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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 이야기

뉴턴의 ‘기적의 해’ 신화

작성자 : 김재영 ㅣ 등록일 : 2023-10-31 ㅣ 조회수 : 1,240

저자약력

김재영 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물리학 기초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과학사연구소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물리철학 및 물리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상대성이론의 결정적 순간들』, 『정보혁명』(공저), 『양자, 정보, 생명』(공저), 『뉴턴과 아인슈타인』(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사이버네틱스』, 『맥스웰의 전기자기론』,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 『에너지, 힘, 물질』 등이 있다. (zyghim@ksa.kaist.ac.kr)

과학사에서는 대개 탈신화화를 중요하게 여긴다. 뉴턴의 ‘기적의 해’는 상당 부분 신화가 된 느낌이 강하다.1) 이런 용어와 개념이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뉴턴이 말년에 쓴 다음과 같은 노트 덕분이었다.

“1665년 초에 저는 급수를 근사시키는 방법과 그 급수를 임의의 이항식으로 바꾸는 규칙을 찾아냈습니다. 같은 해 5월에 접선의 방법을 알아냈고 ... 11월에는 직접적인 유율법을 알아냈습니다. 이듬해 1월에는 색의 이론을 얻었고, 5월에는 역유율법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에 달의 궤적까지 미치는 중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케플러 규칙으로부터 (어떤 구 주위를 회전하는 지구가 표면에서 받는 힘이 어느 정도 되는지 추산하는 법을 알아냈습니다.) ... 행성들을 궤적 속에 붙잡아두는 힘이 행성이 공전하는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함을 연역했습니다. 또 그럼으로써 달을 궤적 속에 붙잡아두기 위해 필요한 힘을 지구 표면의 중력과 비교했습니다. 또 그 해답을 거의 정확하게 알아냈습니다. 이 모든 것은 1665년과 1666년 흑사병이 유행하던 두 해 동안 한 것입니다. 그 무렵 저는 창조성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고 수학과 철학을 그 어떤 때보다 더 많이 고민했습니다.”2)

그림 1. 뉴턴이 피에르 드 메조에게 보낸 편지 일부.그림 1. 뉴턴이 피에르 드 메조에게 보낸 편지 일부.

이 노트는 위그노 학자 피에르 드 메조(Pierre Des Maizeaux)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였는데, 뉴턴이 죽은 후에야 발견되었다. 1665년 초에 이항전개의 공식을 만들어 미분법의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이를 가지고 그해 5월에는 접선의 방법을 11월에는 ‘유율법’(미분법)을 찾아냈고, 이듬해 5월에는 그 역의 방법, 다시 말해 적분법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또 1666년 1월에는 색의 이론을 탐구했고, 같은 해에 달의 궤적까지 연장되는 중력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또 행성들을 그 궤적에 잡아두려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이 자신의 평생 가장 창의적인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말 그대로 전염병이 돌아 학교가 휴교하면서 아이작 뉴턴이라는 매우 창의적인 젊은이에게 엄청난 기회가 온 것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과학사학자들은 당시의 노트와 편지, 발표 또는 미발표 논문들을 추적하면서, 이러한 뉴턴의 회고가 의심스럽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웨스트폴의 1980년 논문이다.3) 무엇보다도 전염병 때문에 울스소프에 돌아간 뒤에 자신만의 독자적인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1660년 청교도혁명을 뒤집은 왕정복고 이후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육과정은 거의 엉망이었다. 전염병이 돌기 전에도 뉴턴은 거의 혼자 독자적으로 공부하고 생활했다. 오히려 휴교령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없고 사고의 흐름도 끊겼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만일 울스소프에서 기적적으로 미적분학과 광학과 물리학 특히 보편중력법칙을 처음 밝혀내기 시작했다면, 나중에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뒤 그와 관련된 후속 연구를 했어야 했는데, 거의 그러지 않았다.

가령 1684년 에드먼드 핼리에게 보낸 논문 초고 “궤도 속에 있는 물체의 운동(De motu corporum in gyrum)” 이전에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즉 만유인력)에 대한 별도의 연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1687년에 출판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는 그에 대한 논의가 상세하게 나오지만, 그 전의 기록은 1684년의 그 미발표 원고가 사실상 전부이다. 과학사학자들은 뉴턴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것은 1679‒1680년에 로버트 후크와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서였다고 보고 있다. 즉 그로부터 13년 전인 1666년에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울스소프의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보편중력(만유인력)을 생각했다는 이야기는 뉴턴의 조카사위가 떠벌인 이야기이다. 물론 뉴턴이 말년에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을 때 나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적의 해에 대한 또 다른 신화는 20대 초의 나이에 미적분학과 광학과 중력이론에 대해 엄청난 발견을 하고 그 이후 그의 연구는 이 세 가지 주제에 집중하여 시대별로 나뉜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뉴턴이 평생 연구에 몰두했던 주제는 신학, 특히 구약의 예언서들과 요한묵시록을 해석하는 문제와 연금술의 문헌들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뉴턴이 대학시절 남긴 노트를 바탕으로 판단하면, 1660년대 중엽에 뉴턴은 광학이나 역제곱 힘에 바탕을 둔 보편중력이 아니라 수학에 몰두하고 있었다.

뉴턴이 태어날 무렵부터 영국은 극심한 내전에 휘말려 있었다. 흔히 청교도혁명이라 부르는 영국 내전이 일어난 것은 1642년부터 1651년까지의 기간이다. 찰스 1세가 잉글랜드 국교회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면서 스코틀랜드에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서 불거진 갈등이 1642년 일차 내전으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소위 잉글랜드 연방이란 이름으로 공화정이 처음 수립되었다. 하지만 결국 의회파 군대의 수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1653년부터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왕정보다 혹독한 독재 정치를 하게 된다. 크롬웰이 말라리아로 죽은 뒤 공화정은 붕괴되어 버리고, 1660년 망명해 있던 찰스 2세가 돌아와 결국 왕정복고의 시대가 시작된다.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1661년은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있다. 1209년에 설립된 케임브리지 대학의 오랜 역사에서 수학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가 이 무렵이기도 하다.

뉴턴이 운동에 관한 자신의 자연철학을 구성할 때 실질적으로 미분법을 사용했음이 알려져 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자체는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일관되어 있지만, 증명과정이나 해설에서 자주 미분법(정확히 말하면 유율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넘어가기 어려운 대목이 자주 눈에 띈다.

유율법(Method of Fluxions)은 어떤 함수를 아주 작은 변화량들로 어림하는 방법이다. 뉴턴은 이렇게 시간에 따라 변하는 양을 유량(流量 fluent)이라 부르고 작은 변화량을 유율(流率 fluxion)이라 불렀다. 뉴턴은 이 이론의 아이디어를 대학 때 자신을 가르친 아이작 배로우(Isaac Barrow 1630‒1677)에게서 가져왔다.

1670년에 출간된 배로우의 저서 <기하학 강의(Lectiones Geometricae)>를 영어로 번역하여 1916년에 출간한 차일드(J. M. Child)는 서문 맨 앞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이작 배로우는 미분학의 창시자다. 뉴턴은 개인적인 소통을 통해 배로우로부터 그 핵심 아이디어를 얻었다. 라이프니츠도 어느 정도는 배로우의 연구에 빚지고 있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츠는 1673년 구입한 배로우의 책으로부터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을 얻고 더 발전시킬 시사점을 얻었기 때문이다.”4)

그림 2. Isaac Barrow. (1630‒1677)
그림 2. Isaac Barrow. (1630‒1677)

배로우가 미적분학의 기본 개념을 생각하고 정리한 것은 1662년 무렵부터이다. 배로우는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의 제1대 루카스 석좌교수였고, 2대가 바로 뉴턴이다. 스티븐 호킹도 이 루카스 석좌교수였다. 배로우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 하나가 아주 똑똑한 것을 알고는 그 학생을 열심히 도와주었다. 그는 독창적이고 뛰어난 실력을 갖춘 자연철학자이면서 인격적으로도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여하간 자신의 노트를 뉴턴에게 주다시피 하면서 똑똑하지만 오만하고 독불장군이던 20대 초반의 대학생에게 이 개념을 더 발전시킬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그림 3. 1665년경 뉴턴의 노트.
그림 3. 1665년경 뉴턴의 노트.

뉴턴이 1665년 무렵에 쓴 노트(그림 3)를 보면, 거기에 미분법의 기본 개념이 숨어 있다. 숫자가 잔뜩 적혀 있는 곳 바로 위에 있는 본문 중에

\[\log(1+x) = x - \frac{x^2}{2} +\frac{x^3}{3} - \frac{x^4}{4} + \frac{x^5}{5} - \frac{x^6}{6} + \cdots - \frac{x^{12}}{12} \]

에 해당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식은 로그함수의 테일러-매클로린 급수 공식이다. 뉴턴의 유율법 이론이 공식적으로 <유율법과 무한급수(The Method of Fluxions and Infinite Series)>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된 것은 뉴턴이 세상을 떠난 후 10년쯤 뒤인 1736년이었다. 유율법의 한 형태에 대한 이론이 처음 출간된 것은 브루크 테일러(Brook Taylor 1685‒1731)의 “순방향 및 역방향의 증가량 방법(Methodus Incrementorum Directa et Inversa)”(1715)에서였다. 순방향 증가량 방법과 역방향 증가량 방법은 대략 미분과 적분과 비슷한 의미이다. 이 책의 출간은 뉴턴의 <유율법과 무한급수>보다 21년 앞선다.

그림 4. Isaac Newton, The Method of Fluxions and Infinite Series (1736)의 표지.그림 4. Isaac Newton, The Method of Fluxions and Infinite Series (1736)의 표지.

테일러 급수는 종종 매클로린 급수라고도 한다. 테일러 급수의 특별한 형태를 보기 좋게 써서 많이 활용한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콜린 매클로린(Colin Maclaurin 1698‒1746)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매클로린은 1742년에 <유율법론(Treatise on Fluxions)>이란 제목의 두 권으로 이루어진 체계적인 저서를 발표했다.

그림 5. Brook Taylor, Methodus Incrementorum Directa et Inversa (1715)의 표지.그림 5. Brook Taylor, Methodus Incrementorum Directa et Inversa (1715)의 표지.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뉴턴이 미적분학을 처음 만들었다고들 하는지 궁금해진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669년 7월 31일에 아이작 배로우가 존 콜린스(John Collins 1625‒1683)에게 보낸 원고에 있다. “항이 무한히 많은 식에 의한 분석(De Analysi per æquationes numero terminorum infinitas)”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원고에 담겨 있는 내용이 바로 미적분학 또는 유율법이다. 이 원고를 더 다듬고 확장한 것이 1771년에 “급수와 유율 방법에 대한 논고(Tactatus de methodis serierum et fluxionum)”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배로우가 콜린스에게 1669년 7월에 보낸 원고 이전에 쓴 편지 내용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이 문제에 아주 뛰어난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 어느 날 원고를 들고 왔습니다. 그 안에는 메르카토르가 쌍곡선에 관해 쓴 것처럼 크기의 차수를 계산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는데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전에 메르카토르가 로그함수를 어림하기 위해 계산한 것이 있는데, 그 계산보다 정확할 뿐 아니라 다른 함수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을 적은 노트를 들고 온 총명한 천재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 편지에서 그 노트 내용을 적어서 보내 준 것이었다. 그 총명한 천재가 누구냐고 콜린스가 묻자, 배로우가 1669년 8월 20일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뉴턴입니다. 우리 대학 학생이고 아주 젊습니다(학부 2학년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탁월한 천재성과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 6. G. W. Leibniz “Nova Methodus pro Maximis et Minimis” (1684).그림 6. G. W. Leibniz “Nova Methodus pro Maximis et Minimis” (1684).

이 대목에서 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라이프니츠는 어디쯤 들어갈까 하는 점이겠다. 라이프니츠는 1684년에 “최대와 최소의 새로운 방법(Nova Methodus pro Maximis et Minimis)”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고, 그보다 10년 전에 이미 미적분학의 아이디어가 들어간 논문을 노트로 남겨 놓았다.5)

배로우는 유율법이나 구적법에 관련된 자신의 연구 내용을 뉴턴에게 전해주었을 뿐 아니라, 뉴턴의 인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기 위한 의무사항이었던 학위논문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배로우가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 안에서는 이 학생의 졸업논문을 지도할 수 있는 교수가 없다.”라는 당황스러운 기록과 함께, 뉴턴이 학위논문을 쓰지 않고 졸업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1669년 자신의 후임, 즉 제2대 루카스 석좌교수로 뉴턴을 추천했는데, 루카스 석좌교수로 취임하기 위해서는 영국 국교회의 사제서품과 비슷한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절차가 있었다. 대학의 이름은 ‘트리니티’ 즉 ‘삼위일체’였지만, 뉴턴은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적 해석을 통해 아리우스주의라는 ‘일신론’을 신봉하고 있었고, 삼위일체를 믿지 않았다. 뉴턴의 성격상 공개적 신앙고백의 자리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할 것이 뻔했다. 배로우는 이 신앙고백의 절차가 교수 임용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왕실에 설득했다. 그 덕분에 뉴턴은 별 탈 없이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강의 실력이 형편없었던 뉴턴의 광학 강의에 들어오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그의 강의는 교과목 이름과 달리 기하학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따라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전설 중 하나는 뉴턴이 강의하던 강의실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깜짝 놀랐는데, 왜냐하면 학생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수였던 학생들이 학기가 진행되면서 하나둘씩 빠져나가서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강의했다는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낱 어설픈 교수에 지나지 않던 뉴턴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찾아온 것은 1684년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 1656‒1741)의 방문이었다. 행성의 운동에 관한 케플러 법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뉴턴의 ‘광팬’이 되었다.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집필할 수 있도록 재촉하고 응원했을 뿐 아니라, 런던 왕립협회가 이 책의 출판 비용을 대지 않겠다고 결정하니까 아예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그 책의 출판 비용을 감당했다. 핼리가 없었다면 뉴턴은 그냥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광학을 가르치는 (그것도 형편없이 가르치는) 보잘것없는 교수로 끝났을지도 모른다.6)

1687년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가 출판되면서, 뉴턴의 명성은 한없이 올라갔고, 1689년에는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의원으로서 유일하게 발언한 것은 날씨가 추우니까 창문을 닫아달라고 한 게 전부였다는 얘기도 있다.

뉴턴의 사회적 지위는 1696년 조폐총감에 임명되면서 상승세에 오른다. 요즘 식으로 말해서 조폐국인데, 절대왕정의 시기에 왕립조폐국(Royal Mint)의 조폐총감(Warden of the Mint)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권력이기도 했다. 당시 위조화폐가 극심했는데, 새로 조폐총감에 임명된 아이작 뉴턴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명령을 내린다. 화폐위조범은 국가반역죄로 기소하고 극형에 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형은 “반역자는 틀이나 나무 패널에 묶고 처형장소까지 말로 끌고 가서 목을 매달아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하고 거세하고 내장을 꺼내고 목을 자르고 시체를 네 조각으로 나눈다. 남은 시체는 대개 런던 브리지처럼 전국적으로 유명한 장소에 남겨두어 반역자의 운명에 대한 경고로 삼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정말 끔찍한 형벌이었다. 여하튼 뉴턴의 엄청나게 강력한 명령 때문에 화폐위조범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업적 덕분에 1699년에 조폐국장(Master of the Mint)으로 직급이 올라갔다. 영국 왕립조폐국 최고의 자리였다.

웨스트팔은 ‘기적의 해’ 신화가 보통 사람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초인이나 천재가 짧은 시간에 갑자기 계시나 깨달음처럼 자연의 진리를 알게 된다는 잘못된 관념을 만들어 낸다고 비판한다. 뉴턴은 말년에 성공 비결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자신은 집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를 쉬지 않고 생각하고 또 고민하고 모든 방법을 찾아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또 똑똑하지만 오만에 가득 찬 학생을 적절하게 지도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를 보여준 배로우, 뉴턴을 지지하고 도우면서 문제 해결을 유도한 핼리, 보편중력의 아이디어를 직접 제시해 준 후크 등이 아니었다면, 뉴턴 혼자서 의미 있는 성취를 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각주
1)김재영, 상대성이론의 결정적 순간들 (현암사, 2023).
2)Cambridge University Library, Add. MS 3968.41, fol. 85.
3)R. S. Westfall, “Newton’s Marvelous Years of Discovery and Their Aftermath: Myth versus Manuscript”. Isis. 71(1), 109 (1980); R. S. Westfall, Never at Rest: A Biography of Isaac Newt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4)J. M. Child, The Geometrical Lectures of Isaac Barrow (1916).
5)T. Sonar, The History of the Priority Dispute between Newton and Leibniz Mathematics in History and Culture (Springer, 2018).
6)R. L. Numbers and K. Kampourakis, eds, Newton’s Apple and Other Myths about Scienc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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