얼마든지 다른 원소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면서 중세 연금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만물이 우주 속에 자기 자신만의 마땅한 자리를 가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달 아래 지상계(sublunary)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4원소 사이에는 그 무게에 따라 계급성이 있어서 무거운 원소는 아래로 향하고 가벼운 원소는 위로 향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가장 무거운 원소인 흙이 아래로 가장 먼저 내려가 밑바닥에 가라앉을 것이다. 이것이 어째서 우주의 가장 밑바닥, 즉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놓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그 위 자리를 다음으로 무거운 물과 공기, 불이 차례대로 차지한다. 그리고 불보다도 가볍고 순수한 ‘제5의 원소’ 에테르(aether)가 달 위쪽 천상계(superlunary)의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운다. 에테르의 본성은 완전무결하므로 천상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천체의 움직임은 영원하고 완전한 원운동이 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천체에 관하여』(천체론, De Caelo)에서 설명한 우주관이다. 이는 이후 수천 년간 유럽과 이슬람 과학 세계관의 기초가 된 지구중심설(천동설)의 기원이 되었다.

훗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자신의 저서 『신기관』(Novum Organum)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흙, 물, 공기, 불의 밀도가 임의로 10분의 1씩 줄어든다고 주장했다며 아주 강하게 비판했다. 베이컨의 책 『신기관』의 제목은 ‘새로운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삼단논법을 소개한 책 『논리학』(Organon)을 깎아내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물의 내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럴듯하고 멋진 대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더욱 고심하며 연역논리학을 가르치고 책을 써 자연철학을 온통 망쳐놓았다고 비판했다.

그림 3.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 만든 지구중심적 우주관.
그림 3.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 만든 지구중심적 우주관.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의 중심에는 ‘목적론’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각별한 ‘4원소설’ 사랑은 원자론을 거부하게끔 했다. 같은 시대 그리스의 철학자 레우키포스(Leucippus)와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는 세계가 궁극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단단하고 변하지 않으며, 더 이상 쪼개지지 않고 무한히 영구적으로 움직이는 독립적인 입자’로 되어있다는 원자론을 주장했다. 이들의 원자론은 운동과 변화의 근본 원리를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유력한 대항마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세에 철저히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적이긴 했으나 근거가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운동의 근원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으며, 우주가 원자의 충돌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났다는 점 또한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쾌락주의자로 불린 에피쿠로스학파를 통해 명맥이 이어졌고, 물질의 근원으로서 원자는 그 어떤 것도 무에서 생겨나거나 무로 돌아가지 않으며 어떤 목적도 없이 무한한 세계의 공허한 공간을 운동하며 존재한다는 유물론적 세계관의 근간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물론을 기각한 핵심적인 이유는 우주와 모든 피조물이 질서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허한 공간, 즉 ‘진공’도 거부했으므로 이들의 사상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자론자들과 달리 ‘목적(telos)’이나 ‘목적인(final cause)’과 같은 개념을 사용해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목적인이란 운동의 네 가지 원인 중 하나로, 그 운동이 원인이 되어 나중에 발생하게 될 사건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어떤 운동은 그것이 미래에 야기할 사건을 위해, 그것을 목적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후에 어떤 목적을 수행하는 데 이바지했는가를 따지는 것을 ‘목적론적 설명’이라고 하며, 어떤 사전 조건이 있었길래 그 운동이 일어났는가를 분석하는 것을 ‘기계론적 설명’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계론적 설명이 과학적 지식의 진보를 주도한 반면, 목적론적 설명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두 가지 설명 중 과학이 탐구해야 할 설명이 어느 것인지는 의외로 분명하지 않다. 목적론적 설명을 좇아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조물주(Creator)’ 또는 ‘설계자(Designer)’라는 존재를 만나기 마련인데, 곧 모든 사건과 운동은 조물주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등장하는 신은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다. 이 신은 인격체가 아니라 차라리 에너지 같은 개념에 더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그 자체로 순수한 활력이기 때문에 전혀 활동할 필요가 없다. 모든 운동의 ‘제1 원인’이지만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오래된 경구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래서 철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는 영국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좋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기계론적 설명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의 사건은 앞선 다른 사건이 야기하고, 그 사건은 그보다 앞선 또 다른 사건이 야기한다는 식으로 계속 원인을 찾아 올라가다 보면 결국 최초의 원인을 설명해야만 하는 상황에 다다른다. 그러면 이 역시 조물주와 다를 바 없는 초월적 개념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은 2,000년이 훨씬 지난 다음에서야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통해 운 좋게도 자신들이 옳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최초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아직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그리스인들이 ‘피시스(physis)’라 불렀던 것에 대한 학문이다. 피시스는 흔히 ‘자연’으로 번역되지만, 당시에는 자연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었다. 피시스는 ‘성장’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도토리는 참나무로 성장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때 이 본성이 바로 사물의 ‘목적’에 해당하며, 그것이 그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피시스’는 그 자체로 목적론을 함축하는 말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그것이 가진 본성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 내부에 운동의 원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자연은 결코 헛된 일을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했던 말이다. 이러한 자연의 개념은 동물과 식물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무척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공했지만, 그의 목적론은 결과적으로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았으며 과학을 결국 곤경에 빠뜨리는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밖에도 차마 용서받기 어려운 숱한 과학적 오류를 범했다.

그림 4.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에 어떤 공헌을 했을까.
그림 4.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에 어떤 공헌을 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레드카드를 받아 마땅할까

누군가를 ‘과학자’라 부를 수 있으려면 그는 어떤 방법으로 연구하는 사람이어야 할까? 만약 베이컨이라면 반드시 관찰과 실험을 통해 귀납적 방법으로 과학적 법칙을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라면 모호한 주장을 배격하고 논리적 분석과 실험을 통해 자신의 가설을 증명해야 한다고 강조할 것이다. 칼 포퍼(Karl Popper)는 위 사람들의 의견을 반박하면서, 대담한 가설을 제시하고 그것이 혹독한 비판과 검증을 견뎌내는지 테스트하는 ‘반증주의(falsificationism)’를 중요시할 테다.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같은 아나키스트는 과학적 방법론에 정해진 규칙이란 없다고 주장하며, 자유롭게 탐구하는 모든 방법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낼 것임이 틀림없다. 만약 이들이 모두 모여 찬반투표를 한다면 과연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자로 불릴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 자신을 과학자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자연과학(physike episteme)’, 즉 ‘자연에 관한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자신을 ‘자연을 설명하는 사람(physiologos)’이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는 사람(physikos)’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관찰과 경험을 매우 중시한 것에 비하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실험’을 해 보인 적은 거의 없다. 사실 그의 시대에는 누구도 실험을 수행할 생각을 거의 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해 고대 그리스의 모든 자연철학자는 실험을 통해 자연을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조작하는 일이 자연의 본성을 왜곡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 외에도 과학적인 주제로 많은 책을 저술했다. 지구와 우주, 물질의 운동에 대한 내용보다는 생물학 분야의 저서가 더 많이 전해진다. 그리고 『자연학』보다 『동물지』에 훨씬 더 정확하고 쓸모 있는 내용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동물지』에서의 성취는 『자연학』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의 유명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과학은 물리학이 아니면 우표 수집이다.” 이는 물리학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단순한 관찰 중심의 학문을 폄훼하는 말이기도 하다. 진정한 과학이라면 데이터를 모으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설명과 이론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일 것이다. 러더퍼드가 보기에 『동물지』는 우표 수집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그렇게 물리학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러더퍼드가 핵물리학 분야에 있어서 주요 업적을 인정받아 1908년 수상한 게 노벨물리학상이 아니라 노벨화학상이었다는 사실은 다소 머쓱한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과학 분야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주장이 훗날 오류인 것으로 드러났다. 사자는 목뼈가 하나밖에 없다는 주장, 무거운 돌이 가벼운 돌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주장, 물체는 그 고유의 색깔을 내부에 지니고 있다는 주장, 사람의 이성이 심장에서 나온다는 주장, 뇌는 단지 뜨거워진 심장을 식히기 위한 냉각장치에 불과하다는 주장 등등. 그뿐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치아가 더 적다는 주장도 있었다. 아마도 여성이 남성보다 영양상태가 부실하고 질병을 많이 앓았던 탓일까? 아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어쩌면 여성의 입속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고 그저 추측만 한 건지도 모른다. 만약 들여다보았더라도 단지 몇 명만 확인하고는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가 남자보다 덜 완전하며 모든 면에서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물의 발생에 대하여』에서 여성을 ‘손상된 남성’ 혹은 ‘기형적인 남성’으로 묘사했으며, 심지어 ‘괴물’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자연발생설(abiogenesis)은 또 어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은 생물이 특정 환경에서 무생물로부터 저절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과학적 검증 없이 이루어진 비논리적인 추측에 불과했다. 그는 음식이 부패하면서 생명체가 생겨난다고 믿었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실험적인 증거나 증명된 사실이 없었다. 훗날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의 실험을 통해 생명체가 기존의 생명체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음이 최종적으로 밝혀진 것은 무려 19세기에 들어서였다. 급기야 1960년 노벨상을 수상한 동물학자 피터 메더워(Peter Medawar)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과학의 숙적으로 간주하고 그의 과학을 무효로 선언한다!

그러나 실증주의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은 이렇게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인류에게 철학을 주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주었다.” 그의 말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과학자의 타이틀을 빼앗는 것은 잔인할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기능(faculty), 평균(mean), 공리(maxim), 범주(category), 에너지(energy), 원리(principle) 등, 철학과 과학적 사고에 필수 불가결한 개념과 용어들을 창조했다. 윌 듀런트는 이전에 태아 상태였던 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비로소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칼 포퍼의 기준을 빌리자면, 과학은 반증 가능한 가설을 내놓고 그것을 시험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과학자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은 대부분 틀렸지만, 다행히도 틀렸다는 것이 밝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들은 적어도 ‘반증이 가능한’ 것들이었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의 누적적이고 연속적인 발전을 통해 진리에 점차 다가가는 일의 대상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크게 공헌한 셈이다. 그의 오류들은 과학의 적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과학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 연료로 쓰인 것이 아닐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새롭게 읽어야만 한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과학과 미래 그리고 인류’를 목표로 한 <크로스로드>는 과학 특집, 과학 에세이, 과학 유머, 과학 소설, 과학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과학 글을 통해 미래의 과학적 비전을 보여주고자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sia Pacific Center for Theoretical Physics)에서 창간한 과학 웹 저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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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박재용,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전복자들 (사월의책, 2025).
2)Aristotle, History of Animals translated by D’Arcy Wentworth Thompson (1910)(동물지, 서경주 옮김, 노마드, 2023).
3)Brian Clegg, Scientifica Historica (2019)(책을 쓰는 과학자들, 제효영 옮김, 을유문화사, 2025).
4)Will Durant, The Story of Philosophy (1926)(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 정영목 옮김, 바다출판사, 2026).
5)Armand M. Leroi, The Lagoon: How Aristotle Invented Science (2015)(과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여행 라군, 양병찬 옮김, 동아엠앤비, 2022).
6)P. B. Medawar and J. S. Medawar, Aristotle to Zoos: A Philosophical Dictionary of Biology (1983).
7)W. D. Ross, Aristotle (1995)(아리스토텔레스, 김진성 옮김, 세창출판사, 2016).
8)Bertrand Russell,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96)(러셀 서양철학사,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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