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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줄거리’를 들려주고 싶다

작성자 : 강병철 ㅣ 등록일 : 2022-02-21 ㅣ 조회수 : 601

저자약력

강병철 대표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서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 살고 있으며, 도서출판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의 대표이기도 하다. 《툭하면 아픈 아이, 흔들리지 않고 키우기》, 《이토록 불편한 바이러스》, 《성소수자》(공저), 《서민과 닥터 강이 똑똑한 처방전을 드립니다》(공저)를 썼고,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 《뉴로트라이브》, 《암 치료의 혁신, 면역항암제가 온다》,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원고 청탁 주제는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의학에 대한 인식 및 지금 하는 활동을 통해 알리고 싶은 이야기’였다. 사실은 나도 우리 사회가 의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일선에서 진료할 때 환자와 보호자들은 항상 설명에 목말라 했다. 그런데 우리 의료 현장에는 의사도 환자도 시간이 없다. 시간이 부족한 의사는 총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수가 없고, 시간이 부족한 환자는 총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도 들을 시간이 없다. 항상 ‘전체 줄거리’가 아닌 ‘대강 줄거리’를 말하고 듣는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니 의사의 실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하니 환자는 평생 똑같은 병으로 병원에 다니면서도 자신의 병을 잘 모른다.

임상의사로 15년 일하는 동안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환자도 의사도 정부도 비용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알레르기 비염 환자가 있다고 하자. 좋아질 만하면 재발하는 바람에 병원은 안 다녀본 곳이 없고, 한의원에서 비싼 한약을 지어 먹고, 비염에 좋다는 온갖 건강보조식품을 구해다 먹어봤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하도 괴로우니 강력하게 대응하면 좋아질까 싶어 수술까지 생각했다. 답은 무엇일까? ‘전체 줄거리’를 아는 것이다. 알레르기 비염은 원래 재발하는 병이다. 일년 내내 달고 산다면 실내 공기 중의 알레르기 유발 물질(알레르겐)을 줄여야 하고, 계절성으로 찾아온다면 알레르겐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미리 대비해야 한다. 약이 효과를 발휘하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리므로, 효과가 나타나도 약을 끊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봄이면 봄, 한철 내내 약을 써야 최선의 치료 효과를 얻는다. 코에 뿌리는 약이 가장 좋은데, 뿌려보라고 하면 절반 정도는 그릇된 방법으로 약을 사용한다. 사용법을 세심하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전체 줄거리’를 들려주면 대부분의 환자가 좋아지고, 스스로 병을 관리하게 된다. 불필요하게 병원을 돌아다니며 이 약 저 약 쓰느라 노력과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보험 적용이 안 되어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한약이나 건강보조식품 비용까지 생각하면 경제적 효과도 무시하지 못한다. 수술이 불필요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의료비를 억지로 낮게 유지하면서 성공적인 의료체계를 운영한다고 자부하지만, 의사와 환자 모두 지식수준이 낮아 불필요한 낭비가 많고, 치료는 잘되지 않으며, 의사와 환자 사이에 불신의 골만 깊어진다. ‘전체 줄거리’가 중요한 이유다.

강병철

어느 날 내게도 ‘전체 줄거리’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아이에게 정신질환이 생긴 것이다. 왜 그런 병이 생겼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의 삶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모든 질문이 절박하기만 했다. 하지만 심지어 동료 의사들에게조차 ‘전체 줄거리’를 들을 수 없었다.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면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족의 모든 역사를 샅샅이 취조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도 휴식은 없었다. 밤새 자기검열의 고문에 시달리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말로 우리가 잘못해서 아이에게 병이 생겼을까?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라는 책을 만났다. 절실히 필요했던 모든 정보가 그 속에 있었다. 지금도 그때 그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고비를 넘겼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몇 차례 정독하고 나니 책을 번역해 다른 부모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인 나조차 정보를 얻기가 이렇게 힘든데 의학에 문외한인 부모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 잘 아는 출판사 사장님을 설득했다. 조현병 환자만도 인구의 1%, 흔히 조울병이라고 부르는 양극성 장애 환자를 합치면 1백만 명이 넘는다고, 그중 1%만 책을 사도 1만 부는 금방 팔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캐나다 이민 후 공립도서관에 앉아 책을 옮기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책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본의 아니게 남에게 폐를 끼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몇 년 후, 우연히 출판사를 시작할 기회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캐나다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한국에 출판사를 한단 말인가? 그때 정신질환 책의 경험이 떠올랐다. 올바른 의학 지식을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의사이자 번역가가 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사람들에게 ‘전체 줄거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러다 손해를 보더라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2003년, ‘누군가에게 빛이 될 책을 만든다’라는 이념으로 꿈꿀자유라는 출판사를 열었다. 

희망에 가득 차 시작했지만, 출판사 운영은 어렵기만 했다. 외국에 있다는 것은 큰 걸림돌이 아니었다. 꼭 필요한 책을 냈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분명 내용이 충실한 책이고, 반드시 그 지식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이런 책이 있다고 알릴 방법이 없었다. 2015년 메르스라는 전염병이 한국을 강타했다. 의료체계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워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없을지 뒤지기 시작했다. 감염병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다가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를 발견했다. 팬데믹과 오늘날 인류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전체 줄거리’가 거기 있었다. 편집장님과 둘이서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다루기에는 벅찬 책이었다. 처음에는 포기했지만, 거의 일 년이 지나도록 판권이 살아 있었다. 내려고 보니 돈이 부족했다. 미국 출판사에 직접 메일을 보내 사정하고, 종이를 가장 절약할 수 있는 포맷에 텍스트를 촘촘히 인쇄해 겨우 예산에 맞추었다. 멋진 기획이라고 생각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수의학계에서 입소문을 탄 덕에 조금씩 나가는 수준이었다.

2017년 알마 출판사의 의뢰로 <뉴로트라이브>를 번역했다. 명색이 소아과 의사지만 자폐에 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나에게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자폐는 다만 장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깊고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는 현상이었다. 정신장애인의 부모로서 자폐 부모들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책을 널리 알려 사회의 편견을 없애는 동시에 자폐 부모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세상은 각박하다지만 선한 의지로 간절히 뭔가를 하려고 하면 반드시 도와주는 분들이 있다. 많은 분의 도움으로 전국을 돌면서 10여 차례 강연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자폐 부모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으면서 장애 운동에 본격적인 관심을 두게 되었다. 장애의 ‘전체 줄거리’가 눈에 들어오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과학적인 사실만으로 ‘전체 줄거리’가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학은 주로 자폐의 불편한 점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오가노이드(organoid)라는 일종의 미니 뇌를 만들어 신경전달물질과 커넥톰을 탐구하고, 자폐 유전자를 추적하며, 장내미생물총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자폐를 장애로만 보는 것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자폐는 무한할 정도로 다양한 인간 정신이 발현되는 한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가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성취해 온 가장 훌륭한 것들이 오로지 한 가지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무섭게 파고드는 자폐적 성향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자폐가 장애가 되는 이유는 사회의 많은 부분이 비자폐인들 중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자폐인을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제도와 관행을 조금만 바꿔도 장애로 이어지는 측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결국 ‘전체 줄거리’란 과학적 사실과 역사적 맥락, 사회적 전개 양상을 함께 바라보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자폐의 ‘전체 줄거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기획한 책이 퓰리처상을 수상한 걸작 논픽션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다. <뉴로트라이브>가 자폐라는 개념이 정립된 역사를 다룬다면, 이 책은 자폐의 민중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소개한다면 대중의 인식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엄청나게 긴 책이지만 <인수공통>과 <뉴로트라이브> 등 대작을 번역해본 경험이 있어 시간을 넉넉히 잡고 옮기리라 마음먹었다.

이듬해, 김영사의 의뢰로 <면역항암제가 온다>를 번역했다. 역시 말기 암환자들에게 절실한 정보라 생각해 한국에 들어가 여러 차례 대중강연을 했다. 몇 군데 의과대학에서도 초청을 받았다. 천안 단국대에서 강연 후 내가 번역한 책의 애독자라는 부부 치과의사 선생님들을 만났다. 놀랍게도 최근 정신질환으로 아들을 잃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리 아이의 증상과 너무나 비슷해 절로 눈물이 났다. 내 자신, 정신장애인의 부모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눈물을 흘렸다. 캐나다로 돌아와서도 그분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온갖 어려움 끝에 내 아이는 회복의 길을 걷고 있었고, 그들은 자식을 잃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뭔가 도움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를 청년의 이름으로 복간하면 어떨까 싶었다. 자칫 오해받을까 조심스러웠지만 두 분은 세상을 떠난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처럼 기쁘다며 아무 조건 없이 출간 비용을 지원해주셨다.

기획자로서, 번역가로서 시야가 넓어지고 있었지만, 출판사의 경영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급기야 2020년 초에는 돈이 떨어졌다. 책을 찍을 인쇄비조차 없었다. 7년을 돌아보았다. 열심히 책을 만들었지만, 너무 반응이 없었다. 지치고 힘들었다. 그냥 번역만 하면 참 편할 것 같았다. 장고 끝에 <자폐>와 <정신질환>까지만 내고 출판사를 접기로 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홀가분해서 눈물이 났다. 그때, 코비드-19 팬데믹이 터졌다. <인수공통>이 불티나게 나갔다. 이제 책을 낼 비용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뒤로 거의 1년간 전염병에 관한 공부만 했다. 미생물과 인류가 얽혀온 기나긴 역사에 눈을 떴다. 다시 한번 ‘전체 줄거리’는 과학과 역사와 사회가 만나는 지점에서 쓰인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자폐를 장애로만 보는 시각이 불완전하듯, 미생물을 병원체로만 보는 시각은 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2021년은 놀라운 해였다. <인수공통>으로 롯데출판문화상을,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로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하면서 번역가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정신질환>은 입소문을 타고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정신질환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메일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벅찼다. 출판사를 연 지 10년, 이제 ‘전체 줄거리’에 대한 믿음과 통찰,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전문성, 비용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책을 낼 수 있는 경제적 역량을 쌓았다. 앞으로 독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까?

첫째는 장애다. 어딘지 다른 사람, 고통받는 사람, 약자이자 소수자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 사회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라 믿는다. 약자가 차별받고 소외되는 세상에서는 비장애인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오롯이 누리지 못한다. 장애인을 해방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다. 둘째는 미생물이다. 우리는 미생물을 적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미생물이야말로 지구의 주인이다. 생명의 역사는 곧 미생물의 역사이며, 인간은 미생물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잠시 일어났다 거품으로 꺼질지도 모르는 파도에 불과하다. 미생물을 매개로 모든 생명이 얽혀 있는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본질과 우리 삶의 터전인 환경을 통찰하고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지식이다. 셋째는 출판사를 시작할 때 목표로 삼았던 ‘누구에겐가 빛이 되는 책’, 질병의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영상의 시대, 미디어의 시대, 인터넷의 시대라지만 책의 가치는 굳건하다. 책이야말로 과학과 역사와 사회가 하나로 얽힌 ‘전체 줄거리’, 지식의 총체성을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의사에서 시작해 번역가로, 출판인으로 변신해 온 내가 앞으로 해야 할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책의 가능성을 믿고 그것을 실현하는 일, 독자들에게 ‘전체 줄거리’를 들려드리는 일일 것이다.


*아태이론물리센터의 <크로스로드>지와의 상호 협약에 따라 크로스로드에 게재되는 원고를 본 칼럼에 게재합니다. 본 원고의 저작권은 아태이론물리센터와 원저작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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