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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전쟁

작성자 : 정인경 ㅣ 등록일 : 2022-08-17 ㅣ 조회수 : 734

저자약력

정인경 작가는 과학 저술가로, 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협동과정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과학기술학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했으며 저서로서는 <내 생의 중력에 맞서>, <모든 이의 과학사 강의>, <통통한 과학책 1,2>, <과학을 읽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 등이 있다. 고등학교 <과학사>(씨마스) 교과서를 집필했으며, 한겨레 신문에 <정인경의 과학 읽기> 컬럼을 쓰고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과 과학기술은 애증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필요악이었던 것처럼 전쟁에서 과학기술은 필요악으로 이용되었다. 때로 전쟁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때로 과학활동을 파괴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과 과학기술을 같은 선상에 놓고 평가할 수는 없다. 전쟁이 과학기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좋다, 나쁘다의 가치 평가하기에는 전쟁의 해악이 엄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폭력적인 전쟁의 종식을 원하며, 과거보다 전쟁에서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과학기술의 결과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전쟁에 주목하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개발된 원자폭탄은 현대 과학기술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전쟁이 끝난 후 과학자와 과학 활동은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한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는 과학자의 동원, 빅 사이언스의 전환점이 되었고,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과학기술의 군사화, 거대화, 상업화는 공공해졌다. 지금은 당연시되지만 역사적으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던 과정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기까지 과학자 개개인의 희생과 고뇌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다시피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들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오펜하이머는 유럽과 미국에서 함께 연구한 과학자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들은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1939년 8월에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개발의 시급성을 알리는 편지를 보낸다. 독일의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고, 미국의 선제적 대처를 촉구한 것이다. 1941년 9월에 하이젠베르크는 보어를 만나기 위해 코펜하겐에 온다. 연합국의 핵무기 개발이 본격화되기 전에 핵무기 개발을 지연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독일의 핵개발 책임자였던 하이젠베르크와 연합국 편에 서 있는 보어는 서로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헤어진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하이젠베르크는 자서전 『부분과 전체』에서 이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미국에 있는 물리학자들의 마음, 특히 독일에서 이주한 물리학자들의 마음은 우리와는 완전히 달라. 그들은 선을 위해 악과 싸워야 한다고 확신할 거야. 나쁜 편을 위해서는 절대 만들면 안 되는 원자폭탄을 좋은 편을 위해서는 만들어도 되는 걸까? 미국 측도 모든 맥락에서 볼 때 선할까? 어떤 일이 선인지 악인지는 그들이 사용하는 수단으로 미루어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림 1. 버트런드 러셀이 직접 낭독한 ‘아인슈타인-러셀 선언문’이 담긴 앨범.그림 1. 버트런드 러셀이 직접 낭독한 ‘아인슈타인-러셀 선언문’이 담긴 앨범.

하이젠베르크의 말대로 원자폭탄은 좋은 편, 나쁜 편을 떠나서 절대로 만들어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후에야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경악했다. 아인슈타인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도록 추천한 일은 내 평생을 두고 후회할 실수”라고 토로하며 고통스러운 심경을 내비쳤다. 한때는 좋은 편이라고 여겼던 미국이 1949년에 수소폭탄 개발을 결정하고, 소련과의 핵무기 군비경쟁에 돌입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1955년 7월에 아인슈타인-러셀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말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자. 자신이 선호하는 어떤 집단이 군사적 승리를 거두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는 묻지 말자. 더는 그런 방법은 없다.” 이렇게 선언문은 자국의 이익이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인류 전체를 생각하자고 인간성에 호소하였다.

한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개발과 그 사용에 기여한 것을 평생 자책하면서 살았다. 1949년에 그는 트루먼 정부가 추진하던 수소폭탄 개발 프로그램에 반대입장을 표명하였다. 일반자문위원회(General Advisory Committee, GAC)의 수장으로서 공개적인 반대는 그의 사회적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사상 검증과 자격 심사를 위한 재판에 회부되었고, 결국 1953년 최종 판결에서 모든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전쟁 영웅’이었던 그는 한 순간에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추락하였다. 이 사건은 전시 연구에 동원된 과학자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결과물에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희망일 뿐이었다. 과학자들의 손을 떠난 결과물에 대해 어떤 통제권도 발휘할 수 없었다. 과학자는 정책 결정에 관여하지 못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협소한 전문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두 거장의 일화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교훈을 남긴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체제는 끝났어도 오늘날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전쟁으로 과학자의 위상이 높아지고 정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지만 이것은 분명 위험한 거래였다. 왜 각국의 정부는 과학기술에 계속 지원을 했을까? 핵무기의 등장이 전쟁의 양상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핵전쟁은 빠른 시일 안에 승패가 결정된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준비태세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핵무기의 존재가 전시 동원체제를 그대로 유지시켰다. 전시에 확립된 군대-산업-대학의 군산학복합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해체되지 않았다. 냉전 시기에 과학의 ‘영구동원’ 체제가 확립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기초과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명분을 제공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은 수십 년 동안 축적된 물리학의 연구성과에서 나온 것이다. 전시 연구를 총괄하던 과학연구개발국(Office of Scientific Reserch and Development, OSRD) 국장, 버니바 부시는 기초연구의 필요성을 여기에서 찾았다. 그는 1945년 7월 트루먼 대통령에서 제출한 보고서 『과학, 그 끝없는 프런티어』에서 정부가 기초연구를 계속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학의 진보가 없다면 다른 방향의 국가적 성취가 아무리 많더라도 현대 세계 속에 한 국가로서 우리의 건강, 번영,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의 보고서는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NSF)의 설립 등 전후 과학기술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시의 아이디어를 채택한 국립과학재단은 전후 과학연구를 지원하는 중요 기관으로 자리잡는다. 국익과 안보에 관련된 지구과학, 기상학, 해양학 등에 연구가 활성화되었고, 컴퓨터와 전자공학 분야에서 군대가 투자한 연구가 경제성장으로 연결되었다.

이렇게 냉전 시기, 정확히 1945년부터 1991년까지 46년 동안 현대 과학기술은 거대 과학이 되었다. 막대한 국민의 세금으로 기초과학에 연구개발비를 지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정부 기관과 산업체 연구소의 과학기술자들은 기초연구가 나중에 전쟁과 질병치료, 복지증진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당당히 연구비를 요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오늘날의 이런 관행은 핵무기 개발과 냉전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덧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군사연구와 기초연구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졌다. 아마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수행하는 과제 중에 자유로운,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위한 연구는 거의 없을 것이다. 어디선가 연구비를 받는다면 기초연구든, 응용연구든 실용적 관심이나 목적을 밝혀야 한다. 특히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우주항공, 입자가속기 등의 거대과학은 국가 안보, 국민 건강, 산업경쟁력, 국가 위신 등의 정치적 근거가 따라붙는다.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하였나? 한국의 과학기술은 1950년 6.25전쟁을 겪고 전후 산업화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더욱 국가주의에 경도되었다. 분단체제의 긴장감을 안고 사는 우리는 한국의 과학기술이 이룬 성취를 돌아봐야 한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과학기술의 역할을 국익과 안보, 번영 등의 국가 정체성에 제한한다면 앞서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후회가 재현될 것이다. 왜 국민의 세금으로 기초과학을 연구해야 하는지, 그 방향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눈앞에 기후변화, 핵전쟁, 전염병, 생태계 파괴 등 세계의 문제가 놓여있다. 과학기술자와 시민들은 고개를 들어 인류와 지구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과학기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하고 탐색해야 한다. 아인슈타인과 러셀의 선언문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자.” 인간성 이외에 모든 것을 잊고, 인류가 한 사람인 것처럼, 전쟁과 파멸을 막아보자는 호소에 다시 귀를 기울이자.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태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과학과 미래 그리고 인류’를 목표로 한 <크로스로드>는 과학 특집, 과학 에세이, 과학 유머, 과학 소설, 과학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과학 글을 통해 미래의 과학적 비전을 보여주고자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Asia Pacific Center for Theoretical Physics)에서 창간한 과학 웹 저널입니다.
http://crossroads.apctp.org/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는 정부의 과학기술진흥기금 및 복권기금 지원으로 사회적 가치 제고에 힘쓰고 있습니다.
각주
1)김명진, 『모두를 위한 테크노사이언스 강의』 (궁리, 2022).
2)카이 버드·마틴 셔윈, 최형섭 옮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사이언스북스, 2010).
3)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유영미 옮김, 『부분과 전체』 (서커스, 2016).
4)실번 S. 슈위버, 김영배 옮김,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시대의 창, 2013).
5)오드라 J 울프, 김명진·이종민 옮김, 『냉전의 역사』 (궁리, 2017).
6)마스카와 도시히데, 김범수 옮김,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 (동아시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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