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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라는 오만과 편견

작성자 : 정우현 ㅣ 등록일 : 2023-03-29 ㅣ 조회수 : 512

저자약력

정우현 교수는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생명과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베일러의대(Baylor College of Medicine)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덕성여대 약학과에서 유전체의 손상 복구와 불안정성 제어기전에 관해 연구하고 있으며, 분자유전학, 암생물학, 신경과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미국에는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 다섯 명당 한 명꼴로 있다고 한다. 미국이 대영제국으로부터 막 독립했던 18세기 말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원 확보와 인류의 이주 가능성을 두고 달과 화성을 수시로 탐사하고 있는 21세기 오늘의 이야기이다. 솔직히 잘 믿기지 않는다. 혹시 이들이 안타깝게도 정규 과학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천동설을 믿는 사람 중 절반은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다.

심지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것도 그 수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몇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단다. ‘평평한 지구’ 가설은 19세기 중반에 영국의 과학자 새뮤얼 로보텀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에 따르면 지구는 구형이 아니라 북극이 중심에 놓인 평평한 원반 모양이다. 그는 높은 곳에 올라가도 지구의 곡률을 관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등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측정 실험들을 수행했지만, 당연히 많은 과학자에 의해 차례로 부정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평평한 지구 가설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고, 1956년에는 새뮤얼 셴턴이라는 사람에 의해 국제학회가 설립될 정도로 꽤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체계 – 천체도(1660).(출처: British Library)▲코페르니쿠스 천문학 체계 – 천체도(1660).(출처: British Library)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지동설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받아들여져 왔다. 기원전 4세기경 아리스토텔레스는 <천구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최초로 지구가 둥글다는 기록을 남겼다. 월식이 일어날 때 달에 나타나는 지구의 그림자가 둥글다는 사실과 북극성을 올려다볼 때 극지방에서는 높은 하늘에서 보이지만 적도 근처에서는 매우 낮게 보인다는 관찰로부터 내린 결론이었다. 천동설을 지지했던 아리스토텔레스였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만큼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젤란이 배를 타고 지구를 돌아 세계 일주에 성공하는 등 역사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들은 점점 더 많이 쌓였고, NASA가 보낸 마지막 유인 달 탐사 우주선인 아폴로 17호가 1972년 지구를 떠나 달로 가던 중 역사상 가장 유명한 지구 사진으로 꼽히는 ‘블루 마블(blue marble)’을 찍어 보냄으로써 지구가 혹여나 둥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결국 관짝에 집어넣고 마지막 못을 박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현재 미국인 열 명 중 한 명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으며, 더 특이한 사실은 20대 청년의 경우 세 명에 한 명꼴로 평평한 지구 가설에 심취해 있다는 점이다. 교육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주로 유튜브와 SNS를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들의 학습 방식과 관련이 큰지도 모른다.(한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보면 확실히 그 이유를 더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평평한 지구 가설은 유명 연예인과 운동선수들의 지지를 받으며 점점 더 인기를 끌더니, 급기야 지난 2017년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한 도시에서 ‘플랫 어서(Flat Earther)들’의 국제 학술 컨퍼런스가 열리기도 했다. 이들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오랜 기간 NASA와 정부가 음모를 꾸미고 사람들을 고의로 속여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당연히 달 착륙이나 보이저호의 태양계 탐사도 믿지 않는다.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의 신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은 15년 동안 과학 부정론자들의 주장과 심리를 연구해온 저자가 이 집회에 잠입해 그들이 무슨 주장을 하는지 들어보려 하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자신이 어떻게 평평한 지구 이론을 만나 믿게 되었는지, 주변으로부터 얼마나 부당한 시선과 박해(?)까지 감당해야 했는지 간증이라도 하는 듯한 연사와 자신의 믿음이 부끄럽지 않음을 공인이라도 받은 듯 감격하는 청중과 모든 참가자들은 흡사 사이비 단체의 종교집회를 연상케 한다. 체리피킹과 확증편향에 빠진 이들에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증거의 제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저자가 자기모순에 빠진 그들의 태도를 어처구니없게 여기는 걸 넘어 어떤 연민의 감정까지 느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을 반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존중을 보여주고 대화에 호응하며 신념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까지 신뢰를 쌓으며 기다리는 것이라 조언한다.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논쟁(arguments)이 아니라 이야기(stories)’라는 말도 적절히 인용하며.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저자가 평평한 지구론자들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정치적, 이념적, 사회경제적 정체성을 분석하기 시작하면서 글의 분위기는 묘하게 바뀐다.

저자는 평평한 지구론을 기후변화 부정론과 묶어 과학 부정론자의 대다수가 보수주의적 성향을 보인다면서 이를 정치적 담론으로 이끌어간다. 아마도 그는 기후위기설을 무시하고 파리협정을 탈퇴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공화당 인사들에게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허튼 주장을 쏟아내며 대중을 선동한 전력이 있던 트럼프의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 과학을 수호해야 하는 저자로서는 그저 좌시할 수만은 없었을 테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사태의 심각성을 외면하고 방역과 치료의 문제를 정치화했던 그의 과학 부정론적 태도를 문제 삼고, 이를 정치적 편향성을 가진 이들의 GMO 반대와 백신 거부 운동에까지 확대해 연결시킨다.

백신이 특정 세력이 인류를 조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등의 반과학적 음모론을 맹신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특이체질로 인한 이상 반응이 염려되거나 다양한 이유로 접종을 망설이는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 과학부정론자로 낙인찍으려는 저자의 판단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사람들이 백신을 맞지 않았더라면 감염자와 입원환자, 그리고 사망자는 물론 급격히 증가했을 것이다. 백신 접종의 사회적 비용 효과가 드물게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보다도 훨씬 크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인해 고통을 겪거나 심지어 사망까지 이르게 되는 소수의 개인은 드물지만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불상사를 그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불운으로 치부하고, 이들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예외적인 숫자로만 취급하려 한다면 대중들은 과학을 신뢰하기 어려워진다.

과학은 백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를 모으는 데 집중하지만, 정작 심각한 백신 부작용이 발생했을 때 그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데는 반대로 소극적이다. 과학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아니, 우리는 과학을 신뢰한다. 우리가 신뢰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드러나는 과학자들의 일관성 없는 태도이다. 비난받을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정부의 보건정책이나 법적인 문제를 다뤄야 하는 정치인과 법조인들의 몫이지 자신은 상관없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많다. 과학은 정확한 데이터를 제공하면 될 뿐 그에 기반해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따라오는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과학이란 정치 사회적인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도구로만 사용되는 처지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가치중립적 과학’이라는 허울 좋은 이념의 또 다른 민낯에 불과하다. 과학철학자 케빈 엘리엇은 <과학에서 가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과학 자체에는 특정한 가치를 추구하려는 의도가 없다 해도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에 영향을 주는 가치를 숨겨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GMO 식품을 꺼리거나 섭취를 망설이는 사람도 과학 부정론자인가? 저자는 GMO가 인체의 건강에 해를 끼친다는 신뢰할 만한 연구는 결코 나온 적이 없다면서 유전자변형식품의 안전성을 완벽히 신뢰하는 모습을 보인다. GMO의 안전성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GMO는 안전했을지 모르지만, 유전자 조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섭취한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으로부터 수확해 얻은 음식물이라도 인체에 해로울 가능성이 있는 마당에 무슨 근거로 모든 GMO가 안전하다는 확신이 가능한가? GMO 식품 그 자체의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다 해도 그것을 키우고 관리하는 데 상업적인 욕심으로 인해 제초제 라운드업의 발암성을 두고 거짓을 일삼은 몬산토 사의 부정 사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GMO 자체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GMO의 무분별한 확산은 작물품종의 획일화와 유전적 다양성 상실을 유발하기 쉽고, 장기적으로 생태계가 얼마나 크게 교란되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올지 현재로서는 예측이 어렵다.

어떤 당파적 편향성 혹은 사회 부적응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음모론에 취약한지 흔히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과학 부정론이나 GMO의 위험성과 백신 부작용에 대한 반과학적 믿음과 조직적 운동, 그리고 특정 기업의 이윤과 맞물린 비윤리적인 태도는 사회적으로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극단의 주장에 반대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반대편 극단까지 달려갈 필요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만이 진리인 양 정의의 칼을 휘두르는 사도가 되려는 것 역시 과학자의 좋은 태도가 아니다. 검증을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을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를 이분법적으로 밝히기 위한 리트머스 검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매킨타이어의 책 속 문장의 저변에는 편 가르기를 서슴지 않는 단호한 판정과 저들을 이해시키고 말겠다는 계몽주의적 태도가 줄곧 흐르고 있다. 반과학으로부터 과학을 수호하겠다는 신념이 나쁠 리 있겠는가? 그러나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표방하는 책의 제목과는 달리 반대 측 주장을 향한 존중과 공감의 자세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저자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 누구든 자신도 모르게 과학 부정론자로 분류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한때 꽤 큰 이슈가 되었던 지적설계 운동의 주장에 대해 이른바 당대 최고의 스타 과학자 16명의 반론을 모아 엮은 책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은 표면적으로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한 지적설계 이론을 비판하는 모양새였지만, 결국 저자들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 믿음을 하나로 묶어 부정하고 폄훼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어째서 과학은 불필요한 적을 만들려는 걸까? 과학적으로 증명되기 어려운 모든 것들을 배격하고 조롱하는 것이 과학의 사명인가? 진리의 체계와 가치관의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끝내 주도권을 잡고 승리하려는 것이 분명 과학의 최종 목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은 과학 부정론자로 판명 날 듯하다.

과학과 종교를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놓고 보자면 언제나 빼놓지 않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이 그것이다. 삼엄한 재판장에 피고인으로 소환된 갈릴레이도 사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남달리 총애하는 사람이었다. 교황의 정치적 위기가 사적인 애정보다 커 보이기 전까지는. 교황이 추기경이던 시절부터 그는 갈릴레이가 자신의 저서를 놓고 언제든 지성적인 조언을 구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르바누스 8세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 30년 전쟁과 가톨릭 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무시무시한 권력 다툼이 일어나 교황은 자신의 권위에 대한 지지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했다.

이때 갈릴레이는 지동설에 대해 논하는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를 저술하면서 그 대화 속 주인공 중 하나를 교황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설정했는데, 하필 그 주인공의 이름은 ‘어리석은 자’를 의미하는 ‘심플리치오(Simplicio)’였다. 천동설을 주장하는 심플리치오는 시종일관 바보같이 틀린 말만 해댄다. 갈릴레이는 냉소적인 무신론자도 아니었고, 종교에 분노한 배반자도 아니었다. 그는 좀 더 지혜롭고 정중한 방식으로 자신의 새로운 이론을 소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평소 빈정대길 좋아하고 자신의 이론에 반대하는 이를 은밀히 조롱하던 갈릴레이의 태도가 가장 중요한 순간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당시 갈릴레이에게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도 부족했다. 지동설을 확실히 입증할 수 있는 연주 시차는 그로부터 200년의 세월이 흐른 1838년이 되어서야 베셀에 의해 처음으로 정확히 측정될 수 있었다.

제인 오스틴의 책 <오만과 편견>의 첫 구절은 꽤 유명하다. “꽤 재산을 가진 미혼남이 틀림없이 아내를 원하리라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진리다.” 이 문장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다. “꽤 업적이 많은 과학자가 틀림없이 비과학적 사고를 하는 이를 깔보리라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진리다.” 과학자의 오만은 그가 수행하는 과학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과학의 위력을 의심하는 이들의 마음을 좀처럼 얻지 못한다.

카뮈는 그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과학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갈릴레이가 자신의 새로운 존재론적 이론 때문에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그것을 즉시 부인해버렸다며 그를 가엾게 여겼다. 그것은 화형을 감수할 만한 가치를 전혀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이렇게 첨언한다. “지구와 태양 중 어느 것이 다른 것의 주위를 회전하느냐 하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요컨대 그것은 하찮은 문제인 것이다.”

사실 지구는 정확히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지도 않다. 지구도 적게나마 질량이 있기 때문에 태양도 약간은 자신의 질량중심에서 살짝 벗어나 돌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둘 다 서로의 둘레를 돌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칼 세이건은 지구로부터 60억 킬로미터 떨어진 우주를 항해하던 탐사선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돌려 ‘창백한 푸른 점’의 사진을 찍는 데 성공하고, 여기서 인류의 작고 보잘것없음을 토로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태양도 결코 우주의 중심에 놓여 있지 않다. 머나먼 우주 공간 다른 은하에서 누군가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를 바라보고 있다면 과연 누가 누구의 둘레를 돌고 있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중요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학을 폄하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가진 무한한 힘과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과학이 우리 삶의 문제를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태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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