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S PLAZA
물리 이야기
칼 슈바르츠쉴트
작성자 : 김재영 ㅣ 등록일 : 2022-03-28 ㅣ 조회수 : 1,476
김재영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물리학 기초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물리철학 및 물리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공저로 『정보혁명』, 『양자, 정보, 생명』,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이 있고, 공역으로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에너지, 힘, 물질』 등이 있다. (zyghim@ksa.kaist.ac.kr)
“전쟁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어서, 지척에서 엄청난 포화가 쏟아지는 속에서도 선생님의 사유의 땅에서 산책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1915년 12월 22일 일차세계대전이 한참일 때 러시아와의 전선 한복판에 있던 독일의 천체물리학자 칼 슈바르츠쉴트(Karl Schwarzschild, 1873‒1916)가 전장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블랙홀 이야기가 있을 때 어김없이 나오는 슈바르츠쉴트 반지름이 바로 그의 이름을 기리는 용어이다. 그는 포성으로 꽉 차 있는 전장에서 도대체 어떤 산책을 했던 것일까?
일반상대성이론은 흔히 1915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이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1915년 11월 25일 프로이센 과학학술원 물리학-수학 분과에서 “중력장 방정식”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발표문은 12월 2일에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 발표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일반상대성이론을 제대로 보여주는 유명한 논문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는 1916년 3월 20일에야 투고되었고, 5월 11일에 비로소 출간되었다. 프로이센 과학학술원에서 그 내용을 발표하고 무려 4개월을 더 끈 셈이다. 아인슈타인은 왜 일반상대성이론의 발표를 미루었을까?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사이에 발표된 슈바르츠쉴트의 논문 두 편 때문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리학 이론이라는 찬사를 받곤 한다. 하지만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에서 법칙을 알아내고 이를 더 체계화하여 하나의 완성된 이론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결국 물리학 이론이 제대로 이론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실제 현상에 대해 문제를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1687년에 출판된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이미 알려져 있던 행성의 운동법칙들을 비롯하여 중요한 현상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계몽사조의 근간이 되고 라플라스가 가장 확실하고 믿을만한 지식을 내세워 결정론적 세계관을 설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 이론을 통해 현상을 정확히 계산하는 능력이었다. 라플라스는 <확률의 해석학적 이론>의 서문에서 “주어진 특정 순간에, 자연을 움직이는 모든 힘과 자연을 이루는 존재들의 각각의 상황을 다 알고 있는 어떤 지성이 이 모든 정보를 다 분석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나다면, 이 지성은 우주의 거대한 천체들로부터 가장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그 운동을 같은 공식으로 포괄할 수 있을 것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어떤 것도 불확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결국 ‘라플라스의 악마’라고까지 불리는 이 뛰어난 지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방정식을 풀어내는 능력이다.
일반상대성이론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이론으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그 이론을 써서 관심을 두고 있는 현상을 정확히 풀어내지 못한다면 이론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요즘은 이론에서 필요로 하는 방정식이 명확하게 있으면 컴퓨터를 이용하여 방정식을 풀어내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 되었지만, 아인슈타인 당시만 해도 이런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그 이론에 담겨 있는 방정식을 풀어내는 일이 크나큰 과제였다.
이 일을 처음 해낸 것은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아인슈타인보다 6년 일찍 태어난 독일의 천문학자 칼 슈바르츠쉴트였다. 슈바르츠쉴트는 16살이 되기 전에 쌍성의 궤적을 구하는 천체역학 분야의 논문 두 편을 학술지 <천문회보(Astronomische Nachrichten)>에 발표할 만큼 어릴 적부터 뛰어난 영재였다. 23살에 푸앵카레의 이론에 대한 연구로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슈바르츠쉴트는 수학 분야의 계산에서 뛰어났다. 천문학과 천체역학뿐 아니라 광학, 사진, 전자기학 등에서 중요한 논문을 120편 넘게 발표했다. 특히 천체 사진의 측광학적 연구에 집중했다. 28살에 괴팅겐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다비트 힐베르트와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함께 연구를 하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뿐 아니라 괴팅겐 대학 천문관측소의 소장이 되었다. 이 천문관측소의 첫 번째 소장이 바로 가우스였으니 슈바르츠쉴트가 얼마나 인정받고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탁월한 연구업적 덕분에 1909년 포츠담 천체물리관측소 소장 자리를 맡게 된 뒤로 그의 연구는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슈바르츠쉴트에게 가혹했다. 1914년 일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물리학자로서 포병부대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15년 겨울,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동부전선에 투입된 슈바르츠쉴트의 손에 막 출판된 프로이센 과학학술원 회보가 쥐어졌다. 거기에는 아인슈타인이 1915년 11월 18일 발표했던 짧은 논문이 실려 있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한 수성 근일점 이동의 설명”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아인슈타인이 11월 4일에 발표했던 논문 “일반상대성이론을 위하여”에서 제안한 임시적인 이론을 기반으로 수성의 근일점 이동 중 뉴턴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던 세차를 43초로 계산하고 있다. 이미 프랑스의 위르뱅 르베리에가 꽤 정확하게 관측한 수성 근일점의 세차가 100년 동안 45\(\pm\)5초였으므로 이 계산은 상당히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계산은 지금의 중력장방정식을 완전히 풀어낸 결과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확립된 아인슈타인 중력장방정식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불완전한 임시적인 방정식조차 비선형 연립 편미분방정식이어서 풀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중력장 방정식의 풀이를 온전히 구하지 않고 그 대신 어림을 해서 가장 영향이 큰 항만 남기는 방식으로 계산을 간신히 해냈다. 측지선 방정식에 들어가는 크리스토펠 기호에서 거리함수 텐서를 민코프스키 시공간의 텐서와 섭동항의 합으로 쓸 수 있다고 가정한 뒤에 이차 어림까지 계산한 것이었다. 또 직교좌표계로 풀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풀이는 불완전했다.
러시아 전선에 있던 슈바르츠쉴트가 정확히 언제 이 학술원 소식지를 받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소식지에 실린 9쪽짜리 논문을 읽고 진공 중력장 방정식의 정확한 풀이를 구했다. 구대칭이며 시간에 따른 변화가 없는 경우로 문제를 좁힌 덕분에 풀이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슈바르츠쉴트는 아인슈타인의 계산에 틀린 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12월 22일에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풀이를 적어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선생님의 중력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수성의 근일점 문제를 스스로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계산한 일차 어림의 결과가 선생님의 계산결과와 달라서 당황했습니다.”
슈바르츠쉴트는 이 편지와 함께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른 질점의 중력장”이란 제목의 논문을 아인슈타인에게 보내 프로이센 과학학술원 회보에 투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논문에는 중력장 방정식을 아주 특수한 경우로 국한시켜 구한 최초의 엄밀한 풀이가 담겨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슈바르츠쉴트에게 1915년 12월 29일에 보낸 답장에서 “풀이가 유일함을 증명하는 선생님의 계산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이 결과를 얼른 발표하겠습니다. 질점 문제를 엄밀하게 다루는 것이 이렇게 간단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솔직한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논문이 수성 근일점의 세차와 어떻게 연결될까 하는 문제에 골몰하면서 헨드릭 로렌츠 그리고 파울 에렌페스트와 계속 교신하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매우 바쁜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었다. 슈바르츠쉴트의 논문을 거의 세 주가 지난 1916년 1월 13일에야 비로소 투고한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밀한 풀이는 특히 이론물리학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중력장 방정식을 비롯하여 물리학에서 다루어지는 방정식은 여러 가지 물리량들 사이의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관계를 나타낼 뿐이기 때문에 방정식만으로는 현상을 설명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특히 뉴턴 방정식이나 맥스웰 방정식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방정식들은 물리량을 나타내는 함수들과 그 함수들의 도함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른바 미분방정식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이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은 까닭은 아인슈타인 중력장 방정식이 미분방정식 중에서도 더 풀기가 어려운 비선형 연립 편미분방정식이기 때문이다. 우선 편미분이라는 것은 독립변수가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나타내는 4개의 독립변수가 있기 때문에 미분도 네 가지가 있고 이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풀이로 구해야 하는 함수는 거리함수 텐서라 부르는 10개의 함수이다. 흔히 ‘쥐뮤뉴’(\(\small g_{\mu\nu}\))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무릎번호 ‘뮤’(\(\small \mu\))와 ‘뉴’(\(\small \nu\))는 각각 1부터 4까지 변한다. 즉 \(\small g_{11}\)부터 \(\small g_{44}\)까지가 되는데, 그러면 모두 16개가 될 터이지만 다행히 \(\small g_{12}=g_{21}\)과 같이 ‘뮤’(\(\small \mu\))와 ‘뉴’(\(\small \nu\))가 반대가 되면 함수의 값이 똑같아야 하기 때문에 6개는 구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구해야 하는 함수가 많아지면 방정식의 개수도 늘어나기 때문에 연립방정식이 된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의 난해함의 핵심은 바로 비선형이란 점에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미분방정식들은 구해야 하는 함수만 들어 있을 뿐이고 그 함수의 제곱이라든가 그 함수에 다시 삼각함수를 적용한 꼴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선형’(직선과 닮은 일차함수)이라고 한다. 선형 미분방정식은 어떻게든 몇 개의 풀이를 찾아내면 일반적인 모든 풀이를 찾아내는 방법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비선형 미분방정식은 풀이 몇 개를 찾아낸다 한들 일반적인 다른 풀이들을 또 찾아내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된다. 게다가 카오스 이론이라고도 불리는 비선형 동역학에서처럼 풀이의 전체적인 변화의 양상도 예측불허인 경우가 많다.
슈바르츠쉴트는 문제를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가정을 도입했다.
1. 거리함수의 모든 성분이 시간 좌표 \(\small x^4\)와 무관하다.
2. \(\small g_{\rho 4}=g_{4 \rho}=0\) (\(\small \rho = 1, 2, 3\))
3. 풀이가 좌표계의 원점에서 공간적으로 대칭이다. 즉 \(\small x^1, x^2, x^3\)에 대해 직교변환을 해도 풀이가 같다.
4. \(\small g_{\mu\nu}\)는 무한원점에서 \(\small g_{44}=1, g_{11}=g_{22}=g_{33}= -1\)이고 나머지 성분은 모두 0이다.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구대칭으로 놓고 시간에 의존하지 않는 풀이를 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지만, 아인슈타인조차 이러한 풀이를 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그 누구도 슈바르츠쉴트처럼 과감하게 제한조건을 도입하여 중력장 방정식을 풀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슈바르츠쉴트의 엄밀한 풀이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슈바르츠쉴트가 풀어낸 중력장 방정식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슈바르츠쉴트가 풀어낸 방정식은
\[ \sum_\alpha \frac{\partial \Gamma^\alpha_{\mu \nu}}{\partial x_\alpha} + \sum_{\alpha \beta} \Gamma^\alpha_{\mu \beta} \Gamma^\beta_{\nu \alpha} = 0 \]
이었다. 이 방정식은 약간 더 손을 보면 \(\small R_{\mu\nu} = 0\)다시 말해 리치 텐서가 0일 때 거리함수 텐서를 구하는 문제와 같음을 보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아인슈타인 방정식은
\[R_{\mu \nu} - \frac{1}{2} g_{\mu \nu} R= \kappa T_{ \mu \nu} \]
이니까, 다른 방정식을 푼 셈이었다. 에너지-변형력 텐서가 0이라 해도 두 번째 항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이 방정식은
\[R_{\mu \nu} = \kappa (T_{\mu \nu} - \frac{1}{2} g_{\mu \nu}T ) \]
로 고쳐 쓸 수 있고, 에너지-변형력 텐서가 0인 경우에는 리치 텐서가 0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슈바르츠쉴트에게 1916년 1월 9일에 보낸 답장에서 “어제 두 번째 편지를 받았습니다.”라고 적었는데,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른, 비압축성 유체 구의 중력장”이란 제목의 논문 초고였을 것이다. 이 논문은 이전 논문과 달리 에너지-변형력 텐서를 비압축성 유체의 경우로 두고 제대로 된 중력장 방정식의 엄밀한 구대칭 풀이를 구하고 있다. 이 논문을 아인슈타인이 프로이센 과학학술원에 투고한 것은 거의 두 달 뒤인 2월 24일이었다.
그런데 천문학자였던 슈바르츠쉴트가 어떻게 아인슈타인의 매우 수학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사변적인 논문을 읽고 바로 엄밀한 풀이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서 당시 독일 물리학계에서 새로운 중력이론과 연관된 분위기를 잠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모교인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아인슈타인은 대학 동창인 수학자 마르셀 그로스만과 함께 새로운 중력이론을 탐구했다. 1913년에 공저로 발표된 “일반화된 상대성이론과 일종의 중력 이론을 위한 개요”와 1914년의 “일반화된 상대성이론에 기초를 둔 중력이론의 장방정식의 공변속성”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가는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지만, 학계에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괴팅겐 대학에서 다비트 힐버트를 중심으로 한 수리물리학자 그룹(에미 뇌터, 막스 폰라우에, 구스타프 미, 막스 아브라함, 군나어 노르트슈트룀, 요한 폰노이만)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917년 막스 폰라우에의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새로운 중력이론으로서 미와 노르트슈트룀이 각각 제안한 중력이론을 유력한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독일어권에서 아인슈타인과 그로스만의 이론에 관심을 가진 물리학자는 극소수였다.
특히 수리물리학자라기보다는 천문학자에 가까웠던 슈바르츠쉴트가 리만 기하학을 도입하여 중력장을 거리함수와 크리스토펠 기호로 나타내는 매우 사변적이고 수학적인 접근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슈바르츠쉴트의 교수인정학위(하빌리타치온) 논문을 지도한 뮌헨 대학의 후고 폰젤리거(Hugo von Seeliger, 1849‒1924)이다. 폰젤리거는 슈바르츠쉴트의 박사학위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슈바르츠쉴트에게 푸앵카레의 천체역학과 관련된 연구문제를 제시하기도 했고, 1902년 5월 25일 아르놀트 조머펠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수성의 근일점 이동 문제를 역제곱 힘이 아니라 \(\small 1/r^n (n \ne 2)\)와 같은 힘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슈바르츠쉴트는 폰젤리거를 통해 수성 근일점 문제에 대한 관심을 오랫동안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접근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폰젤리거와 달리 슈바르츠쉴트는 리만기하학을 사용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탐구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천문학자로서 천문학의 물리학적 기초를 정립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00년에 이미 “공간의 곡률에 허용되는 스케일”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우주공간의 곡률이 0이 아니라 양수 또는 음수가 되는 두 경우를 가정하고 천문관측 데이터 안에서 어느 정도까지 곡률이 허용되는지 상세하게 논의하기도 했다. 또 이 논문에서는 별빛의 측지선을 따라갈 것이라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달리 3차원 공간에 국한되었지만, 슈바르츠쉴트로서는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1915년 이전까지 아인슈타인의 접근에 대한 슈바르츠쉴트의 태도는 반신반의에 더 가까웠다. 아인슈타인은 1911년 태양의 중력이 빛의 진행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식 때 별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해야 했다. 독일의 천문학자 에르빈 프로인틀리히(Erwin Freundlich, 1885-1964)는 당시 거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1914년 크림반도에서 일어날 일식에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일식원정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프로이센 과학학술원에 요청했다. 막스 플랑크는 1913년 1월 31일 슈바르츠쉴트에게 프로인틀리히의 요청을 평가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슈바르츠쉴트는 1909년부터 포츠담의 천체물리학관측소의 소장을 맡고 있었고, 프로이센 과학학술원의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슈바르츠쉴트의 답신에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옳을 수도 있지만 일식원정에는 회의적이라고 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한 슈바르츠쉴트의 태도가 급변한 것은 바로 전장에서 만난 아인슈타인의 수성근일점 논문 때문이었다. 태양 주변에서 별빛이 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수성근일점의 세차는 이미 르베리에 등의 정밀한 관측으로 확립되어 있었고, 계산을 통해 관측값과 거의 같은 결과를 얻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낸 1915년 12월 22일, 슈바르츠쉴트는 조머펠트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수성 근일점의 운동을 다룬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보셨나요? 그 논문에서 그는 관측된 값을 그의 최근 중력이론으로부터 정확히 구했습니다. 이것은 분광선이나 별빛의 휘어짐보다 훨씬 더 천문학자의 심장에 가까운 어떤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1916년 3월 20일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투고한 논문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는 22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고, 이 절들을 묶어 4부로 되어 있다. 1부는 상대성 가설에 대해 일반적인 수준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이용하여 중력 현상을 밝힐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2부는 이를 위한 수학적 도구들을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3부에는 본격적으로 중력장 방정식과 중력장 안에서 물체의 운동을 서술하는 측지선 방정식 등 일반상대성이론의 본론이 나온다. 마지막 4부는 이 일반적인 이론을 여러 현상들에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마지막 절에서 슈바르츠쉴트의 엄밀한 풀이를 인용하고 사용하고 있다. 수성의 근일점 이동 중에서 뉴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값이 100년 동안 \(\small 45 \pm 5^{\prime\prime}\)(지금의 더 정밀한 값은 \(\small 42.98 \pm 0.04^{\prime\prime}\))인데, 1초의 각이란 3600분의 1도이고 100년 동안 이렇게 미세한 차이가 난다는 것을 관측한 기술도 놀랍지만, 포성이 가득 찬 전장에서 아주 엄밀한 풀이를 구하여 이 값을 거의 정확히 계산한 슈바르츠쉴트의 기여가 아인슈타인의 논문에서 결정적이었던 셈이다.
슈바르츠쉴트는 1916년 5월 11일에 출간된 아인슈타인의 그 논문을 볼 수 없었다. 같은 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전장에서부터 천포창(天疱瘡, Pemphigus)이라는 희귀한 피부병으로 고생을 했는데, 결국 그것 때문에 1916년 3월 의병제대했고 두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1916년 6월 29일 베를린에서 열린 왕립 프로이센 과학학술원 학술대회에서 아인슈타인은 슈바르츠쉴트에 대한 추도사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