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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아인슈타인 대 슈뢰딩거

작성자 : 이강영 ㅣ 등록일 : 2023-03-29 ㅣ 조회수 : 1,155

저자약력

이강영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입자물리학 이론을 전공해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입자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스핀>, <불멸의 원자>, <보이지 않는 세계> 등이 있다. (kylee.phys@gnu.ac.kr)

1930년대 이후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주류가 된 코펜하겐에 맞서는 전사로서 의기투합한다. 두 사람은 양자역학을 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지만, 둘 다 확률을 물리학의 본질로 삼고자 하는 코펜하겐의 주장에 반대하고, 양자역학을 넘어서 더 근본적인 이론을 찾고자 했다.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물리학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던 그 시절에, 양자역학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어도 될 만한 권위를 지닌 사람도 아마 그들 둘 정도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양자역학 진영의 젊은 물리학자들에 비해 나이도 상대적으로 가까웠고(아인슈타인 1879년생, 슈뢰딩거 1887년생), 제도와 인습에 본능적으로 반항하는 분방한 성격도 닮은 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고, 물리학 연구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었다.

1929년 베를린 시장 구스타프 뵈스(Gustav Böß, 1873―1946)는 아인슈타인의 50세 생일을 기념해서 베를린 근교에 별장을 지어 선물했다. 그런데 처음 마련한 집이 땅주인과의 분쟁이 생겨서 사용하기가 어렵게 되자, 아인슈타인은 포츠담 남쪽, 슈비엘로브 호수와 템플린 호수의 중간쯤에 위치한 카푸트 Caputh라는 마을에 땅을 사서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시 집을 지었다. 설계는 유태인 건축가 바크스만(Konrad Wachsmann, 1901―1980)이 맡았다. 집을 짓는 동안 그가 주문한 ‘돌고래 Tummler’라는 이름의 요트도 도착했다. 아인슈타인의 본 집은 베를린 시내에 있었으므로 이곳은 그의 별장이자 천국이었다. 이곳에서 아인슈타인은 편하게 아무 옷이나 입고 돌아다니며 자연과 여유를 만끽했고, 많은 전설과 일화를 만들었다.

슈뢰딩거는 이 별장을 가장 많이 찾아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막스 플랑크의 뒤를 이어 1927년부터 베를린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특히 가까워진 것이 바로 카푸트의 집에서였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생활은 나치스가 독일을 장악하면서 끝이 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독일을 떠난 후 나치스는 이 집과 요트를 압류했다. 지금 이곳은 아인슈타인 기념관이 되어 있다.

1940년 슈뢰딩거가 아일랜드 더블린의 고등연구소로 옮겨가면서 두 사람의 닮은 점이 하나 더 늘었다. 이 연구소는 아일랜드의 총리 드 발레라(Éamon de Valera, 1882―1975)가 아인슈타인이 재직하고 있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를 벤치마킹해서 만든 곳이었다. 그 자신이 수학을 공부하고 수학 교사였던 드 발레라는 고등연구소를 만들며 아인슈타인에 해당하는 인물로 슈뢰딩거를 점찍고 그를 직접 초청해서 이론물리학부를 맡긴 것이다. 아일랜드의 <아이리쉬 프레스>지에서는 이 두 연구기관을 비교하는 기사를 자주 썼고, 슈뢰딩거를 아일랜드의 아인슈타인으로 취급했다.

슈뢰딩거가 노벨상을 수상한 석학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자 중 한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인슈타인은 아니다. 하물며 대중에 대한 명성에 이르면, 슈뢰딩거와 아인슈타인은 당연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슈뢰딩거가 자신의 명성에 목을 매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또 그런 것에 초연한 사람 역시 아니었다. 그보다 슈뢰딩거는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삶에 대해서 뿐 아니라 과학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래서 자신을 사로잡는 아이디어가 있다면 이를 설파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또한 슈뢰딩거는 자신을 후원하는 드 발레라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도 안고 있었다. 새로운 아일랜드 공화국의 창설에 전념하던 드 발레라는 1943년 아일랜드의 위대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해밀턴의 사원수 발견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행사를 열 정도로 아일랜드의 학문적 위상도 높이고 싶어 했다. 이러한 드 발레라의 열정은 슈뢰딩거에게는 무형의 압력으로 작용해서, 슈뢰딩거는 일부러 논문에서 굳이 해밀턴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슈뢰딩거는 기회가 될 때마다 아인슈타인과 자신의 친분에 대해 언급했다.

1943년 1월 25일에 슈뢰딩거는 왕립 아일랜드 아카데미에서 강연을 하면서 새로운 통일 이론을 주장했다. <아이리쉬 프레스>는 2월 1일 ‘아인슈타인을 뛰어넘어 전진하다’라는 표제를 달아 이 강연을 보도했다. 다음날에도 몇몇 아일랜드 과학자들과의 인터뷰를 포함한 새로운 기사가 추가되었다. <아이리쉬 프레스>는 슈뢰딩거의 강연 후 아인슈타인에게 신문을 보내고 논평을 요청했다.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점잖게 반응했다.1)

“슈뢰딩거 교수는 대단히 신중하고 비판적인 사고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새로이 시도한 부분에 대해서 물리학자라면 마땅히 큰 관심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저도 이 이상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사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셈이다.

여담이지만, 그 달에 슈뢰딩거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세 번의 강의를 했다. 생물학 교육을 받거나 연구를 진행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던 슈뢰딩거지만, 현대물리학이 가져온 물질에 대한 통찰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강연은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슈뢰딩거의 최고의 팬인 드 발레라를 비롯한 수많은 청중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강연은 책으로 발행되어 젊은 생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열리는 데 일조를 했다.

그해 6월에 슈뢰딩거는 왕립 아일랜드 아카데미에서의 강연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일반통일이론이 실험적 증거를 통해 정당성이 입증되었다고 언급하며, 아인슈타인이 20년 전에 버렸던 개념을 자신이 되살려냈다고 주장했다. 그 모임에서 슈뢰딩거는 심지어 아인슈타인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보냈던 편지의 일부를 공개하기까지 했다. 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1920년대에 아핀 이론을 만들려고 시도했었지만 결국에는 그 ‘희망을 무덤에 묻고 왔다’고 썼는데, 슈뢰딩거는 이 부분을 사람들 앞에서 읽으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1)

“저는 이제 우리가 그의 희망을 다시 되살려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제가 이 이론적 부분에 대해 상당히 강력한 관찰상의 증거를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이 강연은 <아이리쉬 타임스>에 기사화되었는데, 기사의 제목은 ‘아인슈타인, 슈뢰딩거에게 찬사를 보내다’였으며, ‘아인슈타인은 실패했다’라는 표제도 달려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실패를 고백했던 부분에서 슈뢰딩거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말이었다. 신문에야 구체적인 내용이 나올 리 없지만, 물론 슈뢰딩거쯤 되는 이가 아무 내용 없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강연에서도 그는 실험 증거까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실험 증거란 것이 사실 빈약했다. 지구 자기장의 이상 현상을, 그것도 오래된 데이터로부터 인용하고 그것을 자신의 이론으로 설명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무례한 일이었지만, 아인슈타인은 대체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단 아일랜드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고, 아인슈타인이 유명인이 된 이후 워낙 여러 가지 일을 겪다 보니 그 정도 일에는 초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슈뢰딩거를 지지한 것도 아니다. 8월에 슈뢰딩거가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자, 아인슈타인은 9월에 보낸 답장에서 슈뢰딩거가 주장한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잔뜩 만들어서 보냈다. 슈뢰딩거는 얌전히 10월에 답장을 보냈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당신의 말씀이 옳을 겁니다.”

하지만 슈뢰딩거가 기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핀 이론을 확장해서 새로운 통일 이론을 얻을 가능성을 열정적으로 피력했고,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따뜻한 답장을 보냈다.1)

“자네가 자신의 연구내용을 기꺼이 내게 공개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 크게 고맙게 생각한다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럴 자격이 있지 않나 생각해. 난 수십 년 동안 그 어려운 문제에 코를 박고 싸워온 사람이니까 말이지.”

아직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비록 이론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 슈뢰딩거는 고무되었다. 연구는 진전을 보이고, ‘생명이란 무엇인가?’ 강연도 성공하고, 아일랜드에서는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고 있으며, 아인슈타인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1926년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만들어낸 이후 또 한 번의 인생의 절정이라고 할 만했다. 과학저술가 폴 핼펀은 그가 이 무렵 대단히 들뜬 상태에 있었다는 증거로 슈뢰딩거가 그로부터 2년 동안 두 명의 여성과 연애사건을 벌이고, 두 사람 모두에게서 딸을 얻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1) 이때 얻은 두 딸은 모두 슈뢰딩거의 손을 떠나 엄마가 키웠는데, 이 중 린다라는 이름의 딸은 지금의 짐바브웨인 로디지아로 이주해서 거기서 살았다. 린다의 아들은 1973년 그곳에서 태어나서, 후일 물리학자가 되었고, 현재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테리 루돌프(Terry Rudolph, 1973—)다. 테리 루돌프의 전공은 바로 양자물리학으로서, 최근에는 양자컴퓨터 스타트업인 프사이퀀텀 PsiQuantum을 공동으로 창립했다.2) 그는 양자물리학자가 되기 전까지는 슈뢰딩거가 자신의 외할아버지라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1946년은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가장 가까워진 시기다. 이 해에 두 사람의 연구 주제가 대단히 밀접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반상대성이론의 대칭성을 일부 포기해서 더 일반적인 이론으로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보낸 1946년 1월 22일자 편지를 보면 메트릭 텐서의 비대칭항을 살리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파울리가 반대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1)

“파울리가 혀를 내밀며 나를 놀리지 뭔가.”

그러자 슈뢰딩거는 파울리의 비판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답장을 보내 주었다.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연구하는 방향에서 차이가 있다면, 슈뢰딩거는 강한 핵력까지 포괄하는 통일 이론을 만들고 싶어하는 반면, 아인슈타인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핵력은 빼고 중력과 전자기력만을 성공적으로 합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교류는 매우 밀접했다. 4월 7일자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이 편지교환이 내게 큰 즐거움을 준다네. 자네는 나와 가장 가까운 형제고, 자네의 머리가 내 머리와 아주 비슷하게 돌아가기 때문이지.”라고 쓰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슈뢰딩거를 ‘영리한 악동’이라고 불렀다. 아인슈타인 본인으로부터 이런 찬사를 듣다니, 슈뢰딩거는 자랑스럽고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했으리라. 분위기가 한참 좋아진 1946년 말에는 슈뢰딩거가 아인슈타인에게 아일랜드로 옮기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늙은 나무를 새 화분에 옮겨 심지는 않는 법”이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던 1947년 마침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슈뢰딩거는 그동안의 연구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흥분해서 1월 27일 왕립 아일랜드 아카데미에서 그 내용을 발표했다. 종종 그렇듯이 청중 중에는 총리인 드 발레라도 앉아 있었다. 기자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모든 것은 더욱 단순해지게 마련입니다. 저는 오늘 영광스럽게도 여러분 앞에서 아핀 장 이론의 핵심을 밝히고, 그리하여 30년 묵은 오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려 합니다. 바로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1916년 이론을 필요한 요구사항에 맞추어 일반화한 이론입니다.”

이어서 슈뢰딩거는 전문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후반부에는 이를 이용해서 지구의 자기장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대담한 제안도 덧붙였다. 하지만 슈뢰딩거가 지구물리학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지 않았고, 그나마 대부분 오래된 지식들이었다. 왕립학회가 끝난 후 슈뢰딩거는 기자들에게 강의록과 함께 보도자료도 나눠주었다. 나는 그 보도자료를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폴 핼펀의 묘사를 옮긴다.1)

“슈뢰딩거가 나눠준 보도자료 ‘새로운 장이론’은 고대 그리스인에서 출발해 아인슈타인에서 끝나는, 입자와 힘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시작했다. 그는 힘과 물질을 기하학을 통해 기술하려는 욕망이 어떻게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는지 보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연구를 뒷받침하는 빛나는 배경이었다. 그가 제시한 연대기는 자신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인들과 아인슈타인의 뒤를 잇는 후계자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자기 이론의 본질을 기술한 후에 그는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이 마음이 좀 더 열려 있었더라면 1920년대에 똑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거의 확실히 옳다고 믿고 있다 말했다. 그는 지구의 자기장을 검사하면 자신의 이론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 말했다. 지구의 자기장은 자신의 이론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이리쉬 프레스》에서는 다음날 슈뢰딩거의 강연이 역사를 새로 썼다고 보도했다.”

슈뢰딩거는 한 마디로 자기가 일반 상대성 이론을 넘어서는 이론을 만들어서 아인슈타인이 수십 년 동안 도달하지 못한 목표에 도달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이리쉬 프레스>의 보도가 워낙 강렬해서였을까, 차츰 외국의 언론도 슈뢰딩거의 연구 결과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슈뢰딩거는 차츰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자신의 허세를 다른 사람들은, 특히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그는 아인슈타인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분명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다. 총리 드 발레라는 국가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공격받고 있었고, 그가 애지중지하는 더블린 고등연구소 역시 정적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자금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바로 그 드 발레라가 자신에게 기대감을 가지고 청중 속에 앉아있다. 기자들 역시 그를 늘 주시하고 있다. 게다가 어쨌거나 자신은 그저 학술적 강연에서 주장을 펼쳤을 뿐이다. 그의 주장을 과장되게 전하는 쪽은 언론이다. 슈뢰딩거는 이런 생각으로 자신을 달랬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슈뢰딩거는 2월 3일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새로운 연구결과를 설명하고, 언론과 관련된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기자들이 귀찮게 따라다닐 것이라 경고하고 부드럽게 사과하며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더블린 고등연구소에서의 급료 및 연금과 관련된 상황이 워낙에 안 좋다 보니 연구소로 관심을 좀 더 집중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잘난 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뉴욕 타임스> 특파원 윌리엄 로렌스는 아인슈타인에게 슈뢰딩거의 논문과 보도자료를 보내고 의견을 물었다. 아인슈타인은 논평을 사양했지만 <뉴욕 타임스>는 슈뢰딩거의 연구에 대해 세 개의 기사를 실었다. 그 중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반응이었고, 다른 기사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확장되었다는 소식–더블린의 과학자 슈뢰딩거가 사람들이 30년 동안 추구해왔던 통일장이론을 자신이 달성했다고 주장”이라는 제목의, 슈뢰딩거의 강연에 대한 소개였다. 세 번째 기사에서는 슈뢰딩거의 주장이 옳을 수는 있지만 “그가 자신의 앞길에 놓인 함정을 잘 알고 있다”라고 썼다. 또 다른 언론사인 오버시스 통신사도 아인슈타인에게 또 슈뢰딩거의 글을 보내며, ‘슈뢰딩거가 제시한 공식의 장점과 그 함축적 의미’에 대해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아마 그 밖에도 많은 언론이 아인슈타인에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드디어 아인슈타인은 격노했다.

아인슈타인은 조수인 에른스트 슈트라우스의 도움을 받아 언론에 보도자료를 보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로 시작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론물리학의 토대는 현재로서는 결정나지 않은 상태다. 우리는 먼저 이론물리학에서 사용 가능한(논리적으로 단순한) 기반을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당연히 이런 기반이 경험적 사실로부터 점진적으로 일반화(추상화)하는 개발과정을 통해 얻어지리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슈뢰딩거 교수의 최근의 시도는 그 수학적 질을 바탕으로만 판단이 가능할 뿐 ‘진리’나 경험적 사실과 일치하는가 하는 관점에서는 판단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수학적 질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고 해도 거기에 어떤 특별한 이점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예비 시도를 어떤 형태로든 섣부르게 대중에 공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리적 실체와 관련해서 확정적인 발견을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훨씬 더 나쁘다.”

그리고 언론에 대해서도 이렇게 비판한다.

“기사가 이렇게 선정적인 용어를 동원해서 보도되면 일반 대중에게 연구의 특성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심어줄 수 있다. 독자들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작은 나라에서 시도 때도 없이 쿠데타가 일어나듯 과학계에서도 5분마다 한 번씩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듯한 잘못된 인상을 받게 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론과학 분야에서 일어나는 발전은 세대를 거듭하여 최고의 지성들이 지칠 줄 모르고 쌓아올리는 성과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 발전과정은 아주 천천히 자연의 법칙에 대한 심도 깊은 개념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직한 기사를 통해 과학 연구의 이런 특성들이 대중들에게 공평하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 마지막 부분은 절대 옳은 말이다.

이 글은 <아이리쉬 프레스>에 실렸고, 그 밖의 매체에도 등장했다. 일단 전선이 형성되자 슈뢰딩거도 대응에 나섰다.

“분명 아인슈타인 교수 본인도 아카데미 회원이 자신의 아카데미에 가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는 논문을 아카데미에 발표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뒤에서는 훨씬 더 험악한 말이 오간 모양이다. 슈뢰딩거는 더블린을 방문한 물리학자 존 모팻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방법이 아인슈타인의 방법보다 훨씬 뛰어나! 내가 설명해주지, 모팻. 아인슈타인은 늙은 멍청이라고.”

슈뢰딩거의 아내 안네마리 베르텔에 따르면 양측은 서로를 (논문에 대한) 표절 혐의로 고소할 것을 고민했다고 한다. 스캔들로 비화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누가 의뢰한 것인지, 돌아가는 꼴을 보고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시점에서 양측 모두가 무시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중재에 나섰다. 바로 볼프강 파울리였다.

“안 그래도 지금 다들 신나서 구경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송까지 나서 법정에 올라가게 되면 그게 무슨 민망한 꼴입니까! 게다가 나는 도대체 뭣 때문에 이 난리인지부터가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이론은 그 자체로 엉터리에 불과해요! 만약 두 사람 중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 이론에 내 이름을 엮어 넣었다가는 내가 나서서 당신들 두 사람을 고소해 버릴 겁니다!”

파울리의 말로 보건대, 둘 중 어느 한쪽이나, 양쪽 다 파울리에게 자신이 이론에 더 중요한 기여를 하지 않았느냐고 도움을 구한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에 대해서 도움을 구했던 대상은 파울리가 거의 유일했을 것이다. 파울리의 중재 덕분인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건지 몰라도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논란을 접고 휴전에 들어간다. 하지만 단단히 화가 난 두 사람은 그 후 3년 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다음 해인 1948년 슈뢰딩거는 아일랜드 시민권을 얻게 되지만, 드 발레라는 실각을 해서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래도 슈뢰딩거는 1955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 더블린 고등연구소에 재직했다. 드 발레라도 1951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다시 총리로 복귀해서 1954년까지, 그리고 다시 1957—1959에 총리를 지낸다. 아일랜드는 1949년에 공식적으로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각주
1)폴 핼펀 지음, 김성훈 옮김, 이강영 감수, 아인슈타인의 주사위와 슈뢰딩거의 고양이 (플루토, 2016).
2)https://psiquantum.com/.
물리대회물리대회
사이언스타임즈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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